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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다산 정약용
자서(自序)
옛날 중국 고대이 성군인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 임금은 12목(牧)에게 사정을 물어서 그들이 목민하게 하였고, 주(周)나라 문왕은 정사를 펼 때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중국의 전국 시대에 태어난 성인 맹자는 평륙 지방에서 추목(芻牧)하는 것을 목민하는 것과 빙하였으니, 양민(養民)하는 것을 목민이라고 한 것은 옛 성현들이 남기신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사도가 만민을 가르쳐서 뭇 백성들이 모두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대학(大學)에서 국자(國子)를 가르쳐서 모두 수신하고 치민케 하는 길이다. 치민이란 곧 목민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군자의 학문하는 목적은 수신하는 것이 그 반이요, 치민하는 것이 그 반이다. 성현이 돌아가신 지 오래 되어 그 좋은 말씀이 희미해지고 그 좋은 길이 점점 쇠하고 어두워져서, 요사이 사목자들이 이를 모르는 까닭에 백성들은 여위고 곤궁하게 되었으며, 병들고 쓰러져서 구덩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나, 목민한다는 사람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스스로 살쪄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나의 선자(先子)는 성조(聖祖)밑에 두 곳 현감을 지냈고, 한 고을의 군수와 한 곳 도호부의 부사, 그리고 한 고을의 목사 자리를 배수(拜受)해서, 가는 고을마다 좋은 치적을 올렸다. 나는 비록 못난 사람이지만, 부친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듣기도 하였고, 또 따라다니며 보기도 하여 깨닫는 바도 있었다. 또한 물러나서 이를 시험도 해서 다소간 경험도 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유락(流落)한 몸이라 3년 전에 풀리기는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외진 곳에서 귀양살이 18년에 사서 오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익혔으나, 수기지학(修己之學)을 다 배웠다고 해도 배운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23사를 배우고 또 우리나라 여러 역사와 많은 문집 및 제서(諸書)를 배운 것을 가지고, 옛날 사목들이 목민한 자취를 찾아서 분석하고 분류하여 이를 편집하게 되었다. 또한 멀리 떨어진 남방 땅에서 농지 세금으로 해서 간악하고 교활한 벼슬아치들과 아전들이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내가 비록 비천한 곳에 있지만 듣는 바는 아주 자세하기에, 그대로 분류하여 외관적이지만 대략 기록하였다.
이것이 모두 12편인데, 1은 부임이요,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다. 다음은 육전으로 5가 이전(吏典), 6은 호전(戶典), 7은 예전(禮典), 8은 병전(兵典), 9는 형전(刑典), 10은 공전(工典)이요, 11은 진황(賑荒)이요, 12는 해관(解官) 편이다. 편마다 6조로 나뉘어 있어 모두 72조가 된다. 어떤 것은 몇 조를 합쳐서 한 권으로 삼은 데도 있고, 혹은 한 조를 나누어서 몇 권의 책으로 삼으니 모두 48권의 한 책이 되었다. 시대에 맞추고 풍속에 따랐으되 위로 선왕의 헌장(憲章)에 부합디지는 못했을 것이나, 목민하는 일과 조례는 모두 갖추어 있을 것이다.
고려 말에 비로소 다섯 가지로 수령을 고과(考課)하였고, 조선ㅇ 들어서는 그것을 토대로 일곱 가지로 늘렸는데, 이른바 수령이 책임질 큰 것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다함에 법전이 없을 수 없고, 또 여러 조목을 들어서 오직 직책을 다하지 못할가 두려워하는데, 어찌 스스로 생각하고 행해지기를 바랄 것인가. 이 책은 첫 편과 끝 편을 빼고도 10편이나 되며, 60조목이나 된다. 성실한 양식이 있고 또 진실로 양식이 있고 직분을 다하고자 하는 생각만 있다면, 아마도 갈피를 잡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부담은 <이현보>라는 책을 지었고, 유이는 <법범(法範)>이라는 책을 지었으며, 왕소는 <독단(獨斷)> 장영은 <계민집(戒民集)>을 지었다. 또 진덕수는 <정경(政經)> 호대초는 <서언(緖言)> 정한봉은 <환택편(宦澤編)>을 저술해 냈다. 이는 모두 이른바 목민하는 책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책들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오직 음사기구(淫辭奇句)만이 한 세상을 풍미하게 되었으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지겠는가.
비록 이러한 형편이지만 <주역>에 이르기를 "선인들의 말이나 행위를 많이 알아서 지식으로 삼아서 자기 덕을 쌓는다." 했으니, 이 책은 본래 나의 덕을 쌓기 위해서 저술한 것인지, 어찌 꼭 목민에 필요해서 저술한 것이겠는가. 이 책을 심서라고 한 것도 목민할 마음만 가졌지, 몸소 시행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당저 21년 신사(辛巳) 늦봄 열수(烈水) 정용(丁鏞)은 서한다.
제1편 부임(赴任)
1. 다른 벼슬은 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지만,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은 함부로 구해서는 안 된다.
윗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백성이요,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을 선비라고 한다. 선비는 벼슬하는 사람이며, 벼슬에 나가는 사람은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경관(京官)은 혹은 왕을 받들어 모시는 것을 직무로 삼으며, 혹은 맡아서 지키는 것을 직무로 삼기 때문에, 주의하고 근신만 하면 거의 죄짓는 일도 없고 뉘우칠 일도 없다. 그러나 수령은 만백성을 다스리니 하루에도 여러 정사를 처리하게 되고 그 정도가 소규모일 뿐, 본질은 나라일과 다를 바가 없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과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처지는 꼭 같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함부로 목민하는 자리를 구하러 나서겠는다. 옛날에 상공(중앙벼슬아치)은 다스리는 영역이 백리였고, 후백은 영역이 70리였으며, 자남은 영역이 50리였다. 영역이 50리가 되지 못하면 이를 부용이라고 했는데, 이들을 모두 제후라고 했다. 지금 큰 고을은 옛날 상공이 다스리는 영역과 같고, 중읍은 후백의 그것에 준하며, 하읍은 그 지역이 자남의 지역과 비슷하며, 다른 소읍은 그 영역이 부용의 그것과 같다.
지금 벼슬 이름은 달라도 수령의 직책은 옛날 제후의 직책이다. 옛날의 제후에게는 재상과 삼경이 있고, 대부와 백관이 갖추어져, 각기 자기 일을 맡아서 했기 때문에 제후 노릇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수령은 만백성 위에 홀로 외롭게 있으면서 간사한 백성 3인의 도움을 받고, 교활한 아전 6,70인의 도움을 받으며, 거칠고 호기 있는 몇몇 수령들은 막빈을 거느리고 있고, 또 성격이 뒤틀린 10인의 노복까지 데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서로 짝을 지어 굳게 뭉쳐서 수령 한 사람의 총명을 가리고 속여서 마구 재간을 부리며 만백성을 괴롭힌다. 더구나 예날 제후는 부전자승(父傳子承)하여 그 지위를 세습하였다. 그래서 ㅈ후의 신하와 백성이 죄를 지으면 혹은 평생토록 등용되지 못하였고, 혹은 몇 대를 지나도록 떨치지 못하게 되니 그만치 명분과 의리가 무거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 중에 비록 악한 사람이 있어도 제후에게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수령들은 그 임기가 길어야 2년이요, 때로는 몇 달 만에 바뀌게 되니, 그 형편이 지나가는 과객과 같은 입장이다.
이와 반대로 그를 돕는 좌, 보, 막빈, 복예 등은 모두 부전자승하여 옛날의 세습적인 경(卿)과 같다. 따라서 주인과 나그네의 형세가 이미 다르고, 오랜 권세에 잠시 동안의 권세가 또 딸려서 군신의 대의, 천지의 정분(定分)이 없다. 죄를 지은 자라 할 지라도 도피하였다가, 나그네가 더난 후에는 주인이 집에 돌아와 , 편안하고 부유하게, 또 태연 자약학 지내게 되니, 그들이 무엇을 두렵게 여기겠는가.
그래서 수령 노릇 하기가 공후보다 몇백 배나 더 어려운 것이니, 어찌 함부로 수령하겠다고 나서겠는가. 비록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그 직책을 능히 해내지 못하며, 비록 뜻이 있더라도 일에 밝지 못하면 능히 해 내지 못하는 법이다. 수령이 능히 그 직책을 해내지 못하면 그 해독은 백성에 돌아가서 백성을 괴롭히고 병들게 해서 줄지어 쓰러지게 할 것이니, 사람들의 비난과 귀신의 책망은 수령의 후손에까지 미쳐서 재앙을 입을 것인데, 어찌 함부로 수령이 되겠다고 나서겠는가.
오늘날 무인(武人)들이 스스로 전관을 찾아가 수령되기를 부탁하는 풍습이 예사여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 재주와 능력이 능히 수령 직책을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지도 않고 청탁하는 이도 그렇지만, 그 부탁을 받는 사람도 그것을 물어 보지도 않고 들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문신(文臣)으로서 홍문관이나 승정원에 있는 사람이 시골 수령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아랫사람으로서는 부모에 효성하겠다고 수령자리를 원하고, 윗사람으로서는 효도의 이치로써 그것을 들어주는 일이 오래 전부터 있어, 지금은 하나의 풍습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우(虞),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절대로 없었다. 무릇 집은 가난하고 늙은 부모가 있어 끼니조차 받드는 일이 어렵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사정으로서 참으로 보기에 민망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천하의 공리로서는 관직을 위하여 적임자를 골라야지, 사람을 위하여 벼슬 자리를 골라서는 아니 된다.
한 집안의 봉양을 위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수령 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신하된 사람이 자기 보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만백성을 잡는 일도 잘못이고, 이를 허락해 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만일 재주가 있고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그 기량을 생각해 수령이 될 능력이 있다고 자신한다면, 스스로 천거하는 글을 올려 수령되기를 청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함부로 집이 가난하고 늙은 양친을 받들기가 어렵다고 해서, 이것을 구실로 삼아 수령 자리를 구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옛날에 경연관으로 있던 신하들이 본래부터 백성의 신망을 받고 있는 경우에 수령되기를 바라서 임명되는 수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 조정에서는 그를 보내서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고을 백성들도 이러한 사람이 부임해 오는 것을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재주도 없고 덕망도 없으면서 이러한 효성을 구실로 전례를 방패삼아 집이 가난하지도 않고, 부모를 받드는 끼니가 없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고을살이를 구걸함은 예에 어긋나므로 반드시 이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퇴계가 이강이(李剛而)에게 보낸 회답에 말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없으면 자식된 도리로 깊이 걱정해야 하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부모 봉양을 영광스러운 핑계로 삼아서 의롭지 못한 녹을 받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공동묘지에서 제사 음식을 얻어다가 부모 봉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했다. 퇴계가 또 말하기를, "모의(毛義)가 황제의 소명을 받고 기뻐하였으며, 장봉(張奉)이 이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즉 모의가 본래 고결하게 물러설 뜻이 있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뜻을 굽혔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모의가 의롭지 않은 소명을 받고 기뻐하였다면, 장봉은 아마도 침을 뱉고 떠났을 것이다." 했다. 생각건대 재주는 모자라고 재산은 있는 사람이 봉양을 핑계로 수령자리를 얻어 나가면 어찌 불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일 백성을 다스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천거해도 좋은 일이다.
후한 때에 경순이란 사람이 한 고을을 다스리게 해 달라고 자청하고 좋은 치적을 올리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 황제가 웃으면서 "경이 치적을 올리겠다고 하는구나." 하고 동군 태수로 임명했다는 고사가 있다. 또 당나라 이포진이 한 주를 맡아서 스스로 잘 다스려 보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노주 태수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회주로 옮겨서 8년이나 재임했는데, 재임 중 백성들은 아주 평안학 잘 지냈다고 한다.
2. 신영(新迎)에 쓰이는 쇄마(刷馬)비용을 이미 공적으로 받고 나서 또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임금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니, 해서는 안된다.
속대전(續大典)을 보면 지방관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 쓰이는 쇄마는 길의 장단을 계산해서 마릿수를 정한다고 되어 있다. 평안도와 함경도 이외에는 모두 쇄마가 있는데, 주와 부에는 20필이 있고, 군과 현에는 15필이 있다. 이것이 기본 필수이다. 또 상도, 중도, 하도 등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또 대읍, 중읍, 소읍 등 세 등급으로 구분해서 길이 멀고 읍이 크면 6필까지 더하고, 길이 가깝고 읍이 작은 곳에는 혹은 두 필을 더한다. 경기 지방에는 마릿수를 줄이고, 평안도 박천 서쪽과 함경도 홍원 북쪽에는 모두 역마를 지급한다. 모든 쇄마의 값은 처음에는 쌀로 주었으나, 균역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연해 읍은 돈으로 대신 주었는데, 많이 주는 경우에는 4백여 냥, 적은 경우에는 3백여 냥이나 주었다.
이 법을 처음 마련할 즈음, 조정에서는 지방관을 보내고 맞이할 때에 혹시 쇄마비로 백성을 괴롭히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쇄마전을 지급케 하여 그 비용에 충당케 했는데, 요즘에 와서 신구 지방관이 교체될 땡 그 쇄마비를 다시 백성한테 징수하고 있다. 그 받아내는 액수가 혹은 공적으로 지급되는 액수보다 배나 더 받기도 하고, 혹은 서로 맞먹는 액수를 받아 낸다. 오래 된 관습이 풍속이 되어 태연하게 부끄러운 줄을 모르니, 이는 크게 예가 아니다. (구관의 쇄마비는 관에서 지급되지 않는다.) 국왕이 백성을 근심해서 수령에게 말을 내렸는데도 왕의 은혜를 감추고 또 어민의 재물을 빼앗으니, 이것이 이른바 갈백이 탕왕이 주는 제수를 잘라먹기만 하고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
새로 부임하는 수령의 쇄마전은, 반드시 향청에서 징수의 영을 내리게 마련이니, 새로 부임하는 수령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수령이 취임한 후에도 그 쇄마전을 백성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이것은 수령이 착복한 것이다. 거두어 올린 것은 수령이 아니지만 착복한 사람은 누구겠는가. 그리고 그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미 자기가 먹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 차라리 빨리 영을 내려서 수령의 마음을 만백성에게 밝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저보(邸報)를 내려보내는 날에는 따로이 전령을 공형에게 내려서 다음과 같이 함이 좋다.
"신영의 부쇄가는 영을 받기 전에 이미 거두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미 나라에서 지급받았는데, 어찌 또 백성한테서 징수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거두어 올린 것을 돌려 준다고 해도 중간에서 모두 녹아 없어지는 것이 근심스럽다. 그래서 마을의 부역 중에는 군전이나 세전을 막론하고 몇 달 안으로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돌려 줄 것을 군세전으로 대신 충당하도록 하라. 즉 그 마땅히 바쳐야 할 것에서 부쇄가를 제하고, 그 남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맞는 일이다. 이러한 뜻을 향청에서 잘 알아 영으로 일일이 밝혀서 모두가 깨우치게 하라."
만일 신구 수령의 교체가 서울에서 행해져 본읍에서 잘 알지 못하면, 영을 전해 내려서 "신영의 부쇄가는 이미 나라에서 지급되었으니, 어찌 또 다시 백성한테서 거두겠는가. 삼가 거두지 말라(여기에 글자 한 자도 더 보태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다.
무릇 새 수령이 처음 임명되면 만백성이 그 풍채를 우러러볼 것이니, 이러한 때에 이와 같은 명령이 내려가면 백성의 환호하는 소리가 우레 같을 것이고 칭송하는 노래가 먼저 일어날 것이다. 위엄은 청렴한 데서 나오는 것이니,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은 겁내고 고개를 숙일 것이며, 영을 내려서 시행하면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오호라! 버리는 것은 돈 3백 냥이요, 3백 냥으로 이러한 칭송을 사게 되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 수백 년 동안 4천 리에 걸쳐서 부임하기 전, 이러한 영을 내린 사람이 끝내 없었다. 그것은 수령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모두 청렴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이러한 사례를 알지 못하고, 또 부임한 후에도 이러한 경우에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여겨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의호운 영을 내린다면, 그 또한 통쾌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한 고을의 관례는 만 가지로 다르다. 아사를 수리한다든가, 일산이나 쌍교 등을 장만한다는 둥, 함부로 사소한 명목으로 돈을 거두기도 하고, 또는 부쇄가와 같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저리에게 물어서 고을의 관례가 만약 그렇거든 이것도 함께 의롭게 시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행장을 차릴 때에 의복과 안마는 모두 옛 것을 그대로 써야 하며 새로 마련해서는 안 된다.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절용(節用)하는 데 있고, 절용의 근본은 검소함에 있다. 검소한 후에라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후에라야 자애로울 수 있을 것이니, 검소야말로 목민하는 데 가장 으뜸으로 힘써야 할 일이다.
어리석은 자는 학식이 없어서 산뜻한 옷에 고운 갓을 쓰며,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고서는 위풍을 떨치면서 세상의 위세와 서슬을 마음껏 드러내고자 하지만, 새로 온 수령의 태도를 살피는 늙고 능청스러운 아전은 먼저 새로 온 수령의 복장과 안마를 묻되, 만약 사치스럽고 화려하면 씽긋 웃으면서 '알 만하다.' 하고, 만약 검소하고 허술하면 놀라면서 '두렵다.' 하고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거리의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식자들은 더럽게 여기니, 필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착각하여 남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하겠지만, 부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미워한다. 자기의 재산을 축내면서 자기의 명예마저 손상시키고, 게다가 남의 미움까지 사게 되니, 이 또한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치스러운 짓은 모두 어리석은 자나 할 일이다.
수령으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경관을 거쳤을 것이니, 의복과 안마는 대강 전부터 갖추고 있을 터이다. 그대로 있는 의복과 안마로써 행차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한 가지도 새로이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선이란 사람이 말했다. "가난한 선비가 갑자기 벼슬을 하게 되어, 타는 말이며 부리는 종복이며 먹는 음식과 입는 의복 따위를 부자들과 비길 만큼 성하게 차리려고 한다면, 털 한 오라기기일망정 모두 빚으로 장만하게 될 것이다. 관리로 발탁되어 자기를 뽑아 준 사람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 때에도 빚쟁이가 따라다니게 되는 격이다. 이렇게 되니 국고를 도둑질하거나 여염집 살림까지 훑어 내지 않고서는 무엇으로써 빚을 갚겠는가."
송나라 범공칭은 {과정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군께서 전에 수주 수령으로 부임할 때, 행장이라곤 겨우 석 짐밖에 되지 않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도 전과 다름이 없었으니, 어떤 일이 있을 때 거취하는 데에도 간편할 뿐만 아니라, 외부에 추문이 퍼지는 것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성재라는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서 한 물건도 사들이지 않은 것은 돌아갈 때에 짐에 누가 될까 두려워한 것이며, 범 우승이 부임할 때 겨우 석 짐만을 휴대한 것은 행장이 간편해야 함을 생각한 것이다. 거취가 이러하다면 주고받는 데 어찌 청렴하지 않은 바가 있었겠는가.
명나라 해서라는 사람이 남총헌이 되어 처음 부임할 때 겨우 고리짝 두 개를 휴대하였더니, 배가 상하에 닿아도 사람들이 수령이 부임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언젠가 병을 얻어 의사를 불렀는데, 방안에 들어가 보니 깔고 덮는 이부자리는 모두 흰 베라,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만도 못한 것 같았다는 것이다.
참판 유의가 홍주를 다스릴 때, 찢어진 갓과 성긴 도포에 누르께한 혁대를 두르고 조랑말을 탔으며, 이부자리는 남루하여 요도 베개도 없었다. 이렇듯 하여 위엄이 서니, 가벼운 형벌조차 쓰지 않았는데도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모두 없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한암쇄화(寒巖 話)}에 이런 말이 나온다. "참판 윤광안이 나와 같이 외각에서 교서 일을 할 때 헐어 빠진 도포를 입었는데, 마치 상복 같았으되 그가 경상도 감사가 되자 위엄이 전 도를 지배하였으며, 참판 유강이 충청도 감사가 되었을 때, 밀랍으로 밀화를 만들어 패영을 삼으니, 열읍이 두려워하며 그 청렴하고 검소함에 복종하였다. 또 사서 김서구는 평생 검소를 좋아하여 거친 베도포 위에 양갖 옷을 걸치고 다니므로 거리 아이들이 비웃었지만, 그가 해남 현감이 되자 백성들에게 위엄과 은혜가 다 같이 행해져서 학질 환자가 이로써 병을 물리쳤다. 옛날의 청렴한 관리들은 모두가 행실이 반드시 이러했다. 청렴하면 손해를 보니 오히려 행하기 어렵다고 하겠지만, 검소하면 비용도 들지 않는데, 어찌 쉽게 실행하지 못하겠는가. 근자에 한 무인이 해남 현감이 되었는데, 비단 주머니의 매듭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강진 아전들이 이를 보고 '그 주머니를 보아하니 정녕코 음란하고 탐욕스러울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것이 사람을 보는 묘한 방법이니, 오직 학식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간사하고 교활한 아전들도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일산은 햇빛을 가리는 것이다. 50여년 전만 해도 당상관은 반드시 흑산을 지참했는데, 이것이 예날의 이른바 조개( 蓋)이다. 근세에 와서 풍습이 흰색을 좋아하여, 위로는 대신에서부터 아래는 현감에 이르기까지 모두 흰 일산을 사용하고 있지만,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검은 일산은 해를 가리지만, 흰 것은 햇빛이 새어 나온다. 무릇 수령이 외출할 때에는 당상관이나 당하관을 막론하고 모두 흑색 일산을 쓰게 할 것이며, 오직 제유와 유수로써 품급을 달리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혹은 색깔로 달리하기도 하고 혹은 구리나 쇠로써 구분하기도 한다.) 비록 일반이 하는 것과 다르더라도 흰 것은 원래 옳지 않은 것이다.
유옥교의 청익장(靑翼帳)은 대부만이 쓰는 물건이다. 당하관이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정조 대왕 때에는 금하는 명령이 엄하여 범하는 사람이 없더니, 근래에 와서는 다시 잘못된 일을 따르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크게 예에 어긋나는 일이다. 수레와 복장을 법도대로 하게 하는 것은 임금의 대권이다. <주례(周禮)>에 보면 수레에 6등급이 있고, 복장에도 6등급이 있어서, 그 등급에 따라서 존비함을 구별하였다. 유옥교의 청익장도 관직의 품계에 따라서 한도를 두어 금제를 두었는데, <주례>가 남긴 이 제도는 지켜져야만 할 것이다.
한 나라 법에는 2천 석의 장리(長吏)만이 조개와 주번을 쓸 수 있다. 황패가 양주 자사가 되어 치적을 뛰어나게 올리자, 국왕의 조서를 내려서 차개를 주었는데, 특히 한 발이나 더 높게 하여 그 덕을 빛나게 하였다. 소량이 기주 자사가 되자 특히 노차와 고취를 내려 잘 다스리라고 권장했는데, 만일 이러한 것을 하사하지 않았는데도 옥교를 탄다면 무엇으로 선정을 권장하겠는가. 요즘은 적은 고을의 현령도 모두 옥교를 타서, 나라의 국법을 사사로이 범하여 제각기 자기의 부귀와 영화를 표나게 하니, 나라의 기강과 국왕의 뜻이 여기서 모두 멸시되고 마는 것이다.
무신은 반드시 안마(鞍馬)를 타야 하며, 다른 교자를 타서 나라의 영을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백헌 이경석이 관설 허후의 말을 인용하여서 말하기를 "감사는 교자를 타되, 겨울철에는 휘장을 내리고 여름철에는 휘장을 걷어치우고 일산으로 햇빛을 가리면 되는데, 지금 사람들은 3면을 걷어 올릴 수 있는 휘장이 있는 교자를 타고 다니니, 이는 참람하게도 임금이 타는 승여를 본딴 것이다." 했으니 소름이 끼치는 말이다.
살피건대 우리 나라 법에 쌍마교는 관찰사나 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만이 탈 수 있다고 했고, 또 승지를 지낸 사람이나, 의주나 동래의 수령만은 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3품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은 쌍마교를 탈 수 있다고 해석되지만, 3품이라도 만약 왕명을 받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쌍마교를 타는 것은 폐단이 많으므로 상신과 정경만은 타도 좋으나, 아경과 하대부는 유옥교를 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쌍마교에서 3편을 걷어 올릴 수 있는 휘장이 있으니, 허유의 말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겠다.
반자진은 말하기를 "예에 천자는 6마에 좌우참이요, 3공 9경은 사마에 좌참이라고 했다. 한나라 제도에 9경은 2천 석이니 우참이요, 태수는 사마일 따름인데, 그 중에 가질된 사람은 2천 석이 되어 우참이 되므로 5마로서 태수의 미칭으로 삼았다."하고 <학림(學林)>이라는 책에 이르기를 "한나라 때에 조신이 나아가서 태수가 되면 말 한 필을 더해 주었으므로 5마가 되었다." 했다.
살피건대 옛날 태수들은 고을 현읍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는 곧 우리 나라에서 수령이 지방을 감사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지금 작은 고을의 현령들이 태수라고 참징하고 5마의 격식을 갖추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
풍원상이라는 사람이 준의와 시평이라는 두 고을에서 현령을 지냈는데, 모두 말 한 마리만 타고 부임하였다. 위나라 최림이라는 사람도 언릉령이라는 현령이 되었을 때 걸어서 부임했다는 것이다.
<야인우담(野人迂談)>이라는 책에 이르기를 "중국에서는 관원들을 영송할 때에 사람과 말이 지급되지 않았다. 관원들은 다만 문서만 챙겨서 부임하게 되며, 관리와 유생 그리고 늙은 노인들과 백성들이 성 밖에 나와서 영접할 뿐이다." 했다.
4. 부임하는 길에서는 오직 엄하고 온화하며, 또한 과묵하기를 마치 말 못하는 사람인양 해야 한다.
행차는 반드시 일찍 출발하고 저녁에는 일찍 쉬도록 할 것이다. 말에 올라서 동이 트기 시작하고, 말에서 내려 해가 미처지지 않으면 좋다.
수리(首吏)를 불러서 다짐하기를 "하인이 밥을 먹었으면 곧 진지를 올리고, 말에 올라서 동이 트기 시작하면 좋으니 알아서 거행하라."고 할 것이다.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미리 아무 약속도 하지 않고, 일찍 일어나 밥을 재촉하고 곧장 말에 오르면, 하인이 밥상을 받아 놓고도 먹지 못한 채 일어서는 경우가 많다. 말을 달리지 말도록 할 것이다. 말을 달리면 내 성질이 경박하고 조급하게 보이게 된다.
작은 길이 꾸불꾸불한 곳에서는 돌아보지 말 것이다. 돌아보면 말을 탄 아전붙이들이 비록 진흙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하니, 또한 생각해 주어야 한다. 돌아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세에 따라서는 외면하기도 하여, 그들이 용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도중에서는 비록 몸을 굽히지 않는 아전이 있더라도 책망하지 말 것이다. 마치 말 못 하는 사람인 양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도중에 매일 세 끼 식사에는 국 한 그릇, 김치 한 그릇, 장 한 종지 외에 네 접시를 넘지 않게 할 것이다. 네 접시라는 것은 옛날의 이른바 이두이변(二豆二 )이다. 점주(店廚)에서 먹을 때에도 이 숫자보다 덜하지 말고 행주에서 먹을 때에는 이 숫자보다 더하지 말 것이다. 이에 쓰이는 물종은 하인들에게 맡겨 잔소리를 하지 말며, 쓰는 바가 많고 적은 것도 결코 따지지 말 것이다.
만약 잔현으로 녹이 박함이 목천, 연기 같은 유의 경우에는 마땅히 두 접시로써 정식을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 풍속에 행차에는 권마성(勸馬聲)이 있는데, 이는 떠들썩하지 말라는 뜻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행차가 교외에 이르면 수리를 불러서 이렇게 다짐할 것이다.
"나는 권마성을 매우 싫어하니 마을을 지날 때에는 권마성을 한 번만 하고, 고을을 지나거나 고을에 들어가거나 고을에서 나오거나 역참에 들어가거나 역참에서 나오거나 할 때에는 세 번만 하라. 만약 이것을 어기고 더 여러 번 부르면 너에게 죄를 주리라."
{시경}에 이르기를 "이에 그대가 먼 곳에 가는 데 소문만 있었지, 소리는 없구나." 했는데, 군자의 행차는 그 엄숙함이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나라 풍속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여, 여러 하인들이 벼슬아치를 옹위하고 잡된 소리를 어지러이 냄으로써 백성이 바라보기에 엄숙, 장중한 기상이 없어 보인다. 무릇 근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반드시 이런 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을 위하여 수령이 있는 것이니, 비록 말 위에 있더라도 마땅히 지혜를 운용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에게 편의한 정사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결같이 들떠 있기만 하면 어찌 침착하고 세밀한 생각이 나올 수 있겠는가.
여혜경이 연주를 맡게 되어 부임길에 서도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무렵 정이천이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여길보의 이름은 들었으나 아직 지면이 없는데, 아침에 내 집 문앞을 지나게 되었으니 장차 한 번 엿보리라."하고 이윽고 물어보니 지나간 지 오래 되었다. 이천은 찬탄하여 "수행자 수백 명과 말 수십 필을 능히 소리 없이 지나가게 하였는바, 이와 같이 무리를 부리는 것이 정숙하다 할 만하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비록 약간의 말이 있었지만, 그 재주를 또한 어찌 덮어 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행차가 교외에 이르거든 수리를 불러서 다짐하기를 "길에서 선비를 만났을 때, 선비가 나를 위하여 말에서 내리는데도 너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너희에게 죄를 주겠다. 비록 걸어가는 자일지라도 만일 귀족이 분명하거든 너희들은 말에서 내려라. 혹시 말썽이 있으면 너에게 죄를 주겠다." 할 것이다.
근세에는 아전들의 습성이 날로 교만해져, 심지어는 조정의 관리나 명망 있는 선비가 수령을 만나 말에서 내리는데도, 수령을 수행하는 아전은 방자하게 말을 달리며 돌아보지도 않는다. 수령은 이러한 아전을 비호하고 훈계하지 않아, 이로 말미암아 비방과 욕을 무더기로 듣는 일이 많으니, 아전 단속은 반드시 지엄하게 할 것이다.
부임길의 중도에 아전과 하인이 죄과를 저지르면, 작은 잘못과 우발적인 잘못은 아울러 간략히 처리하고, 큰 잘못과 고의적인 잘못은 형리를 불러서 죄과로 회부하여 두었다가, 취임한 지 사흘 뒤에 그를 불러서 책망하되 끝내는 모두 용서하는 것이 좋다. 천리 길을 동행하는 자를 도중에서 채찍질과 종아리질을 낭자히 학, 임지에 도착한 뒤에는 처벌하여 용서치 않는다면, 그것은 인정이 아니다. 다만,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부임길에 중도에 고을에 머물러 있는 공형문보(公兄文報)를 받으면, 마땅히 '도부(到付)'라고 하거나 혹은 '지실(知悉)'이라고만 제사할 것이지, 장황하게 사리를 논해서는 안 된다. 만일 긴요한 일이 있으면 수리에게 사사로이 연락하도록 할 것이다.
부임길의 중도에 본 고을 백성의 소첩이 있을 것 같으면, "단지 취임 후에 와서 진정하라."고만 제사할 것이지, 사리를 논해서는 안 된다.
5. 취임 전 하루 저녁은 반드시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한다.
<치현결(治縣訣)>에서 말하기를 "추임 전 하루 저녁은 반드시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하고, 임지 고을의 경내에서 자서는 안 된다. 대개 신관의 행차에는 수행하고 맞이하는 사람의 숫자가 심히 많아서 경내에 잘 것 같으면 관하 백성들이 해를 입게 된다." 했다.
혹 고을의 경계에 정원이 있으면 그 요역은 면제해 주도록 한다. 오로지 이러한 정원의 일에만 종사하는 자는, 구태여 생각해 줄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성쇠를 물어서 편의에 따르도록 허용할 것이다.
6. 날을 받아서 취임하지 말고, 다만 비가 오면 개는 날을 기다림이 좋다.
택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봉고 파직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폄하가 되어 파직되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 떠나는 이도 있다. 앞사람들이 택일을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것을 따를 것인가. 매양 보면 신관이 이미 가까운 곳에 당도하여, 혹은 하루에 겨우 한 역참만 가기도 하고, 혹은 종일 지체해서 좋은 날을 기다리기도 한다.
읍에 남아 있는 이속들이 수군수군 비웃으니 그의 슬기롭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요, 도임 행차를 따르는 관속들은 집 생각에 마음이 초조한데, 앉아서 노비만 축내니 모두들 원님을 저주할 것이다. 그 재액과 길일이 도리어 저주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니, 필경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다만, 취임하는 날이 비바람으로 날씨가 흐리고 어두우면,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잠깐 맑고 밝은 날을 기다림이 좋을 것이다.
기치(旗幟)는 폐단이 있으므로 다만 영기 두쌍만 쓰고, 그 나머지 관속들의 영접하는 절차는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할 것이다.
고을의 경계로 들어서면 말을 달리지 말도록 단속하고, 길가에 나와서 구경한느 사람을 금하지 말 것이다. 읍에 들어서면 더욱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을 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이는 도리이다.
말 위에서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몸을 비스듬히 하지 말며, 의관을 엄숙하게 정제해야 할 것이니, 이것은 백성들을 장엄하게 여긴다는 것을 보이는 도리이다.
객사 밖에 당도하면 의복을 갈아 입고 뜰 안으로 들어가서 망궐례를 거행하되, 잠시 엎드려서 마음에 스스로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만 리 밖을 발히 보시므로, 천위는 나로부터 지척도 떨어지지 않았으니, 소신이 어지 감히 사가 공경하지 아니하리요. 전하께서 적자 만인의 생명을 오로지 소신에게 맡기셨으니, 소신이 어찌 감히 백성을 오직 삼가서 다스리지 않으오리까.' 한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물러나온다.
7. 정무를 시작하면서 관속들의 참알(參謁)을 받는다.
좌수를 불러 앉히고 이렇게 말한다.
"공사는 서두르지 말고 출관까지 기다리되(상관한 지 사흘 만에 출관하다),만일 시급한 공사가 있으면 비록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구애치 말고 아뢰어 승인받도록 함이 좋다.
청사가 굉장하고 화려하더라도 좋다는 말을 하지 말며, 청사가 퇴락하더라도 누추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좌우의 온갖 기물들이 혹 아름답고 혹 추하더라도 또한 입을 열지 말고, 일체 침묵을 지켜 눈은 마치 보이지 않고, 입은 마치 말을 못 하는 것같이 해서 숙연히 지걸이지 않으면 부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질 것이다.
취임하면 반드시 진찬을 한다. 의당 특생의 품을 쓰되 그 작은 1헌(獻)이요, 그 식은 2궤요(떡과 국수 각 한 그릇) 그 육은 3저요(삶은 고기 한 접시, 구운 고기 한 접시, 어회 한 접시), 유물이 4두요(채소 두 접시, 어육 두 접시), 건물이 4변이다(과일 두 접시, 육포, 어포 합하여 한 접시, 쌀가루 음식 한 접시) 여기에 더 가해서는 안 된다.
자제나 혹은 친척, 빈객으로 따라온 사람에 대해서는 의당 특돈 소품을 쓰되 그 작이 1헌이요, 그 식은 1궤요, 1형 1저 1두 1변이다. 더 많으면 안된다. 만일 빈약한 고을로 녹봉이 박하면, 취임 때 찬은 마땅히 특돈 3정을 쓰되, 국 1형에 2두 2변이요, 다른 것은 특생의 경우와 같다.
선왕의 예에 음식은 5등이 있다. 첫째, 태뢰(太牢)요, 둘째, 소뢰(小牢), 셋째, 특생이요, 넷째, 특돈 삼정(三鼎)이요, 다섯째, 특돈 1정이다. 그 변, 두, 궤, 형은 각각 정해진 수가 있으니, 이는 삼례와 춘추전어 산견되는 바다. 그 예문은 <제례고정(祭禮考定)>의 제2권에 상ㅣ 기재되어 있다. 옛날에 대부는 제사를 소뢰로 지냈는데, 그 식은 특생이요, 사는 제사를 특시(特豕)로 지냈는데, 그 식은 특돈이니 이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대저 예라는 것은 천지의 절문이다. 제사와 연향은 더욱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이니, 그 명목과 그릇 수는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예법을 경솔히 버리는 자는 반드시 국법도 가벼이 범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예법을 중히 여기는 것이다.
행차가 중도에 이르면, 미리 이 절차를 적어서 수리에게 주어 본 고을에 사사로 알리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릇 저에 차리는 높이는 두 치가 넘지 못하게 하고 변에 차리는 높이는 세 치가 넘지 못하게 하며(혹은 두치) 두에 차리는 높이는 한 치가 넘지 못하게 할 것이다.(모두 주척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왔던 이속이나 하인들은 사흘 간 말미를 주되, 수리는 그럴 것이 없다. 수리와 수교를 불러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조사(朝仕)는 해뜰 무렵쯤 참알례가 끝나도록 하면 좋다(일어나는 것은 동트기 전이어야 한다). 퇴청은 이경에 할 것이니, 폐문한 뒤에 맥반이 익을 무렵이면 될 것이다.(겨울 밤에는 다소 늦어도 무방하다) 매일 아침 새벽녘이 되어 시노, 곧 급창이 조사할 시간이 되었다고 고하면 나는 곧 문을 열 것이다. 매일 이경이 되면 시노가 퇴청할 시간이 되었다고 아뢰면, 이에 드디어 물러가라는 영이 내려질 것이다. 오늘 이렇게 알리노니 모두 알게 하라. 그 중 혹 시간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네게 죄를 줄 것이다."
아침 일찍 조례를 행하는 것이 옛날의 예법이다. 군현이 비록 작더라도 조례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매양 보면 수령들이 기거하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해가 세 발이나 떠오르도록 깊이 잠들어 있고, 이속이나 장교 등 여러 일을 맡은 자들이 문 밖에 모여서 느릅나무, 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성거리고 있으며, 송사하러 온 백성들이 무작정 머물러서 드디어 하루 품을 버리게 된다. 온갖 사무가 지체되며 만사가 엉망이 되니 매우 불가한 일이나, 혹 넘 일찍 기상을 해도 이속들이 괴롭게 여긴다.
비나 눈으로 땅이 질퍽거리면 참알례를 생략해도 좋다.
8. 관청의 일은 기한이 있는데, 기한을 지키지 않음은 백성들이 명령을 희롱하는 것이다. 기한을 지키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릇 민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반드시 약속을 분명히 하고, 세 번 알리고 다섯 번 일깨워 주며, 또 반드시 그 기한을 너그럽게 하여 주선할 수 있게 한 후에야 이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대로 실시하여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호대초가 일찍이 말하기를,
"모든 일이 신의가 없으면 성사되지 않는다. 하물며 한 고을의 일이 어지럽게 되고 한 수령의 위엄이 그다지 혁혁하지 못한데, 이에 기한도 지켜지지 않고 호령도 엄숙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요체는 기한을 확고히 세우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정이 각각 다르므로 두 번 세 번 연기해 주되, 세 번까지 연기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 벌은 마땅히 엄해야 한다." 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 현의 관아에서 50리 이상 떨어진 곳은 7일로 기한하며, 그 이하는 5일로 하되 먼저 그 멀고 가까움을 상고하여 미리 규칙을 세워야 한다. 또 일직하는 청리더러 책상머리에 붙어서 즉시 기록하게 하여, 뒷날 참고가 되게 하며 이를 어긴 사람은 벌주어야 한다. " 했다.
한연수가 영천 태수가 되었을 때, 조부를 거둘 때는 먼저 그 기일을 포고하고 그 기일에 맞추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으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이에 따랐다.
증공이 주의 자사로 있을 때, 완급을 헤아려 기한을 정해 주고 기한이 다하기 전에는 다시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 기한이 다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그 죄를 법으로 다스렸다. 기한과 일이 서로 맞지 않으면 각 현의 의견을 들어서 따로 기한을 정해 주고, 그래도 어긴 사람은 벌을 주어 용서하지 않았다. 이에 감히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모두 기한 안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구사가 구용현의 현령이 되었을 때, 소송 심리에 매질은 열 대를 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세금의 독촉에도 미리 기한을 정해두고, 기한이 넘으면 마을의 부로들더러 체포하게 할 뿐, 관가의 하인들이 나아가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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