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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오두
- 오두의 역사산책 -
*이 글은 중국 랴오닝성 번시현에서 우리 민족의 박씨의 역사를 지켜온
대단한 번시박씨 집성촌의 박씨 촌민들을 위하여 드리는 글이다.
중국의 번시 박(朴)씨촌은 4백년 전 아닌 신라 때부터 유래했을 수도!
- 신라 김씨 왕조의 후예가 세운 금金) 나라와 함께 박(朴)씨 들이 세운 '박보국' -
들어가는 말
1.중국 번시현 '번시 박씨'의 '박보가(朴堡家)'란 무엇일까?
2.번시 박씨들은 박보가(朴堡家)를 넘어 '박보국' 사람들의 후예
3.'캄차카반도의 대한(大漢) 사람들'이란 신라인(新羅人)들을 의미
4.<박흥보전>과 <박보전>, <박보가>와 <박보국>
5.신라 - 박보국 - 금(金) - 몽골(元) - 청(後金) - '번시(本溪) 朴씨'
6."범 - 범 - 범", 아즈텍, 잉카인들의 토템과 과보족 토템
들어가는 말
우리민족이 다른 나라에서 수백년 이상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자 연합뉴스에 의하면 중국 랴오닝(遼寧)성 번시(本溪)현에서 한민족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 집성촌'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기에서 "400년"이라는 것은 그들 박씨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이라는 것을 바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청나라 이전부터 그들 박씨 가문들이 그곳에서 살아왔을 개연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필자는 번시현 박씨들이 신라가 멸망한 뒤에 그곳에 정착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글에서 밝혀내고자 한다.
신라가 망하자 신라 김씨 왕조의 후예가 망명국을 건국하여 금(金)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졌다. 그렇다면 신라 왕실의 또 다른 계보였던 朴씨 왕조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분명히 일부는 김씨왕조의 후예들처럼 금나라 지역으로 가서 오늘날 랴오닝성 번시현에 남아있는 박씨들의 조상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필자가 생각하는 것은 현재 번시현의 박씨들이 주장하는 '박보가' 가문의 그 오랜 뿌리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현재 랴오닝성(요령성) 번시현의 이른바 '번시 박씨' 집성촌에는 한국말은 전혀 하지 못하고 우리의 전통 문화도 제대로 모르지만, 오직 그들의 조상은 한민족인 박씨이며 16대 족보를 이어오고 박혁거세 영정을 모시는 것은 물론 스스로 한민족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과연 그들은 남의 나라에서 파란만장한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한민족이 조상이라는 그들의 가문의 족보나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고 그 뿌리 역사를 자손 대대로 제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다. 현재 그들 번시 박씨들도 그들의 과거 역사의 뿌리를 찾아달라고 모국에 호소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다 상세히 그 역사적 배경 찾아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박씨 집성촌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중요한 의미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번시현 박씨들의 역사가 실제로 얼마나 오랜 역사동안 존재해 왔는지를 알아보기 이전에 먼저 어떻게 청나라와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파란만장한 시대 변화 속에서도 그들이 한(韓)민족의 후예로서 그들의 뿌리를 지켜낼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청나라는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後金)이라는 국호를 개명한 국호이다. 그 이유는 오행사상에서 불(火)인 명(明)나라와 상충된다 하겨 명(明)을 극복하기 위하여 물(水)을 상징하는 청(淸)이라 국호를 개칭했다. 청(淸)나라 국호는 그 본래의 국호가 후금(後金)이라는 것 자체가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신라 김씨 왕가의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를 잇는 의미를 가지는 나라인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청태조 누루하치의 성(姓)에 대한 한자 표기가 '애신각라(愛新覺羅)'다. 이것은 신라(新羅)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선글에서 여러 차례 다루었듯이 신라는 멸망했으나 그 후예들은 한족에 대한 만주지역에서 그 명맥을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가 신라 왕실 김씨 왕계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의 후신으로서 후금을 자처한 나라였다는 것은 신라 왕실의 박 - 석 - 김 3대 시조로서 신라 말기에도 김씨 왕조와 함께 강력한 왕계를 이어왔던 박씨 왕실 후예들에 대하여 '관대하게' 존재하도록 배려했을 개연성이 높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라오닝성 번시현의 박씨 집성촌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족보가 최소한은 청나라 때에 배척당하지 않고 존재했을 개연성에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과연 번시 박씨들은 청나라 이전에도 존재했을 개연성은 없을까?
나는 이 글에서 번시현 박씨들 또는 다른 내력을 가진 박씨들도 청나라 이전에 금나라 지역 또는 오랜 세월 우리민족의 영역이었던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추적하고자 한다.
청나라 이전 금(金)나라 건국 때에는 신라 박(朴)씨들은 금나라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과 그 당시 신라 왕실의 김씨 후예들이 세운 금나라에서 신라의 박씨들에 대해서도 알게 모르게 보호를 해주어 그곳에 정착했을 개연성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나는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의 일치성을 추적해 낼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시사적인 뉴스 기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우리민족 문화 또는 그 역사에 관련한 내용들을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분석하여 찾아내 가장 짧은 시간에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이미 오랜 세월 필자가 저간에 집필해온 많은 자료와 연구를 바탕하여 그 개연성이 이미 전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새로운 주장들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한국 역사학계에서 발표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라고 자부한다. 이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의 이같은 노력이 단지 일회적인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수많은 글들의 연속적 선상에서 써내는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만주 지역 또는 금(金) 나라 지역에 박(朴)씨 들이 살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 보자.
먼저 랴오닝성 번시현의 '번시 박씨'들은 그들의 시조(始祖)가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청나라 때에 건너온 것 이상 보다 오래된 박씨들의 시조인 박혁거세를 들먹인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나라 영역
1. 중국 번시현 '번시 박씨'의 '박보가(朴堡家)'란 무엇일까?
현재 문헌적인 것을 바탕으로 번시박씨 집성촌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17세기 청나라와 명나라의 전쟁 때에 조선에서 건너온 박씨들의 후손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그저 집안 대대로 내려온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와 함께 근간에 그들이 찾아낸 문헌적으로 중국의 역사에 기록된 부분을 그 증거로 삼고 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번시 박씨들은 명나라 조정의 요청으로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병되어 온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조선의 박씨들이 후금지역으로 넘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시 박씨들의 정확한 유래와 왜 그들이 그곳에 오랫동안 정착해 온 것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고 그들 스스로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그들 '번시(本溪) 박씨(朴氏)'들의 집성촌 사람들이 '박보가(朴堡家)'라는 가문을 이루고 있다는 그 '박보가'의 의미에 대한 배경을 추적하려 한다. 그 역사적 배경은 400년을 훨씬 넘는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선 좀더 명확하게 번시 박씨들의 정착촌 번시현 사람들이 찾아낸 사실들을 살펴보자. 명나라가 후금의 군사들을 물리치려 전쟁을 벌였던 곳인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인근지역)에서 패하였을 때, 조선의 강홍립 장군과 그 부하들은 후금의 포로가 되었고 결국 강홍립 장군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돌려보내질 때 그들은 조선으로 돌려보내졌만, 강홍립장군의 부하로 갔던 박씨들은 그곳 랴오닝성 번시현 일대에 남아 정착하여 그들의 박보가 촌을 형성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착은 공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을 청나라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청나라 강희제 때의 기록인 번시현 역사지에 따르면 1659년 '박영강(朴英强) 등 번시의 박씨 5형제에게 토지를 나눠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가 앞서 제시한 신라 김씨가 세운 금나라의 후신인 후금 즉 청나라 집권자들로부터 박씨 후예들이 환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해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번시현의 융닝사(永寧寺)에 남아 있는 종(鍾)은 1786년 주조 제작된 것인데 그 종신에는 '박가보자(朴家堡子)'촌이 종 주조 기부자로 각인돼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리고 나중에도 청나라로부터 번시에 정착한 박씨들은 '집단으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공인된 사실은 그들이 그당시에 독립된 집성촌으로서 박씨를 유지해오면서 그때까지 그들의 조상을 한민족의 후예로서 당당히 이어올 수 있었던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다만 청나라 때에 번시박씨들은 '만주족'으로 분류된 적도 있었다는 것과, 중화인민공화국 이후인 1958년 인구조사에서는 '만주족'에서 다시 '한족(漢族)'으로 편입되는 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지울 수가 없어 자신들은 한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그곳 집성촌 촌민 전체가 오랫동안 집단 청원한 결과 그들은 '조선족'으로 인정을 받아 1982년 인구조사 때는 그들 번시 박씨들은 '조선족'으로 칭해져 왔다고 한다.
그런 결과는 번시박씨들이 집단으로 그들이 '조선족'으로 그 뿌리를 되찾고자 했을 때 중국정부에서는 박씨라는 성(姓)이 명나라 때 후금을 대항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파병한 강홍립장군의 부하로 왔던 박영강을 16대 시조로 하는 그들의 족보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수많은 성씨들이 중국에 그 어떤 '뿌리'를 둔 (또는 그런 소중화의식을 인위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경우들이 많은데 비하여 박(朴)씨는 중국 성씨가 아닌 한국인들의 성씨로 중국에서 알려져 있다.
재미있게도 그들 번시박씨들은 지금도 그들의 이름 항렬에 '문(文) - 명(明) - 희(希) - 승(勝)' 등의 돌림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지어오고 있었으며 집집마다 족보를 만들어 후대에 전해왔다는 것이다.
4년전인 2007년부터 그들은 대대적인 번시 박씨 가문의 뿌리찾기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종친회 격인 '번시 박씨 협회(회장 박명겸)'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번시 박씨의 족보를 체계화하는 등 본격적인 뿌리찾기 작업을 벌인 결과 확인된 숫자로만 7천여 명의 후손들을 찾아내 번시 박씨의 가계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확인된 중국 땅에 남아 있는 7000명의 코리안 박씨란 적지 않은 숫자인데 그들 번시 박씨의 후손까지 합치면 최소한 2만여 명은 더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번시현 집성촌에 사는 주민들만의 숫자는 600여명으로 집성촌인 박보가촌의 박씨들이 그 절반을 차지 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박혁거세 시조를 가진 신라와 관련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서 그곳 번시박씨인 박희충(朴希忠.62)씨는 "아들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랑하며 "우리 세대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지만 우리의 뿌리를 잇게 하려고 후손들에게는 한국말과 전통문화를 배우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랴오닝성 조선족 문학가 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성군씨는 "1900년대 이주한 조선족조차 그 뿌리를 잃어가는 마당에 400년이나 족보를 이어오며 혈통을 간직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짧은 이민사를 가진 거주민들보다 오랜 정착의 역사를 가진 가문의 차이로서 번시 박씨들이 얼마나 더 오래된 '천년 가문'임을 나는 이 글에서 추적해 보고자 한다.
번시 박씨 종친회 사무실에는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영정과 신라시대 유물 사진들을 걸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박명범(朴明范) 전 번시현 역사지(誌) 판공실 주임은 앞서 언급한대로 "박영강과 다섯 박씨들에게 청나라 문헌에서 박씨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기록"을 찾아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 주임은 "청나라와 공산당 문헌 등을 통해 우리 시조가 1619년 중국 땅에 온 것은 확인했지만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한국 학계의 도움을 얻어 우리 선조의 뿌리를 꼭 찾아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필자가 생각하는 신라 박씨의 내력에 대하여 이미 여러 편의 앞선 글들을 바탕으로 신라 김씨 왕조의 후예뿐 아니라 신라 박씨 왕조 후예들도 신라가 멸망한 뒤 금나라가 건국될 당시 금나라 지역 어딘가로 이주해 갔을 개연성 이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신라가 멸망되자 신라 김씨 왕조들이 옛 고구려 지역으로 옮겨가 장차 금나라를 건국한 그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같은 시기 금나라 지역에서 신라왕실의 박씨 왕조 후예들도 그곳으로 이주해 가서 그 어떤 역사적 내력을 남겼을 것이라는 면에서 신라멸망 이후 박씨들이 만주지역에 남긴 그 역사 문화적 사실들을 추적할 수 있는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박흥부전>이라고도 불리는 <흥부전>이 몽골에서도 <박타는 처녀> 설화로 존재해 온 사실이라든지, 원나라 때 신라문화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앞선 글들에서 논한 바 있다.
특히 <산해경>에서 말하는 '박보국'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 랴오닝성 번시현 박씨들이 말하는 '박보가'와 그 어떤 역사적 맥락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신라 지역 이외의 박씨 역사'에 대하여 상당한 글들을 써왔다고 자부한다. 이제 이 글에서는 '번시 박씨들'을 위하여 그리고 현재의 한반도권 이외의 신라역사의 잔사(殘史)를 분명히 해두기 위하여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따라서 '번시 박씨' 가문이 '조선족'으로만 분류된 것을 넘어 조선시대의 조선족보다 더 오랜 역사적인 배경에서 그들이 유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글이 될 것이다.
2. 번시 박씨들은 박보가(朴堡家)를 넘어 '박보국' 사람들의 후예
랴오닝성 '번시(本溪) 박씨(朴氏)'들은 그들의 집성촌에서 그저 한 동네의 가문 정도로 '박보가(朴堡家)'라는 가문의 형태까지 파악한 뒤 보다 더 원천적인 그들의 조상 내력을 찾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들의 호소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게 될 것이다.
먼저 강조할 것은 번시 박씨들의 조상들은 그들이 믿는 '박보가'를 넘어 신라 김씨 왕조의 후예들이 세운 금(金)나라처럼 신라 박씨 왕실의 후예들도 나라를 말하는 '박보국'의 후예라는 것을 필자는 주장하려 한다. 그렇다면 '박보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재 랴오닝성의 번시박씨들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그들 자신들의 가문을 박보가(朴堡家)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가문의 의미인 '家'를 제외하면 그들은 '박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보'란 박을 좋아하고 박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 된다. 특히 <흥부전>은 '박보' 형제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흥하는 박보와 노는 박보 이야기가 흥보(흥부)와 놀보(놀부)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박씨 형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흥부전>은 <흥보전> 또는 <박흥보전>이라고도 하는 것에서 번시 박씨들이 그들 가문을 '박보가(朴堡家)'라고 하는 것은 <흥보전>이 '박보가전'이기도 하다는 것에서 필자는 번시 박씨 집성촌의 '박보가' 가문에 대하여 주목한다. 흥보(흥부), 놀보(놀부)는 박씨 형제 이야기였으며 결국 그들은 '박보' 가문의 이야기인 '박보가'이기 때문이다.
<흥부전>이 박씨에 관한 식물적 박씨만이 아니라 신라 시조 박씨에 대한 내용을 문학화한 내용이라고 필자는 앞선 글 <신화이야기140> 흥부전 朴씨의 신라 기원론 (一)에서 다루었다. 그 <흥부전>은 <박보전>이라 할만한 것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 즉 박씨 시조에 대한 내용은 먼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우리 민족의 성씨이며 그 안에는 조롱박을 비롯하여 큰 활, 도철문양과 관련한 표현으로 다양한 한자 표기가 박씨의 '박보'와 관련해 존재해 있었다. 박씨들의 시조인 박혁거세 신화에서부터 박과 관련하여 있다는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과 관련한 신화를 우리는 좀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夸父族)을 살펴보았다.
과보족(夸父族)은 도철(饕餮)문양을 새긴 동이족이었다. '과보'의 '과'와 '보'는 모두 박과 관련한 의미가 들어 있다. 과(夸)는 그대로 박을 의미하며 '보' 또한 바가지와 관련한 '포(匏)'에 이어져 있다. 한자 표기는 '夸父族(과부족)'이지만 '과보족' 으로 읽히기도 하는 것은 '흥부전'을 '흥보전'이라고도 칭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보'는 '父' 또는 '夫'로도 표현되기도 하고 '보(堡)'로 표현되거나 '포(匏)'로 표현될 수도 있었다는 것은 번시 박씨들의 '박보가'라는 표현이 '바가지'와 관련한 박씨를 표현하는 '박보'에서 그 한자 표기가 한 가지로 고정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 <山海經>의 <海外北經>에서 말하는 과보족들이 만들었다는 '박보국(博父國)'은 결국 '朴堡國'의 다른 표현이었을 수가 있다. 박보국은 따라서 번시 박씨들의 '박보가(朴堡家)'의 오리지날 유래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博父國'이라고 써놓으면 그 국호의 모양이 한자의 나타내는 뜻으로 기인한 나라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후대의 다른 뜻으로 한자를 다시 차용하여 개명하는 것은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의 많은 기록들에서 발견되는 일이다. 그럴 때 그 음운은 지키는 경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 정황과 그 배경을 통하여 방증들을 찾아내면 그 음운의 본래 의미를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산해경>에서 박보국(博父國)을 만들었다는 과보(夸父)족들이 사는 곳은 언제나 복숭아 숲이 있었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신라시조 신화에서 복숭아가 관계되어 있었을까? 그야말로 아주 많은 관계가 있었다.
박혁거세 어머니에 대한 칭호 자체가 복숭아 어머니 즉 '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 했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풍류신선도의 토착적 종교로서 태양숭배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신선도는 복숭아를 그 심볼로 하고 있으며 신라시조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의 선도(仙桃)란 신라 박씨들이 복숭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이 세운 박보국이 신라 자체를 의미한 것일 수도 있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시조와 관련한 내용일 수도 있다.
과보족들의 족휘(族徽)에는 과보족의 '夸'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본래의 글자는 大자 아래에 于+弓이 새겨져 있어 그 의미는 '큰 활'을 의미하는 무기 이미지로 해석되고 있다. 과보족은 거인족이었기에 큰 활을 쏘았던 것이다. 그 글자는 동이족의 '夷'와 같은 이체자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동이족의 夷의 모양이 큰 활을 쏘는 종족이라는 면에서 대한국(大漢國)은 동이족의 나라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夸父)족의 '夸'란 그대로 동이족의 '夷'의 이체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한(漢)은 다른 의미로 쓰인 '漢'에 대해서도 한나라 의미로 잘못 해석해 온 문제들이 있었다. <梁書>에는 대인(大人)은 대한(大漢)으로도 불리고 대한국(大漢國)은 오늘날 캄차카 반도 지역만큼 먼 동쪽에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3. '캄차카반도의 대한(大漢) 사람들'이란 신라인(新羅人)들을 의미
중국의 동북공정은 아메리카 신대륙발견에도 그들은 집요한 아전인수의 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해야 한다.
漢江, 大漢門 등 우리 민족사에서 표현되는 "漢"이란 중국의 漢나라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다. 당나라를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대왕의 비문에도 나오는 '성한(星漢)'이란 은하수(銀河水)즉 은한(銀漢)으로도 표현되는 것이다. 漢은 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탄(灘)에서도 볼 수 있는 글자로 무엇인가 떠다니는 것이 있는 물을 의미한다. 필자는 신라김씨들이 조상으로 표현된 성한왕의 '성한(星漢)'이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로 해석했다.
이것은 고대 코리안 고래잡이들이 배를 타고 다니던 은빛 얼음들이 떠다니는 빙하의 바다를 말한다는 사실을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신라 시조' 성한왕(星漢王)의 은하수는 어디였나에서 밝혔다.
<梁書>에서 말하는 대한(大漢)으로도 불리는 대한국(大漢國)이 캄차카반도 지역으로 본 중국인 고고학자 왕따이유(王大有)의 <龍鳳文化源流> (北京, 1988)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알류산열도와 캄차카반도의 '빙하의 바다'의 '大漢'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의 大韓이 단지 삼한시대의 韓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빙하가 떠다니던 '대한(大漢)'에 이어져 있었던 '한' 즉 빙하가 떠다니는 '은한(銀漢)'과 '성한(星漢)' 즉 '大漢'에 이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라 가야인들은 이슬이 하늘의 별이 내려온 것이라고 믿었듯이, 바다에 떠다니는 빙하의 모양은 별이 떨어진 것으로 보았을 것이기에 무언가 떠다니는 '漢'에 은빛의 빙하들은 별이 내려온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은한(銀漢)'과 '성한(星漢)'은 빙하(氷河)의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필자는 풀이한다.
한반도와 빙하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베링해협이 빙하로 이어져 있었을 때인 1만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에 대한해협도 빙하로 얼어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글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코리안들은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를 따라 고래잡이를 한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8천년에서 3천년 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고래잡이 문화에 가장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나라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무대왕 비문에서 문무대왕의 장례를 '고래나루(鯨津)에 분골했다(粉骨鯨津)'고 표현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이미 만파식적의 '움직이는 바위 섬'은 외뿔고래의 출현으로 해석한 것은 물론, 대왕암의 물 갇힌 모양이 울산반구대 고래 암각화의 고래를 닮아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신라 금관의 고래 이미지, 신라 범종만이 가지는 원통이 있는 이유 그리고 첨성대는 숨통을 가진 신라왕실의 고래토템폴이었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주장해 왔다.
고래나루에 장례를 치른 문무대왕의 비문에서 말하는 신라 김씨들이 '성한(星漢)' 왕의 후손들이라는 것은 결국 은한 즉 빙하가 떠다니는 바다의 고래잡이 후손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박혁거세 어머니가 바닷가에 살았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삼국유사의 석탈해조의 기사에서 박혁거세도 결국 바다와 관련한 고래잡이 후손임이라는 것도 밝혔다. 석탈해 또한 <삼국유사> 김수로왕 편에 나오는 내용에서 "왜국 동북 1천리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내용에서 석탈해는 고래잡이 후예라는 사실도 밝혔다.
신라왕조 박-석-김 3대 시조는 모두 빙하와 관련된 고래잡이 후예들이었다는 것을 필자는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와 문무대왕비문의 고래관련 기록에서 확신하고 있다.
그런 고래문화를 가진 신라인들이 동해안 연안을 올라가는 고래떼를 따라 캄차카반도로 올라갔을 것이라고 볼 때 <梁書>에서 말하는 대한(大漢)으로도 불리는 대한국(大漢國) 사람들은 신라인들 또는 신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한(大漢)은 한나라의 의미가 아니라 나한(羅漢) 등에서 보이는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대인국을 의미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梁書>에서 말하는 대한국(大漢國)이 오늘날 중국인 왕따이유(王大有) 등 중국인들이 말하는 캄차카반도 만큼 멀리 있다고 언급하는 그 대인(大人)의 나라 대한(大漢)의 위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코리안 고래잡이들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거인으로서 대한(大漢)의 의미와 관련하여 '나한(羅漢)'의 뜻을 살펴보자. '羅漢)'이란 산스크리트어로 'arhan(알한)'을 한자로 아라한(阿羅漢)이라 표기한 것으로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羅'는 '신라(新羅)' 국호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梁書>에서 말하는 '캄차카반도의 대한국(大漢國)'이란 신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성한(星漢) - 나한(羅漢) - 신라(新羅)에 이어지는 것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성한(星漢)이 하늘 즉 먼곳으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면 나한(羅漢)이란 이 땅 이곳에 내려온(이주해 온) 성한(星漢)을 의미하는 나한(羅漢)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新羅)란 '새로운 羅漢 즉 '新羅'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梁書>에서 말하는 '캄차카반도의 대한국(大漢國)'의 대한(大漢) 즉 나한(羅漢)이란 신라인과 관련된 태평양 연안 캄차카반도에 이르는 고래잡이들이었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오히려 지역적으로 어휘적으로도 타당성이 있다. 왕따이유(王大有)가 아메리카 인디안의 '인디안(Indian)'을 3천년 전 은(殷)나라의 수도 안양을 의미하는 '殷地安'으로 풀이하는 등의 엉터리 해석이 오늘날 중국인들의 아메리카 인디안의 유래에 대한 근거로 주장하는 내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디아(India)라고 그가 살아생전 생각한데서 '인디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은 얼토당토 않은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는 박혁거세 신화에서나 석탈해 신화 김알지 신화에서 보아도 분명 바다에서 온 바가지족(瓠公) 귀족들이 건국했다. 그것은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과 관련이 있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들은 변방의 사람들이 아닌 그들 자신이 우주의 '중앙'에 있다고 믿었다. 과보의 종족적 계보에는 후토(后土)가 信을 낳고 신이 과보를 낳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보면 오방사상에서 중앙인 토(土)에서 인의예지신 가운데 중앙인 신(信: 사대문 복판인 보신각의 信이다)의 후예가 과보인 것을 보면 과보족의 계보에 황제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우주의 중심인 '신국의 나라' 즉 신국토(神國土)'라 믿었다. 그러한 신국토 사상이 불교가 들어와 '불국토' 사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불국사가 남아 있으며, 인도의 천축국 중심에서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조성시기에는 '동축국 중심사상'으로 발전했다. (필자의 앞선 글 참조).
이두를 한자로 옮긴 '新羅'란 오행에서 중심인 '信羅'이며 '神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신라인들을 빙하가 떠다니는 캄차카반도의 '은하수'인 성한(星漢) 또는 대한(大漢)에 이어진 나한(羅漢)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수가 있다. 문무대왕비문에서 말하는 신라 왕실의 김씨 시조가 '성한왕(星漢王)'이라는 것은 그 신화적인 배경과 선사시대 고래잡이 역사에 이어진 '은하(빙하)의 나라' 고래잡이 땅에 이어진 역사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4. <박흥보전>과 '박보전' 그리고 박보가와 박보국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 문화와 역사는 금나라 외에도 <흥부전>으로 신라의 박씨 시조에 대한 간접적인 전설을 이어왔다는 것을 앞선 글에서 필자가 주장했다. <흥보전>을 또 다른 표현으로 <박보전>이라고 하거나 <과보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앞선 글 가운데는 <신화이야기143: <흥부전>의 본명칭은 '과보전' 또는 '박보전' (四)>이라는 글의 2장에서 박보국에 대하여 논했다. 그 내용은 랴오닝성 번시 박씨들의 '박보가'의 배경을 알아내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과보족이 박보국을 세웠다고 했다는 것은 주목된다.
과보족이 중국의 한족이 아닌 동이족임을 중국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동이족을 의식한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염황전쟁에서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웠고 과보를 죽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아도 과보는 동이족이다. 이러한 과보족의 의미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이족까지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 광분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그들의 원류를 황하(黃河)문명에서 시작한 것으로 해오던 것을 이른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이제는 동이족의 무대인 요하문명과 홍산문화에서 기원했다는 식으로 만주 일대를 오히려 중국의 기원지로 보려하는 것에는 과보족 등의 역사를 중국에 편입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탐원공정은 모든 변방의 오랑캐로 여기던 동이족들도 황제족의 후예로 해석하려는 저의가 있다. 그리하여 홍산문화를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하여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을 포함한 만주(滿州)일대 모든 민족의 시조는 황제라는 논리를 주장하려 하는 것이다.
염황전쟁에서 황제가 과보족의 우두머리를 죽였다는 것은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이 세운 박보국에 이어져 있다.
과보족의 우두머리가 죽었지만, 그 후손들이 살아 박보국(博父國. 한자 표기와는 달리 '박보국'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다)을 만들었다고 했다. <山海經>의 <海外北經>에서 과보족들이 박보국(博父國)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과보족(夸父族)의 과(夸)는 조롱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롱박은 신라시조 신화에 나오는 '호공'의 호(瓠)에도 포(匏)에도 나오는 조롱박이다. '과(夸)'는 따로 박을 뜻하는 과(瓜)이기도 하다. 과보족(夸父族)이란 의미상으로 '박보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과보족의 후손들이 박보국을 만들었다는 오늘날 랴오닝성 번시현의 번시 박씨들의 가문인 '박보가'가 '박보국'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흔히 흥부가를 판소리로만 의식하여 '흥부가(興夫歌)로 표현하지만, <흥보가>라고도 표현하는 것은 노래 가(歌)가 아닌 집가(家)를 써서 흥보가(興夫家) 또는 흥보가(興父家)의 가문 이야기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흥보가'가 흥보와 놀보라는 박씨 형제를 다룬 '박보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과(夸)나 과(瓜)가 박이라면 거기에서 '박보국'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가지 '박'과 관련된 것이다. 박보국의 한자 '博父'는 우리말 '박'을 음차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흥부전의 '흥부(興夫)'는 '흥보'라고도 부른다는 것은 과보(夸父), 박보(博父)에서 볼 때 '부'는 '보'와 같은 음운으로 교환되며 夫와 父 또한 '보'에 대한 교차표현될 수 있었던 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흥보전'은 '과보전' 또는 '박보전'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박혁거세 신화에서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박씨라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는 일종의 '박보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혁거세 일족이 세운 신라는 호공(瓠公)으로 표현된 과보족들이 박부국을 건설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山海經>에서 보이는 과보족들이 박보국(博父國)을 세웠다는 기록은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가 그렇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山海經>은 중국 선진(先秦)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 진한과 관련되어 있고 중국의 진(秦)나라인들이 이주해왔다는 학설은 이러한 배경의 한 일면일 수도 있다.
랴오닝성의 번시현의 박씨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말하면서 표현하는 '박보가'의 '보' 또한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한자 표기인 '堡'는 다른 한자 표기들이 존재할 수가 있다.
청나라때는 '만주족'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때는 '한족'으로 편입되었던 것에서도 그들 '박보가' 박씨들은 파란만장한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 역사영역이었다가 중국의 영향하에서 만주지역에서 살아오면서 그들의 가문을 표기하는 한자표기가 다르게 표현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만주지역 명칭들이 한자로는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은 여러 증거들이 있다. 청나라를 건국한 청태조 누루하치의 성이 애신각라라고 표기한 그 한자 표기가 훈과 음이 교차한데서도 알 수 있다. 누루하치(努哈赤)가 멍거테무얼(猛哥帖木)의 6세손으로 태어났다. 누루하치의 성은 '아이신교로'인데 한자 표기는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표기하고 있다.
번시 박씨 가문을 '박보(朴堡)'의 가(家)문이라고 표현한 '박보가(朴堡家)'의 '朴堡'는 그들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라는 구전을 사실로 하고 그 표현은 여러 다른 한자표기를 사용했을 수가 있다는 것을 '누루하치 = 努哈赤' 또는 '멍거테무얼 = 猛哥帖木' 그리고 '아이신교로 = 愛新覺羅'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번시 박씨들이 그들 가문을 표현하면서 '박보가(朴堡家)'라고 한 것은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또 다른 동이족의 표현 속에 나오는 '박보국(博父國)'에 이어진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은 이제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흥부전>의 구조가 아주 유사하게 일치되는 몽골의 <박타는 처녀> 스토리는 금나라 뒤를 이어받은 몽골의 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단산> 신라의 '계룡'과 '蛇陵'의 메타포, 몽골의 <박타는 처녀> (三)에서 논했다. 몽고제국 즉 원나라 왕실에는 신라 왕실의 풍속이 남아 있음을 <역사산책> 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
에서 다루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 신화는 박에 대한 단순한 표현을 넘어 조롱박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번 나온다. 이에 대하여 <신화 이야기 67: <신화 이야기67> 바가지를 따라 온 신화 (1) 아기왕을 발견한 호공(瓠公)의 정체>에서 논했다.
바가지를 만진다는 것은 신라시대 초기의 신화에서 대단히 신분이 거룩한 일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안으로 말하자면 메디신 맨(medicine man)과 같은 신성한 지위에 있었다. 특히 신성한 천문을 다루는 특별한 인물이 역할을 맡았다. 그러한 인물들을 호공(瓠公)이라고 했다.
<흥보전> 이전에 이미 朴씨와 덩굴박의 박씨는 이미 대단히 오래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 에 "진나라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고 한다(辰人 謂瓠 爲朴)"라고 한 것을 보아도 朴씨는 글자 그대로 박꽃에서 열리는 바가지를 의미하는 한자 표기이기도 한 것이다.
옛날 조롱박 표기는 포과(匏瓜)로도 표현했다. 조롱박은 나중에 주전자로 발전했다. 따라서 수주 또는 주자라고 불리었던 신라시대의 주전자는 신화적인 배경이 있었다. 그것이 포과(匏瓜) 또는 호과(瓠瓜)로 불렸던 조롱박 신화에 연결되어 있었다.
신라인들의 바가지 신화는 신라의 국호 계림(鷄林)에 연관한 하늘의 닭 즉 천계(天鷄)에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새벽별을 의미하는 별도 바가지 별 즉 포과성(匏瓜星)이며 그 포과성은 새벽닭 즉 천계(天鷄)와도 관련되어 있었음을 사마천의 < 史記>에도 기록하고 있다. 천계(天鷄)란 천문을 움직여 새벽을 여는 신화적인 의미의 닭이다. 사마천의 <史記>에서 한유예(漢劉睿)의 <荊州占>을 인용한 바가지와 별 그리고 천계와 포과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포과(匏瓜)는 일명 천계(天鷄)라고 하며, 하고동(河鼓洞)에 있다. 포과성(匏瓜星)이 밝으면 그 해에 대풍이 든다. (匏瓜, 一名天鷄, 在河鼓洞, 匏瓜星明, 歲則大熟也)"
<史記, 天官書> 匏瓜條 <索隱>
신라의 바가지와 닭은 함께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은 태양숭배시대와 바다에 연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바다'와 '바가지'의 '바'는 바다물과 그 물에 뜨는 또는 푸는 바가지의 '바' 의미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의 고래잡이들은 해돋는 바다 즉 폭풍과 풍랑의 날씨가 아닌 맑은 태양의 날씨를 숭배했으며 그것은 그대로 신라인들의 '계림'과 닭 그리고 '호공'의 바가지 그리고 하늘의 바가지 별 '포과성'에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우리 민족의 새벽별 바가지 정화수 기원은 신라의 박씨 시조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알지가 닭숲에서 태어날 때 흰 닭이 울었다는 그 닭은 천계(天鷄)를 의미하며 그 닭은 바가지 별 포과(匏瓜)의 다른 명칭이라고 한 사마천의 기록은 신라의 김씨와 박씨 모두 같은 바가지 신화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라 시조들은 고래잡이들로부터 그 실제적 그리고 신화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글 앞선 글에서 논했다.
김알지의 후손으로서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고래나루에 분골했다는 것은 사마천의 <史記>의 기록에서 말하는 하고동(河鼓洞)이 박보국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신라 - 박보국 - 금(金) - 몽골(元) - 청(後金) - '번시(本溪) 朴씨'
신라의 멸망 이후의 남은 역사는 신라의 그 건국 신화만큼 아직도 추적해야 할 많은 미스터리들이 남아 있다.
신라시조 신화의 박-석-김 3대시조 신화는 아직도 많은 숨은 사실들이 남아 있다. 신라가 멸망했을 때 신라 김씨왕조의 후예가 금(金)나라를 만들었고 나중에는 청나라 건국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많은 신라에 관한 잔사(殘史)들이 그 과정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흥보가>가 <박타는 처녀> 설화로 몽골 만주지역에 남아 있었다는 것과 번시 박씨들의 '박보가'는 그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신라인들이 금(金) 나라를 세웠을 때 우리는 그동안 신라의 김씨 왕조 후예들에 국한하여 그 남은 역사를 논해 왔다. 그러나 신라 왕실의 박씨왕조 후예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박타는 처녀>와 함께 몽골(원)이 고려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신라문화에 영향을 받은 금나라의 후예라는 사실에 일련의 연결성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배경으로 신라 왕실의 김씨 왕조 후예가 금나라를 세웠다면 신라 왕실의 박씨 왕계의 후예들도 일부가 분명히 만주 지역으로 '옹진'을 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성립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박보가'에 남아 있는 '박보국'의 잔흔이며, <흥보가>의 구조를 가진 원나라 몽골의 <박타는 처녀>라고 필자는 해석하는 것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이제는 많이 알려진 <화랑세기>의 미실 현상은 신라 왕실의 풍속으로 왕후 대물림 풍속이었다. 그러한 풍속은 신라 왕실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 풍속에 영향을 받은 몽골의 원나라 황실에 이어졌으며, 그러한 왕후대물림 현상은 고려의 임금들에게 시집온 원나라 황제의 공주들에게서도 이어져 있었다. 신라의 미실현상은 원나라 공주들이 고려에 시집 와서도 그대로 행했다는 사실을 필자는 앞선 글에서 논했다.
랴오닝성 번시 박씨들의 '박보가' 가문은 본래 박보국이었으며, 그것은 신라를 의미하는 다른 칭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梁書>에서 말하는 캄차카반도 만큼 먼 동쪽 바닷가의 나라 대인(大人)들이 사는 대한국(大漢國)은 과보국 사람들이 오가던 바닷가로 연결되는 고래잡이 루트였으며, <山海經>의 <海外北經>에서 말하는 과보족들이 세웠다는 박보국(博父國)은 신라 또는 신라인들과 관련된 고래잡이들의 루트에서 나타나는 '고래잡이 집성촌'이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과보족이 세운 박보국은 신라인들 또는 신라인들의 조상들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하며 더불어 '캄차카반도의 대한국인'과 함께 신라의 고래잡이들의 항해에 이어져 있다는 코리안 신대륙발견론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6. "범 - 범 - 범", 아즈텍 - 잉카인들의 토템과 박보국의 과보족 토템
신라인들의 3대 토템숭배는 호랑이, 큰뱀, 계룡(봉황)으로 표현될 수 있다. 여기에서 호랑이는 산중의 호랑이와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먹는 범고래(魚+虎)를 포함하여 함께 '범'이라고 불렀을 수가 있다.
우리 말 '범'에 대한 인식은 단지 한 종류의 동물을 표현한 말이 아닌 보다 광범위한 토템숭배 용어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봉 - 뱀 - 범'이 모두 '범' 숭배토템의 용어인 '범'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세 토템을 나는 '범 토템숭배'라고 칭한다.
'뱀'이라는 말이 '범'과 유사한 음운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말에서 'ㅐ' 음운은 규모가 작은 경우에 그리고 방언에서 일어나는 모음의 변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학교'를 '핵교'라고 표현하거나 '남비'와 '냄비'를 함께 표현한 것은 그런 예이다.
'범'이 작게 표현될 때는 '뱀'으로 발음될 수 있는 것이다. '남비 => 냄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박혁거세 신화의 '큰 뱀'은 '범'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범'의 음운이 발생한 상한선은 알 수 없지만, 범과 뱀은 순 우리말로서 서로 연관되어 있다.
범 => 뱀
우리민족의 '큰 뱀' 토템은 '이시미' 또는 '이무기'에 남아 있다. 흔히 이시미나 이무기를 용의 전신 정도로 보는 것은 지나친 중화사대주의 용토템에 습합되었기 때문이다. 박혁거세 신화에서 '용'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계룡이며 큰 뱀은 따로 나와 있다. 일본의 팔지대사에도 용이 아닌 뱀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신라의 큰뱀 토템의 영향으로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큰 뱀은 '범'이며 작은 것은 '뱀(배암)'으로 표현된 것이다.
봉황의 '봉'이 '범'과 유사한 발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ㅁ' 받침과 'ㅇ' 받침을 같이 'ん'으로 표현하고 있다는데서 우리의 고어에서 충분히 '봉 - 범'으로 이해되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ㅓ' 발음이 어렵다. 신라인들 또한 오늘날 영남사람들처럼 'ㅓ'를 자주 'ㅗ'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엄마'를 '옴마'로 발음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봉 => 봄 => 범
한자말에서 유래한 호랑이를 우리말로 '범'이라고 한 것은 바다의 범고래(orca)에 닿아 있다는 것은 필자의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글들에서 논했다. 한자까지 범고래 호(鯱)자까지 있다. '물고기들의 범'라는 것이다. '범'은 그래서 신화시대에는 '최고 무서운 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범칭인 것을 볼 수 있다.
범 => 범고래 - 범(호랑이) - 표범
신라 시조 신화에서 계룡이 나오듯이 <산해경>에서 말하는 박보국을 세운 과보족도 봉황토템 계열이다. 말하자면 범(봉) 토템으로 3대 토템인 범(봉 - 범 - 뱀) 토템을 말한다. 아메리카 인디안 토템에서 '큰 뱀'은 중국의 용과는 분명 다른 코리안 큰 뱀 토템이었다. 봉황계열 토템족들은 용을 잡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큰뱀과 봉황이 조합된 것이 신라 시조신화에 나오는 계룡(봉+뱀=鷄龍)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봉 + 뱀 + 범의 삼신숭배의 통합적 의미가 '범'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을 범고래에 대한 한자 표기에도 범 호(虎)자가 들어가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과보족 또한 치우천왕과 이어지는 용을 잡는 봉 이미지를 가진다. <산해경>에서 "과보국은 섭이(섭耳) 동쪽에 있고 크고 대인(大人)이다. 오른손에 푸른 뱀 왼손엔 누런 뱀을 잡고 있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용토템이 아닌 봉황토템족인 동이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뱀을 잡고 있는 과보족 대인은 봉황토템이라는 면에서 '계룡토템'을 숭배한 신라인들 또는 신라인들의 조상인 고래잡이들과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사시대 고래잡이 코리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필자가 최초로 주장한 <코리안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이슈는 이제 한국에서나 미국 동포사회에서 전국단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신화와 문화 풍습이 코리안들과 일치되는 수많은 사실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산해경>에서 과보국 사람들이 거인들이고 "손에 뱀을 잡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토템숭배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아즈텍인들의 신화에는 '계룡'이라고 할 '아길라(aquila)'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장면이 들어 있다. 그것은 오늘날 멕시코 국기의 국장이 되어 있다.
아즈텍과 마야인들을 중심한 중남미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남미의 잉카인들의 세계에서도 범(봉-범-뱀) 토템은 이어져 있다.
잉카인들이 독수리인 콘도르와 그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신화에서 알영부인이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나고 그 부리를 물에 씻어 떨어졌다고까지 하여 계룡토템을 숭배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단순히 '독수리'라고 표현하는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그 독수리는 깃털뱀 즉 '털 달린 뱀'이라는 '케잘코틀(Quetzalcoatl)'이었다는 것은 필자의 앞선 글에서 이미 '계룡 = 케잘코틀'이라는 설명으로 다루었다.
<산해경>의 과보국들이 '손에 뱀을 잡고 있다'는 것은 박혁거세 신화에 나오는 큰 뱀이 방해하였다는 것과 서로 맥락이 닿아 있다. 일본 신화에 나오는 큰 뱀인 팔지대사는 신라신화에 나오는 큰뱀에 연결되어 있다.
신라 신화에는 봉황과 뱀이 합성된 계룡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박혁거세를 장례치를 때 나타난 '큰 뱀'과 신라의 토템 '닭(봉)'은 그래서 아즈텍인들에게 뱀과 독수리가 일체된'털 달린 뱀'으로 표현된다.
신라시대에 또 다른 산신토템으로 호랑이가 강력하게 존재했다. 그 호랑이는 아즈텍인들에게 '표범'으로 표현되어 독수리 - 뱀 - 표범의 삼대 토템을 숭배했던 것에서 신라인들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서 논한대로 봉황의 우리말은 '봉 - 봄 - 범'으로 '범'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신라인들의 봉황인 계룡과 큰 뱀 그리고 호랑이는 모두 '범'의 표현의 세 다른 동물 이름이다. 하늘의 '범(봉), 땅 위의 범(호랑이)은 물론 땅 속(또는 강물)에도 범(뱀)이 있다. 바다의 고래를 잡아 먹는 고래를 범고래라고 한 것에서도 바다에도 '범'이 있다.
나는 한자말 신(神)이라는 표현의 우리말은 '범'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호랑이=산신령 의미는 '신련=범'인 것을 볼 수 있다.
호랑이는 한자 표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범은 보다 원천적으로 고래에 이어진 말이다. 따라서 신라인들의 3대 토템은 과보족의 토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즈텍 인디안들과 잉카인들의 3대토템 그대로이다.
과보족 토템: 봉황(봉), 범, 큰 뱀
신라 토템: '봉(계룡) - 범(고래 및 호랑이) - 큰 뱀
아즈텍 및 잉카 토템: 독수리(봉) - 표범(범) - 큰 뱀
이들 3대 토템은 '범'이라는 표현의 '삼신' 표현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범'이란 나중에 '신(神)'이라는 말의 뜻을 지니고 있었던 명사였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가 인도의 산스크리트를 '범(梵)'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본래의 '범'에 대한 토템 의미를 차용한 것이었을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 천황가의 제사에 나오는 닭인 천계나 그 신화에 등장하는 거대한 뱀인 팔지대사는 모두 이러한 신라인들의 '범' 토템숭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코리안 고래잡이들이 건너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또한 이러한 '범' 토템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있다. 아즈텍 인디안들과 잉카인들에게서 특히 명확하게 보인다.
멕시코의 국장(national emblem)은 독수리가 뱀을 그 부리로 물고 있는 장면이다. 그 독수리는 넙적 선인장(nopal cactus)을 밟고 있다. 이 엠블렘 또한 아즈텍 시대의 수도였던 Tenochtitlan의 전설로부터 유래한다. 아즈텍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아즈텍인들이 현재의 멕시코 서북쪽으로부터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는데 그들의 신이 말하기를 "독수리가 뱀을 그 부리로 물고 바위 위에서 자라는 넙적 선인장 위에 서 있는 호수를 찾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곳이 그들의 새로운 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즈텍인들은 오랜 여정 끝에 Mexico Valley에 도착했고 그 골짜기 복판에서 커다란 소금 호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호수 안에는 작은 섬이 있었으며 정말 거기에는 바위에서 자라는 넙적 선인장이 있었다. 거기에 독수리가 서 있었고 그 독수리는 그 부리로 살아 있는 뱀을 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이 그들이 찾고 있던 신성한 바로 그 장소라고 여기고 1325년 그 섬에 도성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섬을 이름하여 Tenochtitlan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바위 위에 선인장이 자라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멕시코 국장은 바위 위에 자라는 선인장을 밟고 선 독수리가 뱀을 물고 있는 장면이 된 것이며, 오늘날 멕시코 국기에도 들어가 있다.
*멕시코 국장. 선인장을 밟고 뱀을 물고 있다.
점이 있는 선인장은 재규어(퓨마)를 대신한 이미지일까.
The "águila (ah´-gee-la)": an eagle fighting a snake while perched on a cactus.
*잉카인들의 3대 심볼. 콘도르(계룡), 퓨마(호랑이), 뱀(큰 뱀)을 유적지 정원에 새기고 있다.
남미 페루 쿠스코(Cusco). 3 Inca symbols Condor, Puma & Snake.
필자의 관련글: <문화비평> 박혁거세 이슬(居瑟)과 굿의 어원 '구슬'(4)
1519년 멕시코를 침략한 스페니아드는 아즈텍인들의 발음인 metxtlixcictlico 전체를 발음하기 어려워 그냥 짧게 Mexico라고 부른데서 오늘날 멕시코라는 칭호가 생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쓰이는 Maxico
라는 말은 아즈텍 시대의 멕시카스(Mexicas)에서부터 유래했다고도 한다. 아즈택인들은 그들이 아즈틀란(Aztlan)이라는 현재의 멕시코 북서쪽 태평양 가까운 지역에서 왔다고 믿었다. 그것은 알류산열도의 아막낙 섬에 3천년 된 온돌과 고래뼈 탈을 남긴 코리안들이 내려온 루트의 방향에 이어져 있다. 아즈텍인들이 맥시코 밸리 지역에 도달한 것은 기원후 13 - 4세기 즈음이었다.
그들은 1325년 Lake Texcoco라는 호수의 작은 섬에 정착했다. 그곳을 "메츠틀리씩틀리코(metztlixcictlico)"라고 칭했는데 이 말은 아즈텍인들의 언어였던 나화틀(Nahuatl) 언어로 3 가지 말이 합성되어 있었던 말이다.
metztli는 달이며, xictlii는 배꼽같은 중앙이라는 뜻이며 co는 장소를 뜻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멕시코'라는 본래의 말인 '메츠틸리씩틀리코'라는 뜻은 '달의 중심 장소'라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명당(심볼)'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민족의 풍수신선도와 일치하는 곳을 의미했던 것이다.
아즈텍인들이 호수 안의 섬을 그렇게 불렀던 것은 풍수신선도가에 일치하는 의미를 가지며 여성의 심볼의 자리에 그들은 도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Belley of Mexico란 여성의 다리 사이의 골짜기를 말하며 음양도가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어머니의 골짜기'를 말하는 것이다. 아즈텍인들의 호수 Lake Texcoco는 '달 호수'라는 의미였으며, 그 중심은 Tenochtitlan 이었는데 지금의 멕시코 시티 지역이다.
아즈텍 인근 바하 켈리포니아는 알라스카에서 귀신고래가 내려와 반환하는 지점이다. 귀신고래는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에도 새겨져 있는 동해에서 반환하는 코리안 귀신고래 이동로에 이어져 있다.
신라의 문무대왕비문에서 문무대왕의 장례를 위하여 고래나루에 분골했다는 것은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에 신라 화랑들의 기록이 있는 것은 단순한 나들이 기록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신라의 고래토템과 연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 박혁거세 신화의 박은 바다의 '구명조끼'로서 고래잡이들의 필수품이었을 수가 있다.
*신라시조 '성한왕(星漢王)'에 대한 기록과 문무대왕이 고래나루터에 묻혔다는
분골경진(粉骨鯨津)이 기록되어 있는 문무대왕비문
앞서 언급한대로 <산해경>에서 말하는 거인 과보국은 결국 신라를 의미했다. 그 신라인들은 계룡과 호랑이 토템숭배를 했듯이 아즈텍인들과 잉카인들도 그렇게 '독수리 - 뱀 - 표범'의 3대 토템을 숭배한 것이다.
한국인들의 전통 민속화에서 호랑이를 표범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앞선 글에서 다루었다. <삼국유사>에서 신라인들의 호랑이 신화가 들어 나오며, 신라문화를 이은 고려시조 신화에도 왕건의 선조 가운데 호랑이 화신에 관한 신화가 나온다.
전통 민속화의 호랑이 그림은 단군신화 뿐 아니라 신라-고려의 호랑이(범) 토템을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왕건신화에는 단군신화가 들어 있지 않으며 단군신화는 고려 중기의 통일 이디올로기로 만들어진 후대의 것이었다.
표범 또한 아즈텍인들에게 '넙적 선인장'으로 표현한 것은 점박이 표범을 점박이 선인장으로 대신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넙적 선인장의 모습은 또 다른 면에서 고래잡이들의 고래 지느러미 이미지의 변이로 볼 수도 있다.
중국인들이 그들의 아메리카 신대륙발견론을 내세울 때 명나라 때 쩡허함대 말고도 한나라 시대의 '부상국'을 들먹이며 '부상(夫桑)'을 용설난 또는 애니깽 식물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신라인들 또는 신라인들의 조상들인 선사시대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를 그렸던 고래잡이들이 도달한 캄차카반도 지역의 '대한국'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묘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 아닐까.
신라의 혜초가 천축국을 갔던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이고 혜초는 돌아오지 못한 채 오늘날 중국 지역인 툰황 동굴에 그의 기록이 남은 것에서 옛사람들은 혜초가 '중국승려'라고 생각했을 것처럼, 부상국 이야기를 쓴 '스님'이 한나라 스님이 아니라 신라인 고래잡이였을 수가 있다.
코리안들이 먼저 오래 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오가면서 고래잡이를 했고 그 흔적을 미국 고고학계에서 찾아내 '코리안들의 것'임을 밝힌 것에서 이러한 사실은 보다 명확하게 코리안 신대륙발견론이 더욱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라 시조신화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호공(瓠公)들은 바가지를 가지고 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는 것 자체가 고래잡이와 연관된 인물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제주도 해녀들의 물확처럼 고래잡이들이 바다에서 일종의 '구명조끼'로 허리춤에 차고 다녔던 것이 바가지가 아니었까.
신라가 멸망하자 김씨 왕조의 후예들은 금(金)나라를 만들고 신라왕실의 박씨들은 <박보국>을 세웠을 수 있다. <산해경>에서 발하는 과보족들이 세웠다는 그 '박보국'은 결국 신라에 이어지며 오늘날 랴오닝성 번시현의 박씨들의 조상이었을 수가 있다.
신라가 멸망하자 신라 김씨 왕조의 후예가 세운 금나라 지역에서 신라 박씨들도 일부 옮겨갔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금나라가 멸망하고 원나라를 거치면서 명나라와 청나라 안에서는 '나라'의 의미를 가지는 '박보국'을 내세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단지 가문을 뜻하는 박보가(朴堡家)라고만 표현하거나 박가보자(朴家堡子)라고 표현했을 수가 있는 것이다. (09/21/10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위의 글에서 필자가 인용한 필자의 앞선 글들:
<역사단산> 신라의 '계룡'과 '蛇陵'의 메타포, 몽골의 <박타는 처녀> (三)
<역사산책> 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
<역사산책> 병자호란 후 <흥부전> <박씨전> 유행의 新羅的 배경 (四)
<신화이야기143> <흥부전>의 본명칭은 '과보전' 또는 '박보전' (四)
<신화 이야기67> 바가지를 따라 온 신화 (1) 아기왕을 발견한 호공(瓠公)의 정체>
<역사산책> '용사일기(龍蛇日記)'로 본 성주(星州)의 역사와 왜인들의 시조신(始祖神) : 박정희 대통령의 부친 박성빈(朴成彬) 가문이 살아온 성주(星州)의 역사
<역사산책>연암 박지원의 '愛新覺羅'와 김부식의 '東神聖母' (一)
<역사산책> 淸 황실의 성(姓), '愛新覺羅'의 新羅 관련 발설은 금기 (二)
<역사산책>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운동 뒤에는 경순왕이 있었다 (1)
<역사산책> 경순왕은 신라부흥운동을 위하여 마의태자를 도주시켰을 것 (2)
<역사산책> 신라 화랑들이 제사하던 금강산과 마의태자 (3)
<역사산책> 칠지도(七枝刀)와 신라금관은 六祖 이은 7대 시조왕 숭배 상징
<역사산책> 박혁거세의 오릉(五陵)은 알영부인의 다섯 남편의 무덤
<문화비평> 박혁거세 이슬(居瑟)과 굿의 어원 '구슬'(4)
<신화이야기 161> 단군신화는 박혁거세신화 제어 위한 고려시대 국가공정
그 외에도 박혁거세에 관한 필자의 더 많은 글은 아래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 아래는 연합뉴스의 관련 기사 전문
<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