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찬게 같은 차에 타게 되었네요.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말 속에 알맹이만 꽉 차 있데요.
신라답사에 좋은 도우미, 기대 됩니다.
* 홈페이지에 갔더니 다른 사진들만 잔득 있고, 우리 사진은 못찾겠데요.
쉽게 볼수 있도록 부탁드려요.
--------------------- [원본 메세지] ---------------------
처음 답사지는 경주 송화산 중턱의 전 김유신 장군묘---남항사지 석불입상(노서동 석불입상)----삼랑사지 당간지주---금장대 암각화(석장동 암각화)---나원리 오층석탑---전진덕여왕릉---손순유허비----용담정
이렇게 답사는 시작 되었습니다. 처음 참가한 여러번 다녀온 눈에 익숙한 유적지들..새로운 분들과의 답사여서 인지 모든 유적들이 새로운 안목으로 또 다르게 보였다.
춘추공님의 긴 여운을 남기는 설명과 차량을 배려해 주신 코알라님 그외 참여 하신 모든 분들이 기얷에 남습니다. 하루가 지난 지금 어제 일들은 또 다른 한 페이지의 사진첩속에 남는 기억으로 두려고 합니다.
생각보단 정말이지 무더운 날씨 속에 답사 다녀 오신분들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오며.
답사 유적지중 메모한 유적지 안내문안을 아래에 덧 붙입니다.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慶州 路西洞 石佛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이 불상은 다리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있으며 얼굴은 모양조차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사람에 의해 망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광배(光背)는 머리둘레의 두광(頭光)과 몸 둘레의 신광(身光)이 각각 2중 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신광은 완전히 파괴되고 두광도 많이 망가져 자세히 알 수 없다.
몸은 비교적 세련되고 허리 위가 길게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에서 가슴 일부까지 마모되어 있어서 옷은 어떻게 걸쳤는지 알 수 없고 가슴부터 아래로는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면서 층단을 이루어 촘촘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삼랑사터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삼랑사(三郞寺) 남쪽에 남항사(南巷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남항사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항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때 삼랑사 경흥(景興) 스님의 병을 고친 11면관음보살 전설이 있는 곳이다.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이 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세운 오층석탑으로, 옛 절의 금당 자리 뒤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아랫 기단에는 면마다 기둥새김이 다섯이 있고, 윗기단에는 기둥새김이 넷씩 있다. 1층 몸체는 돌 넷으로 짜 맞추었으며 1·2층 지붕돌은 처마 받침돌과 지붕 윗돌이 별개이고, 2층 몸체돌과 3층 위로는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이다.
높이는 9m인데, 이 구조로 보아 8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서는 드물게 아직도 그 조성 당시의 원형을 잃지 않고 있다. 각 부의 아름다운 비례는 석재의 순백함과 아울러 청신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끼가 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여 일명 '나원백탑(羅原白塔)'이라고도 불린다.
오류리(五柳里)의 등(藤)나무
천연기념물 제89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이 나무는 4그루가 2그루씩 가까이에 서서, 얽히고 설켜서 팽나무를 안고 있으며 높이는 17m정도이다. 이곳은 신라시대 때 왕이 신하와 더불어 사냥을 즐기던 곳으로서 용림(龍林)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나무에 전하는 전설로는, 신라 어느 땐가 이 마을에 살던 한 농가에는 예쁜 자매가 있었고 바로 옆집에는 씩씩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총각이 싸움터로 떠날 때 두 자매는 한 남자를 같이 사모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남달리 다정하고 착한 자매였으므로 서로 양보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으나 어느 날 뜻밖에도 총각의 전사소식을 들은 자매는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지쳐서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후 연못가에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죽었다던 옆집의 총각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와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는 연못에 몸을 던져 자매들의 뒤를 따라 팽나무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