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첫발을 디디고, 주춧돌을 놓다 1885~1890년 (2) 제중원에서의 선교 협력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입경을 서둘렀다. 하지만 갑신정변 이후 어수선한 정세에 대처하느라 여력이 없던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 포크(George C. Foulk)는 자국민 선교사가 세 명이나 우르르 입경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극구 반대를 표했다. 갑신정변 후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노골화되었고, 일본인 뒤에 서양인이 있다는 생각에 서양인 가옥이 공격받아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는 등 말 그대로 서울은 불안 정국이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서울에 오면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임신 중인 부인을 고려하여 결국 제물포에서 닷새 머문 후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독신인 데다가 성격 자체가 저돌적이었던 언더우드에게 제물포까지 온 마당에 입경을 포기하는 것은 선택지 자체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언더우드는 입경을 고집했고, 다행히 알렌 역시 당장 문을 열게 될 병원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공사를 설득하여 4월 7일 언더우드를 데리고 함께 서울로 왔다. 언더우드는 서울 정동에 도착한 직후 뉴욕의 선교본부에 편지를 썼는데, 당시 서울의 분위기가 조금은 느껴지는 듯하다. 엘린우드 박사님께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 이곳은 조용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이며 일본, 청나라와 맺은 조약의 결과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아직 미지수입니다. 조선인들이 느끼는 불확실성과 근심은 대단합니다. 만일 전쟁으로 치닫는 다면 결코 유쾌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언더우드가 서울에 온 지 사흘 만인 1885년 4월 10일,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개원했다. 고종은 4월 12일, 병원 명칭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뜻을 담은 ‘광혜원’(廣惠院)으로 지어 하사 했고, 2주 뒤인 4월 26일 다시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꿔 하사했다. ▲설립 초기의 제중원 ⓒ동은의학박물관. 제중원은 왕립병원으로서, 병원을 돌볼 관리(주사) 2명을 임명하여 파견했고, 외아문 산하에 두었다. 제중원의 재정은 이중으로 관리 되었는데, 건물 수리비·일꾼 급료·장례비·음식비·연료비 등의 일반 운영 경비는 주사의 소관이었고, 의약품·의약 기구·학교 비품 구 입 등 의료와 의학교육에 관계된 경비는 의료 선교사 소관이었다. 언더우드는 짐을 풀자마자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일을 시작했다. 개원 후 매일 약 40~70명 정도의 환자들이 병원에 밀려들었는데, 의학 수련을 받은 바 있는 언더우드는 환자를 보는 알렌을 도와 진료실 일도 거들었다. 한 달 뒤인 5월에는 요코하마에서 대기 중이던 미북감리회의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이 내한하여 잠시 제중원의 일을 도왔고, 다시 한 달 뒤인 6월에 미북장로회에서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던 의료 선교사 헤론이 도착하면서 제중원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86년 3월 29일에는 제중원 안에 의학교가 설치되었다. 역시 조선 정부와 선교사들의 합작품으로, 조선 정부는 일부 재정 지원과 학생 모집을 담당했고, 교육은 전적으로 선교사들 몫이었다. 매년 12명을 선발하여 5년 동안 의학 훈련을 받게 한 뒤 시험을 거쳐 졸업하면 정부가 그들을 주사로 임명할 계획이었다. 의학교 개원 후 학생들은 우선 영어를 배우고, 기초 과학인 수학, 물리, 화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해부학, 생리학, 의학 등을 영어로 차례로 배워나갔는데, 언더우드는 이때 물리와 화학 과목을 전담하여 가르쳤다. 알렌, 언더우드, 헤론은 이렇게 제중원의 ‘교사’ 혹은 ‘의사’라는 안정적인 신분을 획득하여 아직 선교의 자유가 담보되지 않은 상태 에서 운신의 폭을 조금씩 넓혀나가며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조선어 공부, 내친김에 사전 편찬까지 이렇게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교사로 일을 도우며 안정적인 신분을 획득한 언더우드는 한편 서둘러 어학 공부에 매진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본격적인 선교 활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선교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알렌의 집 바로 옆에 땅과 건물을 매입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꾸민 언더우드는 서재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어 공부에 몰입했다. 언더우드는 조선인 어학 선생을 고용했다. 어학 선생은 천주교 신 자 송순용(宋淳容, 字는 德祚)이라 불린 사람으로 7~8명의 프랑스 신 부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바 있으며, 게다가 신부들이 간행한 《한불자 전》의 편집에도 관여한 바 있는 경험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었다. 물론 조선어 공부가 쉽지는 않았다. 말과 글을 함께 배우는데, 말은 그렇다고 치고 글이 문제였다. 당시 한글의 경우 맞춤법 체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아 언더우드의 회고에 따르면, 열 명에게 물어보면 열 명이 다 다른 맞춤법으로 글자를 써줄 정도였다고 하니, 새로운 언어로서 한글을 배우는 선교사들에게는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말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쓰고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선교사들에게는 글자를 어떻게 체계화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어가 얼마나 배우기 어려운 언어였는지는 초기 선교사들이 남긴 글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길을 알 수 없는 언어의 밀림에 갑자기 빠진” 듯했고, “땅의 것과 하늘의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에 따라서 말 사다리의 어느 층에 놓아야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 였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대화 상대의 신분과 나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존댓말이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아, 사전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갈망했지만, 사전은커녕 학습서도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언더우드 정동 사택의 구조도. 언더우드도 같은 어려움 속에 조선어 공부에 매진했다. 조선인과의 접촉을 늘려 조금이라도 말할 기회를 더 확보하고자 영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물리치지 않고 영어를 가르치면서, 대신 틈틈이 조선말로도 대화를 이어갔다. 언어 교환인 셈이다. 당시 어학 선생으로서는 ‘최상급 교사’라 칭송받던 송순용의 노하우에 언더우드의 노력이 가해져, 언더우드의 조선어 실력은 일취월 장했고,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조선어로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 가운데 가장 빠르게 조선어를 습득하는 언더우드를 보면서 조선어 공부할 때 참고할 수 있을 만한 영어로 된 조선어 문법서나 입문서를 출판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내한한 지 9개월도 채 안되는 시점인 1886년 1월이었다. 뉴브론즈 윅 신학교 교수 이스턴 박사가 추천서에서 언더우드를 “언어의 달인” 이라고 한 것이 결코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어 입문서를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쌓이면서, 언더우드는 뒤에 들어올 영미권 선교사들이 체계적으로 어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참고서를 역시 자신이 출판하는 게 좋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생각하면 바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돌적인 언더우드는 내친김에 문법서뿐 아니라 영한사전도 만들자며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문법서와 사전 편찬은 사실 성서 번역을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기도 했다. ▲존 로스의 《조선어 독본》 표지(좌)와 첫 페이지(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문법서와 사전 제작 과정에서 언더우드가 주로 참고한 책은 프랑스 신부들이 저술한 《한불자전(Dictionnaire Coreen-Francais)》과 《한어문전(Grammaire Coreenne)》, 일본 선교사 임브리(Dr. Imbrie)가 편찬한 《영일어원(英日語源, English-Japanese Etymology)》이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사실 언더우드가 문법서 집필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영어로 된 조선어 학습서가 한 권 출판되어 나와 있었다. 바로 중국 만주지역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중 접경지에서 조선인들을 만나 말을 배우고 최초의 한글 신약성서를 번역하는 존 로스(John Ross)가 1877년 펴낸 영문 한글 회화 교재 《조선어 독본(Corean Primer)》이었다. 언더우드가 참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참고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로스의 책은 문법서가 아니며, 위의 사진에서와 같이 한글 문장을 발음 및 영문 해석과 함께 나열한 90쪽짜리 문장모음집이었고, 또한 평안도 방언으로 되어 있다는 한계도 있었다. ▲평서체와 경어체의 어미변화를 다루는 페이지(좌)와 언더우드의 《한영문법》 표지(우)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한편 언더우드가 문법서를 만드는 도중인 1887년에는, 1884년 부터 인천에서 근무한 영국 영사관의 부영사 스콧(James Scott)이 《언문말책》이라는 영문 조선어 문법 해설서를 출판했다. 많은 노력이 들어간 책이었는데, 다만 초판의 경우에는 문법은 간략히 소개된채 로스의 책처럼 일상생활에 유용한 문장을 모은 회화책 성격이 강했다. 언더우드의 조선어 문법서는 다른 선교 업무로 인해 생각보다 지체되었으나, 1889년 완성되어 요코하마의 인쇄소에서 《한영문법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이라는 제목으로 1890년 봄에 출판되어 나왔다. 425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문법서로, 1부는 ‘조선어 문법’, 2 부는 ‘영어 문법 체계로 본 조선어’라는 부제가 붙었다. 문법은 한글의 발음을 연구한 음운론, 낱말을 분석한 형태론, 문장구조를 살피는 통사론까지 모두 아울렀다. 언더우드는 모국어인 영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구사 할 수 있었으며, 고전 언어로서 서양의 모든 대학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있던 그리스어(헬라어)와 라틴어는 물론이거니와 신학교에서 히브리어, 칼데아어, 시리아어 역시 배운적 있다. 각각의 언어를 배울 때 사용되던 어학 교재에 근대 언어학이 반영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와 같은 개신교 목사, 혹은 가톨릭 신부들의 언어 감각은 공사관 직원이나 의사, 혹은 기타 일반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에 의해 근대적 국어학 연구가 시작되는 갑오개혁 이전에 국어를 연구한 중국·일본인 역관 혹은 서양인들 가운데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의 연구가 가장 뛰어났던 것은 학문의 누적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던것 같다. 언더우드의 문법서가 현대의 국어학자들에게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기존의 서양인이 쓴 문법서가 모두 서양의 품사와 문법 체계를 빌려와 기술됐던 것과 달리, 언더우드의 문법서는 조선어에 적합한 범주를 고려하여 선별한 품사 체계를 제시한 최초의 문법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교사들 가운데에서도 언더우드가 언어에 남다른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언더우드의 《한영 뎐》표지.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언더우드는 연이어 1890년 말에 역시 요코하마에서 《한영 뎐》을 출판했다. 한국 최초의 영한·한영 사전이다. 포켓용 사전으로 기획되어 560쪽에 걸쳐 총 5293개의 표제어를 담았다. 이때 사전 편찬을 도운 캐나다 출신 미북장로회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은 이후 언더우드의 이 포켓용 사전을 토대로 1897년 3만 5000자를 담은 《한영자전》으로, 1911년에는 5만 자, 1931년 8만 2000자를 담은 《한영대자전》으로 점차 증보·발전시켜 나가며 한영사전의 체계를 잡았고, 그것이 현재 우리가 보는 사전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 시작은 언더우드의 《한영 뎐》이었다. 언더우드의 《한영 뎐》에 수록된 어휘가 성경 번역에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예로서, 언더우드의 사전을 보면 빵을 의미하는 ‘Bread’ 가 ‘떡’으로 번역되어 있다. 당시 조선에는 ‘빵’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것이 ‘떡’이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빵’ 이란 밀가루로 만든 것이요, ‘떡’은 자고로 쌀이나 찹쌀로 만드는 것이 한국인의 상식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에 밀가루는 누룩이나 국수를 만들뿐, 과자나 떡류는 만든 바가 없었다. 그런데 성경의 마가복음 6장 41절에 보면,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 이야기가 나오면서,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라고 하면서 ‘떡’이 등장한다. 성경 원문에 나오는 건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고, 따라서 ‘빵’에 가깝다. 중국에는 밀가루로 만든 과자 종류인 ‘병’(餠)이 존재해 중국어 성경에는 ‘병’으로 표기되었고, 그 흔적이 ‘오병이어’라는 단어를 통해 한국에도 남아 있지만, 한글 성경에는 지금까지도 ‘떡’으로 되어 있다. 쌀떡이든 찹쌀떡이든 끈적끈적하여 잘 떼지지도 않는 것을, 예수는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눠주려 애쓰는 모습이 연상된다. 일이 이렇게 된데에는 사전에서 ‘bread’를 ‘떡’으 로 번역한 언더우드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고, 《한영 뎐》의 어휘가 21세기의 한국 기독교인 입에 아직도 차지게 달라붙어 있는 사례의 하나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언더우드의 《한영 전》은 이후 아들 원한경(H. H. Underwood)과 쿤스(E. W. Koons) 및 오승근에 의해 총 723쪽 분량의 개정판이 만들어져 1925년 《英鮮字典》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 문법서와 사전을 만들면서 자신감이 붙은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 출판에 앞서 한글로 각종 교리서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어학교사 송순용 등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개신교 교리서들을 들여와 한글로 번역했다. 언더우드는 특히 입국 초기 10년간 교리서 번역에 애썼는데, 현재까지 언더우드가 직접 번역하여 출판된 것이 밝혀진 교리서에는 아래와 같은 18권이 있다. 이 가운데 1~4번은 언더우드가 번역하여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스스로 보고서에 적었지만 그 실물이 이제까지 단 한번도 확인 된 바 없는 책이며, 5번부터 18번까지는 모두 실물이 확인된 바 있는 책들이다. 중국의 베스트셀러를 선택하여 번역한 이유는 중국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유교 문화권이며, 유사한 종교적 배경을 가졌고, 또 한자어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중국 교리서에 사용된 한자 어휘를 100% 그대로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대신 순한글로 새로운 단어를 창출해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이는데, 예를 들면 ‘무소부재’를 ‘아니 계신 곳 없이’로, ‘십계명’을 ‘열 가지 경계’ 로, ‘삼위일체’를 ‘다만 하나이시로되 위로 셋이시니’로, ‘동정녀’를 ‘처녀’로 ‘만두’를 ‘떡’으로 번역한 것 등이다. ▲언더우드가 1890년대에 번역·출판한 교리서 표지. 위의 책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문답》(2판부터 《예수교문답》으로 제목 변경)은 교리문답서로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면 꼭 읽는 책 가운데 하나였으며, 《셩교촬리》와 《덕혜입문》은 1930~1940 년대까지 베스트셀러를 유지하면서 특히 수많은 지식인의 개종을 이끈 책이었다. 10년간 18권이니, 매년 적어도 2권씩은 번역한 셈인데, 언더우드가 교리서의 번역·출판에 그토록 애쓴 이유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고 선교사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설명할 책이 필요했으며, 또한 개종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책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성경 번역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으로, 신약성서가 완역된 것이 1900년이고, 구약까지 모두 번역 완료되는 것은 1911년이었다. 따라서 성경 번역이 나오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를 배울 수 있는 교리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번역하여 인쇄한 교리서들은 이후 언더우드가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갈 때 잔뜩 짊어지고 나가 팔거나, 조선인 매서인(책을 파 는 사람들)들에게 들려 전국을 돌아다니며 팔게 했는데, 몇 년 후 같은 동네를 가보면 그 교리서를 동리에서 돌려보고 수십 명씩 개종한 사례가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한글 교리서는 선교사가 지방 여행을 제대로 가지도 못하던 선교 초기에 기독교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 되어 나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언더우드 #선교사 #선교 #한교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