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에서 계속>
늘 강조하지만, 함께 전선에 서는 군대는 신뢰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다. 어깨를 걸고 나아가는 전선에서 옆의 전우가 쉽게 물러서면 전선이 곧 무너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런 싸움의 흐름에서 한국군만이 ‘함께 어깨를 걸고 싸우기 어려운 존재’라는 평을 듣는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그러나 1950년 말의 2군단 와해, 횡성전투, 사창리 전투 등으로 인해 그런 한국군의 정평은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였다.
늘 강조하지만, 함께 전선에 서는 군대는 신뢰를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다. 어깨를 걸고 나아가는 전선에서 옆의 전우가 쉽게 물러서면 전선이 곧 무너지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런 싸움의 흐름에서 한국군만이 ‘함께 어깨를 걸고 싸우기 어려운 존재’라는 평을 듣는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그러나 1950년 말의 2군단 와해, 횡성전투, 사창리 전투 등으로 인해 그런 한국군의 정평은 날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였다.
- 한국 전선에 부임한 뒤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던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작전 지휘에 열중하고 있다.
아군의 전선을 동서로 끊으려고 했던 중공군의 기도(企圖)는 좌절했다. 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9병단의 공세 의도는 일단 그로써 주춤했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국군 1사단, 영연방 29여단의 저항에 상당한 피해를 당하였음에도 서부전선 공세를 주도하는 중공군 19병단의 공세는 집요했다.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해 전쟁 국면을 전환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낮에도 공격을 펼치는 강수(强手)를 선보이면서 공세를 벌이고 나왔다. 아군의 작전 개념은 방어선에서 우선 드러난다. 중공군 공격으로 밀릴 경우에 대비해 세 방어선을 설정했다. 포천~가평을 잇는 델타(Delta), 서울 외곽의 수색~북한산~덕소의 골든(Golden), 한강~횡성~양양의 네바다(Nevada) 선이었다.
그 세 방어선을 설정한 뒤 아군은 축차적으로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다. 단, 전제는 중공군에게 최대의 출혈(出血)을 강요한다는 점이었다. 그로써 다시 반격을 펼치면서 당초의 캔자스 선을 회복한다는 구상이기도 했다. 이 작전 개념에 따르면 중공군 공세가 강해질 경우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줄 수도 있었다. 네바다 선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설정한 방어선이었다.
밴 플리트의 서울 사수
그러나 이에 제동을 걸고 나온 사람이 새로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는 늘 한국인의 정서를 중시했던 사람이다. 작전상 수도 서울을 내주는 일은 서울을 나라의 얼굴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서에 어긋난다고 봤던 것이다. 나중에 드러나는 여러 면모도 그렇지만 그는 늘 한국인의 감정을 배려한 인물이다.
그 점에서 그는 미 8군을 이끌었다가 맥아더 장군의 해임으로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옮겨 간 리지웨이와 달랐다. 당초 수도 서울까지 내줄 수도 있다고 본 사람이 바로 리지웨이였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자신의 웨스트포인트 후배이기는 하지만 어엿한 현지 상관이었던 리지웨이의 구상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결국 최후의 철수선인 네바다 선을 상정하지 않았다. 대신 네바다 선보다 30~40㎞ 북방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잇는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했다. 그 이름은 노네임(Noname) 선이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중공군에게 다시 내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의 표명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한국인의 감정을 중시했던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도 매우 좋았다.
사창리 일대의 중공군 공세를 마지막으로 돌려세웠던 4월 25일,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으로 밀고 내려와 미 1군단으로 하여금 성동리와 포천을 잇는 델타선으로의 철수를 강요했다. 임시적인 방어선이었던 까닭에 이 델타선에서의 저항은 계속 펼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서울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중공군은 새카맣게 많은 병력을 동원해 수도 서울을 거듭 위협하고 있었다. 밴 플리트는 그러나 강력한 화력을 동원했다. 그는 중앙청에서 마포까지 야포 400여 문을 정렬시켰다. 이어 중공군이 접근하는 송추 지역을 향해 아낌없이 포탄을 퍼부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미 모두 델타와 골든 선 지역 안으로 철수했거나 일부 병력이 철수 중이었다. 특히 낮 동안 철수를 하게 함으로써 중공군의 추격을 자극했고, 이동 중인 중공군이 보일 경우 포병 화력이 그곳을 향해 세차게 불을 뿜었다. 미 공군의 폭격도 그 점을 활용했다.
중공군은 그로써 서울에 다가설 수 없었다. 강력한 화망(火網)을 뚫으려 했으나 병력 손실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공군의 5차 1단계 공세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강력한 화력을 구사하는 신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개성이 유난히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