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 덕천리176 청송심씨 송소고택(풍수적 시각에서 본다)
1. 풍수적 시각(視覺)
* 송소고택(松韶古宅)에 관하여 인터넷에 백여편의 글이 올라 있으나 관광기행 또는 한옥관람 글이고 풍수적 시각에서 본 글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생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 분포되어 있는가? 어떤 경로로 재산을 모았으며 어떻게 사용했는가? 땅이 그 위에 사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원래 덕천리 일대는 청송심씨들 집성촌인데 영조때(재위1724~1776) 심처대(沈處大)가 세거지를 떠나 지경리 호밭골로 이사가서 후손들이 7대를 살면서 2만석을 모운 다음 7대손 심호택(沈琥澤 1862~1930)이 1880년(고종17) 덕천마을로 금의환향하여 건축한 집이다. 호밭골 집터는 2만석을 축재할 명당인가?
2. 흥망성쇠(興亡盛衰)
* 송소고택은 심호택이 1880년 13년에 걸쳐 건축한 99칸 한옥이고 현재 보존상태가 좋다. 강릉 선교장, 보은 우당고택, 청송 송소고택을 3대 고택으로 친다. 송소고택 옆에 1914년 심호택의 2남 도산서원장 심상관을 위하여 송정고택(松庭古宅)을 지었다
* 청송심씨는 심홍부(心洪孚)를 시조로 하는데 행적이 전해오지 않고 증손(4세손) 심덕부는 이성계의 위하도 회군에 공적이 있어 청성부원군이 되었고 후손들이 왕후 3명, 부마 4명, 재상13명을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 심덕부의 동생심원부는 정몽주를 따라 두문동에 들어갔고 조선의 벼슬살이를 하지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심원부 가계는 11대손 심처대이래로 부자로 살았고 청송일원에 후손이 많다.
* 송소고택은 1990년대 중반 많은 빚을 지고 5억원에 경매가 되었는데 출가한 딸이 매수하여 종손에게 주었다고 동네 사람이 말하였고 지금은 민박집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동네는 관광명소가 되어 일년에 9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 송소고택은 완공한때(1893년)로부터 경매가 진행된때(1993년)까지 약 백년간
번화를 누리다가 망하였고 다시 관광업으로 부흥하였다고 하겠으나 예전처럼 부자소리를 듣기는 어렵게 되었다.(1930년경 전국 만석꾼은 40명이었다)
3. 어떻게 재산을 모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 농경사회에서 축재방법은 소작영농이었다. 경주 최부자는 농지개량으로, 우당 고택은 해산물수출로, 공주 김갑순은 토지투기와 개발로 축재하였다. 소작인에게 모질게 대하면 축재하기 쉬웠을 것이다. 송소고택은 어떤 방법으로 축재하였는지 알 수 없다. 특히 호밭골 심심산골에서 150년간 2만석을 모운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 풍수는 적덕선행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영덕 의병30명이 송소고택에 숨어들자 며칠간 환대했다는 글과 정유재란때 전사한 의병장 심청이 있었다는 글이 있었다. 자랑할 적덕선행을 찾을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4. 명당인가?
* 송소고택 지도---물은 만궁이고 앞산은 둥근 알봉 세 개가 유정하다.
그러나 생기는 두 고택 사이에 작은 면적에 모여 있다. 중등중급.
* 2만석을 일구어낸 지경리 호밭골(청송 파천면 지경리62)--수구는 잘 짜여있고 앞산도 잘 닥아오고 청백이 겹겹이다. 복호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이므로 햇볕이 짧고 답답하여 부자가 살기에는 환경이 열악하다. 지금도 10여채의 집이 있다.
* 현재 철거된 집터---
* 이 곳 양택의 발복만으로 2만석을 모았다고 보기 어렵다. 설화로 심처대가 늙은 스님을 구해주고 그 보은으로 부모묘를 소점받았다는 말도 있고 처의 묘가 명당이라는 말도 있다. 소재를 몰라서 답사하지 못했다.(2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