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赶者成業(간자성업)
赶:달아날 간, 者:놈 자, 成:이룰 성, 業:업 업.
어의: 쫓겨난 자가 큰 일을 이룬다는 말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뜻하지 않게 큰 성과를 이룰 때를 비유한다.
출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 B.C. 58~B.C. 19)은 이름이 고주몽(高朱蒙)이다. 그의 할아버지 해부루(解夫婁)는 아들이 없었는데, 어느 날 곤연(鯤淵. 연못)에서 노란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데려왔다. 그래서 이름을 황금개구리란 뜻으로 금와(金蛙)라고 짓고, 태자로 세웠다.
그 후 태자가 왕이 되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미모의 여인 유화(柳花)를 만나게 되었다. 유화는 본시 물을 맡아 다스리는 신(神) 하백(河伯)의 딸이었는데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유혹에 빠져 정을 통했기 때문에 우발수로 귀양 보내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눈치챈 금와왕은 유화를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얼마 후 닷 되들이만 한 큰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좋지 못한 징조라 생각하여 알을 갖다 버리도록 했다.
그런데 그 알을 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고, 길바닥에 버리면 소와 말이 피해 갔다. 그래서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아와 품어주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겨 알을 깨뜨리려 했으나 깨지지 않자 다시 유화에게 주었다.
유화가 그 알을 따뜻하게 싸서 아랫목에 잘 간작해 두니 얼마 후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비범하고 영특하여 일곱 살 때부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래서 부여의 말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지만 그 기상이나 행실에서 누구도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이에 장자 대소(帶素)가 시기하여 주몽을 제거해달라고 부왕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금와왕은 주몽을 보호해주기 위해 말을 기르는 천한 일을 시켰다.
주몽은 좋은 말에게는 사료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그러자 금와왕은 사냥을 나갈 때 자신은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는 야윈 말을 타게 하니 주몽이 훨씬 더 많은 짐승을 잡았다.
다른 왕자와 신하들이 음모를 꾸며 주몽을 없애려 하자 유화가 주몽에게 몸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주몽은 그 말을 듣고 평소에 사귀어 오던 오이(烏伊), 마리(麻離),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칭하고 자신의 성(姓)은 고(高)씨라 하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는 22세였으며, 신라 박혁거세21년, 갑신년이었다.
그는 출생이 특별하여 다른 형제들의 시기를 받고 궁궐에서 도피했지만 결국에는 나라를 세우는 대업을 이루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開場罷場(개장파장)
開:열 개, 場:마당 장, 罷:마칠 파.
어의: 장날에 장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끝난다는 말로,
어떤 일이 시작되자마자 끝났다는 뜻. 다른 뜻으로 서로
낫고 못함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출전: 한국오천년기문야사(韓國五千年奇文野史)
경기도 가평 하면에 살던 노부부가 모처럼 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배가 강 중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심하게 요동치면서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데도 남편은 요지부동 담담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런 남편을 보고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배가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러자 남편은 갑자기 차고 있던 시퍼런 칼을 뽑아 아내의 목에 겨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겁을 먹기는커녕 피식 웃으면서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조금만 움직여도 목에 칼이 꽂힐 판인데…….”
이에 아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물론 칼은 무섭지요. 하지만 칼이 당신 손에 들려 있는 한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남편이 칼을 치우며 말했다.
“폭풍우도 마찬가지요, 당신이 나를 믿듯 저 노련한 선장을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소.”
대답하기가 남편이나 아내나 피장파장이었다.
그런데 이 피장파장이란 말의 어원은 ‘개장파장, 즉 장을 열었다가 파장한다.’는 말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보따리 상인들이 시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 장바닥에 펴는 것이 피장이요, 해가 지면 거두어 싸는 것이 파장이다.
지금은 노상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흔치 않지만 예전의 우리나라 전통 장은 대부분 공터에 천막을 치거나 그냥 노상에 상품을 파는 것으로 이루어졌었다.
때문에 그 장이 열리고 거두어 싸는 것을 이르는 말이 순수 우리말로 피장파장이고(사전적 해석: 서로 낫고 못함이 없거나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그와 같은 행동으로 맞서는 일), 한자말로는 개장파장(開場罷場)이라고 쓴다.
이 외에도 꽃이 ‘피다’ 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이 피다의 피가 펴는 장이고 다 끝나고 짐을 싸는 일이 파한다는 뜻의 파장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巨正之義(거정지의)
巨:클 거, 正:바를 정, 之:어조사 지, 義:옳을 의.
어의: 거정의 의리라는 말로, 조선시대의 의적 임꺽정에게서 유래했다.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
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경우를 비유하여 쓴다.
출전: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명종(明宗) 때 의적 임꺽정(林巨正.?~1562)은 양주(楊洲)에서 백정(白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힘이 장사였다.
명종10년, 왜구가 쳐들어오자 임꺽정은 애국심이 발동하여 싸움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으나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벼슬도 얻지 못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황해도 일대를 누비며 관가나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대낮에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등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흉폭한 도적이었다.
그해 봄, 명종이 문정대비(文定大妃) 윤(尹)씨에게 보내는 생선 선물을 임꺽정의 무리들이 몽땅 털어가 버렸다. 명종은 이억근(李億根)을 포도관으로 임명하고 군사 3백을 주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억근은 임꺽정의 무리들을 얕잡아 보고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청석골 골짜기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임꺽정의 부하들은 여유롭게 행군하던 관군을 기습하여 이억근을 비롯한 모두를 전멸시켜 버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다시 장수 남치근(南致勤)과 이몽린(李夢麟)을 보냈다.
“애들아, 관군이 또 오신단다. 마중 나가자.”
임꺽정은 관군이 지나는 길목인 가막재에 숨어 기다렸다. 관군은 둘로 나누어 이동린은 가막재로 가고, 남치근은 임꺽정의 산채로 직접 쳐들어갔다.
임꺽정은 가막재에서 이몽린의 관군을 통쾌하게 섬멸하고 산채로 와 보니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잡혀 가고 집 또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간 임꺽정은 부하 서림(徐林)에게 아내와 자식을 구출해 오라고 하였다.
서림은 양반 차림을 하고 한양에 숨어 들어 옥문을 부수고 임꺽정의 아내와 자식을 구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몽린의 후임으로 온 포도대장 김순고(金淳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남대문 옆 한 객주집에 임꺽정의 참모 서림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 서림과 그 부하들이 그 집에 묵게 되면 그때 덮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그 주막에 서림의 일행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자 김순고는 관군을 출동시켜 전원 나포하고, 임꺽정의 형 가도치(加都致)도 붙잡았다.
서림과 가도치가 붙들리자 임꺽정은 더욱 거세게 관군을 공격했다. 김순고와 남치근은 임꺽정을 잡으려고 서림을 회유했다.
서림은 이제 살길은 관을 돕는 일뿐이라 생각하고 변심하여 관의 앞잡이가 되었다.
관군에게 투항한 서림이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임꺽정의 싸움은 번번이 참패했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항복을 했고, 마땅히 숨을 곳이 없던 임꺽정은 관군의 옷을 빼앗아 입고 그들 틈에 끼어 은신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신분이 탄로나 관군이 일제히 쏘아대는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그때가 명종 17년, 5년 동안 황해도 일대를 주름잡던 임꺽정은 심복 서림의 배신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儉行爲國(검행위국)
儉:검소할 검, 行:다닐 행, 爲:위할 위, 國:나라 국.
어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조온의
생활철학에서 유래했다.
출전: 한국역사 이야기
조선 건국 공신인 조온(趙溫.1347~1417)이 벼슬을 내놓고 한가하게 지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막 벼슬길에 오른 젊은이는 전임 대신이며 부원군(府院君)인 조온에게 청탁하면 출세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젊은이는 조온의 집이 너무 초라한 데 놀랐다.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하여 머뭇거리다가 사람을 부르니, 안에서 텁수룩하게 차린 노인이 나왔다.
“조온 대감께서는 안에 계신가?”
“내가 조온인데, 무슨 일로 오셨소?”
상대방을 하인으로 알았던 젊은이는 깜작 놀라서 용서를 빌었다. 조온은 부드러운 말로 젊은이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는 돗자리가 한 장 달랑 깔려 있고, 책장에 책만 꽂혀 있을 뿐 장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저녁상이 나왔다. 그런데 상 위에는 보리밥에 반찬이라고는 나물 된장국 한 가지뿐이었다.
그런 형편없는 식사를 해본 적이 없는 젊은이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한 숟갈 뜨는 시늉을 하다 수저를 놓았다.
“왜 안 드시오? 소찬이라 입에 맞지 않나 보군.”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점심을 들어서 시장하지 않습니다.”
상을 물린 후, 젊은이가 말했다.
“대감께서는 너무 몸을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게 습관들이기 나름이오. 젊어서는 부모님을 섬기고, 벼슬길에 나서서는 일선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 호사하고 편안한 것과는 자연히 멀어졌소이다. 나는 오히려 이런 생활이 편하오.”
“그러나 지금은 벼슬을 그만두셨고, 춘추 또한 높으신데….”
조온은 젊은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 들으시오. 나는 이제 늙어서 나라 일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백성과 함께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또한 나라를 돕는 일이라고 믿고 있소. 지위가 높아지고 공이 조금 있다고 해서 호사를 부리면 안 되오. 부디 이 점을 명심하시오.”
젊은이는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이렇듯 검소하고 청렴한 조온 대감에게 청탁을 하러 온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을 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깊이 감동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牽織之間(견직지간)
牽:이끌 견, 織:짤 직, 之:어조사 지, 間:사이 간.
어의: 견우와 직녀의 사이라는 말로, 견우와 직녀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떨어져 지내는
부부나 연인을 이르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한국인의 풍속 야담(韓國人의 風俗 野談)
견우와 직녀의 설화에서 직녀는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딸이고, 견우는 목축업을 하는 목동이었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아리따운 직녀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베를 짜는 솜씨도 빼어났다. 그런 직녀가 피리를 잘 부는 목동 견우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사랑을 맺어 교제를 하자 크게 화가 난 옥황상제가 명령을 하였다.
“너희 두 사람은 벌을 받아야겠다. 지금부터 견우 너는 은하수의 동쪽으로 가서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직녀 너는 은하수의 서쪽으로 가서 베를 짜며 살게 하라!”
그래서 견우는 동쪽 나라로, 직녀는 서쪽 나라로 떠났다. 1년 중 칠월칠석날에 한 번씩만 만나도록 명하였다.
견우는 견우대로, 직녀는 직녀대로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1년이 지나 칠석날이 되자 견우와 직녀는 각각 은하수 강가로 갔다.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한 터이므로 만나면 그동안 쌓인 이야기라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강의 폭이 너무 넓어서 멀리서 얼굴밖에 볼 수가 없었다. 견우와 직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그 눈물이 지구까지 흘러내리니 지구에는 큰 홍수가 지게 되었다.
그러자 지구에 사는 날짐승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거 큰일 났군, 가만히 있다가는 몽땅 떠내려가게 생겼어, 비를 그치게 하는 방법은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 주는 것밖에 없겠어.”
“그렇게 하자면 누군가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그때, 지혜로운 비둘기가 말했다.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은 까치님들뿐입니다. 그러니 까치님들께서는 은하수에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십시오.”
“좋습니다. 우리가 해보겠습니다.”
다음 해 칠석날, 지구에 있는 모든 까치들은 은하수로 올라가 머리를 서로 맞대어 다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견우와 직녀는 그 다리를 밟고 서로 만나, 그동안 그리워하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검을 오(烏)자와 까치 작(鵲)자를 써서 오작교(烏鵲橋)라고 했다.
매년 칠월칠석날이 지나면 까치들의 머리가 벗겨지는데 그것은 견우와 직녀가 밟고 지나갔기 때문이고, 칠석날 비가 내리는 것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甄萱之末(견훤지말)
甄:질그릇 견, 萱:원추리 원, 之;어조사 지, 末:끝 말.
어의: 견훤의 종말이라는 뜻으로, 후백제의 왕 견훤이 자식에게 축출된 고사에서 유래했다. 화려한 생애의 끝
에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됨을 비유한다.
출전: 삼국사기, 한국역사이야기
견훤(甄萱.867~935)은 신라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으나 뒤에 견(甄)씨로 바꾸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부였는데 나중에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태어나 강보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밭에 나가자 어머니는 밥을 지어 오느라고 아이를 숲 속에 두었는데, 그 사이에 호랑이가 와서 젖을 주니 사람들이 듣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견훤이 훗날 후백제 왕으로 등극하니 때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이었다. 그해 8월에 견훤이 고려의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준마를 바쳤다. 그리고 10월에는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을 침공하자 고려의 태조가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격전을 벌였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평화를 유지하자는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자신의 동생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내니, 견훤 역시 외조카 진호(眞虎)를 보내 서로 볼모를 교환했다.
그런데 고려에 보낸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태조가 일부러 죽였을 거라고 의심하여 왕신을 옥에 가두고, 지난해에 보낸 준마를 돌려달라 하니 태조는 왕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즉시 돌려주었다.
신라 경애왕(景哀王) 4년 9월,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불태우고, 신라의 고을부를 습격하니 경애왕이 고려의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므로 태조가 군사를 일으켜 원조에 나섰다.
그러자 견훤은 서둘러 신라의 서라벌로 쳐들어갔다. 그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유흥을 즐기다가 적이 들이닥치자 부인과 더불어 성남(城南)의 별궁으로 피신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닥치는 대로 약탈케 하고, 별궁에서 경애왕을 죽인 후 경애왕의 동생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동생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 및 왕의 자녀와 궁녀 등 많은 볼모를 잡아 돌아갔다.
이에 고려의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과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낙(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패배하여 죽고, 태조는 겨우 몸만 도망쳤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大木郡)을 빼앗았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6년, 견훤의 부하 공직(龔直.?~939)이 견훤의 사치와 무질서를 보고 실망하여 태조에게 투항했다. 지략이 뛰어나고 용감했던 공직이 고려로 가버리자 화가 난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다 다리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9월에는 견훤이 일길찬 상귀(相貴)에게 수군을 주어 고려의 예성강에서 염주, 백주, 정주의 배 1백 척을 불태우고, 저산도(猪山島)의 말 3백 필을 잡아 오게 했다.
신라 경순왕 8년 정월, 견훤은 운주에 고려의 태조가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군사 5천 명을 뽑아 쳐들어갔다. 그러자 고려의 장군 검필(黔弼)은 견훤이 진을 치기도 전에 공격하여 3천여 명을 베어 죽이니, 웅진 이북의 30여 성의 성주와 견훤의 술사 종훈(宗訓)과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 최필(崔弼) 등도 태조에게 투항했다.
견훤은 아내가 많아 아들을 10명이나 두었다. 그 중에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그 형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이 시기했다. 그때 양검은 강주도독, 용검은 무주도독으로 있었으며, 신검이 홀로 견훤의 곁에 있었다.
신라 경순왕 9년 3월, 신검은 파진찬 신덕(新德), 영순(英順) 등과 함께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금강을 죽였으며,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 나라를 장악했다.
견훤은 금산사에서 석 달 동안 갇혀 있다가 막내아들 능애(能艾)와 딸 쇠복(衰福), 애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금성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람을 고려의 태조에게 보내 만나기를 청하니,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유검필(庾黔弼), 만세(萬歲) 등을 보내 위로하고 데려왔다. 그리고 견훤의 나이가 10년이나 위이므로 상보(尙父. 또는 尙甫)로 삼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금, 비단, 병풍, 금침, 남녀 종 각 40명과 궁중의 말 10필을 주었다.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력에 힘입어 역자를 베자는 것이니, 청컨대 강한 군사를 빌려주시어 불효자 신검을 멸하게 해준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태조는 그해 9월에 친히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니, 신검이 맞이하여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였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으로 하여금 기병 2만과 보병 3천으로써 대적하게 했다.
그 결과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 소달(小達), 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종전 후 군사재판에서 신검은 고려 태조에게 부하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이라고 용서를 구하므로 죽음만은 면케 해 주었다.
그 후 견훤은 등창이 나서 황산(黃山)의 한 사찰에서 생을 마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罄到囊저(경도낭저)
罄:빌 경, 到:이를 도, 囊:주머니 낭, 저:털어낼 저.
어의: 주머니를 모두 털어냈다는 뜻으로, 자식의 성공을 위해 있는 식량을 다 털어 밥을 지어 준 진정법사의 어
머니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상대편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전부를 내어 주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삼국유사
법사(法師) 진정(眞定)은 신라 사람으로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며, 속세에 있을 때는 군대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서 장가도 들지 못하고 군대에 복역하면서도 틈틈이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다리 부러진 솥 하나가 전부였다.
하루는 한 스님이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시주(施主)하라고 하자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솥을 내주고 나서 저녁에 진정이 돌아오자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진정은 전혀 언짢은 기색 없이 오히려 기쁜 얼굴로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은 없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그는 솥 대신 옹기그릇으로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義湘)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說法)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진정은 스님이 되었으면 싶어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의상법사를 찾아가서 도(道)를 깨우칠까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 진정에게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느니라, 네 뜻이 그러하다면 바로 떠나도록 하거라.”
“어머니는 연로하시고, 봉양할 사람은 저 하나뿐인데 끝까지 모시지 못하는 불효(不孝)를 용서하십시오.”
“어미 때문에 네가 출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 어미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하니 어찌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만이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비록 남의 문전에서 의식(衣食)을 얻더라도 천수를 다 누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속히 떠나거라.”
어머니는 미낭저(米囊저. 쌀자루)를 모두 털어 밥을 지어 싸주며 말했다.
“가는 도중에 밥을 지어 먹으면 발길이 더디게 될 테니 이 밥을 가지고 가도록 하여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를 홀로 두고 출가하는 것도 자식(子息)된 도리로 차마 못할 일이거늘. 하물며 어머니의 미음(米飮)거리마저 다 가지고 떠난다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진정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정은 밤낮으로 삼 일 동안 걸어 태백산에 들어가 의상대사에게 귀의하였는데 수양(修養)하는 동안에어머니의 부고가 왔다. 진정은 즉시 가부좌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 어머니를 만나고 7일 만에 깨어났다. 그 후, 해탈(解脫)의 경지에 올라 매사에 초연(超然)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敬奉如佛(경봉여불)
敬공경할 경, 奉:받들 봉, 如같을 여, 佛:부처 불.
어의: 공경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라는 말로, 상대를 지극히 아끼고 공경하며 사랑하라는 뜻이다. 평신도를
그리스도 모시듯 하고, 불자를 부처님 모시듯 해야 천국이고 극락이라는 의미이다.
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 시대의 고승 유정(惟政. 1544~1610)의 속성(俗性)은 풍천(豊川) 임(任)씨이고,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라 했으며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밑에서 자라다가 13세 때 경북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에 입산했다.
그 후 묘향산의 휴정(休靜.서산대사)을 찾아가 불법을 더욱 깊게 수도하고, 풍악산(楓嶽山.가을의 금강산), 팔공산(八空山), 청량산(淸凉山), 태백산(太白山) 등의 명산을 다니면서 불도를 깨우쳐 불가에서 많은 신망을 받았다.
명종 16년에는 승과에 급제했으며 봉은사 주지로 초빙받았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휴정의 법을 이어받았다.
43세 때 옥주산(沃州山) 상동암(上東庵)에서 소나기를 맞아 떨어진 꽃잎을 보고 무상함을 깨달아 문하의 제자들을 해산시키고 홀로 참선에 정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의 휘하에서 승병을 모아 왜적과 싸웠다. 또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함께 의령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니, 그 전공으로 당상관(堂上官. 정3품)이 되었다.
그는 왜장 가토(가등청정.加藤淸正)를 세 차례나 만나 담판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가토가 물었다.
“조선에 어떤 좋은 보배가 있습니까?”
유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는 많습니다.”
“뭐라구요? 보배가 일본에 많다고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당신들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가토는 간담이 서늘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울산의 도산(島山)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순천에서도 크게 이겼다.
그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가 죽고, 도쿠가와(德川家康.덕천가강)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유정은 그를 만나 말했다.
“두 나라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지 이미 오래되어 내가 구제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도쿠가와는 그의 자비로운 언행에 감복하여 그를 마치 부처와 같이 공경하며 극진한 예로 대접했다. 그 덕택에 그는 일본과 강화를 순조롭게 맺고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그의 성과를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녹을 주고, 어마(御馬)를 하사했으나 사양하고 걸어서 해인사(海印寺)로 돌아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敬乘馬驚(경승마경)
敬:공경할 경, 乘:오를 승, 馬:말 마, 驚:놀랄 경.
어의: 경(敬)자가 말을 타면 놀랄 경(驚)자가 된다. 조선시대 임한호에게서 유래한 말로 난처한 경우 순간적인
재치로 교묘히 해결하는 행동을 이룬다.
문헌: 독조야집요(讀朝野輯要)
조선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임한호(林漢浩. 1752~1827)는 당시 벼슬길이 막혀 있던 서얼(庶孼. 서자와 그 자손)들에게 벼슬길을 열어 준 매우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하루는 글방에서 훈장(訓長)이 자리를 비우자 친구들과 글자풀이 놀이를 하며 놀았다.
“야,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글자가 뭐지?”
장난꾸러기 서당 친구가 묻자 한호가 대답했다.
“이에 내(乃)자!”
“글자 생김새를 두고 풀어낸 말이었다.
“그럼 소가 외나무다리 위로 지나가는 자는?”
“그거야 날 생(生)자지!”
소 우(牛)자 이래 가로지른 한 일자가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입 아래 발이 달린 글자는?”
“다만 지(只)자!”
“눈 아래 발이 달린 글자는?”
“야! 그 정도도 모르겠냐? 조개 패(貝)자 아니냐!”
“갓 밑에 발이 있는 글자는?”
“야야! 그건 구멍 혈(穴)자야.”
“그럼 스무 하룻날, 해가 대나무 밭으로 오는 글자는?”
“그건 호적 적(籍)자다.”
대 죽(竹) 밑에 올 래(來)하고, 열십(十)십 자가 둘이고, 그 밑에 한 일, 또 날 일(日) 했으므로 하는 말이었다.
“그럼 삼족(三族)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아니?”
“그거야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를 말하는 거지, 그러나 계보를 말할 땐 좀 달라, 친족(親族)은 그렇지만 어머니 쪽의 외족(外族)과 처족(妻族)은 다른 의미를 지니지, 그리고 후손이라고 할 때의 손자 손(孫)자는 아들 자(子) 뒤에 실 사(糸)자를 합해서 쓰는데, 이는 자식이 실처럼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뜻 아니겠어? 이렇게 대를 잇는 것을 세대(世代)라고 하는데 십(十)자 세 개가 합쳐진 것을 세(世)라고 하니, 일세대(一世代)는 삼십년을 가리키는 거야.”
“그렇다면 공경할 경(敬)자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아니?”
그런데 한호는 미쳐 공경할 경자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기는 싫어 책을 뒤적이다 보니 언뜻 말 마(馬) 부(部)에 놀랄 경(驚)자가 있는지라, 됐다 싶어 외쳐댔다.
“허허, 이것 좀 봐! 공경할 경자가 언제 말을 타고 여기에 와 있네.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찾으니 없지.”
임한호는 재치가 뛰어나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임기응변으로 해결을 잘하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更之更(경지경)
更:고칠 경, 之:어조사 지.
어의: 고친 것을 또 고친다는 뜻으로, 부족함이 많다는 말이다. 최상급은 상지상(上之上)이고 맨 하급이 경지경
인데 그만큼 모자란다는 의미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성종(成宗) 때 정랑(正郞) 손영숙(孫永叔)이란 사람이 호남지방에 부임하였는데 그곳에 자운아(紫雲兒)라는 기생이 한양에서 내려와 있었다. 손영숙은 자기의 직위를 이용하여 자운아를 희롱했으나, 그의 잠자리 능력이 시원치 않아 자운아는 불만이 많았다.
어느 날, 손영숙이 유생(儒生)들의 시문(詩文)을 채점하고 있는 중에 옆에서 구경하던 자운아가 점수를 주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 손영숙은 가장 잘된 것은 상지상(上之上)이고, 차례로 상지중(上之中), 상지하(上之下), 다음은 이지상(二之上), 이지중(二之中), 이지하(二之下), 그리고 여기에 못 들어간 것은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라 하며, 맨 꼴찌는 경지경(更之更)이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 후 손영숙은 서울로 올라가고, 조치규(趙稚圭)란 사람이 후임으로 내려와 자운아와 잠자리를 하고 나서 물었다.
“너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겪었을 터인데, 내 잠자리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더냐?”
그러자 자운아가 대답했다.
“네, 상지하쯤 됩니다.”
“그러면 한양으로 올라간 손영숙은 어땠느냐?”
손영숙은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하였으나 여자를 다루는 능력은 형편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생에게 채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정작 자기는 그 기생의 채점에서 맨 꼴찌를 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鷄價不要(계가불요)
鷄:닭 계, 價:값 가, 不:아니 불, 要:구할 요.
어의: 닭 값은 필요 없다. 즉 닭 값은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미 확보했으니 더 이상
의 것은 필요치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고금소총(古今笑叢), 한국해학소설대전집(韓國諧謔小說大全集)
음심이 발동한 남편이 은근히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오늘 밤 궐사(厥事. 그 일, 즉 남녀 간의 정사)를 당신이 원하는 만큼 해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부인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해준다면야 숨겨 두었던 세목(細木. 고운 옷감)으로 설빔을 지어 드리지요.”
신이 난 남편이 큰소리를 쳤다.
“당신이 약속만 지킨다면 내 열 번도 더 해주겠소.”
이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었는데, 남편이 일진일퇴할 때마다 ‘일차, 이차, 삼차…….’ 하고 수를 헤아리자 아내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이건 쥐가 나무를 갉는 것이지 무슨 일차 이차예요? 설빔은 고사하고 삼베 잠방이도 아깝소.”
“아니, 그럼 당신은 무엇을 일차로 친단 말이오?”
“처음에는 천천히 진입하여 궐물(厥物)을 옥호(玉戶)에 가득 채운 다음, 상하와 좌충우돌(左衝右突), 구퇴구진(九退九進)법으로 달래주고, 화심(花心) 깊숙이 진입하기를 수십 차 거듭하여 마음과 몸이 몽연해지고, 소리는 목에 있지만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으며, 눈을 뜨고 보려 해도 뜰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가위 일차가 되고, 그 다음 두 사람이 깨끗이 씻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게 이차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궐사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데 마침 닭서리 꾼이 문 뒤에서 그 말을 엇듣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의 말이 옳소, 남편이 말하는 일차, 이차는 틀려먹었소. 그건 그렇고, 내가 당신네 닭을 술안주로 할까 해서 두어 마리 빌려 가니 용서하시오. 후일 꼭 갚아 드리리다.”
그러자 부인이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응답했다.
“명관(明官)의 송결(訟決)이 그처럼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니 그까짓 닭 몇 마리가 뭣이 아깝겠소, 닭 값은 그만두시구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鷄林之臣(계림지신)
鷄:닭 계, 林:수풀 림, 之:어조사 지, 臣:신하 신.
어의: 계림의 신하라는 말로, 신라의 충신 박재상에게서 유래했다. 죽어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출전: 삼국유사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36년(391년), 신라가 명실공히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자, 바다 건너 왜왕이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왕이 폐하의 명성을 듣고 서로 화친을 맺고자 하신다고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선 왕자 한 분을 저희 왕에게 보내시어 성의를 보여주소서.”
내물왕은 셋째 왕자 미사흔(未斯欣. 또는 미해.美海)을 볼모로 보내기로 했으나 미사흔의 나이 겨우 열 살이라 신하 박사람(朴娑覽)을 부사로 딸려 보냈다. 왜왕은 이들을 억류하고 30년이 지나도록 보내주지 않았다.
내물왕이 서거하자 태자 눌지(訥祗)가 어리므로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의 조카를 18대 왕으로 추대하니 실성왕(實聖王)이다. 그러나 눌지를 시기하여 살해하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눌지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3년째 되던 해(419년), 이번에는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왕께서 대왕의 동생 복호(卜好. 일명 보해.寶海)님이 뛰어난 지혜와 재주를 지녔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서로 우의를 돈독하게 지내기를 간청하십니다.
눌지왕(訥祗王)은 그렇지 않아도 자주 국경을 침범해오는 고구려와 화친을 하고 싶었던 참이라 신하 김무알(金武謁)을 수행케 하여 선선히 아우 복호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장수왕 역시 복호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이 즉위한 지도 어언 10년, 미사흔이 왜국에 억류된 지 36년째로 접어들었고, 고구려의 복호는 8년째가 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눌지왕은 두 아우의 일로 상심이 커졌다.
그래서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 놓고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술잔이 서너 차례 돌아가고 연회가 무르익어 갈 즈음, 왕은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난날 선왕께선 진심으로 백성들의 안녕을 염려하시었소,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을 볼모로 왜국으로 보내시고 끝내 그 아들의 얼굴을 못 보신 채 눈을 감으셨소, 또 짐이 즉위한 뒤 이웃나라 고구려가 너무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화친을 맺자는 말을 믿고서 동생을 보냈소, 그런데 고구려 또한 지금껏 동생을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 내가 비록 왕의 자리에 올라 있으나 어느 하루도 두 아우가 잊혀지는 날이 없소. 만약 두 아우를 만나 선왕의 혼령 앞에 인사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은혜를 꼭 갚으리다. 이 일을 수행할 만한 사람 누구 없소?”
왕의 호소를 들은 신하들이 송구스런 마음으로 아뢰었다.
“이 일은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라야 해낼 수 있나이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歃羅郡)의 태수인 박제상(朴堤上.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提上)으로 표기됨)이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사료되나이다.”
왕이 즉시 제상을 부르니 그는 한걸음에 달려와 아뢰었다.
“대왕께 근심이 있다면 신하로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오니 신하는 그 일을 위해 목숨도 불사해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일의 어렵고 쉬움을 따진 뒤에야 행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충신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못난 사람이긴 하오나 명을 받들어 수행하겠나이다.”
눌지왕은 제상의 충성과 용기를 거듭 칭찬하고 그를 고구려로 보냈다.
제상은 즉시 고구려 땅에 잠입, 변장을 하고 복호를 찾아가서 5월 보름날 탈출을 도모하겠다고 계획을 알려주었다. 약속한 날, 제상은 지금의 강원도 고성 항만에 배를 대놓고 기다렸다. 복호는 밤중에 왕성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내달렸다. 뒤늦게 복호가 도망한 사실을 안 장수왕은 군사들로 하여금 추격케 한 결과 고성에 이르러 복호를 발견했다.
그런데 복호는 고구려에 억류당해 있을 때 주위사람들에게 많은 온정을 베풀어 인심을 얻어 두었었다. 그날 그를 쫓던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복호를 살려 보내주고 싶어서 화살에서 살촉을 빼고 쏘았다. 때문에 복호는 무사히 도망하여 그리웠던 고향,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눌지왕은 복호를 만나니 왜국에서 오랜 세월, 망향에 젖어 있을 미사흔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신하들에게 말했다.
“마치 몸에 한쪽 팔과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소. 비록 한쪽은 얻었으나 다른 한쪽족이 없으니 여전히 마음이 아프구려!”
제상은 다시 비장한 결심을 하고 곧장 율포 바닷가로 내달렸다.
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왜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율포로 갔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뒤쫓아 갔다. 그녀가 율포에 이르렀을 때 제상이 탄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로 떠나가고 있었다. 제상의 아내는 애절하게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제상은 손을 흔들어 보였으나 배는 이내 아물아물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제상은 왜국에 상륙하자 일단 거짓말로 왜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신라 사람인데 신라왕이 아무런 죄도 없는 나의 부모를 죽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도망쳐왔소.”
왜왕은 제상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에게 집을 주어 안주케 했다.
제상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왜왕에게 바쳐 환심을 사는 한편, 은밀하게 왕자 미사흔과 만나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였다.
어느 날 새벽에 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이 미사흔에게 말했다.
“이런 날이 좋습니다. 어서 먼저 떠나십시오. 저까지 함께 사라지면 왜인들이 알아채고 뒤쫓아 올 것이니 저는 여기 남아서 뒤쫓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나에게 있어 그대는 나의 부형과 같은데 어찌 그대를 버려두고 혼자 가겠는가?”
“신은 공(公)의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만족할 뿐이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오니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떠나십시오.”
제상은 계림 사람 강구려(康仇麗)를 미사흔에게 딸려 보냈다.
다음날 아침, 왜인들이 미사흔을 살피러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제상이 제지하며 말했다.
“어제 사냥을 하느라 피곤하셔서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으니 기다리도록 하시오.”
해가 기울자 감시원들이 이상하게 여겨 다시 물었다.
“이제 일어나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제야 제상이 바르게 말했다.
“미사흔 왕자께서는 이미 신라로 떠난 지가 오래되었소.”
보고를 받은 왜왕이 기병으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나 붙잡지 못했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나 몰래 미사흔 왕자를 보냈느냐?”
“나는 게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따라서 우리 임금의 뜻을 따를 뿐인데 어찌 그런 사실을 그대에게 말하겠소?”
왜왕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내 나라에 온 것으로 이미 내 신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면 오형(五刑. 얼굴 피부에 먹물을 넣는 자자형, 코를 베는 형, 발뒤꿈치를 베는 형, 불알을 없애는 궁형, 목을 베어 죽이는 형)에 처할 것이고, 나의 신하라고 말하면 후한 녹(祿)을 주겠다.”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당신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계림 왕의 매를 맞을지언정 당신의 녹은 받지 않겠소.”
극도로 화가 난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 살을 도려낸 후 갈대밭의 갈대를 짧게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오늘날 갈대에 핏물이 들어있는 것은 그때 박제상의 피라고 한다.
왜왕이 형벌을 가한 다음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계림의 신하요.”
그러자 왜왕은 제상을 뜨거운 철판 위에 서게 하고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계림의 신하요.”
왜왕은 제상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로 데려가 불태워 죽였다.
한편, 미사흔이 신라에 도착하여 강구려로 하여금 먼저 왕에게 알리니,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동생 복호와 함께 남쪽 교외에까지 나가 맞았다. 그리고 대궐로 돌아와 연회를 베풀고, 죄들을 모두 사면하는 한편, 제상의 아내에게 국대부인(國大夫人)이란 작위를 내리고 그의 딸을 미사흔의 부인으로 맞았다.
제상의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곧잘 옛 한(漢)나라의 신하 주가(周苛)에 견주곤 하였다.
주가는 한나라 유방(劉邦)의 신하였는데 형양 땅에서 초(楚)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었다. 초왕 항우(項羽)가 주가에게 물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만호를 주고, 또 제후로 삼겠다.”
주가는 오히려 항우를 꾸짖고 끝내 굽히지 않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는데 제상의 충렬은 그에 비해 조금도 못하지 않았다.
앞서 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그의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쫓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 절문 남쪽의 모랫벌에 누워 길게 울부짖었다 하여 그곳 모랫벌을 장사(長沙)라고 했다. 그리고 친척들이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이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았던 곳은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그 뒤에 부인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누를 길이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 고개 위에 올라가서 바다 건너 아득히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그대로 죽으니 몸은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혼은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鷄鳴樹下(계명수하)
鷄:닭 계, 鳴:울 명, 樹:나무 수, 下:아래 하.
어의: 닭이 나무 밑에서 운다는 말로, 상서로운 일이 생길 때에 나타나는 조짐을 뜻한다.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서 유래했다.
문헌: 삼국사기
신라 초기의 큰 인물 중에는 특이한 설화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1대 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와 4대 왕 석탈해(昔脫解)는 알에서 태어났고,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65~?)는 금궤에서 출현했다.
탈해이사금, 즉 탈해왕의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으로,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도)의 여인을 왕녀로 맞았는데, 그의 부인이 7년 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그러자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궤짝이 파도에 밀려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까지 떠내려갔다. 그곳에서 한 늙은이가 궤짝을 인양하여 열어 보니 그 속에 어린 아이가 있었다. 이때가 박혁거세 재위 39년의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의 성은 궤짝이 처음 발견될 때 까치가 울고 있었기 때문에 까치 작자의 한 변을 취해 석(昔)씨로 하고,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탈해(脫解)라고 지었다.
탈해는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는데 키가 장대하고 두뇌가 명석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남해왕(南解王)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 대보(大輔)로 등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그 후 남해왕이 죽을 적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일렀다.
“너희들 박과 석 두 성이 나이 많은 순서로 왕위를 잇게 하라.”
그리고 잇금의 수로 연장자를 가려 왕위에 오르게 하니 석탈해가 왕이 되었다.
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星) 서쪽 시림(始林)을 지나다가 숲 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파견하여 살펴보게 했다. 그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뻗쳤는데, 그 빛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황금 궤를 비추고 있고, 그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하여 즉시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그 속에 갓난 사내아이가 누워 있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고 거두어 길렀다. 그리고 이름은 알지(閼智)라고 하되 금궤에서 나온 의미를 살려 성을 김(金)씨라 했다. 또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으로 하고 국호로 삼았다. 알지란 어린아이란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뒤따르면서 기뻐 춤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婆娑)에게 사양하고 오르지 않았다.
알지가 장성하여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 또는 仇刀)를 낳고, 구도가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바로 이 알지로부터 번성하게 되었다.
김알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階殺妻孥(계살처노)
階:섬돌 계, 殺:죽일 살, 妻:아내 처, 孥:자식 노.
어의: 계백이 처자식을 죽이다. 백제의 장군 계백이 전장에 나아가기 전에 전쟁에서 패했을 때를 대비하여 처
자식을 죽인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와 관련된 일을 깨끗이 정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문헌: 삼국유사. 삼국사기.
계백(階伯. ?~660)은 백제의 장수로서 나.당(羅.唐) 연합군의 침입을 막다가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직위는 달솔(達率)이었다.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 당 고종(唐 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대총관으로 삼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했다. 이에 계백은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나당 연합군에 결사 항거했다. 그러나 황산벌 싸움에서 연합군의 기세에 밀려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가족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침략자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맞아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진다면 너희들은 모두 적들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니 그보다는 차라리 이 아비의 손에 깨끗이 죽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러자 가족들은 계백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계백은 눈물을 머금고 가족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있을 수 없지만 깊이 생각하여야 할 여지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첩보에 능한 자가 승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가족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다음 전쟁터로 나간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황산(黃山) 들판에 이르러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군사 5만 명과 대결하였다. 계백은 결연한 의지로 장병들에게 최후의 훈시를 했다.
“옛날에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했다. 오늘 여러분들도 분발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국은에 보답하도록 하라.”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가서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해 내니, 그야말로 일당천의 용기로 싸웠다. 이와 같이 서로 진퇴하기를 네 번이나 거듭하며 격전했으나 관창(官昌)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계백도 힘이 다하여 결국 전사했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로 결사대(決死隊)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무리, 또는 군대라는 뜻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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