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Comte)와 멘토(Mentor)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이 사람에 따라서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사람만의 편견이나 사회적 가치관의 오류에서 빚어진 결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편견과 오류를 바로잡아 개인의 바른 삶을 추구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로마의 변화를, 유교는 중국을 변화시키는 데는 많은 희생과 저항이 따랐다. 최첨단 우주과학시대에 베이컨의 ‘우상론’을 범하도록 방임하는 것은 모두 다 미필적 공동정범이다.
요사이 비속어로 쓰이는 용어 중에 ‘꼰대’가 있다. 이제 내가 나이를 먹어가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지칭하는 것 같아 더더욱 신경이 쓰인다. 주로 남자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인데 아버지를 욕할 때 쓰는 말이거나 나이 든 사람을 지칭할 때 또는 선생이나 세대 차이 나는 아저씨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시대의 흐름에 둔감하여 젊은이들에게 공감대가 떨어질 때 주로 사용한다. 꼰대는 프랑스어로 백작을 콩테(Comte)라고 한다. 이를 일본식으로 부른 게 '꼰대'인데, 이완용 등 친일파들이 작위를 받으면서 자신을 '꼰대'라 자랑스럽게 칭했다. 이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보여준 행태를 '꼰대 짓'이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참으로 민족의 수치스러운 단어이다. 그러나 이제 일제강점기의 꼰대는 없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시행착오 속에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 즉, 인식의 근원은 오직 경험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경험론을 자녀와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설파했다. 경험론은 많은 과학적 실험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녀들은 착오를 뒤늦게 자각하고 그 말씀이 옳았다, 또는 젊은이들은 그 어른 말씀이 옳았다 하며 때늦은 후회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나이 든 어른들은 사회적 규범이 미흡한 시대에는 가정과 사회에서 바른길을 인도하거나 나쁜 길을 가로막아주는 지팡이의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명의 노인이 사라지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세대들은 나이 든 세대를 대화나 토론의 기회도 없이 선입견으로 장벽을 쌓고 소통 부재의 세대로 치부해버려 세대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신세대들은 기성세대들을 단순한 생물학적 보존의 연결고리로만 인식하지 말고, 굴곡 많았던 사회적 상황과 도전 불능의 자연환경을 지혜와 용기로 버티면서 오늘의 우리 생명과 삶의 터전을 물려주신 진정한 멘토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세대 간의 대화 광장에 나서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도 고정관념이나 폐쇄된 사고는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멘토(Mentor)’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 등과 같은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어원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0여 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을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낸 주역은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이다. 그가 고안한 거대한 목마의 위장으로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오디세우스는 원정을 떠나면서 아들 텔레마코스를 친구인 멘토르(Mentor)에게 부탁한다. 트로이를 지원한 신들의 노여움으로 전쟁이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멘토르는 텔레마코스를 아버지로서, 스승으로서, 상담자로서 이끌었고 덕분에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없이도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 뒤에 그의 이름 '멘토'는 ‘한 사람의 인생을 지혜와 신뢰로 이끌어주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나이 든 세대가 꼰대에서 탈피하여 멘토로 존경받는 것, 젊은 세대가 꼰대의 고정관념에서 멘토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다 세대 간의 고정관념을 탈피하여야 한다. 세대 간의 단절은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도 걸림돌이 되어 인류의 바람직한 삶을 퇴보시키거나 멸망을 자초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공교육 커리큘럼도 각성해야 하며 비공식 교육 매체인 SNS 등 대중매체도 문자나 보도 하나에도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꼰대와 멘토를 정화된 내용으로 처리해야 한다. 꼰대들의 멘토가 없다면 우리는 동물적 본능 외에는 삶이 전수되는 것이 없다.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수 세기 전의 고운님들의 말씀들이다. 그들의 경전은 따르고 실천하면서, 당장 자녀들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한 피붙이의 간절한 설교는 꼰대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된 이론이다.
나는 평소 성격이 개방적이지 않고 소심한 성격이라 생기발랄한 K여자고등학교에서 보낼 때는 학생들의 나이와 사고의 차이가 있었는지, 숨긴 표정과 들리지 않은 소리를 많이도 느꼈다. 궁여지책의 한 방법으로 평소 KBS-1TV의 《가요무대》를 좋아하면서도, 1980년부터 1994년까지 역시 KBS-1TV에서 제작·방송됐던 젊음의 리듬과 웃음을 밝고 건전한 노래의 중심으로 엮고, 개그맨과 출연자가 함께 꾸미는 콩트 코너가 가수들의 무대 사이사이에 배치된 프로그램이었다. 주요 시청층인 대학생과 청소년층의 문화 행사를 소개하는 장이 되기도 했던 《젊음의 행진》을 의도적으로 시청하여 젊은이들의 사고와 사회적 사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학생들과의 거리도 좁힐 수 있었다. 꼰대는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스크루지 영감 같은 석기시대의 사람만은 아니다, 때로는 근검절약과 자립심을 길러 바람직한 삶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놀부의 숨은 철학관을 발견할 수 있다.
젊음이 세월의 길을 걷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도 몸도 어느 사이 꼰대로 변해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 속에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 내가 꼰대를 탈피하고 멘토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 속에 들어갈 여유를 상대방에게 비워달라 하지 말고, 나를 먼저 도려내고 줄여서 다가설 때만 꼰대에서 멘토로 전환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202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