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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배종숙
목련이 벙글고 벚꽃이 하얀 얼굴에 연지곤지 찍어대며 유혹하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호탕한 시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시어머니는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생명보험 모집인이었다. 아침이 되면 굽이 낮은 검정색 단화를 물걸레로 닦아 신으며 전기 드라이기로 몇 번 쓱싹 머리를 매만졌다. 회사에서 아침 조회가 끝나면 첩첩산골 골짝마다 이집 저집 드나들며 생명보험에 관한 모든 것과 저축성보험까지도 리더해 나갔다. 어머니는 프로였다. 프로의 정신이 깊을수록 단화의 굽은 닳아져갔다. 실밥이 터지는 시골길을 걸으며 어머니는 단단해져갔다. 신발의 밑창이 움푹 패이며 해질수록 실적은 쌓여갔다. 비탈길 많은 길에서 뒷굽이 갉아먹혀 들어가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프로의 길을 걸어갔다. 동네 잔칫집에서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봉사의 열정을 치켜세웠다. 갓 태어날 동네 애기들도 당신 손으로 척척 받아 주었다. 농익은 처녀 총각들의 마음까지도 호의로 받으며 중매쟁이로 변하기도 했다.
하루는 꽁꽁 얼어붙은 강원도의 밤길을 걸으며 달빛을 친구 삼아 귀가하던 중에 누군가 내버려 둔 덜 꺼진 연탄불이 얼어붙은 눈 위에서 어머니 마음을 재촉했다. 그 연탄 불씨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길에서 가져온 연탄 불씨에 새 연탄을 포개어 얹어 놓고 주무셨다. 그게 화근이 되었던 것일까. 이른 새벽녘에 연탄가스에 취해 어머니는 깨어나지를 않았다. 119에 의지해 도립병원에 실려갔다. 가스 해독실에 들어가서 응급치료만 받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뒤 몇 달간의 정상생활을 하던 중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새댁, 시어머니가 00의 집 염소를 몰고 황급히 가는 걸 보았어. "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봄처럼 프로처럼 최선을 다하는 어머니가 도둑질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상한 행동만 계속 했다. 나는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굴리다가 용기를 내어 서울 큰형님 댁에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고 큰형님은 어머니를 서울 병원으로 모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잘 해드리지 못한 원망과 슬픔이 엉겨붙어 나는 꺼이 꺼이 울부짖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되던 날에 서울서 연락이 왔다. 주사를 맞고 식물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첫 딸을 등에 업고 서울로 향했다. 어머니는 사람도 몰라보고 말문도 닫고 눈망울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눈뜬 시체 그 자체였다. 울부짖으며 어서 호전되기를 기도하며 강원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큰형님의 행동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울서 강원도까지 큰형님 친정의 오라버니 차로 어머니를 태워 바로 강원도 집으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으니 집에서 간호하라며 어머니가 먹고 남은 음식까지 챙겨 단숨에 시댁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쫓기듯이 서울로 갔다. 큰형님을 원망도 했지만 나는 소신껏 아무 기척이 없는 어머니를 병수발하며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 귓가에 앉아 말을 했다.
"어머니 말 한마디만 해 보세요. 듣고 있나요?"
입버릇처럼 나는 말을 했지만 무응답 무반응으로 답신을 받았다. 끼니 때마다 주는 음식은 입만 쩍 벌리며 받아서 드셨다. 그리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아랫배가 산등성이처럼 부어올랐다. 아랫배를 눌러 대소변을 받아냈다. 등창으로 인하여 피부가 썩어 여러 군데 웅덩이가 생겨났다. 알콜올로 소독을 해가며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밥을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등창이 나지 않게 이리 누이고 저리 뉘이며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몇 달간 기적같은 나날을 살다가 저 멀리 아주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어머니는 여행을 떠났다.
올해도 봄바람이 나의 마음을 알고 목련과 벚꽃의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낙하하는 꽃잎 위에서 흐느낌을 감고 나직이 흩날리고 있다. 봄은 꽃술에 얼굴을 비비고 흔들며 어머니의 봄이 되어 가고 있다.(1900자)
[시어머니](수필) - 교정본 B안
-배종숙
목련이 벙글고 벚꽃이 하얀 얼굴에 연지곤지 찍어대며 유혹하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내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혼잣말을 내뱉게 만드는 끼 많고 호탕한 시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시어머니는 수십 년 전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생명보험사의 달인이라고 불리우는 생명보험 모집인이었다. 아침이 되면 굽이 낮은 검정색 단화를 물걸레로 닦아 신으며 전기 드라이기로 몇 번 쓱싹 머리를 매만졌다. 그렇게 멋진 중년이 되어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회사에서 아침 조회가 끝나면 첩첩산골 골짝마다 이집 저집 드나들며 생명보험에 관한 모든 것과 저축성보험까지도 리더해 나갔다. 어머니는 프로였다. 프로의 정신이 깊을수록 단화의 굽은 닳아져갔다. 실밥이 터지는 시골길을 걸으며 어머니는 단단해져갔다. 신발의 밑창이 움푹 패이며 해질수록 실적은 쌓여갔다. 비탈길 많은 길에서 뒷굽이 갉아먹혀 들어가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프로의 길을 걸어갔다. 동네 잔칫집에서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봉사의 열정을 치켜세웠다. 갓 태어날 동네 애기들도 당신 손으로 척척 받아 주었다. 항상 밝은 표정의 시어머니는 발길 닿는 곳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세웠다. 농익은 처녀 총각들의 마음까지도 호의로 받으며 중매쟁이로 변하기도 했다. 마음 한 사발 사랑으로 가득 채워 태백산 능선을 오르내리며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능선을 오르내리면서도 향긋한 봄나물을 따 왔다. 방풍나물, 머위, 취나물, 냉이, 달래 등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종류의 나물이 더 많았다.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집 밖에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낮에 따온 나물을 데쳤다. 솥에 넣어 데치던 나물이 다 익기도 전에 그 연기와 향긋한 봄나물 향기가 어우러졌다. 그 향은 사그랑거리는 바람 따라 동네 아주머니 콧등에 닿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초대하지 않아도 몇몇 아주머니가 큰 그릇 하나씩을 가지고 단숨에 집으로 왔다.
시댁이 있는 곳은 비탈진 곳이어서 밤에 지나가다 불빛을 보면 아파트 불빛으로 보인다고 했다.
"와 벌써 봄이 익어가는 냄새 같아. 저토록 많은 나물을 캐 왔네"
친한 동생 같은 한 여인이 말했다.
"응. 봄 아가씨랑 노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시어머니는 하하호호 그렇게 한바탕 또 한 번의 봄을 익혀 갔다. 봄도 나물도 어머니도 모두 프로였다. 긴 겨울 끝에서 3월을 끌고 오는 봄, 아무리 추워도 한 자락의 봄햇살에 얼굴을 내미는 봄나물, 절벽 같은 하룻길에서도 봄처럼 자신의 일을 해내는 어머니. 그 프로같은 봄에 동네사람들은 즐거워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입을 채우기보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하여 나물을 캐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봄을 익혔다. 몸이 열 개가 되어도 모자랐다. 한겨울 중 최고의 추운 날에도 늦은 밤까지 약속한 고객을 만났다. 생명의 이야기로 시작해 생명보험에 가입시키며 보람을 채워갔다.
하루는 꽁꽁 얼어붙은 강원도의 밤길을 걸으며 달빛을 친구 삼아 귀가하던 중에 누군가 내버려 둔 덜 꺼진 연탄불이 얼어붙은 눈 위에서 어머니 마음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그 연탄불을 얼른 가져가 따뜻한 밤을 보내라는 메세지로 받아들였다. 그 연탄 불씨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아침에 직장에 나가고 나면 연탄불을 갈아주지 않아 언제나 연탄불은 꺼져 방안은 추웠다. 그런데 그날은 길에서 가져온 연탄 불씨에 새 연탄을 포개어 얹어 놓고 주무셨다. 그게 화근이 되었던 것일까. 이른 새벽녘에 연탄가스에 취해 어머니는 깨어나지를 않았다. 119에 의지해 도립병원에 실려갔다. 가스 해독실에 들어가서 응급치료만 받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집은 그야말로 왕고집이었다. 그런 뒤 몇 달간의 정상생활을 하던 중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새댁, 시어머니가 00의 집 염소를 몰고 황급히 가는 걸 보았어. "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봄처럼 프로처럼 최선을 다하는 어머니가 도둑질을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봄이 이상해진 것일까, 절망처럼 덮치는 목소리 앞에서 나는 순간 멍해졌다. 봄이 오기 전에 꽃샘추위가 있듯이 어머니에게 꽃샘바람 같은 어떤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찬바람이 어머니의 봄을 영영 빼앗아갈 것 같아 두려웠다. 남을 위해 헌신하고 부지런 떨던 시어머니가 도둑이 될 수는 없었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상한 행동만 계속 했다. 나는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굴리다가 용기를 내어 서울 큰형님 댁에 연락을 했다. 연락을 받고 큰형님은 어머니를 서울 병원으로 모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잘 해드리지 못한 원망과 슬픔이 엉겨붙어 나는 꺼이 꺼이 울부짖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 되던 날에 서울서 연락이 왔다. 호전되어 연락이 왔는 줄 알고 기뻐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주사를 맞고 식물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첫 돌을 앞둔 첫 딸을 등에 업고 서울로 향했다. 어머니를 뵈었다. 사람도 몰라보고 말문도 닫고 눈망울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눈뜬 시체 그 자체였다. 울부짖으며 어서 호전되기를 기도하며 강원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손위 큰형님의 행동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울서 강원도까지 큰형님 친정의 오라버니 차로 어머니를 태워 바로 강원도 집으로 모시고 온 것이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으니 집에서 간호하라며 어머니가 먹고 남은 음식까지 챙겨 단숨에 시댁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쫓기듯이 서울로 갔다. 큰형님을 원망도 했지만 나는 소신껏 아무 기척이 없는 어머니를 병수발하며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 귓가에 앉아 말을 했다.
"어머니 말 한마디만 해 보세요. 듣고 있나요?"
나는 봄꽃 같은 말들을 한 잎 한 잎 꽃피우려고 어머니 귀에 대고 말을 했다. 봄꽃처럼 어머니도 긴 병의 끝자락에서 일어나 꽃 피우기를 소망했다. 방안 가득 봄향이 가득하면 어머니 마음의 봄향도 깨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나는 말을 했지만 무응답 무반응으로 답신을 받았다. 끼니 때마다 주는 음식은 입만 쩍 벌리며 받아서 드셨다. 그리고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많은 양의 밥을 먹어도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아랫배가 산등성이처럼 부어올랐다. 아랫배를 눌러 대소변을 받아냈다. 등창으로 인하여 피부가 썩어 여러 군데 웅덩이가 생겨났다. 알콜올로 소독을 해가며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밥을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등창이 나지 않게 이리 누이고 저리 뉘이며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몇 달간 기적같은 나날을 살다가 저 멀리 아주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어머니는 여행을 떠났다. 친정어머니같은 시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나의 기도가 하느님께 도달하지 못했는지 봄꽃잎처럼 낙하했다. 어머니의 한 많은 삶만 허공에서 뒹굴다가 흩어졌다.
올해도 봄바람이 나의 마음을 알고 목련과 벚꽃의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낙하하는 꽃잎 위에서 흐느낌을 감고 나직이 흩날리고 있다. 봄은 꽃술에 얼굴을 비비고 흔들며 어머니의 봄이 되어 가고 있다. (2629자)
[나의 시어머니]수필-원본-배종숙
목련이 벙글고 벚꽃이 하얀얼굴 연지곤지 찍어대며 유혹하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내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혼잣말을 내뱉게 만드는 끼많고 호탕한 한 여인이 내 눈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수십년 전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생명보험사의 달인 생명보험 모집인이었다. 아침이 되면 높낮은 검정색 단화를 물걸레로 닦아 신으며 전기드라이기로 몇번 쓱싹 머리를 매만지면 멋진 중년이 되어 서둘러 출근길에 나선다. 회사내의 아침 조회가 끝나면 첩첩산골 골짝마다 이집 저집 드나들며 생명보험에 관한 모든것 저축성보험까지도 리더해 나갔다.
동네 잔칫집에서는 두 팔을 걷어부치고 봉사의 열정을 추겨세웠다. 갓 태어날 동네 애기들도 당신손으로 척척 받아 주었다.항상 밝은 표정의 시어머니는 발길 닿는곳 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세웠다. 농익은 처녀총각들의 마음까지도 호의로 받으며 중매쟁이로 변한다. 마음 한 사발 가슴으로 가득 채우며 집으로 오는길은 태백산 능선을 오른다. 능선을 오르내리며 항긋한 봄나물을 따 왔다. 방풍나물,머위,취나물 냉이 달래등 내가 잘알지 못하는 종류의 나물이 더 많았다.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집밖에 만들어 놓은 아궁이에 불을 지퍼 낮에 따온 나물을 데친다. 솥에 넣어 데치던 나물이 다 익기전 그 연기와 항긋한 봄나물 향기가 어우려져 사그랑거리는 바람따라 동네 아주머니 콧등에 다닿는다. 어떻게 알았는지 초대하지 않아도 몇몇 아주머니가 큰 그릇 하나씩을 가지고 단숨에 집으로 올라온다.
시집이 있는 곳은 비탈진 곳이어서 밤에 지나가다 불빛을 보면 아파트 불빛으로 보인다고 했다.
"와 벌써 봄이 익어가는 냄새 같아 저토록 많은 나물을 캐 왔네"
친한 동생 같은 한 여인이 말하자 시어머니는 "응 봄 아가씨랑 노느라 시간이 가는줄도 몰라" 하하하하 호호호호 그렇게 한바탕 또 한 번 봄을 익혀 간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입을 채우기 보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하여 나물을 캐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봄을 익히고 몸이 열개가 되어도 모자랐다.
한겨울 중 최고의 추운날 보험모집인의 일상으로 늦은 밤까지 약속한 고객을 만나며 생명의 이야기로 시작해 가입시키며 보람을 채워갔다. 꽁꽁 얼어붙은 강원도의 밤 달밤의 달빛으로 귀가 하던중 누군가 내버려 둔 덜꺼진 연탄불이 얼어붙은 눈 위에서 어머니 마음을 재촉했다 얼른 가져가 따뜻한 밤을 보내라는 메세지로 전해졌다. 그 연탄불씨를 가지고 왔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고 나면 연탄 불을 갈아주지 않아 언제나 연탄불은 꺼져 방안은 추웠다. 가져온 불씨에 새연탄을 포개어 얹어 놓고 주무셨다. 이른 새벽녘에 연탄가스에 취해 두분이 깨어나지를 않는다.119에 의해서 도립병원에 실려갔다.두분 같이 가스해독실에 들어가서 응급치료만 받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뿌리치고 집으로 왔다. 고집은 왕 고집이다. 그런뒤 몇달간의 정상생활을 하던 중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새댁 시어머니가 누구의 집 염소를 몰고 황급히 가는 걸 보았어 "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남을 위해 헌신하고 부지런 떨던 나의 시어머니가 도둑이 될수는 없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이상한 행동만 했다.잘모시지 못한 나의 죄책감에 안절부절 발만 동동 굴리다가 용기를 내어 서울 큰형님댁에 연락을 했다.나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를 고속버스로(시어머니 스스로 올라탔다)서울 병원으로 데려갔다.어느 정신병원에 입원 시켰다는 소식에 잘 해드리지 못한 원망과 슬픔이 엉겨붙어 울부짓는다.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 되던 날 서울서 연락이 왔다. 호전되어 연락이 왔는줄 알고 기뻐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주사를 맞고 식물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나는 황급히 첫돌을 앞둔 첫딸을 등에 업고 서울로 향했다.어머니를 뵈었다.사람도 몰라보고 말문도 닫히고 눈망울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눈 뜬 시체 그 자체였다.울부짓으며 어서 호전되기를 기도하며 강원 집으로 왔다.그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손위 큰형님의 행동에 소스라쳤다.서울서 강원까지 자신의 오라버니 차로 어머니를 차에 태워 바로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병원에서 치료할수 없으니 집에서 간호하라며 어머니가 먹고 남은 음식까지 챙겨 단숨에 집에 내려 놓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쫓기듯이 떠나갔다. 큰 행님을 원망도 했지만 나는 소신껏 아무기척이 없는 어머니를 병수발하며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 귓가에 앉아 "어머니 말 한디만 해 보세요,듣고 있나요?" 나의 입버릇이 되었지만 무응답 무반응으로 답신을 받는다.끼니때 마다 주는건 입만 쩍 벌려 받아 먹으면서 아무 반응이 없다.많은 양의 밥을 먹어도 대소변을 스스로 하지 못해 아랫배가 산등성이 처럼 부어 오르면 아랫배를 눌러 대소변을 받아냈다. 등창으로 인하여 피부가 썩어 여러군데 웅덩이가 생겨났다.알콜올로 소독을 해가며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밥을 떠 먹이고 대 소변을 받아내고 등창이 나지 않게 이리 누이고 저리 뉘이며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몇달간 기적같은 나날을 살다 며느리만의 임종으로 저멀리 아주멀리 돌아올수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친정어머니같은 시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나의 기도가 신게 하느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봄꽃잎처럼 낙하하여 땅위에서 뒹굴다가 흐트려져 버렸다. 벌써 봄바람이 나의 마음을 앞질러 목련, 벚꽃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낙하하는 꽃잎 위에 흐느낌을 감고 감아 나직이 흩날리고 있다. 그렇게 봄은 꽃술에 비비고 흔드는 벌처럼 어머니의 봄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