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의 길
호세 11,1-9; 마태 10,7-15 /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2024.7.11.
오늘 말씀은 하느님 신앙이 전해지는 복음화의 과정을 알려줍니다. 그 과정이 구약시대에는 태양신 우상을 숭배하던 이집트인들에게 종살이하며 억압 받던 히브리인들을 불러내어 기적을 체험시켜 나라를 세워주고 그렇게 하여 세워진 나라에서 하느님을 섬기기는 커녕 바알신 우상을 숭배하던 앗시리아인들을 흉내내던 에프라임(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서 당시 이스라엘인들을 의인화시켜 부르던 이름)에게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을 보내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우쳐 주었지만 결국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바빌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직접 열두 제자를 뽑아 여러 고을들에 보내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는데,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당신을 메시아로 알아본 소수의 아나빔들만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이 교회가 퍼져 나감으로써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역사에서 드러난 복음화의 계시 과정입니다.
그렇게 서방 세계가 복음화된 후 천8백 년만에 지구 반바퀴를 돌아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이 경위도 기묘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한민족은 이미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경위가 더욱 기묘합니다. 그래서 모처럼 삼위일체 신앙으로 전해진 하느님의 이름은 제사금지령과 이로 인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민족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124위 순교 복자와 103위 순교 성인의 영광으로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한민족 안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하느님 신앙을 박해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민족은 남북 분단과 상호 증오라는 십자가의 고난을 걸머지고 있고, 남한인 대한민국 안에서도 이 고난을 짊어지는 방식에 대한 남남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무신론적인 풍조가 만연하는 가운데 신앙의 사사화(私事化)와 세속화(世俗化) 현상이 만만치 않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 고난 속에서 하느님 신앙을 전하여 겨레를 일치시키고 복음을 온 누리에 전할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바로 오늘 복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도처에 나가서 전한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와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전하는 것이 그 실마리입니다. 민족의 분단과 남남갈등 그리고 남한 내 신앙의 사사화와 세속화 현상이라는 고난은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이기는 하지만 신앙이 튼튼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일 뿐만 아니라 노력과 기술만 있으면 도약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 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활동의 필수 수칙으로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7)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하늘 나라’의 현실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저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주제로 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6년에 전 세계인들에게 자비의 희년을 선포한 바 있습니다. 무상으로 먼저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고 닮아야 하는 것이 제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며, 이것이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정의의 덕목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한 바 있습니다.(회칙 「자비의 얼굴」)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자상하게 부르면서 회개를 호소하던 자신의 조국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임금과 궁정 예언자들과 백성들에게 추상같은 어조로 전했던 이유도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린 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세상의 정의는 각자 자신의 몫을 돌려주는 데 그칩니다. 만일 각자가 자신의 몫을 돌려받지 못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였을 때,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소리를 높인다든가 그 목소리마저 응답 받지 못하면 저항의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 세상의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그리고 최대한의 태도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자기 몫의 인권, 배려, 이익, 역할 등을 돌려받지 못한 이들이 많아서 정의 구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그래서 아직도 구현해야 할 정의가 많기는 합니다.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평등의 권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를 반증하듯이,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1953~)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10만부 남짓 팔린 미국 국내에서보다도 더 많이 130만부나 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한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 1960~)는 한민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로운 민족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펴낸 ‘제국과 의로운 민족’에서, 한민족은 중국민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한 가지 특징을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보이는데, 그것이 의로움이라는 덕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민족의 정치적 지배층이나 학문적 지식층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적으로 흐르는 바람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한민족의 민중은 그 침략해 온 적이 중국 민족이건 일본 민족이건 가리지 않고 떨쳐 일어나 저항했고 스스로를 가리켜 ‘의병’(義兵)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니까 베스타의 생각으로는 한민족이 더 이상 미국식이나 서양식의 정의에 대해 더 배울 것이 없고 이미 한민족은 의로움의 정신적 유전자를 물려받고 있다는 견해인 셈입니다.
하지만 현재 나타나는 한민족의 의로움에는 2%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고구려 이전 고조선 시대에서부터 한민족의 정신적 정체성에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선함이 있었고, 이를 문헌상으로나 유적상으로 입증하는 것이 제천행사와 천손의식 그리고 홍익인간 정신이었습니다. 이런 신성의 흔적을 다른 민족들의 초기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신화는 물론이고, 그리스 로마 신화, 수메르 신화 등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민족을 그 오랜 옛날부터 이끄셨다는 신성의 흔적입니다.
단지 고조선이 2천 년 간 존속하다가 왕조가 고구려로 바뀐 이후에 지배층과 자식층이 정신적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상적으로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학 등 사대적인 경향으로 빠졌을 뿐, 하느님의 선함이 도도히 흐르는 주체적 기상과 하느님 신앙의 종교성은 민중의 심성 안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런 것이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던 것입니다. 의로움은 불교나 도교, 유교에서 강조된 덕목이 아니요 지배층이 요구했던 바도 아니었고, 오로지 민중의 심성 안에서 자연스레 표출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민족의 의로운 감수성도 불의에 저항하는 세상의 정의 수준으로 격하된 감이 있습니다.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저항하는 태도로 굳어진 것입니다. 불의한 상대가 사라지면 그 이상의 대책이 막연한 것이 문제이자 한민족의 의로움이 지닌 한계입니다. 따라서 지난 18세기에 들어온 복음 진리가 한민족이 예로부터 지녀온 하느님 신앙에 힘입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또한 양반 지도자들이 치명하거나 이탈한 뒤에도 신자 민중들이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듯이, 이제는 한민족이 지닌 의로움의 한계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극복 시켜 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의 자비를 베푸셨고 우리가 그 자비를 거저 받았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의 대전제가 하느님의 이러한 무상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고 십자가 희생으로 몸소 보여주신 바가 이 진리이며, 백 년의 박해에서 우리 신앙선조들이 증거한 바가 또한 이것이었습니다. 이 진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고 또 알려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과거 역사에서 의로움이 선함을 결여하게 되어 급기야 하느님까지 잊어버리고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으로만 남아버린 교훈을 바로 알리는 일이며,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함을 알려줌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으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선교적 본령입니다. 복음화의 길, 그것은 의로움의 가치를 거룩함의 생활양식에 담아 승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선교 명령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