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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자의 소원
시편 10 : 1 - 14
시편을 읽노라면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 더러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상으로 보아서 시편 9편과 비슷한 것을 너무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9편을 쓴 다윗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처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고 어려움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을 안타깝게 찾습니다.
이제 우리 오늘 본문 1절로 14절까지의 뜻을 생각하시면서 교독하십시다.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저가 향톤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의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니이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이 시인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극심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그의 자녀가 환난을 당하는데 하나님 숨으시는 것같이 느껴져서 부르짖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 아무리 자기들의 기술로 배를 저어 나아가려 해도 도저히 되지 아니하고 물결이 넘쳐 들고 자기들이 기술로 배를 저어 나아가려 해도 도저히 되지 아니하고 물결이 넘쳐 들고 자기들의 힘의 한계를 느낄 때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어려움이 심해질 때,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신 것 같고 숨으시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는 있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은 교만하고 의기양양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도전하여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멸시합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가득하며 그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습니다. 전에 블레셋 사람이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도전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할 때 그 의분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싸우러 나아가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면 11절 말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하며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다윗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12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십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17절에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렇게 축복하셨으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축복하시리라는 것을 믿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은 고상한 신앙이고 성숙한 신앙입니다.
의심스러운 마음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당황하지마는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보다 더 보이지 않는 일도 과거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담대하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과거에 경험했기 때문에 기대할 수가 있으며 기대하고 있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받지 못한 자비를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받지 못한 자비를 위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허망한 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망상이 아니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에 비록 지금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시며 캄캄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의 일생동안 주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를 따르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몰라 할 때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므로 앞으로도 선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성도들의 발을 지켜 실족치 않게 할 것이며 우리는 기쁨으로 그의 성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저녁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궁핍한 사람은 그냥 있을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가 이렇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허무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힘이요, 위로요, 생명이십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어떤 다른 형식은 인간에게는 매력적인 것이 될지 모르나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그 소원을 아뢰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시편 145편 19절에도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며” 하였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높으신 하나님의 귀를 기울이시게 합니다.
여기 “겸손한 자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소원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슬픈 경우도 있을 것이며 감정에 북받쳐서 말을 하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표현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듣기에 매우 아름다운 표현의 기도를 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들은 너무 장엄한 것이 되어서 이런 겉치레는 하늘에서 용인되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갈채를 받기 위한 기도는 결코 하늘 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기도하므로 그들이 받게 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유창한 말로보다는 조용한 침묵 가운데서 보다 많은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소리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귀는 깨어 있으므로 사람 듣기에는 적당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으십니다. 침묵 속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소원과 꿈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얻는 것은 조그마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겸손하고자 하는데 교만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를 원하는데 불신앙에 설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려 하는데 미지근합니다.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허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를 드리기 원하는데 하고 나면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기도를 드린 적이 많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간절한 소원 말입니다. 이 소원을 주님께 가져가세요.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진 짐을 내려놓고
저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그 은혜로 상 주시리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옆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샘 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다윗은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소원대로 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꼭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상달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겸손한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보시고 놀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시는 하늘의 양식으로 살쪄 놀라운 성장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의 소원을 듣지 아니하십니다. 겸손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에 있어서 굴복의 계곡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꽃과 새들 사이에 거하며 목동들과 같이 노래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만은 율법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율법을 행했으니’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복음에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을 때 구원함을 얻는 것을 믿고 두 손 들고 앞에 와 의가 없이 공로 없이 그저 십자가를 붙드는 자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은 비유로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시고 겸손한 세리의 자복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52장 2절 이하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님도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같이하셔서 그 마음을 소성케 하십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모세일 것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좀 받으면 성자(聖者)연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이 못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닫게 되고 죄인시하게 되고 자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질수록 큰 은혜를 받습니다. 낮은 골짜기엔 이슬이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산꼭대기 높은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교만한 자의 기도는 물리치십니다.
유명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설교사로 일하는데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흑인 청년 하나가 우두커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더러 “여보시오 청년, 그렇게 서 있을게 아니라 나와 같이 일을 하면 어떻겠어요?” 그때 이 흑인 청년이 “나는 그런 일은 안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합니다. 그런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 나도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해요.” 했다고 합니다.
듣는 대로 어떤 여자는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는데 청소하기도 싫어하고 그릇 닦는 것도 싫어한다고 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취직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 출신이 아무 일이나 막 할 수 있나?’ 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을 만큼 더 공부를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정말 많이 하면 겸손해집니다. 어느 정도 한 사람이 교만해서 공부한 티를 내려고 합니다. 열매 하나도 없는 가라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 많은 벼이삭은 고개를 푹 숙입니다. 고개가 숙어지리 만큼 공부해야 합니다. 겸손해지리 만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하다가 한 구석에 여러 사람들이 등에 무거운 돌을 가득히 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때 대답이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한 번도 굽혀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을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 낙원에 가기 전에 허리 굽히는 물리치료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 미리 허리 굽히는 것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족해서 소원하는 바를 모를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알고 계십니다. 엘리 선지는 한나의 소원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여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겸손한 소원을 아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의 소원을 읽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혹 어떤 분은 마음속의 감정을 말하기 원치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비밀을 말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듣고 계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소원이 마음에 가득해서 터질 것만 같고 영혼이 흐느껴 몸부림치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들이 요구하기 전에 내가 응할 것이며, 그들이 말하기 전에 내가 듣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 가운데 심은 그대로 때가 이르면 축복의 수확을 거둘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이 여호와를 만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이게 기도하도록 하시는 성령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거역하지 말고 이 말씀에 용기를 얻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예비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저의 마음을 예비하시며” 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야말로 기도의 생명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했습니다. 이 말은 전심으로 주님을 찾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겠다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강한 소원으로 마음에 예비되어야 합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절한 소원, 안타까운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음악가들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악기의 줄을 점검하고 소리의 절대음에 맞춥니다. 이것은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악기의 음을 들어보기 전에는 아무런 음악도 연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맞도록 예비해야 합니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예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소극적인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다 제거시켜 버려야 합니다. 세상 생각의 파리 떼들을 다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깊이 생각케 하는 것으로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따라 기도하면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 이 약속대로 제게 이루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강한 믿음과 거룩한 인내와 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 마음에 응답 받도록 예비하시는데 우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시는 것은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주님께 외치도록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 영혼의 가장 가냘픈 한탄을 들으시려고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믿으세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주님의 발 앞에 던집시다.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주님의 상처를 바라보십니다. 이 상처들이 우리를 주님 앞으로 나와서 믿고 그의 사랑스러운 발 밑에서 쉬게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고 하나님이 숨으신 것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악한 자가 승리한 것처럼 생각되어 위축되거나 좌절되지는 아니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고 나를 영영히 돌보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찾으십시다. 주님께 부르짖읍시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신 약속을 내놓고 호소하십시다.
“하나님, 일어나소서, 하나님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세요. 이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십니다. 오늘 우리 하나 하나의 기도가 겸손한 기도가 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의 비밀
(시 10:1-18)
: 악인의 특징을 지녔지만 예수 안의 구원을 믿고 찬양할 때 의로움을 누린다.
찬송 363장
시편 10편은 누가 지었는지 저자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내용으로 볼 때 심히 악한 현실과 악인의 횡포에 처해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보다 악인의 특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비탄시입니다.
내용을 보면 시편 기자는 1절에서 혼란한 현실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면서, 2-11절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온갖 불손과 사람 앞에 온갖 횡포를 가하는 교만한 악인들을 구체적인 악행을 고발하고, 12-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여 주실 것을 믿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악한 이 세대에 우리가 드릴 기도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범위를 좁혀서 그 악인의 첫째는 나 자신이고, 그 악인의 둘째 역시 우리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악이 그렇게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이 악을 어떻게 할까 고민 되십니까?
그러나 이 때 할 일은 시편 기자가 악의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함 같이 하나님께서 이 죄까지도 예수 복음 안에서 처리하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인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