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개역한글판에서는 '구속'으로 번역되었던 "속량"에 대해서는 설명할 것이 참 많습니다. 영어로는 redemption(리뎀션)이고 헬라어로는 두 개의 단어가 하나의 영어 단어 리뎀션redemption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 ‘리뎀션redemption’은 미국인들이 평소에도 사용하는 단어인 반면, 우리말 “속량(구속)”은 평소에 쓰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오늘 내용을 이해하시려면 영어 단어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합니다. 이런 경우 번역자로서 자세한 설명을 드릴 책임을 느끼면서도 들으시는 분들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되도록 쉽게 설명 드리도록 노력할 테니 천천히 따라와 보십시오.
제가 한참 성경을 엄청나게 읽었을 때,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성경 번역본은 개역한글판이었습니다. 개역한글에서는 리뎀션redemtion을 '구속'이라고 번역했고 그에 따라, '예수님의 구속사역', '구속자 되신 예수님' 등등의 말을 많이 사용했지요. 그런데 성도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구속"은 구치소에 감금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이 커뮤니케이션을 어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후 개역개정에서는 '구속'을 '속량'으로 바꿨는데, 이것도 참 여러 가지 문제를 낳습니다. 아무튼, 개역한글에서는 구속, 개역개정에서는 속량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말씀드린 데로 영어로는 리뎀션redemption이고, 우리가 구속이나 속량이란 단어를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반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리뎀션이란 단어를 평소에도 사용합니다. 어떻게 사용되는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구속 아닌 속량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표를 사는 행위는 그 우표에 대한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원에 대한 값을 치르신 것으로 비교해 봅시다. 우표 살 때 치른 값이 "돈"이라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사실 때 치른 값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내고 우표를 샀듯이, 예수님께서 피를 쏟아 무엇을 사셨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지옥에만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의 모든 영향력에서 구함을 받는 것입니다. 가난, 질병, 위험, 원수의 억압에서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병들고 마귀의 영향력에 괴로운데?"
값은 치러졌지만 속량이 안 된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우표 값을 치르고 우표를 샀지만 그 우표를 모셔 놓은 들 뭐하겠습니까? 그 우표를 사용해서(속량해서) 그에 해당하는 혜택을 누려야죠. 이 경우, 누려야 할 혜택은 편지를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영, 혼, 몸 중에 속량이 완성된 영역은 "영"입니다. "아니, 왜 영 뿐이야?"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전에는 그 영도 졸고 있네, 영이 흐리네, 어둡네, 뭐네 하면서 문제투성이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비하면 우리 영이라도 온전한 속량이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은 큰 복입니다!
또 다른 비유로 속량을 설명하자면 포인트나 쿠폰 등입니다. 요즘은 포인트를 자주 사용하니까 포인트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신사 포인트가 거의 몇만 포인트나 되는 데 사용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이때 이 포인트를 사용한 것을 영어로는 redemption(속량)의 동사형을 사용하여 redeem, 즉 포인트를 "속량"했다고 표현합니다. 영어권에서는 평소에도 사용하는 말인 것이죠. 포인트를 썼다=포인트를 속량했다.
포인트가 많으면 뭐 합니까? 도통 쓸 수가 없는데... 이러한 상태가 바로 영에 구원이 가득하지만, 혼과 몸으로 풀어져 나오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허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혼몸의 계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의 속량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혼과 몸의 영역으로 가면서 "됐다더니 안 되네?"라고 하는 이유는 첫 번째 '됐다더니'는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신 것이고 두 번째 '안 되네?'는 자신이 그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죠. 1) 잘못된 교리로 인해 거짓을 믿고 있거나 아니면 2) 진리에 대해 아예 무지하거나, 3) 들어서 알면서도 의심하거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표를 편지에 붙여서 편지를 보내는 행위, 또는 포인트가 얼마나 있는지 알고 그것을 찾아 쓰는 행위, 이런 것이 바로 값이 치러진 구원을 속량하는 것, 즉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이 은혜의 복음을 듣고서도 끝까지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불신과 의심으로 하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신 것 같은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를 생각할 때, 저 자신 내면에 돌아가는 상황을 들여다보고 또 다른 성도들의 심리를 분석해 볼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좋은 분일 리가 없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고집을 버리지 않아서, 결국 하나님의 생각인 진리보다는 자신의 생각인 거짓을 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 분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하든, 말은 못 하고 마음 깊이 숨겨 놓았든, 아니면 더 심각한 상황, 믿지 않으면서도 본인은 자신의 불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든 어쨌든, 결국 인간의 딜레마는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의 이 결론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합하지 mix) 아니함이라
즉, 복음을 들었지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역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고 전하는 자들에 의해 복음도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그것을 믿을 것인가, 입니다.
제 통신사 포인트로 커피 한잔을 공짜로 마실 수 있다고 해 봅시다. 통신사 포인트는 그 통신사에 가입할 때 공짜로 받았습니다. 그 포인트는 멤버쉽 카드 안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공짜로 마시려면 먼저 그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 사실을 알았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커피 집을 찾아가서 포인트를 보여주며 "커피 주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영혼몸을 위한 "구원"도 완성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전부 거저 받았습니다. 그 구원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들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게 통신사 포인트와 다른 점입니다. 통신사 포인트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믿음까지 필요하진 않은데 구원이 그렇게나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단 믿으면 생각을 새롭게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내 영에 있는 그 구원의 유익들을 새롭게 된 생각을 통해 내 몸과 현실세계에 풀어 놓는 것입니다. (풀어 놓는 자세한 방법은 앤드류 워맥 목사님의 책, 영혼몸 14장부터 참고하세요.)
저의 설명으로 인해 여러분들께 속량(구속)의 뜻이 좀 분명하게 다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의 속량은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예수님의 구속(속량)사역'입니다. 혼의 속량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몸의 속량은 부활(예수님의 공중 재림) 때 일어납니다(롬 8:23). 우리가 이 땅에서 미처 완성하지 못한 혼의 속량은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날 때 완성됩니다(요일 3:2). 이 땅에서는 우리가 생각을 새롭게 하는 만큼 우리 혼을 속량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이미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결코, 어떤 노력으로도 열 수 없었던 그 길을 열어 주시고 또 그 길 자체가 되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