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카이스트 첫 자회사 ‘아이카이스트’대표
김성진
SW 독학하던 산골 소년, 터치스크린 새 역사 쓰다
중앙선데이 2012.10.21.
18일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에 있는 참샘초등학교. 세종시 첫 마을에 올해 문을 연 이 학교 학생들은 교과서와 공책보다 태블릿 단말기가 더 익숙하다. 교사는 분필 대신 작은 펜 크기의 막대기로 모니터 위에 판서를 한다. 손으로 써도 상관 없고, TV모니터가 아니어도 된다. 빈 공간에 쓴 필기의 흔적을 터치 센서가 인식하면 프로젝터가 바로 그 위로 화면을 띄워 내용을 보여줄 수도 있다. 바로 ‘스쿨 박스’라는 이름이 붙은 시스템 덕택이다.
참샘초교 조찬우 교사는 “공동 학습 등 협업이나 소통 관련 수업을 할 때 성능이 탁월하다”고 말했다. 교사가 칠판에 쓴 내용 중 필요한 것은 손짓 한 번에 학생들의 태블릿에 그대로 옮겨진다. 즉석에서 문제를 내고, 바로 채점도 가능하다. 학생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서로 자료를 주고받으며 토론할 수도 있다. 이 장비는 세종시 첫 마을 6개 학교는 물론 내년 이후 세종시에 문을 열 학교에도 공급된다.
▲ 세종시 모든 학교에 납품된 스쿨박스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끼리의 협동 학습을 돕는다.
5학년 때 영어 배워가며 원서 독파 ‘스쿨 박스’의 터치 인식 장치와 소프트웨어 등 핵심 기술을 만든 회사는 아이카이스트. 대전광역시 KAIST 문지캠퍼스 안에 자리 잡은 이 회사는 이름 그대로 KAIST 역사상 처음으로 브랜드와 기술을 출자, 지분까지 보유한 첫 자회사다. 특별한 회사를 운영하는 김성진(28) 대표도 특별하다. 1984년생이지만 벌써 CEO 경력 5년째다.
그런 만큼 김 대표의 이력은 남다르다. 중학생 때 한국정보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받았다. KAIST 학부생 시절 받은 정보문화상은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 12월 대선에 나선 안철수 후보도 받았던 상이다. 김 대표는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 학부 때 전산학·산업디자인을 복수 전공하고, 대학원 과정을 거쳤다. 지금은 직원 수십 명을 거느리고 명문 대학 이름을 딴 정보기술(IT) 기업의 대표다.
학력과 경력이 이쯤 되면 ‘엄친아’를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김 대표의 어린 시절은 전혀 뜻밖이다. 전형적인 시골 소년으로 자랐다. 충북 음성군 삼성면. 군청이 있는 음성읍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됐다가 재활치료를 거쳐 이제야 스스로 거동할 정도가 됐다. 집안 살림도 유복함과 거리가 멀었다.
어려운 유년 시절이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과 달리, 김 대표는 “즐거웠다”고 말한다. 이웃 사이가 좋은 농촌 마을이었고,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천성이 낙천적이기도 했다. 초교·중학교 때의 은사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선생님들이 내게 잘할 수 있다며 늘 용기를 북돋워 주셨다. 요즘도 교육 관련 사업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산골 소년을 새 세상과 연결한 것은 컴퓨터였다. 1994년 초교 4학년 때, 친구 집에서 컴퓨터(PC)라는 물건을 처음 봤다. 부모님을 조르고 떼를 써서 PC를 들여놨다. 하지만 당시의 응용 소프트웨어(SW) 수준이라는 게 산골 초등학생에게 친절할 리가 없었다. 시시한 게임이나 할 뿐 별다른 쓸모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5학년 때 우연히 교육방송에서 외국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봤다. 컴퓨터 SW를 자세히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컴퓨터에만 통하는 ‘언어’가 있고, 그걸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소년은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동네 유일의 서점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터보C(PC 프로그래밍 언어)’ 책을 집어 들었다. 영어 원서였다. 서점 주인이 ‘네가 보게?’ 하고 놀라워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이 신기하고 기특했는지, 서점 주인은 이후 컴퓨터 관련 책을 꼬박꼬박 들여와 소년에게 챙겨 줬다. 이때부터 김 대표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완전한 독학이었다. 원서를 읽으려고 영어를 배웠다. 김 대표는 “자기주도 학습이 따로 없었다”고 웃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신문 기사를 통해 PC통신 ‘천리안’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겁 없는 소년은 이번에도 ‘천리안’이라는 보물을 찾기 위해 혼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서울 용산 전자상가로 달려갔다. PC통신을 하려면 ‘모뎀’이 필요하고 그 값이 당시 3만원이라는 사실만 듣고 다시 내려갔을 정도로 ‘무작정 상경’을 한 것이다. 어렵사리 손에 넣은 모뎀을 통해 소년은 새 세상과 만났다. 물리적으로는 충북 산골 초등학생에 불과한 그가 전화선을 통해 대도시의 ‘고수’들과 연결됐다. 새로운 SW를 만들어 올리면, 찬탄 어린 격려와 함께 때로 매서운 충고를 들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40여 개의 SW를 만들었다. 산골 소년이 ‘PC통신 키드’로 거듭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갈고 닦은 SW 실력은 남달랐다. 김 대표는 “이런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데, 가끔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PC가 기계가 아닌 생명체로 느껴지기도 한다”며 “프로그래밍을 잘못 하면 컴퓨터가 쓸데없는 짓을 하느라 ‘허덕이는 느낌’이 와 안쓰럽고, 제대로 만들어 시원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면 흐뭇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의 실력은 곧 빛을 봤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정보올림피아드에서 ‘중고생 창의적 컴퓨터 작품 공모전’ 대상(교육부 장관상)을 받았을 때는 ‘중학생이 고교생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다’며 신문에 났다. 주변의 지원으로 고교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 이후에도 빼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KAIST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사업가’의 길로 나선 과정도 흥미롭다. 김 대표에겐 ‘중고생 자원봉사대회’ 수상 경력이 있다. 고교생 시절 각종 유해 매체를 차단할 수 있는 SW ‘모야’를 개발한 뒤 무료 배포해 받은 상이다. 그런 자원봉사가 사업의 계기를 마련해줬다. KAIST 입학 직후 학교 컴퓨터 게시판에서 ‘자원봉사 할 SW 전문가’를 찾는 소식을 봤다. 중증 장애인을 위한 의사소통 보조기구를 개발하는 모임이었다. 보완·대체 의사소통(ACC·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이라고 불리는 이 분야는 장애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SW가 있지만 국내 수준은 선진국에 한참 못 미친다.
장애인 돕기 자원봉사 하다 사업가로 작업을 하면서 김 대표는 보람과 함께 한계를 느꼈다. 전산학과 함께 산업디자인을 복수 전공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야말로 자신들의 입장에서 기능적으로 잘 만들어진 디자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라며 “하지만 돈이 안 되고 만들기도 어려워 국내에선 거의 발전이 없던 분야”라고 말했다. 스스로 해보자는 결심으로 산업디자인을 복수 전공했다. 그러면서 기술뿐 아니라 사용자의 경험, 미적인 감각을 융합시켜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KAIST 산업디자인학과 이건표 교수(현 LG전자 부사장)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이 교수는 애플의 아이폰 이후 IT 산업의 최첨단 트렌드가 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분야를 10여 년 전 국내에 소개한 학자다.
김 대표는 학부 졸업을 앞둔 2007년 동료들과 ‘생각으로 가는 자동차’를 개발했다. 당시 영상 인식과 인공 지능을 결합한 자동운전 기술은 많았지만 김 대표의 접근법은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어떤 특정한 단어나 개념을 ‘생각’해 실행에 옮기려 하면 몸의 근전도와 혈류(피 흐름)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데 착안했다. 혈류를 측정할 수 있는 센서와 SW기술로 구현이 가능했다. 이 기술은 국내 굴지 자동차회사의 아이디어 공모전 실물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내친김에 동료들과 벤처기업을 차렸다. 2008년 초 24세 때 만든 이 회사가 ‘휴모션’이다. 김 대표의 기술을 활용한 ‘생각으로 가는 자동차’는 2015년쯤 장애인용 차량으로 출시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반 기술을 개발했다. 어려움도 많았다. SW 개발자와 벤처기업 경영자의 삶은 많이 달랐다. 김 대표는 “사업상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제조·인력관리 등에 신경 쓰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4월 휴모션과 KAIST가 공동 출자해 만든 아이카이스트의 대표를 맡았다. KAIST는 자체적으로 보유한 다양한 원천 기술을 사업화할 벤처기업을 물색하다 김 대표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세종시 학교에서 쓰이는 스쿨박스는 아이카이스트의 첫 야심작이다. 해외 진출도 순조롭다. 터키·몽골·리투아니아 등에는 시범학교용 제품을 납품했다. 내년부터 매출이 크게 늘 것으로 기대하는 이유다.
하지만 김 대표는 더 크고, 중요한 시장을 보고 있다. 최근 개발에 성공한 ‘대화면 정전용량 멀티 터치’ 기술이 그것이다. 스마트폰에 쓰이는 터치 스크린 기술을 평면 TV 같은 대형 화면에 적용하는 기술이다. 아이카이스트 제품은 기존 정전용량 방식으로는 최대 크기가 12인치였던 것을 100인치급으로 늘렸다. 열 손가락이 아니라, 열 사람이 열 손가락을 써도 정확히 반응하는 진정한 멀티터치다. 반응속도(1ms)가 빠를 뿐 아니라 노이즈(오작동)를 확 줄여 미세한 손놀림도 놓치지 않는다. 속도와 정확성은 이 기술의 실용성을 좌우한다. 김 대표는 “전 세계 어떤 업체도 도달하지 못한 기술 수준”이라고 말했다.
하이테크 업계의 소문은 빠르다. 지방의 작은 회사가 ‘물건’을 개발했다는 소식에 전 세계 유수 기업들이 달려오고 있다. 국내 S· L그룹은 물론 미국의 애플·3M, 유럽의 베스텔 등도 대전을 찾았다. 몇몇 회사와는 상당한 규모의 공급 계약도 맺었다. 내년 초 미국에서 열리는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에 출품하기로 최근 결정됐다.
쉴 새 없이 달려온 그에게 미래의 ‘꿈’을 물었다. 김 대표는 잠시 생각을 고른 뒤 말했다. “모교인 KAIST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롤 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