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닢의 「중얼거리는 옥탑」 감상 / 임종명
중얼거리는 옥탑
김은닢 인기척은 너밖에 없다고 중얼거리는 옥탑 옥탑 빨랫줄엔 지키지 않은 약속이 고드름으로 달렸고 찢어진 내 입술은 겨울이 지나도 핏기가 마르지 않았다 나는 그만 너를 걷고 싶은데 아니 너를 외투처럼 걸치고 싶은데 아니, 먼지 털어낸 서랍 속에 너를 넣고 싶어서 첨탑에 갇힌 사람처럼 줄을 내리면 네가 뱉어내는 축축한 구름들 내 혓바닥을 물고 날아가는 부리가 긴 새들 바람에 뒤집히는 너의 목소리와 난간 사이로 내 귓바퀴가 굴러갔다 발목이 지나갔다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창틀에 걸린 볕이 발끝을 핥아주었다 이곳에서는 잘 보여 옥상의 돌무덤들도 나를 깨뜨리려고 나를 떨어뜨리려고 옥탑을 열었던 나는 젖은 밤들이 검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줄을 놓친 빈 소매가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누군가 펼쳐 읽을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저녁 너는 흰 티셔츠에 묻은 얼룩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혀에 압정을 박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낡아 부슬대는 줄을 끊을까 이 끈을 놓으면 하늘로 떠오를 것 같군 아니 떨어질 것 같군 야윈 별들이 발목을 자르고 풀려나온 자정에도 네 창의 덧문은 닫혀 있었다 너는 눈 쌓인 내 무덤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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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시인수첩》 신인상 당선작들을 필사하다 이 시가 마음에 들어 블로그에 옮긴다. 감각적인 시어들이 아주 정갈하게 배치돼 있고, 한겨울 눈 내린 옥탑 위 심상이 잘 그려졌다. 최진석 문학평론가도 심사평에서 "절제된 어조를 통해 시적 화자의 고독을 적실하게 묘파했다"고 했다. 화자는 빨랫줄에서 빨래 대신 고드름으로 달린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을 본다. 그걸 걷고, 걸쳐입고, 개켜서 서랍에 넣고 싶어서 화자는 "첨탑에 갇힌 사람처럼 줄을 내"린다. 여기서 '줄'은 구조 신호일 것이다. 그 줄을 가지고 화자는 끊을까, 놓을까, 놓으면 하늘로 떠오를까, 떨어질까 수많은 상념과 고민에 빠진다. 화자가 잘 보인다는 "옥상의 돌무덤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화자처럼 외롭거나 좌절하여 먼저 옥탑에서 스스로를 떨어뜨린 영혼들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 하나 화자의 것도 아직은 열리지 않은 채 있다. 다행이다. 이 시에서 '너'가 아주 다의적이다. 화자이기도 하고,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기도 하고, 옥탑이기도 하다. 참고로 늦깎이로 등단한 김은닢 시인은 청각에 아주 예민하게 촉을 세우는 것 같다. 등단시를 보면 청각과 관련된 단어들, 특히 '귀'가 많이 등장한다. 이 시의 "내 귓바퀴가 굴러갔다"도 그렇고, 다른 당선작 「소녀는 북풍을 타고 날아다녔다」 에도 "귀에 태엽을 감고 살바람과 들판을 달렸다", "손을 뻗으면 공중에서 일렁이는 귀들"이란 시구가 있다. 그에 대한 해석이 난해한데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시인으로부터 직접 귀가 전하는 의미에 대해 얘기를 듣고 싶다. 임종명 (네이버 블로거 ‘숲속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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