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호(號) 一. 號의 意義와 性格 號는 名이나 字 外에 누구나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稱號로서, 英語의 Pen name이나 Pseudonym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雅號와 堂號로 나누어, 雅號란 藝術家들이 詩文이나 書畵등에 쓰는 本名 外의 優雅한 號라는 뜻으로, 堂號는 本來 堂宇의 名稱이지만 이것이 그 堂宇의 主人을 나타내는 名稱으로 쓰였다. 後世에는 號․雅號․堂號등이 모두 같은 의미로 쓰여졌으므로 本書에서는 號라는 稱號로 一括하여 표시하고자 한다. 號는 무엇 때문에 짓게 되었는가. 대체로 隱士들이 자신의 姓名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號를 짓고 이름을 감춘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중국 戰國時代에 시작되어, 奏의 甘茂가 渭南 陰鄕의 樗理에서 살았으므로 自號를 樗理子라 하였고, 寒泉子, 鬼谷子를 비롯하여 赤松子․河上公등이 모두 이런 類이며, 漢 高祖 時에 太子를 도왔던 商山 四皓인 東園公․角里先生․綺里季․夏黃公 등도 사람들이 그들의 성명을 알고자 무수히 노력하였으나 끝내 알 수가 없었고 別號만 전해오는 인물들이다. 晉代에 이르러 名을 숨기고 號를 짓는 이런 풍조가 차츰 일반화되어 陶淵明이 五柳先生․陶弘景이 華陽隱居․鄭道昭가 中岳先生이라는 號를 갖게 되었고, 唐代에는 賀知章이 四明狂客․張志和가 湮波釣叟 및 玄眞子라는 號를 가졌는데, 이들 號는 모두 벼슬하지 않고 隱居하거나 벼슬을 버리고 田園으로 退歸한 뜻을 나타낸 호들이다. 宋代에 이르러면 호를 짓는 일이 점차 일반화되어 達官한 貴人들도 號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歐陽修가 六一居士․王安石이 半山老人․蘇軾이 東坡居士․黃廷堅이 山谷道人이라 하였으며, 明․淸代에는 號를 갖는 기풍이 더욱 만연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호를 갖게 되었고, 一人이 수십종의 호를 갖기도 하였다. 號는 본래 中國에서 書齋나 亭子․別堂․住居․出生地등에 緣由해서 붙인 이름을 作家의 別명으로 하여 詩文이나 書畵 등 作品의 署名에 많이 썼던 것인데, 宋代부터 號의 使用이 普遍化하면서 前述한 바와 같이 字까지 避諱하게 되자, 號는 누구나 거리낌없이 부를 수 있는 가장 널리 불리는 칭호로 바뀌게 되었다. 宋代에 字를 諱한 例를 보면 ‘朱子가 말하기를,……“지금 사람들은 웃어른들을 감히 字로 부르지 못하고「몇째어른」등으로 부른다.”하였다.’ 한 것을 들 수 있다. 廣義의 號 속에는 別號․宅號․諡號․佛家의 法名 등도 포함시킬 수 있다. 別號는 本人의 自稱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性格․處地․容貌등의 특징을 따서 他人이 지어 부르는 別명과 같은 號를 말하며, 號를 通稱해서 명과는 別途로 부르는 칭호라 해서 別號라고 부르기도 한다. 宅號는 有명人士의 家屋의 位置를 그 사람의 號로 부르는 것으로 積善洞大監宅․嘉會洞判書宅등으로 불렀으며, 出家한 女人에게 親庭의 地명을 붙여서 忠州宅․公州宅등으로 부른 것도 역시 宅號라 하였다. 法명은 僧명이라고도 하며, 佛門에 歸依하여 僧侶가 된 사람에게 得度式때에 宗門에 俗명 代身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本考에서는 宅號․法명등은 論及하지 않고 諡號는 章을 別設하여 說明하고자 한다. 上述한 바와 같이 號는 가장 보편적으로 불리어지는 칭호로서, 연령이나 性別이나 地位에 따른 제약이 전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지어 쓸 수 있었으며, 15才에 夭折한 趙九鎭의 號 聽涼軒과 成世渟의 號 竹軒 등 數例가 號譜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少年時부터 號를 지었던 일도 있었던 듯하다. 號의 使用이 一般化되면서부터 成人의 명은 君師父 外에는 부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것이 號의 사용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號의 사용이 보편화되자 字까지 諱하게 되었고, 字를 諱하게 되자 號의 사용은 더욱 促進되었던 것이다. 이 結果 後世人들도 先人들의 명이나 字보다는 號를 더 잘 알게 되었다. 韓濩보다는 韓石峰으로, 李滉보다는 李退溪로, 李珥보다는 李栗谷으로, 丁若鏞보다는 丁茶山으로 더 많이 부르고 기억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만을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을 缺禮로 알았으므로 號가 없는 사람은 諡號를 붙여 부르거나(例 : 崔文昌致遠), 官職명을 붙여서 불렀고(例 : 鄭鋉議知常․金員外克己), 시호나 관직도 없는 사람은 先生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불렀다(例 : 康先生日用). 이를 통해서도 우리의 옛 先人들이 이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었는가를 알 수 있다. 號는 本人도 자신의 명이나 字대신 사용하였고, 他人들도 명字대신 불러주는 것이 一般的인 통례이었다. 그러나 本人은 전혀 사용한 일이 없는 號를 他人들이 널리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麗末의 儒學者 朴尙衷을 世人들이 潘南先生이라 부른 것이 이런 例이다. 또한 後世에 전해오는 號 가운데 堂額으로 전해 오기는 하나 本人이 生時에 사용한 일은 없는 것도 있으니, 成三問의 梅竹軒․尹宣擧의 山泉齋등의 號가 이런 類이다. 寒微한 家門에서 顯達한 人物이 나온 경우 자신의 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이미 死亡한 祖上의 字나 號를 지어 族譜를 비롯한 各種文獻에 登載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二. 時代別 號使用의 推移 (1) 三國 및 統一新羅時代 中國에서는 唐代부터 一部 人士들이 號를 지어 쓰기 시작하였다. 唐代 人物들의 號 使用을 例示해 보면, 初唐四傑의 一人이 盧照隣(641~680)의 幽憂子․盛唐代 李白(701~762)의 靑蓮居士 또는 謫仙人․賀知章(659~744)의 四明狂客․晩唐代 李商隱(813~858)의 玉溪生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號가 宋代부터는 많은 人士들에 의하여 사용되었고, 이러한 作號경향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羅代부터 自稱 또는 他稱의 號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三國史記 列傳 卷1~10에 등장하는 人物 62명의 記錄 가운데「號」라는 말이 나타나 있는 사람은 元曉․聖覺․百結등 3인이다. 元曉(617~686)에 관한 기록을 보면, 처음 僧侶가 되어서는 佛書에 널리 해박하였고, 그후 환속하여 스스로 號를 小性居士라 하였다. 元曉가 이미 戒律을 어기고 聰을 낳은 이후에는 俗服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號를 小性居士라 하였다, 하였고, 號譜에도 ‘小性居士薜思 僧명元曉……’라 하였으므로 小性居士라는 稱號는 元曉(俗姓명 薜思)가 自作하여 自稱한 號로 보아야 한다. 居士라는 稱號는 佛徒의 뜻도 있으므로 小性居士라는 稱號도 法명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上記 二種의 史書에 失戒後에 自號를 小性居士라 지었다고 하였고, 法명은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法명이 아닌 號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며, 元曉는 7세기에 활약했던 인물이므로 우리나라에도 7世紀 後半에는 號를 짓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어머니가 늙고 병이 들어 蔬食을 하기 어렵게 되자 割服肉以養母하였다는 孝子 聖覺(生年 不明)이 ‘世間의 명譽와 벼슬을 즐겨하지 않고 스스로 號를 居士라 하였다’ 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곳의 居士라는 稱號는 聖覺이 一生동안 不하고 野人으로 지내었으므로 隱居하는 선비라는 뜻으로 쓴 것일 뿐이므로 이를 號로 보기는 곤란하다. 百結先生에 대하여는, 狼山 아래에 살았는데 가정이 極貧하여 옷을 여러 군데 기운 자국이 마치 메추리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아서 당시 사람들이 號를 東理 百結先生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一生을 빈한하게 지낸 音樂家로서 碓樂을 作曲하였다고 전해오는 이 사람은 姓명이 不傳하고 百結先生이라는 稱號만 전해오고 있다. 杜甫의 詩「北征」에도 ‘經年至茅屋 妻子衣百結’이라는 句가 있고, 蘇軾의 詩「薄薄酒」에도 ‘珠襦玉匣人祖送歸北邙 不如懸鶉百結坐負朝陽’이라는 句가 있는 것으로 보아 「百結」은 예로부터 貧者 또는 乞人의 뜻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百結先生이란 당시의 世人들이 부르던 그의 別號이었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 强首傳에, 太宗大王이 즉위하였을 때 唐에서 使臣이 이르러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으므로 王이 불러서 물어보니 王 앞에서 한 번 보고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막힘이 없자 왕이 놀라워하고 기뻐하며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姓명을 물었다. 대답하기를,“臣은 본래 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을 牛頭라 합니다.”하였다. 王이 “卿의 頭骨을 보니 强首先生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오.”하고 唐 皇帝에게 보낼 回書를 짓게 하니, 글이 공교롭고 뜻이 극진하여 王이 더욱 기특하게 여기며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任生이라고만 불렀다.
하여, 太宗武烈王이 任牛頭의 特異한 頭象을 보고 强首先生이라고 稱號를 지어 주었다 하였으니, 强首도 容貌의 특징에 맞추어 지은 일종의 別號라고 볼 수 있다. 數種의 號譜에서 金庾信의 號를 龍華香徒라 하였다. 그러나 龍華香徒란, ‘公의 나이 15세에 花郞이 되자 당시인들이 즐겨 복종하며 그 무리를 龍華香徒라 불렀다.’ 한 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아 金庾信이 이끌던 花郞徒의 명칭이므로 이를 그의 號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薛聰의 號를 冰月堂이라 한 기록도 散見되나 그 典據를 찾을 수가 없다. 한편 三國遺事에 등장하는 說話의 主人公․鄕歌의 作家 또는 鄕歌와 관련이 있는 이름들인 淵烏郞․細烏女․水路夫人․忠談師․希明․蛇福․月明師․融天師등을 비롯하여 많은 人物의 이름이 說話나 鄕歌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實存人物의 實명인지가 의심스럽고, 만약 실존인물이었다면 이들의 명칭도 그의 행적이나 설화에 맞추어 지은 別號 또는 別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高麗 및 朝鮮時代 高麗時代 人物들의 號 使用에 관하여는 前章에서 字 使用의 調査對象으로 삼았던 507명을 그대로 대상으로 하여 時代別로 分類 考察하였다. 이들 가운데 10世紀의 人物 23명中에는 徐熙의 號 福川 外에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11世紀부터 13世紀까지 300年 사이에는 總調査人員 282명中 朴寅亮(小華)․崔冲(月浦․惺齋․放晦翁)․金君綏(雪堂)․鄭知常(南浦)․李䫨(金剛居士)․尹彦頣(金剛居士)․李資賢(息庵)․高兆基(雞林)․金富軾(雷川)․崔讜(雙明齋)․李仁老(雙明齋)․李奎報(白雲居士․止止軒․三酷好先生․南軒丈老)․崔滋(東山叟)․金坵(止浦)등을 비롯한 20명(조사대상자의 7%)만이 號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어 著명한 文人들 中의 一部가 號를 지어 쓰기 시작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上記人들의 號 가운데 朴寅亮의 號로 되어 있는 小華와 鄭知常의 南浦 및 李仁老의 雙明齋는 이를 이들의 號로 인정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後世의 一部 典籍에 朴寅亮의 號를 小華라 하게 된 것은, 文宗 34年에 朴寅亮의 戶部尙書 柳公과 함께 宋에 使臣으로 갔는데……金覲도 이 행차에 참여하였다. 宋人들은 寅亮과 覲이 지은 尺牘과 表狀과 題詠을 보고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二人의 詩文을 간행하고 小華集이라 하였다.
한대서 연유하였다. 그런 이곳의 小華集은 小中華人(高麗人)의 文集을 의미하므로 이를 朴寅亮의 號로 보는 것은 不當하다. 鄭知常의 號를 南浦라 한 것도 근거가 없으며, 그의 詩에 南浦라는 詩語를 頻用하였는데 이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李仁老의 號를 雙明齋라 하는 것은 그의 子 李世黃이 지은 破閑集序文에 李仁老가 雙明齋集을 撰하였다고 한데 연유한다. 그러나 당시 執權武臣의 총애를 받던 崔讜이 致仕하여 70이 넘었는데도 두 눈이 밝아 雙明齋라 堂號를 정하고 老退한 高官들과 嗜老會를 조직하여 詩와 바둑으로 소일하면서 당시 젊은 文人이었던 李仁老에게 이들이 雙明齋에서 唱和한 詩集을 편찬하도록 한 것일 뿐이므로 雙明齋는 崔讜의 號요 李仁老의 號가 아니다. 그후 朱子學 學風이 傳來하여 퍼지기 시작한 14世紀부터 號의 사용도 본격화하기 시작하여 14世紀 前半期에 이르면 조사인원 87명中 18명(20.7%)이, 14世紀 後半期에는 조사인원 116명中 43명(37.4%)이 號를 사용하여, 字를 사용한 인원이 증가하는 시기와 號를 사용한 人員이 증가하는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近世朝鮮時代의 號 使用에 대한 시대별 고찰을 위해서 韓國人명大事典附錄 韓國人物年表에 수록된 人物中 1401年부터 1650年까지 250年間에 활약한 人物 1622명을 조사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字와 號 및 諡號를 조사하였다.(歿年中心으로 調査하였음). 그 以後 朝鮮朝末까지의 字와 號 사용은 17世紀 前期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1650년까지의 人物들로 조사를 종결하였다. 麗代의 人物 507명과 朝鮮前期의 人物 1622명, 計 2129명의 字와 號 使用者數를 表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字와 號 사용을 함께 표로 만든 것은 양자의 비교에 편의를 제공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다음 表를 通하여 보면 1300年代부터 字와 號의 使用者數가 急激히 增加하여 1600年代에 이르면 字의 使用率이 98.1%로, 號의 使用率이 81.5%로 상승하여 調査者들 가운데 극소수를 제외한 大部分이 號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朝鮮時代의 人物만을 文臣과 武臣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아래에 提示한 두 表(별표2)와 같이 字와 號 모두 文臣들이 武臣보다 使用率이 높다. 이 두 表로 보아 字와 號는 文臣들이 武臣들보다 더욱 즐겨 使用한 것을 알 수 있으며, 特히 號는 使用率이 가장 높았던 때도 武臣들은 50%에 未達한다. 그 代身 號가 없는 武臣들 가운데 國家로부터 諡號를 받은 사람들의 비율은 別表 5와 같이 文臣들보다 높다. 이러한 事實을 通하여 武臣들이 文臣들에 比하여 諡號는 더욱 많이 받았음도 알 수 있다.
시대별 자 및 호 사용자 조사표<별표1> (단위:%)
文․武臣別 字 및 號 使用比率<表2> (괄호안의 단위 : %)
지금까지 시대별로 호의 사용에 관하여 고찰한 것을 정리하여 보면, 삼국통일전후부터 간헐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호가 여말부터 사용자가 증가하여 1600년대에 이르면 조사자의 8할 이상이 호를 가지게 되며 문신만으로 본다면 9할 이상이 호를 가져 호의 사용도 보편화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Ⅲ. 作號 法則 號를 지으려면 자기가 짓는 號에 어떤 뜻을 담고자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즉 號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號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作號者들이 이러한 몇 가지 유형에 맞게 號를 지어서 이것을 호를 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에 이르렀으므로, 이것을 作號法則으로 보고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作號法則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李奎報(1168~1241)이었다. 옛 사람 중에 號로써 명을 대신한 사람이 많았다. 거처하는 바를 따라서 號로 한 사람도 있고, 그가 간직한 것을 근거로 하거나 혹은 얻은 바의 실상을 호로 한 자들도 있었다. 王績의 東皐子․杜子美의 草堂先生․賀知章의 四明狂客․白樂天의 香山居士 같은 것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을 따라서 이를 호로 삼을 것이고, 陶潛의 五柳先生․鄭熏의 七松居士․歐 陽子의 六一居士는 모두 그들이 가진 것을 근거로 한 것이며, 張志和의 玄眞子․元結의 漫浪叟는 얻은 바의 실상(도달한 경지)들이다. 하여, 號에는 居處하는 곳을 號로 삼은 것, 所有한 物을 號로 삼은 것, 到達한 境地를 호로 삼은 것 등이 있다고 하였다. 곧 號를 지으려면 이 세 가지 법칙 가운데 하나에 맞도록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本攷에서는 이들 用語를 약간 바꾸어 就所居而號之者를 所得한 實相(到達한 境地)뿐 아니라 도달하고 싶은 경지까지 포괄할 수 있는 所志以號로 命명하고, 그가 처한 처지를 號로 한 所遇以號를 추가하여 4個條項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所處以號 所處以號는 自身이 生活하고 있거나 因緣이 있는 處所(地명)로 號를 定한 것으로 先人들의 號 中에는 많은 수가 이러한 方法으로 지어졌다. 자신이 거주하거나 혹은 인연이 있는 마을이름(村․里․洞․州․郊 등의 명稱이 쓰여진 號)이나 山 혹은 골짜기 이름(山․峰․巖․岡․嶽․谷)이나 물이름 또는 이와 관련이 있는 지명(溪․海․江․湖․浦․州․川․潭)으로 號를 삼은 예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러한 號들이 處所以號에 속한다. 所處를 號로 定한 것을 例로 들어보면, 鄭道傳의 三峰은 丹陽의 島潭三峰을, 李滉의 退溪나 陶山老人은 安東의 陶山과 退溪라는 地명을 號로 한 것이다. 李珥의 號인 栗谷과 石潭은 坡州의 栗谷과 海州의 石潭을, 柳馨遠의 호 潘溪는 扶安의 愚潘洞을 따서 지은 것이다. 朴趾源의 號 燕巖은 그가 거주하던 金川 燕巖을, 丁若鏞의 號 茶山은 그가 19年間 謫居하던 康津의 茶山을 自號로 한 것이다. 이렇게 地명을 그대로 號로 使用한 것들은 當時 世人들이 기억하고 부르기가 便利하였으리라고 보여지며, 號로 사용하는 사람이 居住하는 處所를 표시하는 것 外에는 主觀的인 뜻이 號속에 包含되어 있지 않은 것이 特徵이다. 그러나 所處를 號로 한 경우에도 主觀的인 意圖가 나타난 例가 간혹 발견된다. 스스로 世人을 등지고 隱居할 곳을 찾아 卜居하면서 그 地명을 自號로 한 경우에는 隱遁의 뜻이 號 속에 含有되어 있기도 하다.
松山 趙狷은 字가 從犬으로 平壤人이다. 初명이 胤이었는데 高麗가 亡하자 명과 字를 바꾸었으니 개가 主人을 그리워하는 의리를 취한 것이다. 淸溪山 에 은둔했을 때 太祖가 친히 왕림하자 다시 陽州 松山으로 피하였다. 松山으로 號를 한 것은 松에서 凋落하지 않음을 取하고 山에서 옮겨가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하여, 趙狷이 所處로 號를 하였으면서도 地명의 字意로 節義까지 나타내어 그의 號에는 所志까지 含有되어 있다. 谷雲 金壽增은 性格이 매우 淸高하였으며 春川의 谷雲에 隱居하였는데 利益을 도모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孤靑樵老 徐起가 만년에 公州 孤靑山 아래에 卜居하자 四方의 선비들이 다투어 우러러보며 그의 門下로 모여드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였는데, 上記 金壽增의 號 谷雲은 所處로 지은 것이나 隱遁의 뜻도 나타내고 있으며, 徐起의 號 孤靑도 所處로 지은 것이나 世俗에 휩쓸리지 않고 살려는 意志가 나타나 있고, 이에 樵老를 덧붙여서 微賤한 身分이어서 宦路에 진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까지 나타내어, 所處以號 하였으면서도 所志와 所遇까지 나타내고 있다.
(2) 所志以號 所志以號는 號속에 자신이 목표로 삼아 도달한 경지 또는 指向하고자 하는 目標와 意志가 담겨진 號이다. 즉 이루어진 뜻이나 이루고자 하는 뜻을 號로 한 것이다. 先人들의 號 가운데 多數가 所志를 號로 한 것들이며 이런 類의 號에는 修身의 뜻을 나타낸 것이 가장 많고 隱遁이나 風流를 나타낸 號들도 흔히 발견되며 諧謔的인 성격을 띤 것들도 간혹 발견된다. 所志以號의 예를 들어보면, 李奎報는 자신의 號를 白雲居士라 한 이유를, 白雲은 내가 본받고 싶은 것이다. 본받고자 하여 배운다면 비록 그 實相을 얻지 못한다해도 유사하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구름이라는 것은 뭉실뭉실 한가히 떠서 산에도 막히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표표히 동서로 떠다니면서 행적이 구애받음이 없고 경각으로 변화해서 그 始終을 알 수가 없다. 油然히 걷히는 것은 높은 뜻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숨는 기상이며, 비를 내려서 마른 생물을 소생시킴은 仁이요, 와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고 가면서도 미련을 두는 바가 없음은 通이다. 구름의 靑黃赤黑色은 그 正色이 아니요 華彩없는 白色만이 正色이다. 그 德과 色이 이와 같으니 그를 본받아 배워서 세상에 나아가면 萬物에 恩澤을 입히고 들어와서는 마음을 비워서 그 결백을 지키고 正常에 處하여,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仙境에 들어가게 된다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알 수 없을 것이며, 이르게 된다면 옛 성인이 얻은 實相에 거의 가깝게 되지 않겠는가. 或人이 묻기를, “居士란 칭호는 무엇인가.” 대답하기를, “或 山에 居하기도 하고 或 집에 居하기도 하는데, 오직 道를 즐길 수 있게 된 이후에야 호로 할 수 있는데, 나는 집에 居하면서 道를 즐기는 자이다.”하였다. 하여, 流麗한 散文으로 自號를 白雲居士라 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구름의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음․변화가 자재함․만물에 은택을 입힘․세상에 초연함․집착하는 바가 없음 등을 연모하고, 華彩없는 白色이 구름의 正色이므로 號를 白雲이라 하고, 자신은 居家하면서도 道를 즐기는 사람이므로 이에 居士를 덧붙여 白雲居士라 하였다는 것이다. 我國 性理學의 導入者 安裕가 號를 晦軒이라 한 것은, 젊어서부터 性理之學을 좋아하여 늘 晦庵의 畵像을 걸어놓고 尊慕의 뜻을 표하며 그 때문에 號를 晦軒이라 하였다. 하여, 性理學을 좋아하고 朱子를 존경하기 때문에 朱子의 號 晦庵을 모방하여 自號를 晦軒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李齊賢은 號를 櫟翁이라 한 이유를, 대저 櫟자에 딸린 樂은 聲部이다. 그러나 재목이 못되기 때문에 害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나무에게는 즐거워할 만한 일이므로 이것이 樂자가 딸린 이유도 된다. 내 일찍부터 大夫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스스로 화를 면하고 본성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號를 櫟 翁이라 하였는데 행여 재목감이 못되어 天壽는 누릴 수 있으리라고 여겨서였다. 하여, 가죽나무가 쓸모 없는 나무이기 때문에 木手의 도끼에 찍힘을 당하지 않고 天壽를 다할 수 있는 것과 같이 自身도 잘난 체 하지 않고 훌륭한 人才가 못된다는 마음가짐으로 亂世에 身命을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櫟翁이라 號를 지었다고 하였다.
栗谷의 母堂 申氏의 號 師任堂은 胎敎로 훌륭한 아들을 낳아 聖人으로 키운 周 文王의 어머니 太任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이런 目標下에 栗谷을 양육하였기 때문에 朝鮮의 代表的인 儒賢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宋純은 老退後에 潭陽에 亭子를 짓고, 俛仰亭이라 편액을 써서 단 후에,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 있으며 그 가운데 정자가 있어 浩然한 기상이 일어난다”하여, 天地를 俛仰하며, 浩然之氣를 기르고자 號를 俛仰亭이라 定했다고 하였으며, 張仲擧라 以存堂이라 自號한 이유를 燕巖 朴趾源은,…한 방을 청소하고 문을 닫고 발을 늘이고 살면서 以存이라 크게 써서 堂額을 걸어 놓았다. 주역에, “용과 뱀이 蟄居하면서 몸을 보존한다.”하였는데 이에서 취한 것인 듯하다. 하여, 張仲擧는 용이나 뱀이 겨울에 蟄居해서 몸을 보존하듯 存身을 위해서 隱遁 蟄居하겠다는 뜻으로 周易의 ‘龍蛇之蟄 以存身’에서 以存을 따다가 號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丁若鏞의 號 與猶堂도 老子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西隣’에서 與와 猶를 따다 지은 것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茶山의 人生을 살얼음판을 건너듯 四方의 敵國을 대하듯 조심하며 살겠다는 뜻을 이 號로 표현한 것이다. 所志로 號를 삼은 例는 일일이 枚擧할 수 없을 정도로 그 例가 많다. 歲寒堂(安宗道), 後凋堂(金富弼), 寒松堂(尹哲)등은 論語의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에서 따서 號로 삼은 것이고, 三省齋(鄭崇祖)는 論語의 ‘曾子曰 吾日三省五身……’에서 訥齋(張沆․李芮․朴祥․梁誠之), 訥庵(金瓚), 訥軒(李思鈞), 毅齋(金悌甲)등은 論語의 ‘剛毅木訥近仁’에서, 蠱齋(崔淑生), 遯齋(成世昌), 頤齋(車軾․崔來吉), 艮齋(朴應南․田遇), 巽齋(金九容․金若恒)등은 周易 卦명에서, 惕若齋(金九容․金若恒)는 周易의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에서, 日新堂(李天慶)은 大學의 ‘日新 日日新 又日新’에서 澹簡溫齋(金鍾厚)는 中庸의 末章에서 따다가 지은 號로서 그 文句가 상징하는 뜻을 수양의 지표로 定한 것이다. 그밖에 知足堂(趙之瑞․袞南․權讓), 存養齋(李季甸), 好學齋(閔箕), 退修菴(趙聖復), 竹松堂(南景昌)등의 號도 修身이나 節義를 뜻하는 것들이다. 隱逸이나 風流的인 뜻으로 지은 號로는 逍遙堂(權綸․朴世茂), 撫松軒(孫天佑), 悠然堂(金大賢), 忘憂堂(郭再佑), 忘機堂(曺漢輔), 無閔堂(林瑋․朴絪), 逸休堂(李䎘), 茅齋(李弘宇), 醉菴(李洽), 忘世亭(沈璿), 風月亭(月山大君), 風詠亭(金彦琚), 無愁亭(兪最基), 下鷗亭(趙應卿)등을 列擧할 수 있으며, 大笑軒(趙宗道), 醉夢軒(吳泰周)등은 諧謔的 諷刺的인 뜻을 지닌 號로 볼 수 있다. 이러한 號에는 世俗의 風塵에서 超脫해서 處士나 禪家的인 생활을 하고자 하는 意志가 담겨져 있다. 우리의 先人들은 顧命思義라 하여 修養이나 隱遁 또는 風流의 뜻이 담긴 명字나 號를 지어놓고 항시 이를 돌이켜보면서 그 속에 담겨진 뜻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生活의 座標로 삼았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所志로써 號를 삼은 것이 많게 되었고, 각도를 달리하여 고찰해 본다면 號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所志가 함유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3) 所遇以號 號를 짓는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號로 표현한 것을 所遇로 號를 定한 것이라 할 수 있다. 所遇로 지은 號 가운데는 貴해졌거나 富者가 되었거나 健康해진 것을 나타내는 號는 드물고, 늙음․괴로움․가난함․병들음․외로움․허무함 등을 나타내는 號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號들은 대체로 隱(碧山淸隱 金時習․猊山農隱 崔瀣․樵隱 李仁復․漁隱 閔霽․醉隱 宋世林등), 翁(痼翁 朴世堅․病翁 申弼貞․棄翁 兪彦民등), 叟(薄田耕叟 安繼宋․樵叟 郭鏡․江叟 林薰등), 老(野老 李渟등), 夫(漁夫 成孝元등), 居士(雲水居士 金光燦등), 散人(江湖散人 金叔滋등), 山人(淸平山人 李資玄등), 布衣(直峯布衣 金宇顒등), 野人(葵藿野人 安應世등)등의 字가 붙은 號들이다. 申從頀의 號 三魁堂은 19세에 司馬試에 壯元하고 成宗朝에서 大小重試에도 壯元을 하여 科擧에 세 차례 魁科로 及第하였다 하여 이를 號로 定한 것이며, 金大有는 나이가 70이 넘으니 壽가 足하고 司馬試와 大科에 合格하여 臺省과 州縣의 벼슬살이를 하였으니 榮譽가 足하고 朝夕으로 酒肉의 供饋를 받으니 이 또한 不足하지 않다 하여 號를 三足堂이라 하였다. 이 두 사람의 號는 例外로 자신이 처한 자랑스러운 처지를 號로 한 것이다. 文益漸은 항상 근심하는 것이, 나라의 국운이 떨치지 못함․聖學이 泯滅되려함․자신의 道가 서지 못함 등 세 가지였으므로 號를 三憂居士라 하였고, 金籥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鄭 아무개는 나를 惡者라 하였고 纘男은 나를 怪者라 하였고 옛 친구는 나를 狂者라 하였고 白江은 難者라 하였고 潛谷은 岡者라 하였으니 五者翁으로 號를 삼겠다.”하여, 自身에 대한 世人의 다양한 評을 모아 號로 삼기로 하였다. 許馝은 平生의 嗜好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고 담배를 한 대 피워보면 곧 그 産地를 분별할 수 있었으므로 號를 煙客이라 하여 자신의 嗜好를 號로 삼았고, 李聖任은 筆翰․文辭․言語․歌聲․容貌 등 다섯 가지가 모두 玉과 같다 해서 호를 五玉이라 하였으니, 이런 號들도 所遇以號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所蓄以號 所蓄以號는 간직하고 있는 物가운데 특히 玩好하는 것으로 號를 삼은 것이다. 前述한 白雲居士語錄에서는 中國 陶潛의 五柳先生․鄭熏의 七松處士․歐陽修의 六一居士 등을 이런 號의 例로 들어 놓았다. 五柳先生과 七松處士는 각기 宅邊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이를 自號로 한 것이고, 六一居士는 歐陽修가 가진 것으로는 一萬卷의 藏書․一千卷의 集古錄(구양수가 경전을 주석한 책)․一章의 琴․一局의 碁․一壺의 酒와 一老翁(구양수 자신)을 들 수 있다하여 號를 六一居士라 하였다는 것이다. 我國人의 號 가운데도 자신의 玩好하는 物을 號로 삼은 예가 號譜에 散見되는데 몇 가지를 例示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毅宗時에 참소를 당하여 東萊에 유배된 鄭叙는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고 거문고 타고 시를 읊는 것으로 戀君之情을 달래면서 ‘築亭種瓜’를 따서 號를 瓜亭이라 하였고, 許震은 居所에 우거진 대숲이 있었는데 壬辰亂時에 불타 없어지자 이를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짓고 號로 삼아 竹村이라 하였고 당시의 명公들인 漢陰․月汀․西湖․東嶽 등이 모두 和詩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는 灰燼되어 없어진 玩好物에 대한 아쉬운 마음으로 이를 號로 삼은 것이다. 玄若昊는 雅操와 德行이 있는 사람으로 몸소 常綠樹인 松․栢․竹을 심고 自號를 三碧堂이라 하자 三淵 金昌翕이 三碧堂記로 지어 이를 찬양하였다 하며 文益周는 집 앞 연못의 붉은 蓮꽃이 白色으로 변하였으므로 號를 白蓮堂이라 하였다 한다. 崔澐은 집안에 연못이 셋이 있어서 世人들이 三池先生이라 불렀고, 權지는 儒城 村舍에 은거하며 한가히 지내는데 짙푸른 솔숲이 집을 에워싸서 속세의 티끌 하나도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號를 萬松處士라고 불렀다 한다. 以上에서 살펴 본 所蓄以號들이 松․竹․栢․蓮․瓜․池등을 號로 하였고, 이들이 隱含하고 있는 象徵이 作號者의 뜻과 合致하여 이를 號로 삼은 것이므로 所蓄以號들에도 作號者의 所志가 內含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以上 4種의 作號法則 가운데 作號者의 獨創性과 個性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所志以號이고 沒個性的 非獨創的인 作號方法이 所處以號이며, 위에 열거한 4種의 法則中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號가 있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호로는 보기가 곤란하다. 어떤 人物의 居住地(所處)가 바뀌었거나 뜻하는 바(所志)나 처한 상황(所遇)이나 玩好하는 物(所蓄)이 바뀐 경우 그에 맞는 號를 새로 지어서 쓰는 일이 흔히 있게 되어 一人이 數種의 號를 갖거나 심한 경우에는 一人이 數十種의 號를 지어 쓰기도 하였다. 金正喜는 阮堂․秋史․禮堂․詩庵․果坡․老果․揅掾齋 등 500여종의 호를 사용하였다 하며, 이것이 一人이 여러 種의 號를 사용한 대표적인 例이다. 그 外에 李奎報는 三酷好先生․白雲居士․止止軒․四可齋․自娛堂․南軒丈老등의 號를, 金時習은 贅世翁․梅月堂․淸寒子․雪岑․東峰․碧山淸隱등의 號를, 許筠은 喬山․蛟山․惺所․鶴山등의 號를, 李滉은 芝山․退溪․陶叟․陶山老人․淸凉山人․退陶晩隱등의 號를, 李珥는 栗谷․石潭․愚齋등의 號를 사용하였으며, 林悌는 白湖․謙齋․嘯癡․楓江등의 號를, 李學逵는 洛下生․春星堂․匏花屋․田樹屋등의 號를, 李書九는 薑山․惕齋․素玩亭․席帽山人등의 號를, 丁若鏞은 三眉․茶山․籜翁․俟菴․鐵馬山樵․與猶堂등의 號를 사용하였는바, 이들이 여러 種의 號를 갖게 된 이유도 所處․所志등의 變化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같은 號를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일도 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號를 모방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所志나 所遇등이 같아서 자연히 같은 號를 쓰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같은 號를 多數人이 共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교통통신이 불편했던 과거에는 자기의 號와 같은 號를 가진 사람이 과거나 현재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니 歷史上 저명한 인물이 사용하여 世人이 공지하게 된 號를 後世사람이 自號로 하는 예는 극히 드문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이 쓰는 固有한 號를 가지고 싶어하면서도 동일한 號를 衆人이 共用하게 된 이유는 以上에 列擧한 바와 같이 所志나 所遇등이 같아서이거나 他人이 이미 쓰고 있는 號인줄을 몰라서였다고 생각된다. 같은 號를 여러 사람이 共用한 例 가운데 5인 以上이 共用한 號만을 一山文庫所藏本 號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齋라는 號는 13人이 共用하고 있고, 東皐․松坡․松齋는 각각 11人이, 竹溪․竹窓․孤山․謙齋․敬齋등은 9人이, 松巖․南谷․滄州․晩沙․東溪․東岡․訥齋․省菴․松亭등은 8人이, 雲谷․四溪․松菴․栗亭등의 호는 7人이 共用하고 있다. 鳳巖․白石․霞谷․梅溪․秋潭․石門․壺隱․晩悔․龜峰․南坡․逍遙堂․懶齋․艮齋․恥菴등의 號는 6人이, 雲巖․楓巖․愚谷․晦谷․杜谷․東冥․東湖․松溪․南溪․雲溪․寒泉․月潭․柳村․西村․東理․埜隱․九峰․南嶽․松厓․雙淸堂․知足堂․松堂․靜齋․拙齋․竹亭등의 號는 5人이 共用하였다. 5人以上이 共用한 號는 63種이고, 使用者는 415명으로 이 가운데 松溪․松厓․松堂․松巖․松亭․松坡․松齋․竹亭․竹溪․竹窓 등 節義를 상징하는 松字나 竹字를 號로 使用한 사람이 가장 많고(82명), 東溪․西溪․南溪․東湖․西村․東里․東坡․東岡․東皐 등 特定한 地명을 나타내는 號를 사용한 사람이 다음으로 많으며(60명), 그 外의 號들도 대부분이 修身의 뜻을 含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調査를 통해서도 所志以號와 所處以號가 號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四. 號의 分類 (號譜를 中心으로) (1) 號譜 우리나라에서는 數種의 號譜가 傳해오고 있는데 모두 筆寫本인 것으로 보아 印刊된 일은 없었던 듯하다. 現傳하는 筆寫本들에 收錄된 人物들이나 冊의 體裁가 모두 비슷한 것으로 보아 獨創的으로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보고 筆寫한 것으로 推測된다. 號譜의 體裁나 內容을 理解하는데 가장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여러 種의 號譜가운데 단 한 권에만 收錄되어 있는 號譜 凡例이며 그 凡例의 內容은 다음과 같다.
凡例 一. 무릇 號를 記錄하는 方法은 堂字號는 堂字號끼리 모으고, 齋字號는 齋字號끼리 모았으며, 만일 屋盧之屬가운데 각기 한 두 가지씩밖에 없는 號는 각각 그 類에 붙였고, 村里의 山水로부터 그 以下는 모두 이 方法에 의거하였다. 一. 한 사람이 몇 種類의 號를 가진 경우에는 該當된 屬에 모두 記載하였고 事蹟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號에만 記錄하였다. 一. 한 사람이 여러 種類의 號를 가졌다 해도 그 號에 새로운 뜻이 없는 것은 다만 한 號에만 記錄하였다. 예를 들면 尤菴을 或尤齋라고도 하지만 菴字號에 記錄하였으면 齋字號에는 記載하지 않았고, 玄翁을 或 玄軒이라고도 부르지만 翁字號에 記載한 경우에는 軒字號에는 記載하지 않았으며 다른 號들도 모두 이 方法을 따랐다. 一. 號를 가진 사람으로 일찍이 스스로 그 號를 使用한 일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부르기만 한 경우에도 모두 記錄하였다. 李堅幹을 山花先生으로, 朴尙衷을 潘南先生으로 부른 것이 그 例이다. 一. 記載된 號 가운데 혹 堂額으로 傳하여 오기는 하지만 本人이 號로 使用한 일은 없는 것도 있다. 成學士(三問)의 梅竹軒, 尹美村(宣擧)의 山泉齋등의 類가 이런 例이다. 一. 號는 있지만 事蹟을 알 수 없는 者도 간혹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의 이름만 적고 나머지 난은 비워 놓아서 그의 事蹟을 알게 되면 記錄해 넣을 수 있게 하였다. 一. 號를 記錄할 때 단번에 모두 알아서 記錄할 수가 없으므로 간혹 뒤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補充한 곳도 있다. 그러므로 時世의 高下가 차이가 없을 수 없으며 이런 것은 대체로 六一翁 集古錄의 例를 따랐다. 一. 號를 記錄한 사람은 그 世派도 記錄하였는 바 반드시 號가 있는 사람으로 根據를 삼았으며 대체로 科譜에 科學合格者를 根據로 해서 記錄한 例를 따랐다. 一. 어떤 사람의 事蹟을 적을 대에는 襃貶하는 말이 없을 수 없지만 옛 사람의 正論에만 依據하였을 뿐 감히 사사로운 理論으로 비난하는 말은 取하지 않았다.
以上 列擧한 號譜 凡例의 內容을 要約하여 보면 堂字號는 堂字號끼리, 齋字號는 齋字號끼리 모아 놓았으며, 한 사람이 여러 種의 號를 使用한 境遇에는 該當 屬에 모두 記錄해 놓았고 事蹟은 가장 널리 알려진 號밑에만 記載하였다. 한 사람이 비록 여러 가지 號를 使用하였다 하더라도 새로운 뜻이 별로 없는 비슷한 號를 使用한 경우에는 더욱 널리 알려진 한쪽만 記錄하였고, 或 어떤 號를 本人이 自稱한 일은 없고 他人들이 그렇게 부르기만 한 경우에도 모두 記錄하였으며 堂額으로만 傳해올 뿐 生時에는 使用해 본 일이 없는 號들도 收錄하였다. 收錄順序는 屬別로 나누어 時代順으로 記錄함을 原則으로 하였으나 號譜가 一時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長期間을 通하여 補充된 것이기 때문에 時代가 뒤바뀐 경우도 있게 되었고, 行蹟은 客觀的으로 記錄하고자 努力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體裁로 先人들의 號를 실어 놓은 號譜들이 몇 개 圖書館에 所藏되어 있는데 筆者가 閱覽해 본 號譜에 관하여 略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號譜 : 國立中央圖書館 一山文庫室에 所藏된 것으로 天․地․人 三冊으로 되어 있고 3736명의 號가 堂號 齋號등의 順으로 收錄되어 있으며 號와 姓명밑에 細字로 字, 本貫, 官位, 事蹟등을 기록해 놓았다. ㉡ 號譜 : 國立中央圖書館 所藏本으로 四冊으로 되어 있고 3414명의 號가 上記 ㉠과 같은 體裁로 收錄되어 있고 他 號譜에서는 볼 수 없는 號譜凡例가 卷頭에 記錄되어 있다. ㉢ 號譜 : 國立中央圖書館 所藏本으로 六冊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五冊은 上記 ㉠과 같은 方法으로 3775명의 號를 싣고 나머지 한冊은 別冊으로 書畵에 能했던 人物들의 號만을 모은 筆畵家譜로 되어 있다. 이 號譜는 本 論文에 收錄된 號譜 가운데 가장 많은 人物의 號를 收錄하고 있다. ㉣ 號譜 : 서울 大學校 奎章閣圖書館 所藏本으로 禮․樂․射․御․書․數의 六冊으로 되어 있고 第一冊 禮篇은 上記 ㉠ 號譜와 같은 體裁로 3098명의 號를 싣고, 나머지 五冊은 姓氏別로 姓명과 號를 記錄하였다. ㉤ 그밖에 東國명賢號譜, 大東號譜, 朝鮮世家號譜, 文譜 등이 國立中央圖書館에 所藏되어 있다.
(2) 號의 分類 本 章에서 號를 分類하는데 基本 資料로 利用한 것은 一山文庫所藏本號譜이다. 一山庫 所藏本 號譜(以下 本章에서 號譜라 한 것은 모두 一山文庫所藏本을 指稱한다)에는 3,736명의 齋字號, 堂字號, 亭字號 등 295種의 號로 分類하여 수록하여 놓았으며 그 가운데 齋字號가 442명(全 收錄者數의 11.83%)으로 가장 많고, 10명 未滿의 人物이 號로 使用한 字가 243字나 되며 總 收錄人員의 1%인 37명未滿이 號로 사용한 字가 275字에 달하는 것으로 보다 普遍的으로 使用된 號는 20種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295種의 號를 비슷한 類別로 묶어서 屋廬之屬, 山陵巖谷之屬, 村里田野之屬, 河海泉淵之屬, 天日陰陽之屬, 草木禽獸之屬, 器用之屬, 隱逸之屬, 厭世諧謔之屬, 雜號 등 10個의 屬으로 나누어 보았으며, 每 屬別로 統計를 내고 그 特徵들을 列擧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屋廬之屬 屋廬之屬에는 家屋명이나 堂宇명 및 建物에 附屬된 部分의 명稱을 使用한 號들(齋, 堂, 菴, 軒, 窩, 亭字號 등 25種)을 모았으며 이 屬에 該當되는 號를 使用한 사람들의 數는 統計表와 같다(統計表의 使用率은 總員 3,736명의 1%에 해당하는 37명 以上이 使用한 號만 記錄하였다. 以下 諸統計는 모두 同一함).
屋廬之屬統計<表 1>
이 表로 보아 號譜에 記載된 사람들의 號 가운데 약 38%에 해당되는 1,416명이 屋廬之屬에 속한 號를 使用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 屬에 해당하는 26種의 號 가운데 齋, 堂, 菴, 軒, 亭, 窩의 여섯 자를 使用한 사람수가 1,332명으로 이 屬에 包含된 總員의 94.13%(나머지 19種의 號를 使用한 사람 수는 5.87%)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上記 6種의 號가 이 屬을 代表하는 號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6種의 號 중에 齋字號는 號譜에 收錄된 總員의 11.83%에 該當되는 442명이 使用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三字齋號가 1명(澹簡溫齋 金鍾厚), 二字齋號가 雙明齋 崔讜, 保閑齋 申叔舟, 佔畢齋 金宗直등 138명, 一字齋號가 益齋 李齊賢, 惺齋 崔冲, 訥齋 梁誠之, 晦齋 李彦迪, 慕齋 金安國, 企齋 申光漢등 303명이다. 齋字號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널리 使用하던 號이다. 堂字號를 보면 梅月堂 金時習, 淸香堂 尹淮, 虛白堂 成俔, 四友堂 韓明會, 寒暄堂 金宏弼, 晩翠堂 權標, 師任堂 申氏등 二字堂號의 使用者가 287명, 西堂 金誠立, 松堂 趙浚등 一字堂號의 使用者가 40명으로 총 327명이 堂字號를 使用하여 號譜에 收錄된 총원의 8.76%에 該當되어 齋字號 다음으로 使用頻度가 높으며, 號를 통칭 堂號라고도 부르는 것은 堂字號를 비롯한 屋廬之屬의 號가 4割 가까이를 占하고 있는데도 理由가 있다고 본다. 菴字號를 보면, 知足菴 尹忭, 退修菴 趙聖復등 13명이 二字菴號를, 恥菴 朴忠佐, 靜菴 趙光祖, 冲菴 金淨, 自菴 金絿, 省菴 金孝源, 巽菴 沈義謙, 尤菴 宋時烈등 210명이 一字菴號를 使用하여 모두 223명이 菴字號를 쓰고 있으며 295종의 號 중에서 使用頻度가 세번째로 높다. 軒字號를 보면 梅竹軒 成三問, 醉琴軒 朴彭年, 蘭雪軒 許楚姬등 55명이 二字軒號를 使用하였고, 晦軒 安裕, 止軒 李奎報, 桐軒 尹紹宗등 109명이 一字軒號를 使用하여 총 164명이 軒字號를 使用하였으며 여섯 번째로 使用頻度가 높은 號이다. 亭字號는 歸來亭 申末舟, 二樂亭 申用漑, 觀瀾亭 元昊등 42명이 二字亭號를, 稼亭 李穀, 瓜亭 鄭敍, 春亭 卞李良, 浩亭 河崙, 土亭 李之菡등 78명이 一字亭號를 使用하여 都合 120명이 亭字號를 쓰고 있으며 일곱 번째로 使用頻度가 높다. 窩字號는 梅竹窩 盧克誠, 三省窩 洪聖輔, 無悶窩 李相休등 14명이 二字窩號를 使用하였고, 夢窩 金昌集, 養窩 李浚慶, 竹窩 李瑀등 42명이 一字窩號를 使用하여 窩字號를 使用한 사람이 都合 56명으로 使用頻度의 순위는 16위이다. 이상으로 屋廬之屬에 해당되는 號들을 고찰하여 보았다. 이 屬에 해당되는 號가 전체의 약 4割을 점유할 정도로 使用頻度가 높으며 그 가운데 위에 열거한 6種의 號를 使用한 사람이 號譜에 수록된 총원의 35.66%(屋廬之屬의 94.07%)에 해당하는 1,332명으로 이들 6種의 號가 특히 使用頻度가 높은 號들이다.
2) 山陵巖谷之屬 山陵巖谷之屬에 해당되는 號들은 山을 뜻하는 山, 峰, 岡, 巒, 嶽, 崙, 麓등의 號와, 고개나 산길을 의미하는 峴, 嶺, 嶠, 언덕을 의미하는 皐, 阜, 厓, 坡, 丘, 陵, 原, 堤, 墎, 陸, 암석을 뜻하는 巖, 石등의 字를 써서 지은 號들로서 各 號別 使用者數는 아래의 表와 같다.
山陵巖谷屋廬之屬統計<表 2>
이 表에 나타난 바와 같이 山陵巖谷之屬에 해당하는 23字의 號 가운데 巖字號, 峰字號, 山字號, 坡字號, 厓, 皐, 石, 岡字號등 여덟字가 이 屬의 號를 使用한 총 493명중 440명(91.1%)으로 나머지 15종의 號는 통계에서 무시해도 될 만한 미미한 숫자이다. 巖字號를 보면 風巖 金叔滋, 東巖 李潑, 釣巖 李時白, 農巖 金昌協등 105명이 모두 一字巖號를 使用하고 있으며 使用頻度는 9위를 占하고 있다. 峰字號를 보면 三峰 鄭道傳, 龜峰 宋翼弼, 石峰 韓濩, 高峰 奇大升, 霽峰 高敬命, 鶴峰 金誠一, 重峰 趙憲, 芝峰 李粹光등 101명이 一字峰號를 使用하였으며 使用頻度는 11번째에 해당된다. 山字號는 東山 崔滋, 孤山 尹善道, 五山 車天輅, 蛟山 許筠, 鍾山 申潗등 一字山號를 83명이 使用하여 비교적 使用者 수가 많은 편이다. 그 외에 黃岡 金繼輝, 東岡 金宇顒등 岡字號의 使用者가 22명, 東皐 李浚慶, 南皐 周世鵬등 皐字號의 使用者가 29명, 乖厓 金守溫, 西厓 柳成龍등 厓字號의 使用者가 32명, 陽坡 鄭太和, 松坡 崔誠之등 坡字號의 使用者가 39명, 玄石 朴世采, 白石 洪茂績등 石字號의 使用者가 29명으로 이들 5種의 號도 비교적 使用頻度가 높은 號들이다. 山陵巖谷之屬에 해당되는 號를 使用한 사람이 號譜에 수록된 총원의 13.2%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이 屬의 號를 使用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3) 村里田野之屬 村里田野之屬은 居住地域을 나타내는 村, 里, 洞, 巷, 州, 郊등과 農園과 聯關된 園, 圃, 田, 疇, 畦, 畹, 墅등의 號를 모은 속으로서 그 使用者數와 使用率은 다음 統計表와 같다.
村里田野之屬統計<表 3>
이 表에 나타난 바와 같이 村里田野之屬에 해당되는 號 중에는 使用者數로 보아 村字號와 谷字號 외에는 주목할 만한 號가 없다. 村字號를 보면 陽村 權近, 厖村 黃喜, 象村 申欽, 耐村 姜弘立등 113명의 號가 수록되어 있으며 使用頻度가 8위로 使用자가 매우 많은 편이다. 谷字號는 耘谷 元天錫, 大谷 成運, 栗谷 李珥, 荷谷 許封, 柏谷 金得臣, 泉谷 宋象賢, 溪谷 張維, 磻谷 柳馨元, 夏谷 申必淸등 188명의 號가 수록되어 있는 바 谷字號는 使用頻度가 4위로 使用者가 대단히 많은 號이다. 이 외에 圃字號도 藥圃 鄭琢, 農圃 鄭文孚, 同圃 金時敏등 비교적 많은 사람이 使用하였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村字號와 谷字號의 使用者가 많은 것은 (이 屬의 80.6%) 作號時에 自身이 居住하던 地名을 號로 使用한 所處以號의 號가 많았던 것도 이유의 하나이다.
4) 河海泉淵之屬 河海泉淵之屬은 바다(海, 溟), 江(河, 漢, 江), 연못 및 湖水(湖, 淵, 潭, 塘, 沼, 池, 澤), 물가(浦, 洲, 江, 濱, 津, 涯, 渚), 여울(灘), 시내(川, 溪, 磵), 물결(潮, 浪, 波, 瀾), 모래(沙, 磯), 다리(橋, 梁), 섬(島)등 물과 聯關된 號를 모은 屬으로서 이 屬에 해당되는 號를 使用한 사람의 수는 다음 표와 같다.
河海泉淵之屬統計<表 4>
河海泉淵之屬에 해당되는 40種의 號 가운데 가장 많이 使用된 號는 溪字號로서 灡溪 朴堧, 林溪 尹集, 丹溪 河緯地, 退溪 李滉, 牛溪 成渾, 鵝溪 李山海, 沙溪 金長生, 南溪 朴世采등 169명이 使用하여 號譜에 등재된 총원의 4.52%에 달하여 使用頻度는 다섯째로서, 溪字號가 많은 것도 地名을 自號로 한 所處以號의 號를 많이 使用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에 梅湖 陳澕, 白湖 林悌, 星湖 李翼등 69명이 湖字號를, 秋江 南孝溫, 松江 鄭澈등 29명이 江字號를, 石洲 權韠, 三洲 金昌協등 47명이 洲字號를, 福川 徐熙, 遲川 崔鳴吉등 64명이 川字號를, 藥泉 南九萬, 寒泉 宋象賢등 25명이 泉字號를, 花潭 徐敬德, 秋潭 吳達濟등 45명이 潭字號를, 林塘 鄭維吉등 21명이 塘字號를, 白沙 李恒福, 月沙 李廷龜등 29명이 沙字號를 使用하여 湖, 江, 洲, 川, 泉, 潭, 塘, 沙字號등도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使用하였다.
5) 天日陰陽之屬 天日陰陽之屬에 해당되는 號들은 天(天, 日, 星, 奎), 陰陽空間(東, 西, 南, 北, 上, 下, 裏, 前, 邊, 口), 氣候(雨, 雲, 霞, 嵐)등과 關聯된 號들을 모은 것으로서 이 屬에 해당되는 號를 使用한 사람의 수는 다음 통계표와 같다.
天日陰陽之屬統計<表 5>
天日陰陽之屬에 해당되는 20種의 號 가운데 湖陰 鄭土龍, 梧陰 尹斗壽, 漢陰 李德馨, 淸陰 金尙憲등 21명이 陰字號를, 潘南 朴尙衷등 16명이 南字號를, 河西 金麟厚, 沙西 金湜, 洛西 張晩, 魯西 尹宣擧등 19명이 西字號를 使用하여 陰, 南, 西등 所處와 유관한 三個號의 使用者가 약간 많을 뿐 이 屬에 해당되는 號의 使用者는 많지 않다.
6) 草木禽獸之屬 草木禽獸之屬은 草木(松, 竹, 筠, 梧, 菊, 蕉, 蓮, 荷, 籮, 花, 林, 菜, 芚, 草등)과 禽獸 및 昆蟲(鳳, 鶴, 馬, 鹿, 蠹, 蟬, 鵝)에 관련된 號를 모은 屬으로서 이에 해당되는 사람의 수는 다음 표와 같다.
草木禽獸之屬統計<表 6>
草木禽獸之屬에 해당되는 26種의 號 가운데 雲松 姜希孟, 孤松 林慶業등 21명이 松字號를, 孤竹 崔慶昌, 三竹 李弘淵등 14명이 竹字號를 使用하였을 뿐, 나머지 號의 使用者는 모두 한두명에 지나지 않는다. 松字號와 竹字號가 약간 많이 使用된 것은 두 식물이 모두 節義를 象徵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7) 器用之屬 器用之屬통계<표 7>
위의 통계표와 같이 器用之屬에 속한 號는 일상 생활용품의 이름을 붙여서 지은 號들로서 이러한 號의 使用者는 그 수가 극히 적어 총 29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설명을 略한다.
8) 隱逸之屬 隱逸之屬의 號는 은퇴한 노인, 세속을 등진 사람, 在野에서 수양하는 사람 등의 뜻으로 쓰여진 號들로서 아래의 통계표와 같이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이런 類의 號를 使用하였다. 이 속에 해당되는 號 가운데 隱字號, 翁字號, 子字號, 居士號등이 使用頻度가 높은 號들이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使用한 號는 翁字號로서 四字翁號의 使用者가 石磵樓霞翁 趙云汔 1명, 三字翁號가 倻溪散翁 宋希奎, 終南睡翁 李山海등 4명, 二字翁號의 使用者가 贅世翁 金時習, 隱儿翁 成以文, 天放翁 劉好仁등 27명, 一字翁號의 使用者가 拙翁 崔瀣, 櫟翁 李齊賢, 巽翁 周世鵬등 73명으로 都合 105명이 翁字號를 使用하여 전체 號 가운데 使用順位가 10위에 해당된다. 隱字號는 碧山淸隱 金時習, 退陶晩隱 李滉, 猊山農隱 崔瀣등 7인이 三字隱號를, 牧隱 李穡, 陶隱李宗仁, 圃隱 鄭夢周, 冶隱 吉再등 71인이 一字隱號를 使用하여 都合 78명이 隱字號를 쓰고 있다.
隱逸之屬統計<表 8>
子字號는 希夷子 李資賢, 玄洞子 安堅등 52명이 使用하였고, 居士號는 小性居士 元曉, 金剛居士 尹彦頤, 白雲居士 李奎報, 三憂居士 文益漸, 動安居士 李承休등 24명이 使用하여 子字號와 居士號도 使用頻度가 비교적 높다. 隱逸之屬의 號를 使用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통해서도 우리의 선인들은 宦路에 오르는 것보다 處士로서 修身과 後進敎育에 從事하는 것을 더욱 높이 평가했던 思想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9) 厭世諧謔之屬 厭世諧謔之屬은 厭世的, 自虐的, 諧謔的인 뜻을 內包하고 있는 號들을 모은 屬으로 이 屬에 해당하는 號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는 않지만 窮困한 처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러한 號를 使用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 屬에 해당되는 號 가운데는 厭世的이면서 諧謔的인 멋이 가미된 號도 간혹 있으니 夢囈(꿈을 꾸면서 싱긋거린다), 醉啞(술에 취해서 껄껄 웃는다)등이 이런 종류의 號들이다. 厭世諧謔之屬統計<表 9>
10) 雜號 雜號는 어느 속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號들로서 그렇다고 독립적인 명칭을 붙이기도 어려운 분류상의 困難때문에 雜號라 하였을 뿐이요 결코 號 자체가 雜되다는 뜻은 아니다. 雜號는 아래의 통계표와 같이 48자를 58명이 使用하여 통계상으로는 극히 미미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雜號統計<表 10>
본 장에서 분류하여 고찰한 號의 통계를 총괄해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표로 보아 狹意의 堂號라고 부를 수 있는, 즉 建物을 상징하는 號의 使用者가 1,416명으로 총원의 37.90%이고, 거주지나 거주지 주변의 일정지역을 나타내는 號가 대부분인 山陵巖谷之屬, 村里田野之屬, 河海泉淵之屬의 號를 使用한 사람수가 1,548명으로 총원의 42.40%를 점하여 이 두 분류의 號 使用자가 총원의 82.10%인 近 3.000명에 달한다. 이것을 통해서도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이 건물과 관련된 號나 거주지와 관련된 號를 지어 使用하였음을 알 수 있다.
號의 屬別統計<表 11>
한편 號譜에 수록된 총원의 1%인 37명 이상이 使用한 號만 모아서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使用頻度가 높은 號 統計<表 12>
이 통계로 보아 295種의 號 가운데 6.78%에 해당되는 20種의 號를 號譜의 총 수록인원인 3736명의 69.33%에 해당하는 2950명이 使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원의 약 7割에 해당되는 인원이 20種의 號를 使用하였고, 총원의 약 3割에 해당하는 인원이 275種의 號를 使用하였다면 위 총계에 수록된 20種외의 號는 모두 雜號로 보아 통계상으로는 무시해 버려도 크게 不當하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이 통계에 나타난 20種의 號를 다시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齋, 堂, 菴, 軒, 亭, 窩字號 등 건물을 표시하는 것이 여섯字에, 이러한 號를 使用한 사람이 1332명으로 <표12>에 수록된 총원의 51.43%(號譜에 수록된 총원의 35.65%)이고, 溪, 湖, 川, 洲, 潭, 谷, 巖, 峰, 山, 坡, 村字號등 山水 및 村落과 關聯된, 즉 인간의 거주지와 관련된 號가 11種으로서 1023명이 이러한 號를 使用하여 <표12>에 수록된 총원의 39.83%(號譜에 수록된 총원의 27.38%)이며, 翁, 隱, 子등 老退 隱逸의 뜻으로 쓰인 號가 3種으로서 이러한 號를 使用한 사람은 253명으로 <표12>에 수록된 총원의 9.07%이다. 이것을 정리하여 보면 선인들의 號는 건물과 관련하여 지은 號, 거주지와 관련하여 지은 號, 隱逸의 뜻을 나타내는 號 등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장에서 시도한 號의 분류는 號譜에 수록된 號들을 유사한 유별로 묶는 과정에서 귀납적으로 이루어진 분류로서 일면으로는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 점도 있으니, 어떤 사람의 號를 고찰할 때 號에 쓰여진 전부를 대상으로 고찰하지 않고 號의 끝 자만을 보아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본 장에서 시도한 號의 분류는 형식적인 분류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분류를 통하여 作號의 경향이나 作號者들의 嗜好등을 파악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한국인의 호(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