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朴哲淳)을 처음 만난 것은 8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하순께였다. 당시 박철순은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에 몸 담고 있었다. 그가 시즌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0월 중순께였다. 그러니까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만난 거였다. 마침 국내는 프로야구 창립 총회(12월 11일)를 마치고 6개 구단이 선수 영입에 정신이 없었다. 박철순도 서울지역 선수 공개 모집에 신청서를 접수해 놓고 있었다. 이런 틈 새에서 그를 만났으니 할 얘기는 뻔했다.
박철순은 미국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고 여러 얘기를 했다. 그렇지만 내 귀를 때린 것은 너클 볼이었다. 생소했다.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타자 앞에서 불규칙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묘한 볼이라는 것을 알았다.
박철순은 이런 볼로 국내 무대에 선다면 20승쯤은 문제 없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설마 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뛰어 넘어 22연승에 24승을 올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방어율(1.84)과 승률(0.857)에서도 1위를 차지해 투수부문 3관왕에 올랐다. 과연 박철순은 슈퍼스타다웠다. 그러나 박철순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국부 진통제를 맞으며 코리안시리즈에 섰다. 그리고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그가 얻은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허리 디스크로 쓰러져 불사조라는 이름을 얻은 게 전부였다.
프로 데뷔 첫 경기서 MBC 꺾고 첫 승
박철순의 데뷔 전은 프로야구 개막 다음 날인 3월 28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MBC 청룡. 개막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황규봉(黃圭奉)과 이선희(李善熙)를 두들겨 11-7로 넉 다운시킨 MBC는 그 여세를 몰아 OB 베어스까지 잡을 기세였다. MBC는 1회부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감독 겸 선수로 출전한 백인천(白仁天)은 1회부터 서둘렀다. 박철순은 볼 카운트 1-1에서 슬라이더를 몸 쪽에 붙였다. 백인천은 역시 노련했다.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밀어 쳐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를 만들었다. 박철순에겐 뼈 아픈 안타였다. 2루 주자 김용윤(金容允∙현 김바위)에게 득점을 허용한 안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철순은 당황하지 않았다. 초반을 넘어서면서 비장의 무기인 너클 볼을 꺼내 들었다. 빠른 볼을 노리던 MBC 타자들은 손쉽게 무너졌다. 박철순은 1회 말 1점을 내준 뒤 5회 말엔 1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1점을 헌납했을 뿐 더 이상 MBC의 득점을 허용치 않았다. 대신 OB는 2회 초 신경식(申慶植)이 우전 안타를 날린 뒤 2루를 훔치자 양세종(楊世鍾)이 우중간 2루타를 터트려 첫 득점을 올렸다. 5회 초엔 3점을 뽑아 전세를 단박에 4-1로 뒤집었다. 이후에도 OB의 공격은 계속됐다. 6회 초 이홍범(李洪範)의 솔로 홈런에 이어 9회 초엔 신경식과 양세종이 대미를 장식하는 랑데부 홈런을 날려 9-2로 첫 승을 낚았다.
"박철순이 저런 투수였나? 깜짝 놀랐다. 스피드보다 컨트롤이 절묘했다. 특히 너클 볼이 좋았다. 너클 볼이란 타자들의 눈을 속이는 볼이다. 실밥이 보일 만큼 스피드도 없고 회전도 없다. 볼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 번번히 당한다. 강속구가 뒤를 받혀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 빠른 볼이 들어올 줄 알고 있다가 느린 볼이 들어오니 타이밍을 맞추질 못하는 거다. 거기다 직구나 커브처럼 일정한 코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제 멋대로 들어오니 속을 수 밖에 없다"
백인천 감독은 서울지역 선수 드래프트에서 박철순을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박철순이 이토록 희한한 볼을 익힌 것은 79년 3월 공군 팀 성무에서 제대, 연세대에 복학한 뒤였다. 책을 보며 연습을 했다. 아니, 흉내를 냈다는 게 옳았다. 그러다가 이런 볼을 자신의 것으로 완성시킨 것은 81년이다.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에 몸 담고 있을 때였다. 밀워키가 마이너리그 투수들을 위해 운영하던 피칭 스쿨에서 익혔다.
박철순이 밀워키로부터 마이너리그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은 79년 10월 23일이었다. 계약금 1만 달러(약 500만원)에 월봉으로 7백 달러(약 35만원)를 제시했다. 그 해 6월 미국에서 열린 제2회 한∙미대학선수권대회(6월 8~14일)에 대학대표로 출전,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에게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인 게 계기가 됐다. 특히 박철순은 공식 일정이 끝난 뒤인 6월 26일 볼티모어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볼티모어 실업 올스타 전이 결정적이었다. 이날 박철순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6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는 물론 볼넷도 허용치 않는 퍼펙트 게임을 이끌어 이를 지켜보던 스카우트들을 매료시켰다.
"경기가 끝난 뒤 대한야구협회 재미지부장인 이덕준(李德俊)씨가 밀워키 스카우트를 소개해 줬다. 그는 볼 스피드가 최고 148km가 나왔다며 이런 볼이면 빅 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뒤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연세대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어서 확답을 못했다. 모든 것을 이덕준씨에게 일임한 뒤 귀국했지만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80년 1월 9일에는 밀워키 브루어스로부터 입단 초청장이 날라왔다. 계약 조건도 전보다 좋았다. 계약금 2만 달러(약 1,400만원)에 월봉은 1,200 달러(약 84만원) 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덕준씨의 주선으로 1월 28일 하오 1시 서울 무교동 체육회관 강당(10층)에서 김종락(金鍾珞) 대한야구협회장 등 관계인사와 세계야구연맹 부회장 '가르시아'(니카라과) 및 미국야구협회장 '니트 와일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단 계약식을 가졌다. 비록 마이너리그 계약이었지만 국내 선수로는 미국 프로야구에 최초로 진출한 투수가 됐다. 한국인으로는 68년 이원국(李源國)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내 선수가 아닌 일본 선수 자격으로 진출한 거였다.
미국 피칭 스쿨서 익힌 너클 볼로 중무장
박철순이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80년 3월 6일이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 해 2월에는 마이너리그 싱글A 스탁턴 포츠에 배속됐고 거기서 5승2패(방어율 2.31)를 올려 주가를 높였다. 월봉도 1,800 달러로 껑충 뛰었다. 특히 81년 7월 2일에는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로 한 단계 올라섰다. 이 때의 성적은 6승7패. 시즌이 끝났을 때는 12승10패(방어율 2,32)로 팀에서 다승 3위, 탈삼진 1위(138개)에 최소 사사구(28개)를 기록해 밀워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의 우수투수가 됐다. 그 덕분에 82년도 월봉은 2,500 달러로 오르고 트리플A 진출도 약속 받은 몸이 됐다.
"국내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은 귀국하고 나서 한참 뒤에 들었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가슴은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 가 있었던 것 같았다. 미국 갈 맘이 싹 없어졌다. 그래서 팀 매니저에게 국내 프로야구에 진출할 뜻을 내비쳤다. 즉각 연락이 왔다. 고생이 되더라도 한 해만 더 뛰어보자는 거였다. 트리플A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할 수 있는 데 기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굳혀진 상태였다. 언젠가 망가져서 돌아올 바에야 지금이 국내에 몸 담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박철순은 그의 말대로 미국 행을 접은 뒤 12월 23일 제일은행의 김우열(金宇烈)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야구위원회(KBO∙전 한국프로야구위원회)에 취업 신청서를 냈다. 박철순은 배명고 출신으로 서울지역이 연고지였다. 그러나 서울지역 프로야구 입단 희망 선수들은 자의로 팀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타의에 의해 충청지역이 본거지가 된 OB 베어스가 선수 취약지역을 내세워 서울이 본거지인 MBC 청룡과 1대2의 비율로 드래프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박철순은 가능한 한 MBC 청룡(서울)에 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박철순은 12월 29일 하오 3시간에 걸쳐 OB구단 사무실(서울 중학동 합동 빌딩)에서 실시한 드래프트에서 OB에 잡힌 몸이 됐다. 우선권을 쥔 MBC가 1순위로 김재박(金在博)을 찍자 OB는 단박에 박철순을 채 간 탓이었다.
박철순은 2월 19일 프로야구 진출 선수로는 유일하게 특급 대우(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로 OB와 입단 계약을 마쳤다. 실력은 미지수였지만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활동한 경력을 높이 샀다. 그러나 박철순에겐 문제가 있었다. 밀워키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계약 위반이라며 위약금 6만 달러(계약금의 3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거기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서종철(徐鐘喆) 총재도 '해적판 프로야구를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이적 동의서를 요구했다. 할 수 없었다. OB 베어스 박용민(朴容玟) 단장이 미국으로 날라갔다.
"우리는 미국과 선수협정을 맺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선수 등록을 할 때 이적 동의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밀워키서 계약 위반이라고 떠드니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2월 초 겸사 겸사해서 LA 다저스를 방문했다. '피터 오말리' 구단주를 만난 자리에서 박철순 건을 얘기했더니 걱정 말라며 밀워키 구단주 '버드 세릭'를 만나게 해줬다. '버드 세릭'은 만나자 마자 박철순 칭찬부터 해댔다. 그런 뒤 그를 만드는데 2년간 15만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트레이드 머니는 5만 달러(약 2,700만원)가 적당하다는 거였다. 아주 고단수였다. 이에 맞서 2만 달러를 제시했다. 트레이드 머니는 절충 끝에 3만 달러에 합의를 봐 3월 19일 외환은행을 통해 송금하는 것으로 끝냈다"
한 시즌 최다 세계 기록이 된 22연승
박철순은 프로야구 개막(3월 27일) 이틀 전인 3월 25일 밀워키의 이적 동의서를 첨부, 한국야구위원회에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사흘 뒤인 3월 28일 MBC를 상대로 데뷔 첫 승리를 장식했다. 박철순은 우연스럽게 MBC와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었다. 프로야구 데뷔 첫 상대로 첫 승리를 안긴 팀이 MBC였던 것처럼 그에게 첫 패배(4월 4일 청주)의 쓴 맛을 안겨준 팀도 MBC였다. 4월 4일 홈 구장인 청주에서 선발로 등판한 박철순은 6과 ⅓이닝 동안 4안타로 5점을 내준 뒤 강판 당했다. 못 던졌다기 보다 내야 실책으로 3점을 내주는 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러나 4월 10일 전주에서 열린 해태 전에서 구원 승으로 일어선 박철순은 목표 20승(8월 15일 서울)과 20연승(9월 11일 대전)을 MBC를 상대로 달성했다.
박철순은 프로야구의 막이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20승이 목표였다. 그런데 전기리그가 끝났을 때 18승2패3세이브(방어율 1.99)를 올려 놓고 있었다. 목표 20승이 20연승으로 바뀌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은근히 세계 최다 연승(24) 기록을 넘보는 눈치였다. 9월 18일 대전에서 롯데를 상대로 22연승을 올릴 때만해도 24연승은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9월 22일 잠실로 옮겨 치른 롯데전이 화를 불렀다. 3-3 동점이던 9회 말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철순은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연장 10회 말 김용철(金容哲)에게 결승 타를 얻어 맞아 연승 기록이 22승에서 막을 내렸다. 한 시즌 22연승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프로야구 100년을 넘어선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최다 연승 기록은 24연승이다. 1937년 뉴욕 양키스의 '칼 허벨'이 세웠다. 그러나 이 기록은 2 시즌에 걸쳐 이룩한 것이다. 1936년 16연승으로 시즌을 마감한 '칼 허벨'은 1937년 8연승을 올려 24연승의 기록을 남겼다. 한 시즌 최다 연승은 1888년 뉴욕 양키스의 '팀 키페'가 세운 19승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22연승은 찾아볼 수가 없다. 1952년 교진(巨人∙요미우리 자이언트)의 마츠다(松田)가 2시즌에 걸쳐 20승을 올렸고 1957년에는 니시테스(西鐵)의 이나오(稻尾)가 20승을 세운 게 최다 연승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박철순의 22연승은 한 시즌 최다 연승 세계기록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박철순은 쑥스러워했다 "올해는 나에게 행운을 안겨줬다. 타자들이 약해 덕을 본 반면 우수한 투수들이 없어 독주할 수 있었다. 내년엔 10승을 올릴 수 있을까? 미지수다. 그러나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입단이 보류됐던 우수 선수들이 합류한 83 시즌을 마친 뒤 내려야 할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박철순은 83 시즌 내내 병마와 싸워야 했다. 발단은 9월 29일 대구서 벌어진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 경기는 OB나 삼성에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OB가 승리할 경우 전∙후기리그 우승으로 통합 챔피언이 되는 경기였다. 반대로 삼성이 승리할 경우 후기리그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 OB와 코리언시리즈에서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다툴 가능성이 높은 경기였다. 때문에 OB는 박철순을, 삼성은 권영호를 선발로 내세웠다. 하지만 박철순에겐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경기 초반 번트 수비를 하다 허리를 다쳐 1-2로 역전패를 당했다.
허리 통증은 일종의 경고였다. 박철순은 전∙후기리그 통틀어 36경기에 등판했다. 그 가운데 15경기서 완투를 했다. 224와 ⅔이닝을 던졌다. 혹사였다. 거기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4시간 7분 동안 11과 ⅔이닝을 완투했다. 박철순에겐 죽음을 건 사투였다. 이러고도 탈이 안 났다면 박철순의 몸이 이상한 거였다. "그 땐 허리 디스크 짐작도 못했다. 갑자기 허리에 충격을 주어 통증이 온 줄 알았다. 볼을 던지다 보면 이런 일은 다반사여서 이 때도 한 이틀 편히 쉬면 괜찮을 줄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쉬어도 통증은 가시지 않고 기분 나쁘게 뜨끔거렸다. 병원을 찾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쉬라고 했다. 그런데 한가하게 쉴 처지가 아니었다"
허리 통증 잊으려 진통제 맞으며 등판
삼성이 시즌 마지막 경기(10월 2일 대구)에서 MBC를 3-1로 물리치고 코리언시리즈에 진출, 불꽃 튀는 접전의 와중에 있었다. 코리안시리즈는 7전 4선승 제였다. 4승을 먼저 챙기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거였다. 그런데 1차전(10월 5일 대전)에서 3-3으로 비긴 OB는 2차전에서 0-9로 완패를 당해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박철순은 팀에 힘을 불어 넣기 위해서라도 등판할 수 밖에 없었다. 3, 4차전에 구원으로 등판했다. 두 경기서 승리를 지켜 전세는 2승1패1무가 됐다. 5차전은 선우대영(鮮于大泳)과 황태환(黃泰煥)이 승리를 지켜 3승1패1무. OB가 6차전만 잡으면 우승이었다. 김영덕 감독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 차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봐도 박철순 밖에 없었다.
"6차전에 박철순이 선발로 나오자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박철순의 허리 이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박철순은 초반부터 집중 안타를 맞으며 허물어 졌다. 이런 상태라면 우리가 손쉽게 이긴다고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회가 거듭될수록 볼의 위력이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이상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박철순은 허리 통증을 잊기 위해 근육 마취제를 맞은 상태였다" 삼성의 임신근(林信根) 코치 말이었다.
그러나 박철순이 맞은 것은 국부 진통제였다. 박철순은 3차전부터 주사를 맞고 던졌다. 이 때의 사정은 김성근(金星根∙현 SK 감독) 투수코치가 잘 알고 있었다. "코리언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사무실에 갔더니 철순이가 나와 있었다. 우리가 1무1패를 당한 상태여서 분위기가 침울했다. 철순에게 '허리는 어때?'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좋아졌다'고 했다. 철순인 뻔한 거짓말을 해댔다. 그런데 철순이 주사를 맞고 뛰겠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그 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투수 출신인 나나 김영덕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았다. 소용이 없었다. 철순이는 경기 시작 전 국부 진통제를 맞았다. 비통했지만 선수들과 미팅할 때 분위기를 잡았다. '자 오늘은 철순이가 생명을 걸고 던지니 열심히 하자'고 했다. 선수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 만큼 박철순은 OB 선수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마운드에 서면 터지지 않던 방망이도 불이 붙었다. 3차전에서 선우대영을 구원 등판, 승리를 지킨 박철순은 4차전에서도 주사를 맞은 뒤 황태환을 도와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국부 진통제는 한 번 맞으면 2시간 동안 효력이 지속됐다. 이에 맛 들인 박철순은 6차전이 열리기 직전 주사를 맞은 뒤 몸을 풀었다. "그 당시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허리의 아픔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우승을 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주사를 맞고 던졌다"
10월 12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에서 벌어진 코리언시리즈 6차전은 OB가 8-3으로 역전승을 올려 4승1패1무로 원년 챔피언의 영광을 안았다. 박철순은 이날도 마지막 마운드를 지켰다. 그리고는 곧바로 우승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병명은 요부추간판(腰部椎間板) 헤르니아(척추의 제4 요추와 제5 요추 사이에 끼어 있는 물렁뼈가 삐져 나온 상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