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차별이 있습니다. 또한 차별이 있기에 불공평합니다. 아마도 역사적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인종적 민족적 차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민족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있고 적게 가진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대우가 달라지고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는 일등석에 앉아서 편안히 가고 누구는 3등석에 앉아서 가야 하는 현실을 누구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평한들 아무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고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차별이 가장 뚜렷하고 혹독하게 일어나는 것은 똑같은 사람임에도 짐승처럼 다루는 것입니다. 옛날에 노예가 그랬습니다. 정말 아주 옛날에나 있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근세까지도 이어온 것이 바로 유색인종에 대한 자세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미국 남부지방의 인종차별이 가장 혹독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시아인들도 초기 미국 이민시절 그 비슷한 처우를 받았던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남부지방에서 노예생활을 한 흑인들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사람대우를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짐승만도 못했습니다.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은 기본이고 맘에 안 들면 살해해도 그만이었습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종차별은 아직도 때때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는 차별철폐를 인정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징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문명인으로서 우리는 계속 의식의 개혁과 사회적 공익을 함께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각자가 경계심을 가지고 함께 노력하며 실현해가야 하는 일입니다. 차별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으로 인한 상황일 뿐 사람 자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존중해주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든’이 어떻게 노예로 팔려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러다 주인에게 잘 보여서 조금 나은 자리로 옮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약할 수 없는 일이고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더구나 성숙해지는 모습에 관리자의 눈은 욕정까지 품은 듯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무참히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후 임신한 동료가 또한 견디다 못해 목을 맨 것까지 수습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여기 있어도 사람다운 삶은 없습니다.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돌아볼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일단 벗어나보기로 합니다.
‘베로니카’는 인종차별을 철저히 배격하며 그 문제에 대하여 저술도 하고 다니며 강연도 합니다. 사회적 저명인사가 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신만의 행복한 가정도 꾸렸습니다. 어느 날 성공적인 강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즐겁게 파티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려 택시를 불러 탑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떱니다. 그런데 예약한 택시 기사가 전화를 헸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지금 타고 있는데 무슨 소리? 아차 싶지요. 그러자 뒤에서 한 남자가 목을 죕니다. 발버둥 쳐보지만 운전기사도 한 패입니다. 친구들이 탄 차가 옆으로 지나갑니다. 알 턱이 없지요. 소리소리 질러도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끌려갑니다.
깨어나 보니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둑한 좁은 방, 거기에 한 남자가 버티고 말합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아. 너는 절대로 내게서 피할 수 없어.’ 반항하는 듯하자 혁대로 가차 없이 휘갈깁니다. 그 때 밖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납니다. 남자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갑니다. 여자가 이를 악물고 힘을 내어 기어나갑니다. 그리고 막대기를 주워 뒤에서 남자를 내리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격투를 벌입니다. 여자가 쓰러졌을 때 마침 그 때 여자와 잘 아는 흑인남자가 달려와 싸움에 껴듭니다. 불행히도 남자는 백인 관리자의 총에 쓰러집니다. 그 새 여자가 다시 일어나 관리자를 내리칩니다. 결국 그의 칼을 빼앗아 찌릅니다. 죽어가는 그에게 그의 핸드폰을 대고 안면 인식으로 핸드폰을 켭니다. 그리고 구조요청을 하지요.
기막힌 조합입니다.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고 영화도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구성으로 주제를 전하며 흥미까지 덤으로 제공해줍니다. 못살게 괴롭히던 관리자가 ‘이든’을 부르며 끝까지 괴롭힙니다. 모두 처리하고 돌아서며 여자가 말합니다. ‘난 이든이 아니라 베로니카란 말이야.’ 구조대가 와서 베로니카를 돕습니다. 그리고 경찰이 와서 ‘안테벨룸’이란 간판을 밀어버리며 기념공원을 폐쇄하는 조치를 행합니다. 그곳은 ‘남북전쟁기념공원’이었습니다. 영화 ‘안테벨룸’(Antebellum)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전전의’ 또는 ‘남북전쟁 전의’란 뜻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복된 주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