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오피니언
[선데이 칼럼] 김선혁과 김수경
중앙선데이
입력 2024.03.16 00:24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
북한 “남북은 적대적 두 국가”
남한 “북, 체제 경쟁 패배 인정”
이산가족에겐 남은 시간 적어
대립 속에도 인도주의 발휘해야
지난 연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당 전원회의에서 남한을 동족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는 언명을 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얼핏 생각이 든 것이 엉뚱하게도 오든(W.H. Auden)의 수필 『정사각형들과 직사각형들(Squares and Oblongs)』이었다. 뉴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대남 노선의 근본적인 전환을 천명하였다. 내용인즉슨 남북 관계가 더 이상 궁극적으로 평화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동족’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고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남한을 더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의 상대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첫째, 남한 정부가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항상 북한을 자유민주 체제로 흡수 통일하려는 노선에 집착하여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다는 것을 들었다. 둘째, 남한 사회에서 정치는 실종이 되고 문화적으로 미국(양키)문화에 혼탁하게 물들어 있으며 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서 역시 같은 동족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끝으로 국제사회에서의 국격과 위상에서도 남북간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열등한) 남한을 같은 수준의 상대로 고려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엉뚱하게도 핵무력을 동원하여 남한을 군사적으로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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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세계, 특히 남한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바로 목전에 가까이 있는 상대방이 핵무기로 자신을 공격하여 군사적으로 점령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는 너무 평범한 논평들이 나왔다. 아마도 북한의 공격적인 수사들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신랄한 비아냥 조의 비판도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분단 이후 남북 간의 체제 경쟁에서, 이제는 북한이 패배하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는 지적이었다. 북한 사회에서 남한의 실정에 관한 정보가 은연중 확산되고 남한의 문물을 선호하는 풍조가 퍼지자 그에 대한 방어 조치를 취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남한을 동족이 아니라고 못 박아서 북한 인민들이 남북한 실정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하지 않도록 애초부터 끊어 버리려 한다는 해석이다. 실은 지난 세기 동독도 처음에는 동서독 관계를 같은 민족의 두 국가로 보았지만, 현실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70년대 초부터는 두 민족 두 국가의 관계로 보는 입장을 취한 일이 있었다. 그 밖에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있었다. 우리 스스로도 북한을 진지한 대화 상대가 아닌 냉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는 지적이었다. 어차피 이제 같은 민족 운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가장 신랄한 비판은, 73년 전 김 위원장의 조부 김일성도 남한을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평화 회담을 제의하고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3년 동안이나 말할 수 없는 민족적 재난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다소 엉뚱한 곳에 이르고 있었다. 남한에만 13여 만에 이른다는 이산가족들의 문제였다. 사람들의 의식에서 자신과 친한 친지, 특히 가족은 자기의 일부이다. 해방과 분단 특히 전쟁 이후 한반도에는 대규모의 이산가족들이 발생하였다. 정전이 되고, 그 후 냉전이 끝나고 바깥 세상에서 나라들 사이에 여행이 자유롭고 쉬워진 후에도 이들의 처지는 그대로였다. 한때 관계가 개선되었을 시기에도 엄격한 통제하에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선택된 몇몇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뿐이다. 남북이 동족이 아니라니, 이제 그나마도 영구히 불가능해진다는 것인가.
몇몇 저술들은 탈냉전의 시기 제 3국 경로를 통하여 어렵사리 가족과 제한된 재회를 한 슬픈 사연들을 이야기해 준다. 언어학자 김수경은 해방 직후 월북하여 북한의 국문 표기 체계 정립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전쟁 중에 가족들과 헤어지고 월남한 가족들은 캐나다로 이주하여 정착한다. 냉전 종식 후 이들은 캐나다, 일본, 중국 등을 우회하여 연락을 하지만 지극히 사랑했던 부부간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이타가키 류타, 『북으로.간.언어학자 김수경』)
김선혁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신탁통치 반대 학생 운동을 하다가 소련군 당국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당한다. 그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러시아에 정착하였다. 그후 역시 미국과 러시아를 통하여 가족과 연락이 되어 47년 만에 서울에서 모두 재회하지만 이미 한국에 정착하기는 너무 늦어진 상황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귀환하여 그곳에서 타계한다. 그동안 김선혁은 한국, 미국, 러시아에 사는 가족들과 함께 화상회의 앱으로 일요 예배를 계속하였다.(김선혁, 『평양에서 서울까지 47년』)
앞에 언급한 오든의 글은 바로 사람들 사이의 ‘공감의 결핍’ 혹은 ‘간격’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은 살육 현장의 잔혹함에 관하여 이야기하다가도 금세 자리를 달리하여 차 한잔을 즐긴다. ‘위대한 지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이산가족들의 말 못할 어려움을 알고 있고 이 문제에 관하여 쉽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다가 이제 동족이 아니어서 핵무기를 동원하여 공격을 하겠다고 하는 북한의 새 노선에 어떻게 대응을 할지 지혜를 모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 모두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은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잠시라도 자유롭게 만날 기회를 마련하여 줄 생각도 잊어선 안된다는 점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