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文武王 海中陵 유감
20여년 만에 경주를 다녀왔다.
두어달 전 내가 일본에 갔을 때, 도쿄 근처의 고도 가마쿠라(鎌倉)를 안내해주던 일본 친구가, 신라의 천년수도였고 유네스코 문회유산이 많은 경주를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그가 서울에서 열린 모 세미나에 참석하러 온 틈을 타서 내가 안내해 준 것이다.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12시경에 경주 도착, 다음날 오후 7시 김포공항 발 비행기 편으로 도쿄에 돌아가는 시간에 맞추려면 경주에서 12시 경에는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경주에서 활동할 시간은 8시간 정도 밖에 없는 셈이었다.
경주 시내에 흩어져 있는 고분 등 유적지와 불국사, 토함산의 석굴암 등만을 보자면 그런대로 여유 있는 시간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동해안 바다 가운데의 문무왕 해중릉(海中陵)과, 시내에서 좀 떨어져 교통편이 좋지 않은 곳에 있는 괘능(掛陵) 등을 보여주려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승용차를 갖고 갈 수도 없었고, 택시를 온통 대절하는 등 돈을 펑펑 쓸 형편도 못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원거리 택시 타기는 뭔가 불안하기도 해서 이용하기 싫었다.
그 친구의 이름이 文武王과 같은 이름인 文武인데다가 文武大王은 특히 일본과 관련이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 분이므로 그곳을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고,
불국사에서 울산 방면으로 가는 도로 근처에 있는 괘능(掛陵)은 주위의 석상(石像) 중에 서역국가 출신의 무신상(武臣像)이 있는 등 경주 일대의 다른 왕릉이나 고분과는 여러 면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해서 포함시키고 싶었다.
인터넷 등으로 사전조사를 해보니 문무왕능 방면으로 가는 버스는 약 한시간 간격으로 있고, 시내에서 왕복 두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였다.
당초 문무왕 해중능 주변의 일출도 볼 겸해서 다음날 새벽에 갈 계획이었으나, 다음날 흐리고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경주 도착 즉시 해중능을 먼저 보기로 하였다.
시외버스터미날에 가보니 대왕암 방면으로 가는 버스는 직전에 출발해버려서 한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래서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감포(甘浦)행 버스를 타고 <어을리>에 가서 택시편으로 대왕암이 있는 봉길리 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시간을 체크해 두었다가 그걸 이용해서 되돌아오기로 하였다.
20여년전 문무대왕의 해중능을 처음 보았을 때는 큰 감명을 받았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대왕이 죽어서는 동해의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겠다고 그의 유해를 동해바다 가운데에 묻어주도록 유언했기 때문에, 바다 가운데 바위틈에 안장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해중릉이 생긴 것이라는 해설문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대왕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오랜만에 본 경주는 대규모의 보문관광단지 등이 생겼고 기타 지역도 많이 정비되어 세계적인 관광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문무왕 해중능 주변은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았다. 아니 상대적으로 더 초라해 보였다.
그땐 조용하고 한적한 맛은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해안가의 포장된 도로 위로 대형트럭과 관광버스 등이 굉음을 내며 쉴 새 없이 달리고 있고, 그 도로와 대왕능 사이의 넓지 않은 해변에는 음식점 등 상가와 주차장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무슨 감회 같은 건 별로 기대할 수도 없었다.
1300년전 통일국가를 이룩해서 화려한 후생이 약속되어 있던 대왕이, 사후에도 국가수호를 위해 스스로 바다 속에 묻히는 것을 택한 대왕의 능 주변을 정비, 성역화해서 호국정신의 상징으로 삼으면 좋으련만...
그런 훌륭한 대왕의 능 주변이 너무나 난잡하게 방치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도 마음이 착잡하였지만, 이웃나라 친구에게 그런 곳을 안내하고 있다는 것이 창피스럽기도 하였다.
관점의 차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요즘엔 별로 오래지도 않은 과거에 좌익성향 등으로 처형 받았던 사람들의 유적지도 새롭게 평가 운운 하며 거액을 들여 성역화(?)사업을 하는가 하면, 불요불급한 곳에 현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제수용을 하며 무슨 거창한 시설을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데, 1300년전의 훌륭한 호국정신이 깃든 이곳의 정비는 어째서 소홀한 것인지?
다음날 아침 새벽에 불국사 옆의 등산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올라가서 석굴암을 보면서, 그 아래쪽으로 빤히 내려다보이는 대왕암 주변 바다를 다시 한번 보고 내려왔다.
동행했던 일본 친구는 나의 치밀한 가이드 덕분에 상상을 초월한 천년고도의 모습을 단시간에 모두 볼 수 있었다고 인사했지만, 나는 방치되어 있는 듯한 문무대왕 해중능 주변을 보여준 게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