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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영등포의 밤 & 마포종점
1.영등포의 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든 사랑의 불 길
고요한 불빛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아아아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이 노랫말은 60년대 오기택이란 가수가 부른 ‘영등포의 밤’ 이란 노래 가사인데 어린 시절 옆집 사는 형은 이 노래를 입에 달고 다녔었다.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놀던 형은 선풍기니 곤로니 뭐를 만들거나 고칠 때면 으레 나를 대동하였었다. 나는 재주 많은 형이 신기하고 마냥 신이나 조수노릇 한답시고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 덕분에 공기총도 쏴보고 오토바이 뒷자리도 앉는 특혜를 누려 봤는데 형은 어느 날 영등포에 공장을 다닌다고 아쉽게 떠나버렸다. 그때 처음 영등포란 곳을 인식하였다. 당시 포도밭 안양은 복숭아 많이 난다는 소사와 다를 바 없이 보잘 것 없는 소읍이었고 영등포를 가자면 박미와 시흥을 지나 오르는 선망의 융성한 곳이었다. 어렴풋이 성냥공장에 양평동 빵공장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 후로는 형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노래가 어느 참인가 내 입에 따라 붙어 버렸다. 지금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 입에 못을 물고 망치를 들던 형 모습이 수수히 떠오르고 비가 올 때나 나 역시도 뭐를 만들어 보자고 수작을 부릴 때 그 가수의 묵직한 음조를 탄다. 그뿐만이 아니라 형 때문인지 노래 때문인지 왠지 영등포는 사나이들이 폼 잡고 가볼 곳이란 염두가 그 시절부터 자리했던 것도 같다.
친구하고 어느 동네 깡패가 제일 센지 겨루는 말 쌈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끝까지 영등포 라고 우긴 것도 다분히 그 덕분이라 믿어진다. 그때부터 연정을 주어서인지 영등포가 그냥 나는 좋다. 모처럼 서울을 오르는 때 나의 최종 목적지는 영등포가 되곤 한다. 수십년 서울을 다녔어도 어둠이 깔리는 때 곳을 기어들어 갔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꽤 오랜 시간 영등포는 나와 교우하였다. 전철역도 없던 때 인천에 잠시 학교를 다녔었는데 그때 안양에서 인천을 가자면 영등포에서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었다. 나는 힘겨워 학교 다니는 것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에 취직을 하여 인천이나 부천 쪽 공장을 들를 때도 영등포를 꼭 경유하였다. 영등포는 어쩌면 촌티 나는 내 면면으로서 만만하기도 하여 어쩔 수없이 마음에 드는 지도 모르겠다. 기차를 기다리며 나 같은 뜨내기가 동네를 채우는 어스름한 무렵 동네는 그제야 민낯으로 반색하며 절로 무르익는다. 질퍽한 골목은 우중충하고, 마시는 공기도 순순하지 않아 홍어 냄새 쯤 풍겨도 별탈이 없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자하도이든 길가든 널린 좌판은 모두 가난한 소용물들이다. 근심어린 표정으로 삼삼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나는 또 영등포를 본다. 번잡하지만 변변하지 않은 동네는 내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서울 속 시골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경 길 막 올라 처음 마주한 곳이 영등포가 아니던가. 시골 냄새가 시시콜콜 따라 안 왔을 리 없다. 기실 서울역은 상징뿐이고 상행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영등포역에서 하차하였었다.
환락가에 왁자한 먹자골목에 시장이 뒤죽박죽인 이런 동네에선 객기도 흥정도 큰 몫이다. 주먹이 세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이 당연 일등을 차지 할 수도 있다. ‘내 가슴에 안겨든 사랑의 불 길’ 이란 노랫말과도 같이 영등포는 야심한 쯤엔 사랑의 미로를 따라 야들야들 춤을 추는 화장 끼 짙은 양귀비이다. 혹여 환상 마냥 비운하여 암흑가의 잔혹한 음모와 생존본능이 어우러진 영등포의 밤이라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원래 맨 몸이 전부인 처지엔 닥치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오늘 몇 년 만에 영등포를 또 찾았다.불야성을 이루는 영등포는 밤이 있어 존재 하는 양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객 찾는 불빛만 아롱지는 것이 환상은 이쯤에서 끝이 아닌가 싶어진다. 기실 그 옛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하던 진등포라고 불리던 영등포로서야 마포나 노량진만한 포구나 되었던가.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이 쓸쓸한데 영등포는 불빛만 아련하였다는 마포종점 노래처럼 차라리 한 강 넘어 강촌으로 외로웠을 때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과거 비둘기호만 서던 안양같은 조그만 역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통일호나 무궁화호를 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겨우 당도한 역이 바로 영등포역이었다. 더욱이 강화나 김포를 가자면 시외버스를 꼭 그곳에서 타야 했다. 그런 역이 이제는 KTX가 겨우 한 두 차례 서는 이도저도 아닌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신세는 너무도 처량하여 비는 아니 오는데 노랫말처럼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이 되어 버렸다. 정감이 짙고 한(恨)이 질기면 밤이 깊다고 했던가.
큰 허울만 뎅그러니 남아 한 겨울철 따뜻한 화장실에 몰려든 노숙자들만 득실한 것이 마치 가장 노릇하며 시집도 포기해 버린 세상이 야속한 어느 여인의 말로를 보는 것도 같다. 그간 영등포역 신세를 안 진 시골뜨기가 있을까. 사연 많은 한 때는 만남의 즐거움, 이별의 아픔과 상처로 기억되는 기차역이고 꿈에 젖은 동네 여관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운 추억으로서만 남는 영등포 밤이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며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내게 눈물바람 남기고 돈 벌러 간 형이나 장롱 속 밑돈을 몰래 꿰 차고 영등포에 내린 촌뜨기들은 지금은 한 몫을 챙겼을까. 차가운 밤기운에 취해서일까. 고단한 영등포역이 가로 지으며 뭐라 말하는 것만 같다. 왠지 노랫말 끝 구절'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밀려드는 것은 왜일까.
2. 마포 종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은방울자매의 노래 '마포종점'. 이 노래는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그런 사연의 노래는 많다. 그런데 이 노래에 유독 끌리는 것은 왜일까. 이 노래는 애절함을 더하는 몇가지 소도구가 들어있다.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 당인리 발전소, 영등포, 비에 젖은 전차.... 마포종점은 지금은 사라진 전차의 종착지이며 전차자체도 없어진지 오래된 긴 세월이다. 모두 추억의 장소에 걸맞는 서글픔과 애틋함을 지니고 있다.
밤이 되어 이 종점에 비가 내린다. 누군가가 왜인지 모르지만 늦은 시각 그곳을 찾아왔다. 그가 비를 맞고 서 있고 전차 또한 비를 맞고 서 있다. 갈 곳이 없는 데다가 가련하게 비를 맞고 서있는 둘은 똑같은 처량한 처지다. 그러기에 가사에 비에 젖어 너도 섰고 나도 섰다고 표현했다.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흡신 맞이하는 서글픔이다. 흘러간 지명들도 한 몫을 한다. 한창 개발중인 영등포는 불빛이 아련히 비추고 명을 다한 당인리 발전소는 고요하게 숨을 죽이며 밤을 겨우 넘기고 있다. 여의도 비행장은 또 어떠한가.
탁월한 감정이입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간이 다 되어 이별을 해야 하는 처지로 비를 맞으며 저 너머 새희망이라 할 영등포를 쳐다보는 풍경이 아른거린다. 지금은 마포에 다리가 놓여 있는데 아마 그시절에는 다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높은 빌딩들이 없었기에 당인리 발전소가 마포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실제 작사가 정두수는 1968년 11월 전차가 사라진다는 뉴스를 듣고 전차와의 영원한 송별을 기려 그 쓸쓸함과 연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빌려 이 노래를 적었다고 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박춘석이 곡을 붙여 최고의 히트곡 '마포종점'을 만든 것이다. 2절에 등장하는 당시의 여의도 비행장. 지금은 상상조차 안되는 장소다. 국회의사당에 금융빌딩이 찌들듯 들어선 여의도에 땅콩 밭에 비행장이라니. 누구는 땅콩을 서리하고서는 헤엄쳐 영등포로 기어나왔다고 했다. 온 나라가 잿빛으로 칙칙했던 그 무렵부터 이전의 대중가요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색채감이 뚜렷한 팝 계열의 노래들이 속속 등장했다.
한명숙의 '노란 사쓰의 사나이'와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는 남성들에게는 노란 사쓰를 여성들에게는 빨간 구두를 대유행시키며 우울한 사회분위기를 뒤엎고 온 나라를 원색으로 화사하게 채색시켰다. 밝은 미래를 계몽적으로 강조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서울에 대한 로망이 극심했던 시골 처녀 총각들의 이농현상은 사회적 큰 이슈였다. 60년대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거주했던 곳은 서울의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 그러니까 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던 마포와 한강 넘어 영등포였다.
영등포지역에 위치한 공장에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지칠 때 그들은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난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은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슬픈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 마포종점은 그 같은 당대 변두리거주 서민들의 애틋한 삶의 정서를 가득 담아낸 명곡이다. 당시는 땅콩밭이었다는 여의도를 지나 배를 타야 했지만 지금은 마포대교를 지나면 금세 영등포이고 지금의 마포는 땅값이 비싼 서울의 중요 도심으로 환골탈태하여 옛정은커녕 무미건조 그 자체로 우뚝서 있으니 감개무량이라 표현할 처신도 마포종점은 모두 잃었다.
작사가 정두수는 그런 애닯음을 고스란히 글로 남겨 놓았다. 1960년대 초, 서울의 마포는 시골 냄새가 물씬 났다. 강에는 갈대숲이 우거졌고 나룻배도 있었다. 황량한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나 남새밭이 널려 있던 말죽거리로 가려면 강에서 나룻배로 건너 가야 했다. 한강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을 빼곤 마포나루에는 장어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마포는 또한 '땡! 땡! 땡!'을 출발음과 도착음으로 하는 전차의 종점으로도 유명했다. 고즈넉이 눈 내리는 겨울밤이나 궂은비가 쏟아지는 여름밤, 더욱이 밤이 늦어 오가는 사람이 없어 적막감마저 감돌 때면 마지막 전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귀갓길의 남편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전차는 그야말로 그리움 자체였다.
종점에서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대학생 연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 빈곤하고 궁핍했던 시절, 당시 가정교사는 대학생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부업이었다. 그들은 공원 벤치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다가 짜장면 한 그릇을 외식으로 먹으면 그날 데이트는 괜찮은 날로 여기던, 그런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가 아는 두 연인은 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마포종점 부근 허름한 집에 사글셋방을 얻었다. 남자는 다시 박사 코스를 밟으려 밤잠을 설쳤다. 그는 대학 연구실이나 대학 강사로, 더러는 다시 가정교사 부업도 하며 악착같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여자도 남편 뒷바라지는 물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얼마간 집안 살림을 벌어 썼다. 신혼은 소꿉살림처럼 아기자기했다. 여자는 밥을 지어 밥그릇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이내 남편 마중을 위해 마포종점으로 나갔다.
남편이 일찍 귀가하는 날이면 둘은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꼭 손을 잡고 인근 당인리로 이어지는 긴 둑을 걸었다. 원효로 전차종점에 이를 때까지 거닐다 보면 불빛이 깜빡거리는 당인리 풍경이 들어온다. 어릴 적 고향의 반딧불이를 연상시키는 반가운 풍경이었다. 당시 그는 마포종점 부근에 살면서 작곡가 박춘석 씨와 함께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가수들의 노래 작품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밤새 작업을 하다가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마포 설렁탕집을 찾았다. 당시 마포종점에는 유명한 설렁탕집이 있었다. 그 집의 시원한 국물 맛은 야근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의 출출한 속을 푸는 데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영화 녹음실의 성우는 물론 배우와 스태프들이 새벽마다 모여드는 단골집이었다.
어느 날, 설렁탕 주인이 마포종점에 살던 두 연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미국으로 유학 가 있던 중 너무 과로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한다.남편을 졸지에 잃은 여인은 늦은 밤이면 신혼 초 사글셋방 시절을 떠올리며 마포종점에 나가 그곳을 미친 듯 배회하고 다녔다. 남편을 기다렸지만 한 번 간 남편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결국 여인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언젠가부터 마포종점에서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1966년 그해 여름, 그날도 궂은비를 맞으면서 마포 전차종점에 나가 마지막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땡! 땡! 땡!' 도착음을 내면서 밤늦은 시간에 전차는 들어오고 있었다. 궂은비를 맞으면서... 밤잠을 설치며 써내려간 <마포종점> 그날 밤, 그는 밤잠을 설치면서 애절한 두 연인의 사랑을 담은 <마포종점> 노래시를 썼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애틋한 애가였다.
우리나라에 전차가 처음 생긴 것은 1899년 광무 3년의 일이다. 미국인 콜브란이 당시 황실에 건의하면서였다. 고종은 당시 청량리에 있던 민비의 능인 홍릉에 자주 행차했다 .많은 신하와 수행원들을 동원하여 한 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 되었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보면 1902년 덕수궁의 중화전의 중건을 위한 예산이 30여 만원이었다. 그렇게 보면 한번 행차에 10만원은 엄청나게 큰 돈 이었다.
초기에는 40인 승차 8대와 황실 전용 귀빈차 1대가 운행되었다. 당시엔 전차 운전사들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차장은 한국인이었다. 첫 개통되던 날 ‘거대한 쇳덩어리’가 저절로 굴러간다는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기 위하여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도나도 조금 더 가까이서 보자고 몰려드는 바람에 전차는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를 여러 번 반복했다. 승차 운임은 상등이 3전 5푼, 하등이 1전 5푼이었다.
어디서나 손을 들면 태우고 승객이 요구하면 내려줬다. 심지어는 술이 취한 승객들이 소변을 보겠다고 하면 못이기는 척하고 세웠다가 다시 태워 가기도 했다. 처음에는 신기한 괴물을 한번쯤은 타보겠다고 장안의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루종일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타려는 사람들이 넘쳐 나다보니 정원 80명에 평균 150명이 넘는 인원을 태우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전차는 늘 초만원이었다.
해방 전 까지 전차는 서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승객이 많아지면서 전차 노선은 대도시로 확대되었다. 광복 뒤 자동차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전차는 속도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에 밀려 오히려 한물간 퇴물이 되었다. 1969년 마침내 선로가 철거되면서 70년의 짧은 생 동안 수많은 서민들의 애환을 실은 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는 그런 전차를 보기라도 했던가. 엄마도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남대문 근처에서 봤다는 것이 사실인지 단지 상상인지 구분이 안 선다. 암만해도 안양에서 먼 발걸음으로 창경원 들러 엄마와 내가 그 시대 한 자국을 만든것 같은 데 너무도 흐릿하여 확정지어 말하지는 못하겠다. 창경원의 회전목마가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자식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을 선 엄마이기 때문 필시 그 기억의 한줌이 남겨진 것이 아닐까.
마포종점 노랫말의 최고조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떠나간 첫사랑을 찾는 마음과 더 이상 막혀 갈 수 없다는 끝이라는 뉴앙스를 빗물에 섞어 극적으로 대비시켜 이루어 낸 데 있다. 종점.. 말 그대로 끝점이다. 유사한 느낌을 자아내는 노랫말 생각나는 게 또 하나 있다.
손석우 시, 곡의 이별의 종착역.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안개 깊은 새벽 나는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이만은 왜 못 오나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 진다 이별의 종착역
'종’이란 단어를 묶어 생각해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실제 끝났다 란 의미의 한자로 終을 사용하는데 우리 흔희 쓰는 ‘鐘치다.’란 말의 의미 또한 '끝이 났다' 로 쉽게 인식되어진다. 더더욱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점이란 표현이다. 종착역이나 종점은 더 이상 가지 않는다는 끝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출발을 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점 종착역이란 표현은 즐겨 써도 시점 시발역이란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더 이상 갈 수 없다 라든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라든지 더 이상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 남는 미련에 대해서 애착이 강한 속성을 지녔다. 시작점에서 비를 맞으며 옛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된다하는 표현이라면 다가서는 마음은 아닐 것이다. 종점에서 눈물바람으로 서 있어야 기다리는 마음이 절실히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언제쯤일지는 모르지만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다. 마포종점이 여의도 비행장과 전차를 소유한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의 중요한 마스코트 한 둘은 챙겨두고 싶다. 과연 무엇이 좋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 ... 이 노래는 걸쭉하니 운치 있는 것이 처량한듯 푸념조 타령에 내 나이에 꽤 걸맞다싶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이 노래를 창밖 빗속 리듬에 맞춰 우수에 차 흥얼거리고 있다.
첫댓글 저에게는 청량리역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아이의 행동반경으론 꽤먼거린데도 곧잘 그곳에 가서 놀곤했지요. 고등학교땐 단과반 다닌다고 매일 들르다시피했구요.그러고보면 어느역이나 선배님이쓰신 그런 느낌이 있나봅니다. 몇십년을 상전벽해할만한 변화가없던 그곳도 큰탈바꿈을하기위한 준비를 하는가보더라고요. 사창가가없어진다지요....
제가 선배인 줄 어찌 알았데요... 그렇지요 588 유명한 곳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