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현종 때 하멜 일행을 억류한 조선 위정자 행태.
조선은 북벌이라는 허망한 명분에 집착해 국고를 탕진.
예송논쟁으로 허송세월하느라고 백성들의 삶을 외면했다.
그당시 조선의 조정은
서구와 접촉할 기회를 놓치고
서구의 앞선 첨단 기기 및 과학 문명을
유입할 기회를 놓친 탓에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우물 안 개구리' 격인.,쇄국정책.
'하룻밤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
.
그무렵 조선은 연이은 흉년과 기근으로 국가 파산사태 직면.
조선은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을 대외적으로 은폐하는데 급급.
그 때문에 하멜 일행은 13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뒤 조선을 탈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실상을 알렸고.
하멜의 보고서를 통해 조선의 실체를 인식하게된 동인도회사.
장차, 중국시장 개척의 교두보로서 조선과의 직교역을 원했지만
조선 위정자들의 외면과 일본 막부의 지능적 방해공작 때문에 무산.
그후 일본은 양학과 난학을 발전시켜 장차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개혁 개방의 토대를 쌓아간 반면에 조선은 유교 근본주의에 매몰되어
서학이나 북학조차 포용 못하고 소중화 논리에 목을 맨 우물 안 개구리.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큄' 출생.
당시 네덜란드는 1602년에 설립된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지에서 해상무역 활동.
'동인도회사'는 현지에서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된 청화백자를 사서 유럽에 가져가 막대한 부를 챙겼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인도제도에서 강력한 네덜란드
상업제국의 수단으로서 번창하다가 1799년 해체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회사에 희망봉과 마젤란 해협 사이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원주민 토후들과 계약 맺을 권한을 부여.
또한 요새를 짓고 군대를 지닐 수 있는 권한과 네덜란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관리들을 통해 행정기능을 수행할 권리를 주었다.
얀 피터스존 쿤(1618~23)과 안톤 반 디멘(1636~45) 등
강력한 총독의 통치 아래 이 회사는 영국 함대를 물리쳤으며,
포르투갈을 제치고 동인도제도를 장악했다(→ 네덜란드 공화국).
.
1619년 이 회사는 자카트라 이름을 바타비아(자카르타)로 바꾸고
그곳을 자바와 그 주변 섬들을 정복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했다.
17세기 말부터 주요교역과 해상세력으로서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
대신 자바 일에 더욱 몰두했고
강제 인도(引渡), 공출제도를 도입해
원주민 토후들을 더욱 엄격히 감독했다.
18세기 상업에 집중해 있던 해운기업의 형태에서
농산물 생산에 주력하는 느슨한 지역기구로 변했다.
18세기말경 부패와 막대한 부채에 휩싸이자
네덜란드 정부는 마침내 1799년 회사의 특허장을
취소하고 그 부채와 재산을 넘겨받았다.
.....................................................
1651년 동인도회사 선박의 포수(砲手)로 입사한 하멜.
2년뒤 본사가 있는 자바섬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갔다.
하멜은 보직이 서기(書記)로 바뀌면서 무역선에서 일했다.
17세기 서양 무역선에는 반드시 서기가 동참.
그 시기에 무역선은 교역선이자 탐험선이었다.
서기는 새로운 항로 개척과 함께 항해 종류, 해로의 흐름 등
중요한 정보를 기록하고 보고함으로써 유럽 각국의 해양개척과
무역정책에 도움을 주었던 존재였기에 이러한 그의 직무로 인해
훗날 조선에서의 억류 내용을 상세하게 적시한 《하멜표류기》작성.
1653년 1월 10일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한 하멜 일행은 6월 1일 바타비아에 다다랐다.
그런데 며칠뒤 타이완 신임총독 레세르(Lesser, C.)를 임지에
데려다주라는 회사 명령에 따라 6월 14일 타이완 안핑(安平) 행.
임무를 마친 선원들은 또 다시 데지마 상관이 있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에
스패로 호크 호에 올라 타이완을 떠났다가 풍랑을 만나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8월 16일 제주도 근해에서 배가 좌초.
그 결과 28명의 선원이 익사했고
38명만 살아남아 모슬포 근해 상륙.
이튿날인 8월 17일, 제주 목사 이원진이
이들을 발견하고 병사들을 보내 체포했다.
이원진은 실학의 태두였던 이익의 종숙으로
3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귀경을 준비하던 중
유럽의 불청객 하멜 일행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말이 안통하자 대정으로 이송 후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
“제주목사 이원진이 치계하여 말하길,
배 한 척이 본도 남방 해안에 난파했다.
대정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에게 병사를 딸려 보내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배의 생존자는 38명,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달랐다.
일본어를 아는 자도 있는데
‘그대는 서양의 기리시단인가?’
묻자 모두가 ‘예수! 예수!’라 대답.
우리나라를 묻자 ‘고려’라고 말하고,
이 섬을 물으면 ‘오질도’라고 말했다.
중국을 물으면 ‘대명(大明)’
또는 ‘대방(大邦)’이라 말하고
서북쪽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동쪽을 가리켜 물으면 ‘일본’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 대답.
가고 싶은 곳을 묻자., ‘낭가삭기’.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서울로 호송하라.' 명령.
하멜 일행은 9개월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거처와 식량을 제공받는 등 대접을 받았고,
제주 주민들에게 조선어까지 배울 수 있었다.
.......................
.......................
그해 10월 29일, 하멜 일행은
통역으로 파견한 박연을 만났다.
본래 네덜란드인 선원 '벨테브레'였던 그는
1627년(인조 5년)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란 이름을 얻고 조선 여인과 혼인하여 가정까지 꾸린 인물.
박연은 1648년(인조 26년) 무과에 합격한 다음 훈련도감에 소속.
일본이나 중국 조난자 교육을 담당 대포 제작에 관여하기도 했다.
당시 58세 박연은 수십년만에 동포들을 만나 눈물흘리며 반가워했다.
그렇지만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가려는 것을 알고 간곡하게 만류했다.
일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때문에 처형될 것이라 염려했던 것
선원들은 그를 통해 본국 송환을 간청했지만, 조선 조정은 불허.
그러자, 낙담한 6명의 선원이 1654년 작은 배를 구해 탈출 시도.
돛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출 실패후 태형을 받았다.
1654년(효종 5년) 7월, 하멜 일행은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 사이 이원진은 임기가 끝나 새 인물이 제주 목사로 부임.
순풍이 불어 제주 출발 하루 만에 해남에 다다랐는데,
북상하던 도중 선원 한 사람이 급사해 영암에 매장했다.
7월 26일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국왕 효종을 배알했다.
일찍이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적 있던
효종은 서양인들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그들의 신상을 파악해 보니 대포 전문가 10명,
천문을 이해하는 사람이 1명, 창틀 전문가 2명,
조총 전문가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무렵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 내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은 이들의 무기제조기술 활용 계획.
효종은 이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식량으로 매달 70말의 쌀을 지급하고
군사훈련에 참가시켰고 자신의 행차를
호위하게 했으며 또 박연과 마찬가지로
몇몇 선원들에게 '남북산', '남이안' 등의
조선식 이름을 지어주는 등 환대하였던 것.
그해 겨울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을 남한산성으로 이송.
조선에서 서양인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신에게 들키면 어떤 오해를 살지 알수 없기 때문.
그런데 이듬해 봄 '제인스'와
보스 두 선원이 문제를 일으켰다.
.
당시 서울에 돌아와 있던 두 사람은
4월 21일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산에 땔감을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숙소를 빠져나와
홍제교 근처에 숨었다가 대로에서 사신 행렬이 지나가자
재빨리 사신에게 다가가 말고삐를 잡고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호소.
난데없는 서양인의 출현에 깜짝 놀란 사신은 말이 통하지 않자
두 사람을 숙소로 데려가 조정에 통역자로 박연을 불러달라 요구.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박연을 빼돌려 만나지 못하게 한 다음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을 내보내게 했다.
그후 제인스와 보스는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더니
몇 달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조선 측 기록에 따르면 탈출했던 한 사람은 곧 체포되었고,
다른 한 명은 창의문 부근에 숨어 있다가 역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무마되자 조정에서는 하멜 일행에게 곤장 50대씩.
그리고나서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형에 처했다.
하멜 일행이 끌려간 전라 병영은 영암과 강진 중간.
민가에 수용되어 36명의 병사들에게 감시를 받았다.
그때부터 억류자들은 탈출을 단념하고 허송세월을 보냈다.
외과의사였던 아이복켄(Mathew Eiokken)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 조선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멜표류기》에서는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멜이 동인도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많이 받기 위해 은폐한걸까?
그들이 유배당한 7년 동안 전라감영 병사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
최초 전라 병사는 이들에게 가벼운 제초작업과 청소를 시켰다.
두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나무를 하게해 옷과 구두가 헤어졌다.
세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더 심하게 나무를 시켜 옷가지가 누더기.
네 번째 부임한 전라 병사는 1658년~1660년까지
2년 동안 재임했는데, 하멜 일행에게 호의적이어서
보름에서 스무날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까지 허용했다.
그 덕에 하멜은 조선인들의 생활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1659년(현종 즉위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 즉위후
조선에서는 3년 동안 혹심한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도처에서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 백성들이 기아상태.
유랑민이 전국에 속출했으며 떼강도가 극성을 부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병까지 돌아 많은 백성이 떼죽음.
하멜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
‘국왕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게 하고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길목마다 감시를 강화하는 명을 내렸다.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야했고 잡풀까지 뜯어 먹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헐벗고 굶주린
억류자들 역시 하나 둘씩 쓰러졌다.
1663년(현종 4년) 생존자는 22명 뿐.
억류자들의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순천과 남원, 좌수영에 수용.
당시 내례포(여수)에 있는 좌수영으로 거처를 옮긴 하멜은
전라좌수사 이도빈 배려로 3일간 지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하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이도빈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하멜 일행에게 "왜 탈출하지 않느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좌수영에는 하멜을 비롯하여 12명이 수용되었는데,
이도빈이 재임한 3년간 4명이 죽고 8명만 살아남았다.
이도빈의 뒤를 이어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민발은
전함에 불이 나서 세 명의 병사가 죽었는데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어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뒤이어 부임한 정영은 억류자들에게 매일
새끼를 꼬게 하는 등 고된 노역을 강요했다.
그 때문에 쇠약해진 동료가 죽자
하멜 일행은 마침내 탈출을 결심.
“여수에 내려온 이후 어떤 수령은 할 일도 없는데
우리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마당에 세워 놓았다.
또 어떤 수령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 종일 줍게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그는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말 그대로 고역이었다.
결국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동료 부르트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록 모험으로 끝날지언정
우리의 운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
하멜 일행은 그때부터 세심하게 탈출 계획을 세웠다.
장사를 하여 돈은 마련했고,
선원들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항로를 알아냈다.
이윽고 준비가 완료되자 하멜은 멀리 있는 섬에 가서
면화를 구입해 오겠다는 구실로 조선인 친구에게
두 배나 비싼 값을 치르고 큰 배를 한 척 구입했다.
출항 전에 순천에 억류되어 있던 일행 중
2명이 좌수영에 와서 탈출에 합류했다.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밤이 이슥해질 무렵
하멜을 비롯한 8명의 억류자들이 은밀히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다. 출발시간이 늦은 것은
주변 사람들을 방심시키기 위해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신 때문.
이윽고 하멜 일행은 좌수영 수군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여수 해안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다행히 순풍이 불어
추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흘 동안 쉼 없이 동남쪽으로
항해하던 그들은 9월 8일 마침내 일본의 고토 섬에 다다랐다.
그들은 고토 도주의 배려로 9월 13일 밤
나가사키 데지마 섬 상관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5척의 네덜란드 선박을 발견한 하멜일행.
조선에 억류된 지 무려 13년 만에 보는 고국의 배.
그 동안 36명의 표착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16명,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8명이었다. 9월 14일 아침, 하멜 일행은
데지마상관에 들어가 동인도회사 동료들의 환영을 받았다.
10월 25일 그들은 나가사키 당국에 출두하여
억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심문 받았다.
나가사키 부교의 심문은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심문내용은 스패로 호크호의 규모, 항해 목적,
난파 경위 질문 11개항, 조선생활에 관한 7개항.
조선 군사·경제·풍습·종교에 관한 7개항,
조선의 대외관계에 관한 6개항,
탈출 경위와 조선의 입장에 대한 내용 13개항
등 무려 54개항에 달한다.
하멜 일행은 조선 사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제주도는 섬 둘레가 15마일이며, 육지까지 10~12마일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90마일 정도인데 14일 소요거리.
더불어 스패로 호크호의 선원은
전원 네덜란드인으로 동인도회사 소속이고
기독교인은 실종된 제인스 뿐인 사실도 밝혔다.
.
지리한 심문이 끝난 다음에 하멜 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꿈에 부풀었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들을 1년간 데지마 억류 결정.
그로 인해 하멜은 한 달 뒤인 1666년 10월 1일
동인도회사의 선박 7척이 바타비아로 출발하는
장면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1년 동안 하멜은 데지마상관에 머물며 13년 동안
조선에서 겪었던 일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에도 막부는 왜 하멜 일행을 즉시 풀어주지 않았을까?
현재까지 남아있는 막부의 외교문서집 《통항일람》에는
막부에서 조선 조정에 탈출자들이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정중히 묻는 문서만 남아있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 7년과
8년 기록에는 당시 막부에서 '하멜 일행의 억류사실에 대해
조선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들의 억류와 탈출 과정이
조일 양국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했던 것이 억류의 요인.
당시 쓰시마 번에서 파견한 사신 도치바나는
조선 측 즉의관 김석주에게 아란타(네덜란드)가
자국에 오랫동안 곡물을 바쳐온 속국인데 그 나라의
백성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는 까닭을 질타했다.
아울러 양국이 을미년에 약조를 맺고
표류한 배는 서로 통보하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13년 동안
억류한 처사를 따져 물었다.
김석주는 억류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아란타 백성인지 알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도치바나는 박연으로 개명한
벨테브레의 존재까지 들먹이며 조선을 압박
그들은 조선의 내정을 손바닥 보듯 읽고 있었다.
.
일본은 당시 하멜 사건을 기화로 당시 21척으로 제한되어 있던
무역선의 수량을 늘이고 동래 왜관의 이전을 성사시키고자 했다.
한데 왜인들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있던 김석주는 과거 제주도에
표착한 벨테브레를 왜관에 인계하려 했을 때 인수를 거부했던
전례를 내세우며 일방적으로 회담의 종결을 선포해 버렸다.
그와 같은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에도 막부는 1간 하멜일행의 귀국을 허용 안한 것.
조선과의 외교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1667년 10월 23일자로 하멜 일행 출국을 허락.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선원들은 조선 억류기간 동안
밀린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서 하멜이 작성한 보고서를
마차이케르 인도네시아 총독을 통해서 회사에 제출했다.
하멜의 보고서는 시중에 유출되어
1668년 《하멜표류기》란 이름으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 또 다른 판본이 암스테르담에서 출간.
이 책은 1670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뉘톨리 신부에 의해
불역판이 간행되었고, 이듬해인 1671년에는 독일어로 번역.
1704년 영국 런던에서는 존 처칠에 의해 영역판도 출간되었다.
그때까지 동방에 있는 은둔의 왕국 코레아는
유럽인들에게 겨우 이름만 알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
당시 하멜의 보고서를 받아든 동인도회사에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보를 신중히 검토한 끝에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669년에는 새로 완성한 1천 톤 급
대형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로 명명하기까지 했다.
조선과의 교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교역 추진에 앞서 현지에 억류된
선원 8명을 송환하기로 결정하고 에도 막부에 중재를 요청.
이에 따라 막부에서 조선에 억류 선원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예송논쟁으로 골치를 썩이던 조선은 문제를 제기 않고 제안을 수락.
그 결과 1670년 2월 조선 잔류를 선택한 요리사 얀 클라슨을 제외한
7명 선원이 석방되어 바타비아에서 대기하던 하멜 일행과 함께 귀국.
그후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692년 고향 호르큄에서 사망했다.
1669년,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직교역 추진을 위해
코레아호를 바타비아로 출항시켰다.
동인도회사 출항일지에는 네덜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 4월 2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와 동시에 바타비아 상관장에게 조선과 직교역 추진 명령.
그러자 에도 막부에서 반발했다.
그들이 조선과 직접 교역하겠다면
데지마상관을 폐쇄할 것이라고 협박.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이 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는
막부의 대응에 굴복하여 조선과 접촉 포기.
그리하여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교역 목적으로
건조된 코레아호는 코레아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
그 결과 중국 중심 동북아시아 질서가 와해되던
17세기 무렵에 유럽과 조선의 만남은 좌절되었고
일본은 데지마 상관을 통해 유럽 문명과 교류 독점.
이는 18, 19세기로 이어지던
서구 열강의 세계체제 속에서
난학과 양학을 섭렵했던 일본이
조선, 중국에 앞서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