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킹' 이승엽이 더 넓은 그라운드를 향해 새로운 도전장을 던졌다. 하지만 이승엽을 바라보는 메이저리그의 시선은 냉정했다. 한국야구를 호령했던 사자의 우렁찬 포효는 천리만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한숨소리로 바뀌었다.
"울화가 치밀어 옵니다. 이렇게 안타까울 수 있습니까?" 자랑스런 후배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 소식에 한껏 들떠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이만수 코치는 기자와의 통화 도중 애써 분을 삭이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내 진정을 되찾은 이코치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입니다. 이게 바로 어쩔 수 없는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현실입니다."
◆차가운 현실의 벽
모든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메이저리그가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일본프로야구가 70년 역사를 뽐낸다. 이에 반해 한국 프로야구는 이제 겨우 20년, 걸음마 수준이다. 물론 한국프로야구가 20년 동안 이뤄낸 면면을 살펴보면 실로 놀랍다. 그러나 미국 현지의 반응은 차갑다. 한마디로 '그래서 어쩌라고(so what)?'. 그 정도일 뿐이다.
"이승엽의 56호 홈런은 분명 가치있는 기록입니다. 미국 역시 56호 홈런을 아시아 신기록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기록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단지 산술적인 숫자놀음 정도로 해석하죠." 이만수 코치는 한국야구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의 이유를 분석했다. 검증되지 않은 한국 출신보다 검증된 도미니칸 공화국 출신을 선호하는 것이 메이저리그의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 행간에는 실리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국내 언론들은 말합니다. '국민타자'의 몸값은 최소 몇백만 달러 수준이다. 미국에서도 거는 기대가 높다. 몇몇 구단이 구애의 손짓을 해왔다 등등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풀리기 기사가 결국에는 부머랭이 돼 이승엽에게 상처로 남습니다. 또 수많은 팬들 역시 현실의 벽 앞에서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코치는 이승엽의 미국행을 더욱 더 주장했다. 비록 몸값이 기대 이하의 수준이라 할 지라도 대한민국 국민타자의 매운맛을, 한국야구의 우수성을 알렸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현실의 벽을 넘어라
"마이너리그라도 좋습니다. 우선 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이코치는 이승엽의 마이너리그행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미 구단들의 자본주의적 속성을 내세웠다.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조건으로 스카웃을 한다면, 설령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뛴다 해도 구단은 그 선수를 눈여겨 보고 키운다는 얘기다.
"구단주는 장사꾼입니다. 비싼 돈으로 데려온 선수를 벤치에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요. 메이저리그 최소 연봉이 30만달러입니다. 한데 그 이상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선수를 그냥 마이너리그에서 썩게 할까요? 구단은 그 선수를 우선순위에 두고 키울 겁니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의 생리고요."
단, 이만수 코치는 이승엽이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우선 그를 따라다니던 '국민타자' 또는 '스타'라는 이름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서글픈 말이지만 미국에서 승엽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현지교포 몇몇을 제외하곤 없습니다. 이승엽이 한국의 '고질라' 마쓰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네 언론뿐입니다."
이코치는 절대 이승엽의 능력과 잠재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만큼 한국프로야구를 무시하는 미국인들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승엽인데' '내가 아시아 홈런 신기록 보유자인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험난한 미국생활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승엽이가 미국땅을 밟는 순간, 그는 '스타' 이승엽이 아닌 '마이너리거' 이승엽이 돼야 합니다."
이어 자신의 험난했던 미국생활을 상기하며 차근차근 다음 이야기를 풀어갔다. "내가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 그 누구도 '한국의 홈런왕'이 왔다며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이만수가 언제나 뉴스의 중심이었지만 여기서는 달랐습니다. 소외됐다는 느낌, 그건 한번이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사람만이 압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비웠죠. 한국에서는 해보지도 않았던 궂은 일까지 마다않고 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해결사였다. 시간이 갈수록 이코치의 성실한 모습이 그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고 국내 최초로 메이저리그 유급코치가 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전히 스타의식에 젖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죠. 분명 중간에 포기했을테니까요." 이코치는 박찬호나 김병현이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무(無)'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야구 우수성, 싸워서 알려라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힘든 까닭은 한국 프로야구가 미국땅에서 검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승엽보다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리틀 마쓰이' 마쓰이 가즈오가 인정받는 이유는 이미 이치로 스즈키와 마쓰이 히데키라는 걸출한 스타가 미국땅에서 실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엽이의 어깨가 더욱 무겁습니다. 승엽이가 잘하면 잘할수록 한국야구의 위상은 더욱 올라갑니다. 비록 본인은 기대 이하의 대접을 받고 미국땅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승엽이의 발걸음이 곧 후배들의 길이 됩니다. 즉 선구자가 되는거죠. 승엽이가 닦아놓은 길이 후배들의 메이저리그 진출 통로가 될테니까요. 박찬호가 김병현과 서재응에게 길을 열어주었듯이 말입니다."
때문에 이코치도 이승엽이 짊어져야할 부담감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승엽은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분히 잘해 나갈거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 승엽이가 미국행을 택한다면 '선진야구를 배운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배우는 것은 코치의 몫입니다. 이승엽은 싸워야 합니다. 세계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뤄 이겨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승엽이 살 수 있는 길이며 또한 한국야구가 인정받는 길입니다."
한편 이코치는 만약 이승엽이 고민끝에 국내 잔류를 택한다 해도 그 선택에 지지를 보낸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한 기록을 만들어가는 것도 가치있는 일입니다. 또한 세계적인 선수와 어깨를 겨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고요. 모든 선택은 본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꿈꿔왔던 메이저리그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펼치는 것도, 미래가 보장된 한국에서 야구인생을 마치는 것도 모두가 존중받아야 될 이승엽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워낙 똑소리 나는 후배라 현명하게 선택할 것으로 믿습니다."
첫댓글 정답이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