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29.목.
■ 첫째 날
존재와 부재가 이토록 헷갈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존재와 부재가 또 이토록 극명하게 차이가 난 일도 없었다.
지독한 모순이자 이율배반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의 아내가 맞아줄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막상 집 앞에 서면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는다.
누군가가 나보다 앞서 집에 들어가 모든 것을 치워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남겨진 흔적, 배인 향기, 아직도 침대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베개.
청소를 하다가.. 나뒹구는 아내의 긴 머리카락 한 올에도 두 눈은 삽시간에 흥건해진다.
교회에 다니는 사촌 누나가 하늘이에게 말했다.
“하늘아. 엄마는 하느님이 필요해서 데려가신 모양이야.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힘내? 응?”
하늘인 겨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고모.... 나랑 하느님 중에.... 누구한테 엄마가 더 필요해?”
장례 다음 날.
아내의 사망신고와 아내 회사의 유품 정리를 위해 나섰다.
하늘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녀석도 아빠랑 다니는 걸 무척 좋아해서 흔쾌히 따라 나섰다.
동사무소에서 신고를 마친 후 담당직원이 아내의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했다.
무심코 건네자 그 직원은 아내의 주민등록증에다 재빠르게 붉은 매직으로 ‘사망말소’라고 썼다.
그걸 본 하늘이가 저어기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직원에게 부탁했다.
“저.. 아내의 주민등록증은 제가 보관하면 안될까요?”
“규정상 그건.... 도용의 우려도 있고,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아요.”
“그건 알지만,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요. 그냥 앨범에 꽂아 둘 생각입니다.”
“그래도, 규정 상 어떻게 할 수......”
그때 하늘이가 말했다.
“울 엄마, 우리랑 같이 살게 해주세요. 우리방에 함께 있게 해주세요.”
“.................”
그러자 그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아, 그러시면.... 이거, 그냥, 그렇게 하세요. 그 대신 잘 보관하셔야 해요.”
나는 주민등록증을 받자마자 인장을 닦는 알콜티슈를 꺼내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얼굴에 진땀이 배여 나올 즈음, 아내의 주민등록증은 다시 제 빛을 찾았다.
그리고 하늘이 손에 꼬옥 쥐어 주었다.
■ 속절없는 대화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하늘이는 계속 질문세례였다.
“아빠, 하늘나라엔 천국이 정말 있어?”
“거긴 어떻게 생겼어?”
“거기 가면 엄마 만날 수 있어?”
“우리도 가 볼 수 있어?”
“그렇겐 안돼.”
“우리도 죽으면 엄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 스스로 죽는 사람들은 곧바로 하늘나라에 갈 수 없어. 사람은 누구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살 수 있도록 수명이란 걸 받고 태어나. 그런데 스스로 죽는 사람은 일찍 죽은 만큼, 자기가 살아야 했을 시간만큼 땅과 하늘 가운데 머물러 있다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어. 그 시간동안 아팠던 일, 괴로웠던 일, 못다했던 일을 하고는 하늘나라로 가게 되거든. 결국 지금 죽으나 열심히 살고 죽으나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마찬가지로 정해져 있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기 세상에서 남은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더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다 가야지. 그리고 엄마도 병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만큼 치료를 받으며 못다한 여행도 하고 책도 읽고... 그렇게 마음을 풀고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여행을 하고 난 뒤에야 하늘나라에 있는 또다른 우리집으로 갈 수 있어. 거기에서 나중에 우리가 다시 가족으로 만나게 되는 거야. 그러니 어차피 그때까지 열심히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해. 그게 엄마가 우리에게 바라는 소원이기도 해. 엄마랑 아빠는 그렇게 약속했거든. 그래서 아빠가 엄마 대신에 하늘이를 아름답고 지혜롭게 키워서 나중에 만나기로 했거든. 이해 할 수 있겠어?”
“하늘나라에 또 우리집이 있어?”
“그럼. 누구나 하늘나라에 가면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그 집에서 모든 사람들은 가족끼리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그런데 거기에 모이는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거든. 그러니까 빨리 죽는다고 거기서 곧바로 만날 수는 없는 거야. 그게 인간의 생명이고 자연의 약속인 거야.”
“그럼 그 집은 누가 살고 있어?”
“천사들이 살며 지켜주고 있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천사가 되면 되잖아?”
“하늘아. 너는 지금도 천사야. 땅 위의 모든 어린이들은 천사란다. 그래서 이 땅의 세상이 더 착하고 아름답고 평화롭게 될 수 있도록 천사들이 아이들로 태어나는 거지. 지금은 이 세상에 있어야 해.”
“그런데 세상에는 왜 자꾸 나쁜 사람들이 생겨나? 이명박팀 처럼?”
“욕심이 많아져서 그렇겠지. 그래서 더 많은 천사들이 필요한 거고.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이 그렇게 많아. 그러니까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거지.”
“하느님은 근데 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안 데려가고 엄마같은 착한 사람들을 데려가?”
“................................ 바쁘시겠지. 그보다...... 나쁜 사람들도 반성하고 착해질 수 있는 기회와 자격을 주려고 지켜보는 건지도 몰라. 착한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은...... 그건 아프고 힘든 일들이 많아 쉬거나 치료해주려고 하시는 거겠지.”
“엄마는 나랑 있으면 제일 행복하다고 했는데.....”
“................................”
아내의 회사에서 유품을 챙겨 나온 후
아내가 간혹 통원치료를 받던 강남의 한 한의원을 찾았다.
원장선생님과 간호사들이랑 인사를 나누고 나오자 하늘이와 나는 허기를 느꼈다.
스파게티를 먹고 싶다는 하늘이 뜻에 따라 인근 패밀리레스토랑을 찾았다.
시키지도 않은 발렛주차를 해주는 것부터 의심스럽더니
메뉴판의 식대가 강북 보다 150% 가량 비쌌다.
게다가 봉사료, 부가세도 따라 붙어 있었다.
(식사 후 주차장에서는 발렛비(주차대행료)까지 달라고 했다.)
중국속담에 ‘화남의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대한민국에선 그 반대가 되나 싶었다.
창가 통유리 좌석에서 식사를 하던 하늘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보던 하늘이가 말문을 열었다.
“아빠. 엄마, 지금 우리 보고 있을까?”
“그래.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엄마는 보고 계실거야.”
“엄마도 지금 밥 먹고 있을까?”
“글쎄? 하늘나라에선 먹지 않아도 배고프진 않대.”
“그럼 왜 제사밥을 차려줘?”
“먹지 않아도 되지만 맛은 느낄 수 있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는 것을 그대로 맛 볼 수 있대. 그러니까 하늘이가 맛있는 거 많이 먹어야 해.”
“..................”
“하늘이, 뭐 생각해?”
“아빠. 그럼 우린 엄마랑 얘기 할 수 있어?”
“대화는 못하지만 우리 얘기는 들을 수 있을 거야.”
“우린 들을 수 없잖아.”
“들을 순 없어도 느낄 순 있어.”
“어떻게?”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전해줘. 바람이라든지 빛이라든지 비라든지....... 구름만 해도 그렇잖아. 저기 봐. 저 구름은 통닭같아 보이잖아? 그럼 엄마가 통닭을 좋아했으니까 ‘나 지금 통닭 먹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빠, 저기 저 구름 좀 봐! 저건 고등어 같아. 엄마 지금 고등어 먹고 있어?”
“으, 응... 그렇겠네?”
“아빠, 저건 말 같아! 엄마 지금 말 타고 있어?”
“그래. 밥 먹고 운동하느라 말 타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아. 노을이 지네. 엄마가 우리 하늘이 빨리 집에 가서 쉬어라고 하시는 모양이야. 빨리 먹고 가자.”
“아빤 하늘나라에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아빤 예전에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도 다녔고 성당도 다녔고 절에도 다녀봤잖아. 그리고 사람들도 아주 많이 사귀어서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어. 그리고 책도 많이 보고 글도 많이 쓰고..... 아빠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도 많이 하기도 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직접 겪어보거나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생각을 하는 유일한 생명이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착하게 살면서 열심히 책읽고 공부하고 사람들 사귀며 대화하고 여행하는 일이 소중한 거야.”
■ 환청
“왜 이렇게 늦었어?”
“씻고 밥 먹어.”
“책 읽고 나면 좀 치워둬.”
“하늘이 책 좀 읽어줘.”
“늦게 까지 그러지 말고 일찍 좀 자.”
“나 좀 나갔다 올 테니까 하늘이 좀 봐줘.”
“오늘은 늦을 것 같으니까 자기가 좀 챙겨 먹어.”
“천천히 좀 운전해.”
“이번 달 급여는 늦어?”
“오늘은 자기가 빨래 좀 해주면 안돼?”
“청소 안 할 거면 어지럽히지 좀 마.”
“나이 들면 변할 줄도 알아야지.”
아스라이, 때론 또렷이
문득문득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서 뛰놀던 하늘이가 현관으로 달려들면서 소리친다.
“엄마~ 물 줘................. 아, 엄마 없지?”
골목길에서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창가로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 어른스런 아이
하늘이가 혼자서 샤워를 하겠단다.
문을 닫고 들어간 하늘이가 콧노래인 듯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나는 잠시 마음이 놓인다.
거실을 정리하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욕실문을 열어 본 순간
나는 아득한 심연의 낭떠러지로 곧장 추락하듯
온 몸에 모골이 송연한 소름이 돋았다.
하늘이는 샤워기의 세찬 물줄기 속에 선 채
고개를 떨구곤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흡사 콧노래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나는 지체없이 화들짝 달려가 물줄기 속에서 하늘이를 꺼내 안고선
물이 흥건한 욕실바닥에 주저앉아 녀석을 껴안고 말했다.
“울고 싶으면 아빠 앞에서 울어. 나무라지 않을테니까, 혼자 숨어서 울지 말고 아빠 앞에서 울어. 응? 하늘아.....”
하늘이 펑펑 울면서 대답했다.
“아빠도 외롭잖아~ 엉, 엉......”
하늘이를 끌어않은 채 소리없이,
물인 듯, 눈물인 듯, 분간없이 한참을 울었다.
늦은 밤.
할머니가 하늘이랑 함께 자자고 말씀하셨다.
하늘이는 아빠랑 잔다고 했다.
하늘이를 데리고 내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하늘아. 할머니랑 같이 자면 어때?”
“아빠랑 잘래.”
“왜? 할머니가 같이 자고 싶어하시잖아.”
그러자 하늘이는 조용히 나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울 아빠.. 외로우면 안 돼.”
나는 또 녀석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속으로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빠는 너보다는 외롭지 않아.’
이렇게 소리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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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의 영면을 기원하고 지켜주신 벗님들께
가슴 깊이, 가슴 깊이 감사합니다.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열심히, 흔들리더라도 스러지지 않고 열심히 살겁니다.
이제 남은 숙제인 하늘이를 위해서라도.
Rain n Tears - Paul Mauriat.wma
첫댓글 4월 초순에는 군 생활 중 순직한 친구의 아들의 안장식에 참석하여 만난 친구를 보고 아무 말조차 할 수가 없어 뻐끔뻐끔 담배만 피우고 왔는데 같은 달 반려와 어미를 잃은 이들을 보고 왔으니 잔인하다면 잔인한 4월, 현충원에서 친구에게 아무 할 말이 없듯이 낮달에게도 무슨 말로 위로가 되겠는가 하면서도 남겨진 자의 몫 같은 게 있을 성 싶네. 그 몫이 삶의 이유일 것도 같으니 꾸역꾸역 억지로라도 밥을 입에 넣으면서 용감해지시게,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형님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항상심이 그윽한 형님께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형님을 대하며 제 열정의 방향과 지표를 어디에 둬야 할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저 온전히 형의 몫이니 어렵고 어렵더라도 영혼의 평화를 빌어봅니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될 숙명, 어렵고 곤고하더라도 온전히 제가 헤쳐나가야 할 숙제임을 명심하고 살 것입니다. 항상 가장 앞서,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친구들을 살펴주시는 허남해님께 늘 감사합니다.
똑똑하고 정이많은 하늘이, 동사무소직원에게 하는 두번째 마디에 ... 더이상 글을 읽어 내려갈수가 없네요.. 평정..낮달님에게 평정을.. 하늘이에게 평화를...
네. 그래야 하겠죠. 평정심과 항상심을 잃지 않고 끈기있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슬프네요. 힘내세요. 낮달형님!!
드림썬. 언제 우리 가족이랑 자네 앞의 푸른 동해바다로 달려가보겠노라고 언질해놓고도 지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네. 이젠 하늘이랑 단 둘이서라도 한번 가볼 예정이니 그때 한잔 하자. 고마워, 썬..
새벽에 문득 들어왔다가 한참을 머물다 가네. 기운 잃지 말고 힘 내시게. 하늘이와 함께 힘 내시게...
낮님 고생 많아요...하늘이 얘기를 듣다가 하늘이 엄마 사진을 보다가....울컥 하네요...아직도 하늘이엄마가 애닳고 그러네요..마음 여린 사람은 때로는 반대로 그만큼 더 강하다고 위안하며 격려합니다. 처음 보았을 땐 아기였는데 갑자기 훌쩍 커버린 듯한 하늘이...어린 마음속에 그 슬픔들이 짙어지지 않도록 낮님의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겠어요. 하늘이와 하늘이 아빠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