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이 되시는 아버님 “이젠 통일꾼이 되어라”
작고하시기 전 1985년 설날 예순후반 아들-며느리에게 당부[늦봄을 통일꾼으로 만든 문재린과 김신묵]
◇코스모스 꽃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늦봄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권사
‘문익환=통일’이란 운명의 근원▲북간도와 부친 문재린 목사
통일이라는 민족 문제의 해결이 저의 존재의 전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저의 신앙의 전부인 셈인데 이것은 아버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북간도 명동에서 온 것입니다. (옥중편지 1990. 6. 1)
늦봄이 73세 생일날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내용으로 어머니께 쓴 옥중편지다. 늦봄은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일생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된 연원을 작고한 부친 문재린 목사와 북간도 명동에서 찾았다. 부친을 포함한 명동촌의 개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신앙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고 그것이 지금 통일 운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어머니와 작고하신 아버지의 생각이라고 언급했다. 두 분의 염원을 자신이 이어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유엔사령부 찾아가 “청진 데려다 달라”▲문재린 목사의 통일의 꿈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는 4~5세 때 함경북도에서 북간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가슴 속에 품은 독립의 열망을 이루기 위해 교육과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해방이 가까워져 오자 일본군과 공산 세력에 잇달아 체포되어 죽음의 순간을 세 번이나 가까스로 벗어난 문재린 목사는, 큰아들 늦봄 부부를 북만주에 남긴 채 발각될 위험을 피하고자 아내와 작은아들과도 따로따로 탈출해 남한에 정착했다.
늦봄 부모에게 북간도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었다. 그곳은 민족의 영토였고 이주 역사는 곧 민족의 역사였다. 그래서인지 훗날 분단된 현실에서도 마음은 늘 북간도와 민족 통일에 쏠려 있었다. 이런 문재린 목사의 마음은 한국전쟁 때부터 표출되었다. 그는 유엔군이 두만강까지 진격하자 통일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유엔사령부를 찾아가 비행기로 청진까지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청진만 간다면 회령 종성을 넘어 북간도로 가 볼 요량이 아니었을까?
휴전 후에는 함경도와 인접한 강원도에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캐나다 선교부를 설득해서 강원도 순회 전도를 시작했다. 강원도에 장로교회가 많아지면 통일된 후 캐나다 선교부의 관할 구역이 자연히 북쪽으로 확장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강원도를 넘어 함경도와 북간도에 이르는 미래를 염두에 둔 활동이었다.
“민족통일 시대 책임이 네 두 어깨에”▲늦봄에게 이어진 통일의 꿈
1960년대 늦봄 집안의 남한 생활은 안정된 기반 위에 평안한 모습이었으나, ‘북간도에 뿌리를 둔 집안 내력은 가족들의 저변에 도도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늦봄이 성경 번역에 몰두하고 있을 60년대 말, 50세 지났을 어느 시점엔가 부모님은 늦봄에게 통일운동에 나설 것을 은근히 떠밀고 있었다.
(아버지) “1899년 2월 18일 두만강 찬바람을 가르며 간도로 들어가시던 그분들의 뜻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그걸 민족통일로 성취하는 것이 이 시대의 책임이 아니겠니?”
(어머니) “네 두 어깨에도 그 책임이 짊어져 있는 거구.”
부모님에게 민족통일은 두만강 너머 북간도의 회복에까지 이르는 큰 소망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늦봄이기에 부친에게 만주 한인 역사를 쓰시기를 권하며 ‘김부식이 떼어버린 고구려사, 발해의 역사를 다시 계승하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민족사를 어떻게 만주로까지 확대하느냐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만주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영토로서는 회복할 수 없지만,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인 역사의 뿌리는 압록강 두만강으로 만주까지 뻗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옥중편지. 1981. 4. 6.)
늦봄은 부친이 북간도로 가서 살다 거기서 묻히고 싶어 했지만, 건강 악화로 북간도행 꿈이 깨어진 것이 부친의 생애 마지막 아픔이었다고 회고했다. 「아버님은 이렇게 가셨습니다」에서 늦봄은 건강이 악화한 부친이 통일에 대한 애착을 여러 차례 드러냈음을 기억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님이 오시니까 통일 이야기를 하십니다” (82년 12월 15일 봄길이 보낸 편지 내용을 서술)
한번은 헛소리로 이런 말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의정부는 지났지? 동두천도 지났지? 평양은 아직 멀었지?” (84년 10월 병원 치료 중의 상황 언급)
김근태 씨 부인과 연성수 부인이 찾아왔을 때 … 어디서 기운이 났던지 벌떡 일어나 앉아 기도하자고 하시면서 양심수들의 건강과 석방,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85년 10월~11월쯤의 상황 언급)
세배 받으시며 무겁고도 엄중한 과제 ‘통일’ 당부▲1985년 설날 아침
◇수의 차림의 아들 문익환과 포옹하고 있는 말년의 문재린 목사
이처럼 ‘죽을병을 앓으면서도 무의식 상태에서 통일을 넋두리처럼 외시다가 가신’ 부친은 작고하던 해 설날에 늦봄 부부에게 무겁고도 엄중한 과제를 당부한다.
1985년 설날
예순일곱이 되는 아들
예순여섯이 되는 며느리의
세배를 받으시며
아흔이 되시는 아버지
아흔하나가 되시는 어머니
이젠 너희들 통일꾼이 되라 하신다 (문익환 시. 「통일꾼의 노래-1」 중)
민주화운동에 직접 뛰어들기 이전부터 분단 해소를 가장 중요한 민족문제라 생각했고 민주와 통일 두 가지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통일꾼이 되라는 부모의 요청은 새삼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89년 방북을 위해 출발하던 아침, ‘아버님이 입으시던 남방셔츠 한 벌과 점퍼 한 벌을 정성스레 넣어가지고’ 길을 떠났던 것도 그런 부모의 당부를 뼛속 깊이 각인하고 있었던 징표가 아닐까.
운명 사흘 전 어머니 “통일은 다 됐어”▲어머니 김신묵 권사
◇어머니 김신묵 권사가 운명 사흘 전에 한 말, “통일은 다 됐어”. 늦봄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늦봄이 방북으로 수감 중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늘 민족과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뜨겁게 빌며 기다리시던 조국의 통일을 못 보고 가신다면, 그것도 제 마음에 한으로 맺힐 것’이라며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짚었다. 방북 이후 활발해진 남북 교류와 당국자 접촉, 독일 통일 등으로 민족통일에 대한 심리적 기대가 높아지자, 어머니도 통일을 확신하시듯 했다.
어머니 운명하시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가 문병 와서 통일 보고 가셔야죠 하니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은 다 됐어 (문익환 시. 「통일은 다 됐어」 중)
분단 50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펼친 늦봄의 통일 운동과 함께,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가 염원했던 만주 지역의 역사·문화적 회복도 이 시대의 과제임을 생각해 본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 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다산책방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사계절출판사
통일꾼의 노래-1
문익환
1985년 설날 예순일곱이 되는 아들 예순여섯이 되는 며느리의 세배를 받으시며 아흔이 되시는 아버지 아흔하나가 되시는 어머니 이젠 너희들 통일꾼이 되라 하신다
1899년 2월 18일 아버지는 네 살에 독립군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는 다섯 살에 동학군 아버지 어머니 등에 업혀 하루에 두만강 얼음판을 건너셨는데 이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으시고 반장님 반귀머거리로 환갑 진갑 다 지난 아들 며느리에게 업혀 사시면서도 마음만은 더욱 푸르러 더욱 뜨거워 갈라져 피 흘리는 조국 생각하는 마음 이대로는 눈감을 수 없어 이젠 우리더러 통일꾼이 되라신다
원산 함흥 회령을 거쳐 눈보라 휘몰아치는 북간도 용정 새장 거리에 서서 조선 독립 만세 조선 통일 만세 목이 터지게 부르다가 쓰러지는 게 마지막 소원이시란다
하늘아 들어라 땅아 들어라 백두산 줄기 우릉우릉 울리는 마음으로 압록강 두만강 흑흑 흐느끼는 피눈물로 사십 년 분단 슬퍼하는 겨레 앞에 무릎 끓고 맹세한다
그 소원 겨레의 소원 내 소원이라고 열 번 죽어도 스무 번 죽어도 이 소원 이루고야 말리라고 이 소원 못 이루느니 차라리 날벼락 맞아 죽을 거라고 거룩한 이 땅에 묻히는 걸 거절할 거라고 |
월간 문익환_12월 <통일꾼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