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이하 김) : 먼저 '노이즈가든'이란 이름에 대한 질문부터 하겠다. '사운드가든'을 좋아하는 멤버들이 모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다는 말은 너무나 유명한데, 왜 이름에 '노이즈'가 들어갔는지 궁금하다. 차라리 '명인가든'이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윤병주(이하 윤) : 사운드가든의 <Louder Than Love>와 <Badmotorfinger>를 들으며 한창 좋아할 무렵 만든 밴드 이름이다. 당시엔 자작곡을 한다든지 프로밴드로서 공연을 한다든지 하는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들의 곡을 카피하면서 그들의 사운드에 비하면 우리의 연주는 그저 노이즈 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 내가 노이즈가든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94년도 모던 락 소모임 당시가 아닐까 싶다. 그 전부터 꽤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 대충 언제까지 그 역사가 올라가는가? 그 문제의 데모 테이프는 정확히 언제쯤 만들어진 것인가?
윤: 첫 합주가 92년 10월이었다. 그 후 1년 정도 각종 작은 공연을 가졌고, 멤버들의 사정상 93년 말에 밴드 활동을 그만두기로 결정. 그러나 활동 기간 중 명색이 프로라는 밴드들이 너무도 그저 그런 자작곡과 연주를 보여준 데 자신감을 얻어, 우리의 족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93년 겨울에 데모를 녹음, 94년 초에 아는 사람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김: 1회로 끝나버린 톰보이 락 콘테스트 때 구색을 맞춰야 한다는 주최측의 잔머리에 의해 출전했다가 너무 잘해서 대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여타 사항들이 있는지? 당시 음반사였던 폴리그램에서 '서태지도 처음부터 자기 음악을 한 게 아니다'라며 현실과의 타협을 요구했던 것을 과감히 거절했다는데, 그 때의 상황 역시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그 때 대신 음반을 발매했던 C-KIDS는 지금 뭘 하는가?
윤: 톰보이 콘테스트. 어떻게 예선을 통과했는지도, 어떻게 상을 받게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 얘기들은 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얘기들이라 구체적으로 아는 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그 행사의 진행을 맡았던 PD가 본선이 있기 전, 진출 밴드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곡 길이를 5분 이내로 줄여줄 것을 요구했다. 자기가 심사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나? 어쨌든 상 타고 싶은 생각보다는 오기가 앞섰기에 본선 무대에선 끝없이 연주했다. 그때 기념 음반을 녹음하면서 우린 꽤나 까다롭게 굴었다. 5분 이내로 줄이라는 말이 다시 나왔고, 한글 가사 얘기도 나왔다. 그래서 나는 5분 이내는 물론, 한글 가사에다 소프트하기까지 한 버전을 넣는 대신 오리지널 원곡도 넣겠다고 했고, 엔지니어도 그곳 엔지니어 대신 우리 데모를 같이 녹음했던 엔지니어를 불러왔다. 두 곡을 녹음하는데다 녹음 시간도 남들보다 더 걸렸다. 게다가 음악도 비상업적이었으니 미움을 살 만했다.
서태지가 처음부터 자기 음악을 안 했다느니, 처음엔 자기 음악 20%에 대중을 위한 음악 80%를 넣어야 된다느니 그런 말을 했는데,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서태지를 별로 동경하지 않았으니 그런 건 상관이 없었고, 20:80의 비율은 그 반대였더라도 싫었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 합주가 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기에 별 미련이 없었다. 결국 가타부타 얘기 없이 흐지부지 그 건은 끝났다.
시키즈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 아는 건, 그들이 톰보이 이전에 청소년 락 가요제란 데서 대상을 탄 적이 있는데 당시 청소년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다.
김: 명기타리스트 윤병주님은 한 달에 CD를 수십 장 사서 모두 들어보며 기타로 카피한다는 소문이 있다. 정말인가? 기타 부분만 따는 건가. 모든 부분을 일단 기타로 따보는 건가?
윤: 자기 CD를 모두 카피하는 건 칼파의 박종환 얘기고, 난 카피하는 거 거의 없다. 합주하기로 결정난 것, 혹은 너무 좋은 노래만 카피한다. 곡 전체를 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부분적으로 쳐본다. 좋은 리프라든지 코드, 솔로에서도 한 부분, 그런 식으로 내가 좋은 부분만 쳐본다. 게으른 상태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기타가 내 옆에 있어도 '카피 한번 해봐야겠다'는 결심만 하고 안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웃기는 얘기지만 내 생각엔 나도 명기타리스트가 아니고 노이즈가든도 명밴드가 아니다. 진짜 웃기는 건, 딱 평균이고 보통 밴드여야 할 우리 같은 밴드가 내 생각에도 국내 여타 밴드들보다 낫다는 거다. 한마디로 우리가 50점짜리라면 나머진 50점 이하라는 거다.
김: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윤병주님은 '하드 코어 외모에 70년대 명인 연주'라고 한다. 그런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드 코어 음악 쪽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며 최근 유행하는 Korn 부류의 음악은 어떻게 보는가?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요즘 '하드 코어'라고 우기고 있다는 이현도의 <적의>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하드 코어 계열의 음반은 있는가?
윤: 하드 코어가 대체 뭔지 난 모르겠다. 스래쉬, 데스, 그라인드 코어, 하드 코어...... 스래쉬 분위기인데 왠지 펑크 분위기에 평민 분위기가 나는 게 하드 코어인가? 그렇다면 갑자기 생각나는 건 Helmet 정도밖에 없는 듯. 추천작은 Meantime 정도...... 체질상 하드 코어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다. 내 통신 아이디인 suicidal 도 한창 Suicidal Tendencies 를 좋아할 때 만든 거지만, 그들의 음반 중 정말 하드 코어라 할 만한 1, 2 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집 <How Will I Laugh Tomorrow>나 그 다음인 4집 <Lights, Camera, Revolution......> 등을 좋아했다. Korn 같은 건 너무 별로다.
이현도의 <적의>는 케이블에서 비디오만 봤는데 뭐...... 이현도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하드 코어일 수도 있지 않을까? 댄스, 힙합 하는 사람이 너무 제대로 해도 웃기지 않을까 싶다.
김: 음악을 처음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원래도 기타로 시작한 건가? 가장 처음 영향받은 음악인은 누구이며 요즘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영향받은 인물을 생각나는대로 다 써주어도 좋겠다. 국내, 국외를 나누어서 써주면 고맙겠다.
윤: 처음 기타를 산 건 고 1 시작하기 전 겨울방학 때다. 난 그때 내가 기타를 살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을 못 했는데, 길 가다가 중학교 동창들이 기타 사러 간다고 가길래 따라갔다가 일렉트릭 기타가 5만 원 정도밖에 안 한다는 걸 알고서 며칠 후에 샀다. 국민학교,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메탈도 들었지만, <월간팝송>같은 잡지나 각종 음악 관련 매체에서 60년대 음악이 정말 음악성 있다는 식의 여론을 조장하는 바람에 어린 마음에 그때 것들을 많이 들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롤링 스톤즈,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프린스, 아이언 메이든 등등을 좋아할 때고, 처음 산 악보는 에릭 클랩튼 거였다. 영향받은 인물은 정말이지 너무 많다. 내가 가진 CD 콜렉션이 곧 영향받은 인물들일 것이다. 국내에서라면 일단 사하라의 인재홍을 뺄 수 없는데, 그건 연주나 음악에서 영향받은 건 아니고(물론 그 음악과 연주를 좋아하지만 내가 할 음악/연주 스타일과 거리가 멀다는 것) 각종 장비나 톤 메이킹 같은 하드웨어적인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재홍이 형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보다 100배 후진 톤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또 한 명, 저스트 블루스라는 클럽의 주인이자 거기에서 연주하는 채수영이라는 사람이 있다. 태어나서 본 우리나라 기타리스트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해외에도 그런 사람 드물걸......
김: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 음반에 관여한 걸로 알고 있다. 좀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윤: 관여래봤자 말 그대로 프로듀서 역할이다. 간단히 녹음 진행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 잡는 데 관여하고, 그 곡에 어울리는 톤을 만드는 데 돕고, 부분부분의 편곡에 아이디어를 내고, 뮤지션과 엔지니어 사이에서 의사소통 역할 해주고...... 그런 것들이다.
김: 노이즈가든의 초창기 보컬이 하이텔 메탈동 출신의 또 다른 명인 정재준(teaser)님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최근에도 그를 보컬로 내세워 공연을 한 적이 있다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것인가? 원래 노이즈가든은 하이텔 메탈동 밴드인가?
윤: 91년에 처음 통신을 시작하고 얼마 후 메탈동이 생겼다. 당시에 재준이랑 나는 서로 이상한 B급, C급들에 관한 글을 올리곤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모임에서 만나게 되고 각종 음악 얘기 하는 친구로 지냈다. 그러다가 노이즈가든을 같이 만들게 된 것인데, 생각보다 노래를 너무 잘했다. 최근에는 보컬 박건이 건강이 안 좋아 입원하는 바람에 이미 잡혀 있던 델리 스파이스의 오프닝을 재준이와 함께 했다. 노이즈가든의 처음 멤버들(정재준, 나, 최민호, 김태윤) 중 드럼 김태윤을 제외한 세 명은 하이텔 메동 회원이었지만 지금은 나밖에 없다.
김: 원 보컬 정재준 씨와 만나게 된 연유는 이제 알겠다. 그렇다면 현 보컬 박건 씨와 만나게 된 건 어떠한 우여곡절을 통해서인가? 나머지 멤버들과의 만남은 또한 어떠한지? 원 보컬 정재준 씨와의 재결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윤: 처음 데모를 내면서 해산했던 멤버들(정재준, 나, 최민호, 김기현, 김태윤) 중에서 계속 음악에 미련을 갖고 잠시 블랙 신드롬에 들어가기도 했던 드럼의 김태윤이 몇 달 후, 아마 94년 4월쯤에, 다시 노이즈가든을 하자고 했다. 어차피 합주 밴드로 시작한 거니까 뭐 멤버가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 태윤이 보고 아는 애들 있냐고 했더니 베이스의 염재민을 데리고 와서 합류. 셋이서 연주만 맞춰보며 이런 저런 보컬들을 오디션했는데 태윤이가 재준이의 고음을 좋아했기에 계속 고음 보컬리스트들만 데려왔다. 그러나 대부분이 헬로윈 풍의 나약 청승 보컬들이라 다 '뺀찌 놓던' 와중에 예전에 태윤이와 함께 아마추어 스래쉬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다던 박건이 합주 구경을 하러 왔다가 장난으로 노래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크고 터프한 매력이 있어, 정재준보다 못한 제 2의 정재준을 찾느니 차라리 180도 다른 사람이 낫겠다 싶어 보컬로 하게 된 것.
그러던 중, 먼저 밴드 재결성을 제의했던 김태윤이 앞날에 불안감을 느꼈던지(그리고 고음 보컬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들었던 면도 있음) 어이없이 터보로 이적. 그 바로 두어 달 후 톰보이에서 우승. 우승 당시는 잠시 있던 스페어 드럼이었고, 그 두어 달 후, 박경원을 소개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얼마 전 델리 공연을 앞두고 합주 때 최근 외국 유학중인 김태윤, 정재준 등과 함께 합주를 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언젠가는 오리지널 멤버들과의 프로젝트도 구상중.
김: 최근 일어난 말도 안 되는 악마주의 음악 논쟁에 대해 길게 한마디만.
윤: 말 안 되는 게 한두 가지라면 악마주의 논쟁에도 신경이 쓰이겠지만 다 말도 안 되는데 뭐 굳이 관심을 갖겠나. Rollins Band의 <Disconnect> 가사에 동감한다.
김: K모 평론가의 밥줄인 '저항의 음악'이란 게 과연 한국에 있다고 보는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윤: 그 K모 씨가 강모 씨라면...... 그 사람도 요즘 그런 얘기 거의 안 하더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천지인 같은 밴드는 '저항'이 욕먹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더 강조하며 앨범 PR을 하는 것 같다. 역으로 승부한다는 걸까? 물론 저항의 음악이란 건 있다. 김민기나 정태춘이 바로 그런거 겠지. 내 생각은 '락은 저항의 음악'이 아니라는 거다. '락 중에 저항의 음악이 있다'면 몰라도...... 그리고 물론 '모든 락 음악이 저항의 음악'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저항의 대상은 다 다르다. 나는 그렇게 개개를 무시하고 전체를 매도하는 이들에게 저항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 좋아하는 사람은 직접 락을 하면 될 거 아닌가.
김: 그러고보니 노이즈가든의 뮤직 비디오는 본 적이 없는 듯싶다. 그런 매체에 대해 애시당초 관심이 없는 것인가? 그 외의 '활발한 홍보활동' 역시 없어온 듯싶다. 일부러 하지 않는 건지? (안 해도 알 사람 다 알긴 하지만.) 또한 영화 음악 참여에 대한 의사는 있는지?
윤: 상업성은 없는 주제에 보고 들은 게 많아서 탈이다. MTV 클립들 보며 살아오다 구리디 구린 우리나라 뮤직 비디오 맨들에게 어떻게 비디오를 맡기겠나? 그나마 우리 같은 경우는 소자본으로 해야 할 텐데 한국은 '싼 게 비지떡' 아닌가. 서태지나 이현도 비디오와 김경호 같은 비디오를 비교해봐라. 우리나라는 '예술성 높은 저자본'이란 건 백만분의 1 확률이다. 활발한 홍보 활동 역시 닭살 돋아서 하래도 못 할 듯. 뭐하러 하나. 영화 음악은 아직 누가 해보라 그런 적 없어서 생각 안 해봤다.
김: 한국에서 생계를 위협받는 가장 과격한 방법은 음악을 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특별한 부업 없이 음악만 하는 것인지?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사는지? 혹 소속사에서 월급이라도 받는지? 클럽 공연에는 거의 페이가 없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인지?
윤: 처음 노이즈가든 할 때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학교 다니는 것이 밴드 생활에 지장이 된다거나 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내가 낮에 어디서 뭘 하건 밴드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요즘은 각종 일들을 하고 있다. 다른 멤버들 역시 각자 알아서 자기 할 일들을 하고 있다. 밴드로 돈벌이가 된다거나 그런 생각은 거의 않는다. 락 음악 하면서 이걸로 먹고 살리라 하는 것만큼 바보 짓은 없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되는게 J 클럽 아닐까. 근데 무서운 건 스래쉬 메탈 하는 놈들조차도 기회만 와주면 그런 거라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더 웃긴다. 역시 우리나란 안 되는 나라다.
클럽 공연은 페이와 상관없이 기분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안 한다. 돈 10만원 갖고 억지로 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
김: 노이즈가든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중후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형태인데 맺기만 하고 풀지를 않더라. 아무리 Soundgarden 과 Danzig 의 영향이 크더라도 좀더 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음악이 그런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왜 신나는 게 없는지...... 근데 1집이 다 그런 거 보면 당시에 내가 신나지 않았나 보다. 신나는 거 없다고 일부러 만들어 넣은 건 없으니까. 그냥 나오는 대로 만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다면 내가 신나지 않는 사람인가보지 뭐. 근데 웃긴 건, 카피 곡은 신나는 거 많이 한다.
김: 노이즈가든의 음악은 분명 내수용이 아니라 해외 진출용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에 나가기 위한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세운 적 있는지? 적어도 문제의 음반 <Am I Metallica>에 실린 그 음악을 듣고 일본에서 반응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떤가? 혹 그 음반을 Metallica 에게 보내기는 했는지?
윤: 반응이 어떤지는 무신경한 편이기 때문에 잘 모르겠고, 공식적으로 보낸 건 없다. 공식적이 아닌 루트라면 언젠가 들어가겠지. 요번에 나온 Nirvana Tribute 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내수용/해외진출용은 웃기는 얘기다. 우리 가사를 다 한글로 하게 된 연유도 거기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락 그룹들 인터뷰는 항상 그렇다. "가사는 왜 영어로 했나요?"-"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웃긴 말이다. 그래서 해외 진출한 그룹은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 뮤지션들이 말하는 해외에서의 무용담은 다 사발이다. 뭐, 믹싱이니 마스터링이니 처음에 안 해주려다가 음악을 듣고 놀라서 해줬다라는 식의 그런 것들. 웃기지 마라. 우리도, 언니네도 돈만 내면 다 해준다. 모 가수가 영국 메트로폴리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 영국에서의 데뷔를 제의했다고 한다. 언니네 마스터링할 때 그 스튜디오에서 한국 가수 아는 사람 있냐 그랬더니 하나도 모른단다. 펫샵보이즈와 진(Gene)이 와서 녹음하고 있는데 변방의 한국 가수에게 데뷔 제의를 누가 하나?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마스터링 해준 사람은 사운드가든과 컬트 등을 했던 사람이다. 우리도 그 사람이 안 해주려다가 깜짝 놀라서 해줬고 미국 데뷔 제의받았다고 사발치면 되는 거다. 근데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초라해진다.
김: 노이즈가든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시도일 듯도 싶지만, 혹 국악이나 트롯 리듬을 결합시킬 의향은 있는지? 그 외에도 다른 장르의 음악(특히 제3세계 음악)을 결합시킬 생각은 있는지? 그리고 다른 음악인과 협연을 할 의향은 있는지? (예를 들어 한울림 예술단이라든지......) 만약 노이즈가든 멤버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한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구와 함께 하면 좋겠는가?
윤: 자연스럽게 내가 관심을 갖게 된다든지 우연히 어떤 사람과 알게 되었다든지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관심도 없는 분야에 의도적으로 끼어들긴 싫다. 내가 살아오면서 국악에 관심 가져본 적도 없으려니와 TV에서 국악 나오면 채널 돌리던 사람이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 꼭 지들이 음악하면 김덕수 부르고 북치고 장구치고 그런다. 국악을 접목했다는 자체가 추한 게 아니라, 그 마인드가 추한 거다. 트롯 또한 마찬가지. 최근 들어 벤처스나 딕 데일(Dick Dale) 같은 서프 기타 음악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Ride the lightning>에 그런 식으로 해봤다. 존존(John Zorn)과 버켓헤드(Buckethead)를 들었기에 역시 그 곡 중간중간에 지랄도 해봤다. 블루스를 좋아해서 솔로는 블루스풍이었다. 그 이상 뭐가 필요한가?
그 외에 화이트스네이크(Whitesnake)와 딥 퍼플(Deep Purple) 등을 합주하는 잭팟(Jackpot)이라는 프로젝트도 하고 블루스 프로젝트도 있어서 가끔 '저스트 블루스'라는 클럽에서 연주도 한다.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으면 그 방면의 전문가와 할 것이다. 자기 혼자 전 장르를 겉핥는 조선 딴따라들은 정말 싫다. 내가 좋아하는 명인들이라면 누구와 한 무대에 서도 너무 좋을 것이다.
김: 데뷔 앨범을 만들 당시 비화에 대해 알고 싶다. 엔지니어는 누가 들어왔고, 멤버는 누가 들어갔으며(하도 자주 바뀌니까), 돈은 얼마나 들었고, 회사에서 어떤 간섭이 있었고......등.
윤: 비화라면......엔지니어는 송필원이라는 사람으로, 우리 데모 녹음도 했던 사람이다. 실력이 있다기보다는 우리와 말이 잘 통하고 시키는 대로 잘 해주어서 좋은 사람이다(2000년판 정정: 사실 실력도 있고 잘 하는 사람이다. 이 인터뷰할 당시 서로 안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얘기한 것). 대부분의 톤 메이킹이나 믹싱은 나와 당시 베이스를 치던 이상문이 했다. 우리 멤버는 94년부터 지금까지 박건, 나, 염재민, 박경원이다. 95년 여름, 염재민이 군대에 끌려가고 약 3, 4개월 간 초대 베이시스트인 최민호가 고시를 준비하고 있음에도 도와주었고, 95년 말부터 약 1년 간은 나와 중고교 동창이자 노이즈가든 제5의 멤버(사운드 엔지니어이자 기타리스트이기도 하고 술자리 및 사석에 항상 동참하던)였던 이상문이 처음으로 베이스를 잡으며 도와주었다. 아무리 멤버가 없어도 이 바닥에서 구르던 애들과는 함께 하기 싫다. 생각들이 다 구리고 음악을 정말 안듣는다. 집에 가보면 CD 열 장 있으면서 주워들은 철학은 엄청 많다. 백스테이지(뮤직비디오 감상실)에서 누구의 비디오 하나 보고 그들의 음악을 심도 있게 논하는 바보들 천지다.
그래서 앨범 녹음은 이상문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 96년 말에 염재민 복귀. 이상문은 현재 나와 잭팟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다. 기타리스트로 하는 합주 밴드도 있다. 어땠든 간에 돈은 뭐 남들 드는 정도 들었고 회사에선 일체의 간섭이 없었다. 안 한다는 조건으로 했으니까 당연한 거겠고......
김: 정말 희한한 건 특별히 과격하거나 도덕적인 하자가 없음에도 앨범에 가사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별한 상징적 의미인가? 그 가사들은 일반인들이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윤: 가사는 일단 한때를 풍미했던 바보들이 음악보다 가사를 더 많이 논하는 게 싫었다. 그리고 오디오란 같은 데서 글 보면, 다들 CD 사면 일단 가사부터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안 넣은 게 첫 번째 이유고, 또 부클렛 미관상 안들어가는 게 더 보기 좋았다. 그런 거 보고선 뭐 가사엔 비중이 없네 어쩌네들 그랬지만, 팝송엔 없는 가사 찾아 모으는 작자들이 말은 참 잘한다 싶었다. 가사는 메동 가사란에만 올렸다. 통신 인생의 반 이상을 메동에서 보냈는데 내가 메동에 할 수 있는 건 게시판 관리 말고는 그것밖에 없었던 거 같아서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라도 일단 거기에만 올렸다. 거기에만 올려도 원하는 사람에겐 어떻게든 갈 거라 생각했다.
김: 정말 힘들 것 같은데 혹 노이즈가든 카피 밴드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해주시고 싶은 말 한마디.
윤: 글쎄, 나우누리 회원이 포함된 어떤 밴드가 <난 기다려>를 합주했단 얘기를 들은 적 있고, 놀라운 건 아는 밴드가 진주 공연 갔을 때 오프닝으로 나왔던 진주 아마추어 밴드가 <타협의 비>를 했다는 거였다. 직접 본 건 하나도 없다. 한마디 하자면, "해보니까 들을 때보다 훨씬 쉽지?"
김: 앞으로 음악을 하려는 초년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지?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들에게도 따로 한마디 해주면 고맙겠다.
윤: 알아서들 해라. 어차피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하는 거나 듣는 거나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