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선계(先系)는 창녕(昌寧)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대악서 승(大樂署丞)을 지낸 조겸(曺謙)으로부터 고관(高官)과 대작(大爵)을 대대로 배출하였다. 16세(世)를 전해 내려와서 좌정승(左政丞) 조익청(曺益淸)에 이르러 명성과 덕망이 더욱 성대하였다. 그 손자인 조상명(曺尙明)은 덕원 부사(德源府使)를 지내고 조경무(曺敬武)를 낳았는데, 조경무는 중군 부사직(中軍副司直)을 지냈다. 사직(司直, 조경무를 말함)은 조말손(曺末孫)을 낳았는데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군수(郡守, 조말손을 말함)는 조치우(曺致虞)를 낳았는데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지냈다. 이가 곧 공의 황고(皇考, 아버지를 말함)이다. 공의 선비(先妣)인 숙인(淑人)은 창원 박씨(昌原朴氏)로 부장(部將)을 지낸 박혁손(朴赫孫)의 딸이다.
공은 병오년(丙午年, 1486년 성종 17년) 8월에 태어났다.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학유(學諭)와 사록(司錄)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4년 뒤에 전적(典籍)에 승진하였고, 이어 호조(戶曹)ㆍ형조(刑曹)의 좌랑(佐郞)과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 형조(刑曹)ㆍ예조(禮曹)의 정랑(正郞)에 전임(轉任)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 여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며, 경인년(庚寅年, 1530년 중종 25년) 8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45세였다. 창원부(昌原府) 북쪽에 있는 지개동(之介洞)의 청룡산(靑龍山)에 장사지냈다.
공의 휘(諱)는 효연(孝淵)이고 자(字)는 언부(彦溥)이다. 총명 준수하고 민첩 예리하여 남다른 풍도가 있었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는 즉시 붓을 휘둘러 완성하였는데, 글의 내용이 거침없이 분방하고 억양(抑揚)이 강하였다. 공은 유사(有司)의 뜻에 구차하게 고분고분 따름으로써 어서 빨리 출세하려고 하지 않았고, 벼슬에 있을 때에도 기개가 특출하고 행동이 고상하여 남에게 아부하거나 짐짓 부드러운 태도를 지어 환심을 사거나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벼슬길이 많이 지체되었으나 공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곧 스스로 말씨가 급한 것이 도(道)에 해롭다고 여기어 옛사람이 가죽을 허리에 패용(佩用)한 훈계1)에 사뭇 뜻을 두었다고 한다.
처음에 원정공(院正公, 사옹원 정을 지낸 아버지 조치우를 말함)이 매우 효성이 독실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모친을 봉양하다가 70세 때에 상(喪)을 당하였고, 공이 걸군(乞郡)한 것도 부모를 봉양하기에 편리한 까닭이었는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원정공이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중에 세상을 떠났고, 또 1년 뒤에 공이 다시 상복을 입고 있는 중에 세상을 떠났으니, 오호(嗚呼)라 애통한 노릇이다. 하늘이 이 집안의 효사(孝嗣)들에게 제대로 보답해주지 않은 것이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공의 배필(配匹)인 영인(令人)은 진성 이씨(眞城李氏)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이우(李堣)의 딸이다. 부인의 증조(曾祖)는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지낸 이정(李貞)이고, 할아버지는 진사(進士)로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이계양(李繼陽)이다. 영인(令人)은 성품이 온순 현숙하고 행실이 얌전하였으며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남편에게는 순종하고 자식에게는 자애로웠다. 정미년(丁未年, 1487년 성종 18년) 모월(某月)에 태어났고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 5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79세였으며,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충순위(忠順衛) 조윤신(曺允愼)이고 차남은 진사(進士) 조윤구(曺允懼)이다. 충순(忠順)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조계익(曺繼益)이고, 차남은 조광익(曺光益 취원당(聚遠堂))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3남은 조희익(曺希益)이고, 4남은 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 이고, 5남은 조겸익(曺謙益)이다. 진사(進士)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조선익(曺善益)이다. 증손(曾孫)은 남녀 합하여 약간 명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의 증조께서 무과에 올라 중군(中軍)이 되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공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네. 4세(世)가 연이어 과거에 올랐고 또 손자가 과거에 올랐으니, 진실로 집안의 명성은 멀리 그 연원(淵源)이 있었네. 공이 잘 계승하여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었으니, 벼슬이 낮은 것을 어찌 한탄하겠으며, 효도하다가 죽었으니 어찌 원통하게 여기리오. 화복(禍福)이 번갈아 찾아드는 이치는 분명하여 어둡지 않네. 후손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아마도 내 말에 징험(徵驗)이 있으리라.
각주
1) 성미가 급한 사람이 피혁(皮革)을 패용(佩用)함으로써 느긋한 태도를 스스로 함양하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전국(戰國) 시대에 서문표(西門豹)가 급한 성질을 느긋하게 다스리려고 항상 가죽을 허리에 차고 다닌 일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 후한(後漢)의 범염(范冉)도 급한 성질을 다스리려고 조정에 출사(出仕)할 때 항상 가죽을 패용하였다. 이와 반대로 성미가 지나치게 느린 사람은 팽팽한 활시위[弦]를 항상 패용하여 스스로를 경계하였음.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ㆍ≪후한서(後漢書)≫ 범염열전(范冉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