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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도 바울의 행적
사도행전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오늘은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사도 바울의 행적과 그 교훈들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 시에까지 들어와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2년 동안 체류하면서 여전히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치며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음을 봅니다. 그 당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법정에서 공인된 종교 혹은 비공인된 종교로 아직 결정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유대교는 공인된 종교였으므로 어느 정도 로마의 공권력의 보호를 받았지만 기독교가 아직 공인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 로마 황제 네로 앞에서 사도 바울이 상소함으로 인하여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재판 결과에 대하여 매우 큰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재판을 기다렸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네로의 정확한 판결이 내려졌는지에 대하여 확인된 점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1차 감옥에 있을 기간이 주후 60년에서 62년까지의 이년간인데 이 때에 로마 황제 네로는 점점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갔습니다. 타키투스가 쓴 연대기라는 책을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네로 황제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하고 그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해졌습니다. 자기가 턱수염을 처음 깎은 날을 기념하는 날을 기념하며 축제를 만들어 온갖 음란한 일들을 행하게 하고 상류 계층의 여자들까지 음란한 대사를 외게 하고 온갖 방탕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리하여 퇴폐 풍조에 빠진 이 오래된 수도는 네로 황제로 인하여 더 깊은 악덕으로 팽배한 타락의 도시로 바꾸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혜성이 나타났는데 민간 신앙에 의하면 혜성은 왕의 교체를 예고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로가 추방될 것이고 다음에 선택될 왕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런 도중에 저 멀리 지금의 영국 브리타니아 지역에서 동란이 일어났습니다. 네로 당시만 하여도 로마 제국의 영토는 지극히 광대하였으니 이집트를 포함한 북 아프리카 전역과 이베리아 반도 곧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 그리고 지금의 프랑스 전역인 갈리아와 바다 건너 영국의 남부인 잉글랜드 지역과 게르만 족이 사는 유럽 중부 지역과 지금의 그리스와 발칸 반도의 남부 지역, 그리고 지금의 튀르키예 전역과 시리아 전역과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 지역까지 차지하고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을 가지고 다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광대한 지역에는 이런 저런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 모든 일의 수장인 로마 황제 네로는 군대를 지휘하는 일만 해도 참 위중한 상황인데,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행을 계속 저지르고 있었고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세네카마저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의 군사적 고문이었던 부루스라는 사람도 병 때문인지, 네로의 독살 때문인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네로는 고삐가 완전히 풀려버린 악마처럼 날뛰는 야생마가 되어버린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네로가 재판정에서 정상적인 판결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재판정에서 깊이 기독교에 대하여 심의를 하였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은 네로에게까지 기독교의 진리를 증거했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모든 자들의 장차의 심판에 대하여 증언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적절한 기회가 네로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로마에서 있었던 1차 구금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은 셋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또한 쇠사슬로 그를 결박한 채 날마다 그를 지키는 로마의 시위대 청년들을 한 사람씩 전도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가 그 투옥 기간 동안에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인 빌립보서 1장 12절, 13절에 보면 시위대 안에 복음이 상당히 전파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당시 시위대는 로마의 귀족의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사도 바울과의 접촉은 로마의 상류층의 젊은이들 중에 기독교 복음이 증거되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이 로마에 있는 동안에 복음이 로마 황실 안에도 전파되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1,22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편지 마지막에 작별 인사말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빌립보 편지는 사도 바울의 로마의 1차 옥중 생활의 거의 마지막 때에 쓴 편지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보낸 사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하도 수고함으로 인하여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소식을 빌립보 성도들이 전해 듣고 염려를 하였는데, 그렇게 전해들어서 빌립보 성도들이 염려하고 있다는 말을 에바브라디도가 병에서 나은 다음에 듣고는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그의 손에 붙여서 보내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루 이틀에 진행될 일이 아니고 적어도 1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1차 투옥 기간 중 거의 막바지에 쓴 편지로 보아야 합니다. 그 때쯤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약 2년 정도 로마에서 사역하였는데, 벌써 그의 복음 전도의 영향력이 로마 귀족 자제들인 시위대 안에 널리 퍼졌고 또 로마 황제의 가문인 율리시스 클라우디오 황실에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형제 자매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밤중에 그 곁에 서서 이르신 말씀 곧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사도행전 23:11)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본받아서 우리도 집에 있으나 병원에 있으나 학교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배나 차량이나 비행기 안이나 어디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힘을 다합시다. 사도 바울이 가장 비천한 죄수의 신분이 되어서 전도하기가 참 불리하였으나 복음을 열렬히 전하여 열매를 많이 맺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어떤 입장, 어떤 자리, 어떤 지위에 있든지 간에 기회를 만들어서 예수님을 전하는 데 모든 역량을 발휘합시다.
디모데후서 4:2 말씀에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썼던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 모두 이 말씀대로 최선을 다하여 당장 전도의 열매를 맺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할 일인 전도의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때에 사도 바울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주후 62년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곧장 그가 오랫동안 꿈꾸었던 서바나 곧 지금의 스페인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갔을까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클레멘트라는 속 사도가 쓴 서신에서는 사도 바울이 서바나에 갔다 온 것에 대한 암시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서방의 한계점까지 나아가 권세자들 앞에서 증언하였고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 거룩한 곳으로 올림을 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인내의 가장 위대한 모범이다”(클레멘트)
만약 서바나에 갔다고 한다면 감옥에서 풀려난 즉시였을 것이고 어느 시간이 흘러 돌아와서 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1차 로마 투옥의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약 2년 내지 3년 동안 전도 활동을 행한 것은 그의 서신서들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기록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 쓴 그의 편지 속에 그의 다음 행적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을 썼습니다.
빌립보서 2:23 이하의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디모데)를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갇혀 있을 때에 풀려나면 마게도냐 지역을 방문하여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들을 방문할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빌레몬 2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골로새 시에 살고 있는 빌레몬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가 곧 로마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예상하면서 소아시아 지역 곧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 등을 방문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석방된 후에 행한 제 5차 전도여행 중에 쓴 편지를 보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충분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먼저 디도서 1:5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레데 섬에 갔다가 그의 동역자 디도를 거기에 남겨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레데는 오늘날 그리스 남쪽에 있는 크레타 섬으로서 매우 큰 섬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는 동안에 이 섬에 어느틈엔가 기독교 공동체가 상당한 규모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필요가 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곳에 방문하여 지도하였다가 그의 동역자 디도를 그 교회에 남겨서 그 교회의 지역 목회를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 남겨진 디도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디도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디도서 3:12 말씀에 보면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해에 겨울쯤에 니고볼리라는 곳에서 동역자들과 회동하기로 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니고볼리는 그리스 북서부 해안 도시입니다. 이곳은 로마 식민지 도시로서 로마의 첫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을 쳐부순 악티움 해전의 승리를 기념해서 건설한 도시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동역자 율법 교사 세나 그리고 아볼로와 디도까지 함께 모여서 겨울을 지내려고 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해서 복음을 그리스 북동부 위쪽으로 전파하여 발칸반도 지역을 복음화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5차 전도 여행 중에 디모데에게 써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 1:3,4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르기를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업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들러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눈 후에 그 교회의 영적 감독과 지도를 위하여 동역자 디모데가 필요한 것을 느끼고 떠나면서 디모데를 남기고 자기는 마게도냐 지역으로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 게 디모데후서 4장 부분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또 다시 체포되어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수감되어 있던 때였고 그가 에베소교회에 남겨두어 목회하던 디모데에게 쓴 마지막 유언과 같은 편지입니다. 거기에 보면 디모데후서 4장 20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당국에 다시 체포되기 전 전도여행할 때에 사도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도 잠깐 머물렀는데 그곳에도 교회가 있었던 것을 보입니다. 또 그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도 이 5차 전도 여행 때에도 한번 들러서 에라스도를 거기에 머물게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9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디모데후서 4:9~13)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마게도냐로 가는 도중에 드로아 항구에 들렀는데 거기에 드로아 교회의 형제 가보의 집에서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아마 여름이어서 사도 바울은 그의 두꺼운 겉옷을 맡기고 떠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이 오기 전에 사도 바울이 다시금 로마 당국에 의하여 체포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체포된 것은 주후 64년 경의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 일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타키투스의 연대기를 보면 그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이 지음이 네로와 로마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대단한 시인이며 가수로 여겨서 공개적인 무대에 서고 싶어했습니다. 이전에 청년제 때에 자기 집 정원에서 모인 청중 앞에서 노래한 곳은 나처럼 성량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너무 좁다면서 자기의 시를 자랑하고 자기의 노래를 자랑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극장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서 박수 갈채를 즐기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도 네로는 그가 계속하여 사람을 죽이곤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과 부자연을 불문하고 온갖 음행으로 몸을 더럽히며 더 이상 타락할 도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할 만큼 패덕의 극한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타키투스는 네로의 극단적인 타락의 예로, 네가 정식 결혼 절차를 밟아 불결한 남색 상대자 중에 한 명인 피타고라스라는 사람과 결혼식을 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책에서 쓰기를,
“로마의 최고 사령관이라는 자가(네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부가 쓰는 주홍색 베일로 머리를 덮었다. 혼례 증인이 입회했다. 지참금이나 합환 침상, 결혼 횃불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끝내는 여성의 경우에는 밤에 의해 숨겨지는 것까지 모두 사람들 앞에 노출시켰다. 그 후 곧 재난이 일어났다. 우연이었는지 황제의 책동에 의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의 화재는 그 때까지 수도를 덮쳤던 어떤 맹렬한 화재보다 규모가 컸고 피해가 엄청났다. 그 불길은 대경기장이 있는 팔라티움 언덕부터 불에 타기 쉬운 점포들에 붙었고 불길들이 더 강해졌다. 평지를 다 태우더니 약간 높은 평지로 올라가더니 다시 저지대를 휩쓸었다. 어떤 소화 대책도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재해의 기세가 빨랐다. 그 무렵 로마는 폭이 좁은 길이 이리저리 꼬불꼬불 구부러지고 집이 늘어선 모양도 불규칙했기 때문에 피해를 입기 쉬운 수도였다. 사람들은 다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불길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불을 끄려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위협하고 방해했다. 개중에는 여봐란 듯이 횃불을 던지면서
“당국의 명령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외치는 자도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대화재는 로마의 거의 3분의 2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정도로 참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 로마 밖에 나갔다 돌아온 네로가 잿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로마의 시민들에게 자기 궁전의 정원을 개방하여 쉬게 했지만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에게 이런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네로가 수도가 한창 불타고 이을 때 대 저택 내의 사설 무대에 올라서서 눈앞에 화재를 구경하면서 이것을 태곳적의 불행과 비교하며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고 있었다. ”
트로이는 그리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태워지고 멸망된 소아시아 북부 도시였습니다. 그것을 소재로 하여 호머가 일리아드라는 서사시를 지었습니다. 네로는 로마가 불탈 때에 불타는 트로이 성을 생각하면서 어쭙잖은 시를 읊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의 대화재로 인하여 네로 황제에게 엄청난 원성을 쏟아졌습니다.
이에 네로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도들이 이렇게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사람들은 네로가 대화재를 명했다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들이 평소 꺼림칙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합세했습니다. 타키투스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다시 이 해악의 발상지인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마음에 안 드는 파렴치한 것들이 모두 흘러들어오는 이 수도 로마에서조차 이 기독교가 극도로 창궐하고 있었다.”
이 기록을 보면 기독교 복음의 전파력이 로마 시내에서 실로 강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화재를 기점으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기독교인 검색령을 내리고 기독교인들의 체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살해를 당할 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타키투스의 글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야수의 모피를 뒤집어 쓴 채 개에 물리고 찢겨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십자가에 붙잡아 매고, 혹은 불에 타기 쉽게 만들어놓고 해가 지고 나서 야간의 등불 대신에 불태웠다고 합니다. 네로는 이 구경거리를 위하여 자기 황제의 정원을 제공하고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고 네로 자신이 처형당할 기독교인들 사이로 직접 전차를 몰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체포한 기독교인들을 전차에 치어 죽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렇게 희생되는 것은 네로 한 개인의 잔인성을 만족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연민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고 타키투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로마 제국 수도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상황 속에서 로마 당국에 의하여 마녀사냥처럼 기독교를 박해하던 중에 사도 바울이 그 기독교 지도자로서 낙인이 찍혀서 로마의 군인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끌려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체포된 장소는 사도 바울의 행선지 중에 로마에 가까운 최종 장소인 니고볼리 시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서신들을 종합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석방 된 후에 5차 전도 여행을 한 그 여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서바나에 처음 잠깐 갔다 왔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크레타 섬에 디도와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 디도를 내려놓고 사도는 빌레몬에게 쓴 편지에서 이른 대로 그 다음에는 밀레도 항구에 들렀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동역자 드로비모가 병들었기 때문에 그곳에 두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밀레도 항구는 빌레몬서의 편지 내용대로 빌레몬이 살고 있던 골로새 시가 가깝기에 사도는 골로새 시로 가서 빌레몬 집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바브라가 세운 골로새 교회에도 들러서 여러 성도들과 교제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서 골로새 시 가까운 곳에 바로 삼년 동안이나 그가 사역했던 에베소 시가 있기 때문에 거기로 가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만나 교제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 교회에 그 동안 사도 바울이 비어 있는 사이에 이전에 영적으로 느꼈던 바대로 장로들 중에도 삯꾼 목자가 생겼고 이리떼도 밖에서 들어와 양떼들을 괴롭게 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음을 보고서 사도 바울은 자기와 동행했던 디모데를 거기에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러 드로아 항구에 도착하여 드로아 교회 성도인 가보의 집에 묵었을 것입니다. 아직 여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거기서 자기의 겉옷을 맡겨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다가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가죽종이로 쓴 구약 성경을 맡겨 두었습니다. 당시에 가족 종이인 양피지에 쓴 구약 성경은 모세 오경 중 신명기 책 한권이나, 혹은 이사야 책 한 권이나 시편 한 권식으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게해를 건너 마게도냐에 건너가서 그곳의 약속을 주었던 대로 빌립보 교회를 들러서 성도들과 정겨운 대화도 나누고 그의 로마 감옥에서의 옥바라지를 위하여 아프기까지 했던 에브라디도를 다시 만나 그간의 일로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아가야 지방으로 내려가 고린도교회에 들러서 그 교회를 격려하고 거기에서 에라스도를 머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동역자들과 만나서 겨울을 함께 지내려고 작정했던 장소인 니고볼리로 이동했다가 네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면서 이방 교회의 대표격인 사도 바울을 체포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사도 바울이 니고볼리에서 계획했던 바가 그 동역자들과 함께 그 윗지방 일루리곤 혹은 달마디아로 가서 전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달마디아 혹은 일루리곤 지역인 지금의 알바니아 나라 근방에서 전도하다가 체포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의 5차 전도여행이 마무리 되고 로마 감옥에 다시 들어간 사도 바울은 로마 대화재를 일으킨 주동 배후 인물로 낙인이 찍혀서 법정에서 계속 추궁을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당국은 이미 네로의 비이성적인 강요 속에서 기독교인들을 맹렬히 핍박하면서 그 본보기로 수백 명을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하고 횃불로 삼아 태워 죽이고 전차 바퀴에 치어 죽이는 일을 해왔기에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봐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려오는 말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편지를 써서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아들처럼 여기던 디모데를 속히 겨울 전에 오도록 부탁했지만, 그 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사도 바울을 감옥에서 칼로 목을 베어 죽였다는 것이 정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부들이 주로 인정한 통설대로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이 쓴 편지라고 여긴다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쓴 후에 에베소에서 디모데가 올라와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히브리서 13장 22절로부터 23절에 보면, 이렇게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정통 교부들은 이 히브리서의 기록자가 사도 바울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편지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다시 갇혀 있을 때에 디모데가 사도의 편지를 받고 급히 로마로 왔다가 잠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풀려난 것을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의 순교한 연도가 로마 화재 다음해인 주후 65년보다 1~2년 늦어진 67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과도 부합됩니다. 아직 성전이 예루살렘에 멀쩡히 서 있는 상태에서 유대인들 중 일부가 공인 종교인 유대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대화재 사건의 주범으로 낙인찍혀서 불법 종교로 여겨져서 로마 제국 내에서 박해받는 기독교를 버리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감옥에 다시 갇혀 있으면서 유대인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으면서 이렇게 간절한 히브리서 편지를 써보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그가 주후 60년에 1차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은 후에도 그 후 65년 내지 67년 정도에 순교하기까지 참으로 한번도 쉬지 않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에도 전도하였으며 그리하여 로마의 최고위 지도층에 복음이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빌립보서를 써 보냄으로써 당시 교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여러 이단적인 교훈들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영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세워져야 하는 각 직분자들의 신앙과 인품과 그 섬김의 도리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수많은 이교적 문화와 이단적 사상에 맞서서 견고하게 서서 복음 진리를 계속 지켜가며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신학적 기반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또한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전도하며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격려하였으며 함께 동역했던 동역자들과 함께 협력 사역을 계속함으로써 복음 전도의 영향력이 더 깊게 더 넓게 더 빠르고 강력하게 뻗어나가도록 힘을 보태었고 리더쉽을 발휘해주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와 협력하여 사역하던 디모데와 디도와 같은 동역자들에게 목회 서신들을 써 보내어 목회자의 합당한 자세들을 자세히 가르쳐줌으로써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하여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남아서 교회들을 지도해갈 수 있도록 목회의 방향들을 분명히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많은 시련들이 있었으나 늘 기도하면서 성령 안에서 그 고난을 이겨나감으로써 진정한 신앙인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의 협력과 존경도 받았지만 동시에 견제도 받았고 배신도 당했습니다. 그가 세웠던 교회의 장로들과 성도들로부터 충격적인 배신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이겨나갔으며 그 가운데 도저히 변화되지 않은 쓴 뿌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단호함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여러 차례 갇히자 그 일을 가슴 아파하는 동역자들과 성도들도 있었지만 그의 거듭된 시련 속에서 그를 등지고 떠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사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처럼 디모데에게 쓴 사도의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6~8)
그렇습니다. 그의 나이 35세쯤에 다메섹 도상에서 대낮의 태양보다 더 강렬한 영광의 빛 가운데서 그를 찾아오신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사도 바울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던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은 마치 계속된 전쟁터의 싸움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숨 막힐 정도의 길고 긴 달음질 경주와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전쟁터에 선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어 갔고 보았고 싸웠고 이겼습니다. 또 달렸고 또 달렸고 또 달려서 마침내 주님이 기다리는 결승점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후회없이, 후퇴없이, 남김없이 그의 삶을 소진하여 자기의 부르심에 온전히 충성하고 그리운 주님께 돌아갔던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철학자 토인비는 사도 바울을 평가하면서, “바울을 태웠던 배는 유럽의 문명을 싣고 가는 배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한 인물이 끼친 영향력이 그 후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뜻입니다.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참 진리를 전파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놀라운 세계 비전 곧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그 뜻을 이루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제 21세기를 맞아 주님이 오실 때가 심히 가까워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이제 교회와 그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우리 역시 이 시대에 사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들로서 마땅히 달려갈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싸우기 시작하여 많이 정복해온 영적 전쟁터의 남은 한쪽 격전지가 지금 21세기에 부름받은 우리가 맡아 싸워야 할 싸움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전선의 적군들은 종교다원주의, 세속주의, 동성 연대 등 치열한 영적 전선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 전쟁터의 자리에서 도망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러시아나 우크라 군인들이 날마다 전쟁을 치르는데, 후방에 있는 젊은이들 중에 도망치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영적 전쟁터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영적인 도망자, 탈영자들이 되지 맙시다.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며 내 믿음을 지키다가 다친 영적 상처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사령관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말이 “네 상처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 때 주님 앞에 복음을 인하여 일하고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당한 욕설, 손해, 희생 등의 상처들을 증거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우리의 신앙의 경주 길을 달려가는 일을 쉬지 맙시다. 사도 바울이 그의 달음질을 마쳤던 주후 65년까지 30년을 계속 달음질한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 뵙는 그 날까지 우리의 신앙의 달음질을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계속하여 멈추지 않고 달음질하여 장차 주님 앞에서 쇠하지 않은 영광의 면류관들을 다 받아 누리는 복된 영적 경주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