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이란 단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읽는 사람, 성경을 통해 나를 읽는 사람, 성경을 통해 세계를 읽는 사람, 성경을 통해 역사를 읽는 사람이다. 또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사람이자 교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교회를 읽고 묻는 사람이어야 한다.
단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읽고 묻는 사람은 하나같이 말한다. 교회가 위기라고, 그것도 매우 심각한 위기라고, 기독교를 ‘안 믿는 시대’를 지나 ‘혐오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고. 나도 그리 생각한다. 하여 독자들과 함께 교회사적 위기에 처한 교회를 읽어보려 한다. 교회 위기의 표피적 증상이 아닌 위기의 깊은 내막을 추적하려 한다. 위기의 내막과 근원에 눈뜰 때 비로소 극복의 길이 찾아지리라 믿기에,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기에.
예수와 교회
교회가 뭘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27). 예수는 자기 몸인 교회의 토대이자 머리이다(엡 1:22). 교회의 토대이자 머리인 예수는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는 사뭇 다른 가르침을 전했다(막 1:22). 모세율법에 대한 이해가 달랐고, 각색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고쳐주었다(마 4:24).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가르침을 전하고 능력을 행하는 예수를 보고 “이는 어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막 1:27)라며 놀랐다. 언제나 소문은 발보다 빠른 법. 희망에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 소문을 듣고 처처에서 모여들었다. 병든 자, 헐벗고 주린 자, 로마의 권력에 짓밟혀 신음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3-14)
지금 이 말에 충격받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말이어서 여기에 깃든 파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상상하기 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청중들에게 이 말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솔직히 저들이 누구인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혁명가들인가? 예수와 뜻을 같이하겠다며 피의 언약을 맺은 동지들인가? 아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모여든 장삼이사들이다. 예수만큼이나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무지렁이들이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향해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란다. 너희가 세상을 바꿀 주역이란다. 온 세상이 너희 손에 달렸단다.
예수의 이 말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노래한 찬가와 맥이 닿는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눅 1:51-53, 가톨릭 성경)
마리아는 지금 자기 몸속에 있는 아이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어떤 일인지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세상 이치와 질서를 근원적으로 뒤엎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그 말의 주인공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거리의 장삼이사들인 저들이 세상 이치와 질서를 근원적으로 뒤엎는 주역이 될 거란다. 아무리 살펴봐도 저들에게서 세상의 소금이나 빛이 될 전거나 뒷배가 보이지 않는데 그런 저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될 수 있을까. 세상에 흰소리도 이런 흰소리가 있을까.
예수의 기대, 그리고 교회
예수는 저들에게서 뭘 봤기에 저리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한 것일까? 저들에게서 뭘 봤기 때문이 아니다. 남들에게 없는 뭔가가 저들에게 있어서 저런 흰소리를 한 게 아니다. 오직 거리의 장삼이사들을 불러 세상의 소금 되게 하고 빛 되게 하는 게 하늘 아버지의 뜻임을 믿었기에 그런 것이다. 자기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왔고(마 1:21), 이 땅을 떠난 후에도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저 무지렁이들을 통해 같은 일을 할 것이고(요 15:26),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임을 믿었기에 그런 것이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나 뒷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사실, 하늘 아버지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해 저런 엄청난 말을 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잉여 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허황한 듯 들렸던 그 말은 실재가 되었다. 저들의 희망이었던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자의 처형을 당한 후, 부활하여 잠시 곁에 있다가 승천한 후 약속대로 저들에게 예수의 영이 임한 것이다(행 2:1-4). 예수의 영을 받은 저들은 예수의 몸인 교회가 됐고, 교회를 이룬 저들을 통해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교회(그리스도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 올해 분석한 자료(고든 콘웰 신학대 글로벌 기독교연구센터 2024년 분석)에 따르면, 세계 인구 81억 1천만 명 중 26억 3천만 명이 예수의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적이 놀라운 숫자다. 숫자로만 보면 예수의 기대가 어느 정도 성취된 듯 보인다.
그런데 숫자를 괄호 속에 넣고 묻자. 저들(교회)을 향한 예수의 기대가 정말 성취됐을까? 예수가 기대하고 예고한 대로 그간의 교회가 정말 세상 이치와 질서를 근원적으로 뒤엎는 소금이고 빛이었을까? 명실상부 예수의 몸이었을까?
하나님의 기대, 그리고 이스라엘
여기서 잠시,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큰 민족을 이루셨다. 또 모세를 부르시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에 이르게 하셨다. 그렇다면 묻자. 하나님은 왜 굳이 그 일을 했을까?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집트 왕의 학대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게 불쌍해서? 아니다. 이집트 왕의 학대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저들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고, 여호와께서 저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었다(출 6:7). 저들의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출 10:2, 14:4).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따르고, 하나님만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잘 듣고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신 13:4).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노역에서 해방하신 후 시내산 입구에서 그간의 행적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이다. (출 19:4-6, 공동번역)
이스라엘 열두지파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빠짐없이 준행하겠다고 피의 언약을 세웠다(출 24:1-11). 그런데 언약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낸 자기들의 신’이라며 제단을 쌓는 패악을 범했다(출 32:1-6). 그 후로도 계속 반역과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행한 일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밭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1-2, 개역개정)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극적인 대조를 선포한 이사야는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따지듯 탄원한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사 5:3-4)
하나님은 그 무엇도 더할 것이 없을 만큼 이스라엘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리고 극상품 포도를 기대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채 들포도를 맺었다. 1장에서는 좀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한다.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소환해 말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2-4)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행적에 대해 성경은 줄기차게 말한다. “저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왕하 17:14, 40, 느 9:16, 사 48:18, 렘 3:13, 29:19, 겔 12:2, 단 9:6, 호 9:17) 듣지 않음으로 극상품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것이고, 듣지 않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한 것이고, 듣지 않음으로 모든 고통과 재앙이 비롯됐다는 것이다.
다시 교회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오자. 교회는 어땠을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의 기대에 충실했을까? 누군가는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세상 끝까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된 것은 온 교회가 힘을 다해 선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지금도 대다수 교회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이전까지는 성령이 주도한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이었다고 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380년)하면서부터는 로마 권력을 등에 업은 ‘교회 제국’의 복음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즉 힘없는 장삼이사들을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게 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질서를 근원적으로 뒤엎는 복음이 아니라 힘 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확장하고 지지하는 제국주의적 복음, 기독교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적 선교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콘스탄티누스 이전/이후의 기독교는 같은 기독교라 하기 어렵다.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이 견해의 대표자는 고대 후기 역사의 권위자인 피터 브라운).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이 핵심 내용에 있어서는 플라톤 사상과 결합하며 그리스화됐고, 교회의 조직 체제에 있어서는 로마의 법체계와 결합하며 로마화됐다.
물론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교회가 로마의 박해를 벗어난 것은 환영할 일이요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도 예상치 않은 복음의 그리스-로마화가 진행됐고, 그로 인해 교회는 살았으나 복음은 죽는 기이한 현상 ―즉 교회와 복음이 유리되는 현상, 복음이 교회를 이끌기보다 교회가 복음을 이끄는― 이 나타났다.
이 지점이 교회 굴절의 변곡점이고, 교회 타락의 원점이다. 체코 프라하 출신의 영성가 토마시 할리크는 《그리스도교의 오후》에서 “그리스도교는 4세기가 되어서 렐리기오(종교)의 역할에 순응하기 시작했다”(70쪽)라고 진단한다.
교회 위기의 진실과 근원
오늘의 교회는 어떨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오늘날 생각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위기라고 말한다. 나날이 무너져가는 교세를 염려하며 질문한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왜 세상이 교회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걸림돌이 되었는가? 아니, 걸림돌을 지나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추락했는가?
이 질문에 교회 컨설팅 전문가들은 답한다. 진부한 훈계조의 설교를 바꿔라. 교우들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를 하라. 소그룹을 활성화해서 외로움과 생존경쟁에 지친 마음을 보살피라. 민주적으로 소통하고,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라. 목회 대상을 방만하게 잡지 말고 특정 세대나 특정 과제 중심으로 특화하라. 제자도를 바로잡으라.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라. 사회의 변화 트렌드를 예민하게 읽어라. 미래 세대에 투자하라.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땜질로는 이 시대 교회의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이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하며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과거와 달리 교회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21세기 사회가 세속화·다양화·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교회가 사회 전체를 품고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지금은 많은 영역이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질병은 병원이, 교육은 학교가, 가난 구제나 자연재해는 정부가, 각종 사회문제는 시민단체가, 죽음은 장의사가, 정치는 국회가, 뉴스는 언론이, 문화적 욕구는 예술이, 자연의 신비는 과학이 각각 맡아 선도한다. 교회가 세상사에 끼어들 여지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교회에 귀 기울일 필요 또한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 위기는 이 때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교회 위기의 핵심은 사회의 세속화에 있지 않고, 교회가 철 지난 세계관(근대-중세적 세계관, 양자역학과 진화 이전의 세계관)에 붙잡혀 시대와 공명을 이루지 못하는 데 있다.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기는커녕 세상의 변화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구린 곳이 된 것도 이 때문이고, 목사의 설교가 진부해지고, 교회가 여전히 천국과 지옥 마케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교회가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것도 다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교회가 철 지난 세계관에 붙잡혀있는 탓이다.
또 하나, 오늘의 교회가 갈릴래아-예루살렘 교회를 닮지 않고 그리스-로마화된 교회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오늘의 교회 위기를 복음의 위기라고 생각하는데, 동의하기가 어렵다. 나는 오늘의 교회 위기를 그리스-로마화된 교회의 ‘1,700년 체제의 위기’(313년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380년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 이후 체제)라 생각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과 유리된 것,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현실이 되기보다 종교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 위기의 근원 진실이라 생각한다.
즉,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교회는 그리스-로마화된 교회로 변이됐고, 변이된 교회는 황제보다 더한 권좌에까지 오르며 정통 기독교로 뿌리를 내렸고, 정통 기독교로 뿌리내린 교회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1,700년 동안 세계로 확장되었고, 지금까지 기독교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채 세상 위에 우뚝 설 수 있었으나 21세기인 오늘날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 바로 이것이 지금의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의 본질적 위기에 처하게 된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과 같이 듣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듣지 않아서 예수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로마화된 것이고, 듣지 않아서 그리스-로마화된 교회의 ‘1,700년 체제’를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했던 바로 그 교회라고 착각했던 것이고, 듣지 않아서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듣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려줄 수 없게 된 것이고, 듣지 않아서 짠맛을 잃은 소금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묻자. 들음이란 무엇일까? 저들은 왜 듣지 않은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