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글을 받으면서 남다른 감회에 빠졌습니다.
저는 1964~1966년 7사단 5연대 본부중대에서 근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목'을 탄생시킨 한 명희 소위가 바로 7사단 소초장으로 근무했다는 말에 감사와 더불어
이렇게 훌륭한 노래를 탄생시켜 호국영령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일깨워 주었으니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 태영 드림
비목(碑木) 탄생 뒷이야기
대한민국 가곡(歌曲) 중 명곡의 하나로 손꼽히는 '비목(碑木)'이 잉태된 배경과 지역 의미를 살펴보면,
60년 대 한 청년 장교(학군 2기 한 명희 소위)가 DMZ 소초장(小哨長)으로 근무하면서 체험한 마음을
가사로 담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비목(碑木)은 죽은 이의 신원 따위를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나무로 만든 비를 뜻합니다.
이 곡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등 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 노루 산 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도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군을 떠난 지 오래 됐으나 호국(護國)의 달에 이 노래의 가사를 되새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는 아무런 값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무하던 전방 곳곳에 이름 없는 비목으로 묻힌 수많은 선배들의 죽음을 건 싸움 그리고 그 대가로
얻어진 승리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시절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기에 이 곡의 가사를 쓴 한 명희 씨
의 이야기가 더욱 마음에 남습니다.
비목(碑木)이 잉태된 지역은 금성 천과 북한강 상류와 합류하는 화천 북방, 남쪽은 백암산, 대성 산, 북쪽은
김일성 고지, 오성 산이 위치하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한국 전쟁 당시 휴전이 임박한 상황에 파로호 구만리
발전소를 쟁취하기 위한 피아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군사적 격전지였습니다.
본인은 73년과 74년 7 사단 3 연대 수색 중대 소속으로 그 당시 189GP 장 (188GP 장은 이 재경 동기) 임무를
수행했으며, 오래 전 비목의 가사를 듣게 되었을 때 저는 연도만 다르지 작사가 한 명희 소위와 동일 지역에서
근무했음을 직감했습니다.
한 명희 소위는 막사 주변 빈 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생각으로 삽질을 하던 중 유골 옆에 위치해 개머리판
없는 칼빈 소총 총열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사가의 증언에 따르면 (노래 말 2 절에 궁노루가 등장합니다.) 당시
병사들이 수컷 궁노루(사향노루)를 잡게 되는데 그날부터 홀로 남은 암놈이 짝을 찾아 애절하게 울게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합니다.
이 경험이 아름다운 가사로 녹여져 당시 한 명희 소위가 느낀 비감(悲感)이 더 크게 전달됐습니다.
한 명희 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만든 비목((碑木)을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습니다.
"겉으로는 호국 영령을 외쳐 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
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비열한 사람, 숱한 싸움의 희생 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살면서도 아직도 호국 영령 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을 한번 바쳐보지 못한 못난 이웃들, 제발 그대들
만은 비목을 부르지 말아 다오. 죽은 자만 억울하다고 초연에 휩싸여 간 젊은 영령들이 진노(嗔怒) 하기 전에...
부족하지만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이 뜻깊은 곡을 연주하며 바라옵기는 언젠가 비목 (碑木)' 탄생한 그 현장에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주를 통해 제 마음이 조금이나 마 들으시는 분들께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https://talkmoim-v.kakaocdn.net/streaming/bM41SA/7iGpq35gWw/5AaKRF51Gpc7jHuJKavBr0/groupv_high.mp4?size=27076039
반백 년이 흘러간 세월 속에 호국 영령을 가슴에 새기면서..
백 승훈 드림
<카톡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