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보다 더 어려운 분을 도와주세요.”(초고)
/남태일 (2017. 2. 25)
무서운 한파가 밀려오면서 기온이 영하 18도 까지 내려가는 어느 일요일, 아침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서울에 사는 조카였다.
“삼촌, 할아버지가 새벽에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져 K대학병원 응급실에 왔어요. 뇌졸중인 것 같아요”
순간 칼날 같은 아픔이 심장까지 파고들며 눈앞이 아찔해진다. 혈압 약만 먹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 갈 준비를 하였다. 마누라는 해외에서 식당을 하는 아들을 도와주러 가고 집에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문밖에 나와 보니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였다. 너무 추워서 차도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겨우 시동을 걸어 두 시간 거리의 병원으로 잽싸게 달렸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어린 시절 소문 난 말썽꾸러기이었고 아버지 속을 무척 태웠다. 사흘이 멀다 하고 학교 유리창을 깨서 담임교사에게 불려갔고, 남의 집 닭이나 오리를 훔치어 여러 사람이 같이 먹고 혼자 돈 다물어 내고, 친구들과 싸워서 피투성이 만들어 놓고 입원비, 치료비 물어주고…… 오죽하면 저 놈은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고 까지 했을까. 결혼 후에는 사업 한답시고 아버지가 아껴서 모아 준 돈과 형제들 돈도 많이 날려 버렸고. 나이 오십이 넘어서 사업도 괜찮게 되어 경기도에 와서 새집도 장만하였다. 남자들은 예순이 넘어서야 철이 든다더니 아버지를 봄에 새집으로 모시여 정성껏 효도 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고 하니 가슴이 미여지고 안타가운 마음 어찌 형언 할 수 가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고속도로에서 한창 잘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승용차 시동이 꺼지면서 차가 멈춰버렸다.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소용이 없다. 차 밖으로 나오니 맹렬한 칼바람이 얼굴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일요일이 어서 그른지 오가는 차도 드물고 지나가는 차에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지 않았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려 해도 휴대 폰 배터리조차 떨어졌다. 집에서 나올 때 충전한 배터리를 교체 한다는 것을 깜박 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안의 온도가 떨어지고 손발이 얼어들어 온몸이 점차 굳어지며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귀에는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칼바람에 애처롭게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추위 속에 떨고 있는 마른 풀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숨 쉬는 것은 나 혼자 밖에 없다. ‘사람은 이렇게 죽는구나.’ 절망감을 느끼는 동시에 아버지를 생각하니 어느새 목이 메여 오면서 쓸데없는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이때였다. 낡은 승용차 한대가 멈춰 서고 젊은 남자가 차 옆에 다가 와서 둥글둥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사정을 얘기 하자 두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공구를 꺼내어 수리를 하며 자기 차에 가서 몸을 녹이라고 하였다. 다행히 큰 고장은 아닌 것 같았다. 온 몸은 추위로 굳어진 듯 보이는 그였지만 얼굴만큼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연신 감사하다는 말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잠시 후 시동이 걸렸다. 나는 너무 고마워 지갑에서 10만원을 꺼내어 사례를 하려 했지만 그는 거절하며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도 다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위에 힘든 분이 있으면 저라고 생각하고 도와주세요.” 나는 그의 진심어린 부탁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시간이 흘러 설이 다가오는 무렵, 해외에서 사업하는 며느리가 할아버지 병원비도 드리고 명절에 쓰라며 300만원을 주고 갔다. 서울에 있는 딸네 집에 갔다가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도 찾아뵙고 백화점에서 쇼핑도 할 겸 차를 몰고 서울로 향해 나섰다.
서울 외곽에 도착 할 무렵 추위에 점심시간도 지나 허기를 달래려고 길옆에 있는 김밥 집에 들어갔다. 주인인 듯한 젊은 여자가 목발을 짚고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 옆에는 서너 살 되는 눈빛이 반짝이는 남자 아이가 공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주문한 된장찌개는 너무 맛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올봄에 뺑소니차에 치여서 발목이 절단되었고 그 차는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였다. 주방 옆 작은 방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달려 가보니 아이가 놀던 공이 높은 선반에 걸려 있고, 그 아이는 의자를 밟고 공을 꺼내려다가 넘어진 모양이었다. 서둘러 아이를 안고 차에 태워서 인근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이엄마는 다친 아이를 부둥켜안고 병원비는 어디 가서 구하고 불행은 무엇 때문에 우리 집에만 찾아 오냐고 하며 목 놓아 엉엉 울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팔목 윗부분에 금이 갔단다. 한참 후 침대에서 링거 주사를 맞는 아이가 잠이 들고 그녀는 슈퍼에 물건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느새 창문밖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이때 얼마 전 추운 날씨에 내 차를 수리해주었던 고마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정말 저를 돕고 싶으면 저보다 더 어려운 분을 도와주세요.”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며느리가 설날에 쓰라고 준 돈 100만원을 봉투에 넣고 펜으로 이렇게 썼다.
“저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상처 입고 고생하는 아이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때 병상 옆 책상위에 그녀가 놓고 간 스마트 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었다. 화면에는 미소 짓는 젊은 남자의 얼굴과 ‘남편’ 이란 두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났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는 어찌 이렇게 공교로운 인연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감격에 젖어 다시 봉투에 이렇게 썼다.
“지난 번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서 절망감을 느낄 때 저를 도와 준 분이 바로 애기 아빠였네요!”
혼자 병원을 나왔을 때 하늘에서는 배꽃 같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송이가 녹아 땅속의 씨앗들을 촉촉이 적셔 주면, 머지않아 연두 빛 새싹들이 돋아나며 세상은 온통 봄으로 가득 찰 것이라 생각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