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6-17 예수께서는 저녁에 몰려온 수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셨다.
14-15절은 갈 곳이 없어 사돈 댁에 얹혀 살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신 내용이었다. 이제 이어지는 16-17절은 그날 저녁에 마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16절은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 그날 저녁에 일어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고 되어 있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한 소문만 듣고 온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이 사람들은 4:24-25절 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일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일 것이다. 문둥병자를 치료하시고 백부장의 종을 치료한 소문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들은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 나왔을까? 그날은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지면서 시작되고 토요일 해가 지면서 끝이 난다. 안식일에는 치료를 받을 수 없기에 해가 지고 안식일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 몰려온 것이다. 저들은 안식일이 끝나길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사랑하는 가족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태는 마을 사람들이 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한 동네 사람들만 온 것이 아니라 가버나움 전체가 다 모여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을까? 한 100명쯤 모였는데 온 도시가 다 모였다고 했을까? 100명가지고는 온 도시라고 말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 숫자를 세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셀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집 주변을 가득 메울고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예수께서 치료하신 환자들은 귀신들린 사람들과 병자들로 나뉘어져 있다. 첫번째는 귀신들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일것이다. 거라사 광인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경우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주셨다. 원어에서는 그 영들을 쫓아내셨다 라고 되어 있다. 그 영들이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있던 악한 영들이다. 귀신들린 사람들은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 치료하셨다.
두번째는 병자들이다. 병자들이란 육체적인 질병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치료하셨다고 되어 있다. 때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듯 손으로 만지심으로 치료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씀으로 치료하기도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만지심으로 치료하신 것과 말씀으로 치료하신 것이 함께 나와 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예들은 손으로 만지셔서 치료하셨지만 마태복음 9:6의 중풍병자나 12:13절의 손 오그라 든 사람은 말씀으로 치료하셨다.
16절에서 주목해야 할 말은 “모두 고쳐주셨다”는 말이다. 가버나움이라는 도시 전체가 모였다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면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얼마나 걸렸을지 한번 생각해보자.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 많은 경우 병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예수님께 치료를 받으려고 줄을 섰던 사람들도 예수님 앞에 한사람씩 나와 예수님께 자신들의 아픔을 호소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시고 손을 대시거나 말씀으로 치료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람 앞에 적어도 2-3분정도는 필요하다. 100명을 치료하셨다면 최소한 4-5시간은 걸렸을 것이고 200명이라면 그보다 배는 더 걸렸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밤을 새워가며 한사람 한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치료해 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핵심은 병의 치료가 아니다. 핵심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밝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모든 질병을 치료하실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이 치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을 놓치는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불쌍히 여겨 치료하신 것에 이어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오늘 본문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들도 없이 늙고 병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또 같은 마음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대하시며 밤을 새워 치료해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팔복중에서 5번째 나온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본보기를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팔복중에 사람들을 향한 첫번째 복있는 자이다.
17절은 이사야 53:4절의 인용이다. 이사야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두가지 모습이 나타나 있다. 하나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함을 담당하신 것이다. 새번역은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라고 했다.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의 정확한 반대말은 능력이라는 말이다. 이는 본래 건강하여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연약함이란 몸이 약하여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다.
또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짊어지고 가던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질병을 예수님이 가져가셨다는 말이다. 같은 병을 서로 다른 말로 두번 쓴 것은 히브리적 표현이다. 서양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쓸데없는 반복이라고 싫어하지만 동양사람들은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다시한번 표현해서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지고가는 고통의 짐들을 대신 받아 지신 분이라는 뜻이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은 예수께서 치료하신 것의 핵심이 불쌍히 여기셨다는데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마가복음 6:34절에 보면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고 했다. 또 누가복음 7:11-17절에 보면 나인성의 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내용이 나온다. 7:13절에 보면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다. 죽은 아들의 뒤를 울며 따라가는 여인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처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또 수많은 무리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분이다.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분이 우리의 아픔을 하나하나 다 들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신 분이 우리를 보고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이웃들을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