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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를 방해하는 마귀의 소리
출 8: 25-28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배 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80-90%가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존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촉점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실제적으로 표현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수있다면 그것의 첫째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 치고 신앙이 바로 성장하는 사람이 없고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치고 복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를 철저히,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때 온갖 영적인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배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답지 못한 예배가 이 땅에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계획입니다.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예배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계획이며 작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단을 쌓고 짐승을 잡아 희생을 드렸습니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믿음의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언제나 방해하고 유혹을 쉬지 않습니다. 사단이 어떻게 방해하는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났습니다. 바로에게 요구한 것이 지금까지 드리지 못했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출 8:27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어 광야로 삼일 길을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모세가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희생 즉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러한 네 가지 형태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바로는 마귀의 상징입니다.
마귀는 오늘날도 온전히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드리려는 성도들의 신앙을 방해합니다. 옛날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마귀의 수법은 오늘이나 예전이나 다를바 없이 나타납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고, 갑자기 개구리 떼가 나타나서 왕의 침상까지 뛰어다니고, 땅의 모든 먼지가 이가 되어 사람과 육축의 피를 빨아먹고, 파리떼가 새까맣게 나타나서 사람들을 괴롭히자 그제서야 바로는 하나님께 굴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모세에게 한 말을 보면 올바른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성도들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간계한 꾀가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 이 땅 예배를 드려라.
첫째는 이땅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 8:25절에 보면 바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이것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으면 광야까지 갈 것 없이 이 땅 즉 애굽 땅에서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땅 예배를 좋아합니다.
이 땅 예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별되지 않은 예배입니다. 드리는 둥 마는 둥 하는 예배입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이고 육신의 상징입니다.
신자가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애굽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은 애굽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3일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출 8:27절에 보면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흘길 쯤 광야로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땅 예배를 폐지하고 사흘 길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창 22: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3일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 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민 10:3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군할 때 법괘와 이스라엘의 거리가 3일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또한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 예수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시간도 3일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를 다시 만난 것도 주와 헤어진지 3일 만이었습니다.
이 땅 예배는 자기 편리주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자기 위주의 예배를 삼가야합니다. 마귀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게 하되 하나님의 중심의 예배가 아닌 자기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합니다.
② 너무 멀리 가지말라
둘째는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8:28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참된 예배를 방해하는 두 번째의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마귀의 달콤한 음성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귀가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성도는 마귀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하나님께로 가까워 져야합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 즉 예배생활을 하나님과 가까이 가지 말도록 적당히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는 드려도 좋지만 밤 예배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 헌금은 드려도 좋지만 십일조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마귀의 소리를 듣고 분별력이 어두워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힘들어도 정식으로 3일길 가서 예배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신앙의 원칙을 포기하지 말고 정식으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③ 어른만 가서 예배드려라
세 번째는 아이는 머물러 두고 어른만 가서 예배 드리라는 것입니다. 출10:9-11절에 보면 바로는 다시 제안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부모의 제일 우상은 아이들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애들만 자기가 데리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3일길 예배를 드리고서도 자기애들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마귀가 붙들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그 아이 때문에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물질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연말 사업하는 어느 집사님이 거래처인 어느 관공서에 들렸는데 마침 직원들이 송년회식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집사님의 사업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장이 반갑게 마지하며 술을 권했습니다. 그 때 집사님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몇 번 권하다가 그러면 음료수라도 들라고 하며 콜라를 따라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거기 있던 부하 직원한 사람을 가르키면서 "저 사람은 교회 다녀도 술 잘 마시던데 ..." 하며 그 사람을가르키며 예수 믿으려면 이 분처럼 믿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사람으로서 사업하는 분들에게는 항상 그런 자리가 가장 힘든다고 합니다.
호의를 거절하면 나중에 어떤 계약이 이루어질 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거절을 못할 뿐 아니라 일부러 술을 사기도 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간증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니까 담대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 참된 예배는 포기하는 데부터 이루어집니다.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니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른만 가서 예배드려라 라는 마귀의 말에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아이도 예배드려야 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이 자식을 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물질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④ 양과 소는 머물러두고 가라
자식을 남겨두고 어른만 가서 예배드리라는 유혹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양과 소는 놔두고 가라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출 10:24절에 보면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과 소를 놔두고 가면 무엇으로 제물을 삼아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제물 없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제물 없는 예배는 헌신 없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자신의 헌신을 표현하는 헌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헌신이 없는 것은 헛된 예배입니다. 참된 예배는 철저한 생활의 헌신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철저하게 헌신되어진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는 제물의 피가 있는 예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지금 막 잡아서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희생이 있습니까?
금년 우리교회 선교부에서 지원하기로 선교사님 중에 몽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수정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파송 받을 때 쓴 유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유서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일상 생활과는 낯 설은 단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무엇인가 이상한 감정을 끌어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 안에서 만난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평안을 전합니다. 지금 나는 감사와 기쁨으로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복음을 위해 힘썼습니다.
나의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영혼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이제도 변함 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품에 안깁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해지고 주님을 목표로 하는 삶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이 세상을 이별할 때 나의 장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허락해주십시오. 그리고 화장하여 이곳이 어디든 이 땅에 뿌려주십시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시간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참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
이 수정 선교사는 원광대학교 한국화 과를 졸업한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올해 서른 여섯의 처녀입니다.
그는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얼마든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가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포기하고 버려진 땅 몽골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동기는 성령의 강력한 부르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92년 7월, 어느 선교사님이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오셔서 설교하는 중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자를 지금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자가 있으면 지금 일어서 주십시오"
간절한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 같았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강력한 감동과 힘에 끌려 일어섰고 그 후에 그의 가슴에 타는 듯한 불덩어리가 들어있는 듯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감격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간증 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허물도, 잘못도 많은 이 죄인,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지혜롭지도 못한 자를 주께서 부르셨다니....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의 평생을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옵소서.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합니다.』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빈손으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이수정 선교사는 자신의 온 몸과 일생을 바쳐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 고백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우리가 그와 똑같이 독신을 서약하고 미개한 땅에 선교사로 갈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주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전도지 한 장을 가지고 가든지, 전도대원으로 주를 위해 한 나절을 드리든지. 여러분의 삶에서 주를 위해 몇 가지 아니 한가지라만이라도 반드시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그 헌신을 굳게 지키십시오.
⑤ 마귀가 굴복하는 믿음이 됩시다.
모세는 바로의 이러한 유혹에 섣불리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단호하게 바로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결국 하나님과 모세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출애굽기 12:32절에 보면 바로가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서 말합니다.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할 단어가 있습니다.
너희의 말대로 ...라는 단어입니다. 두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가 어떤 유혹과 협박을 해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세력과 협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킵시다.
마귀가 굴복하여 "네 믿음대로 네 말대로 되라" 라고 선언하게 만듭시다.
1950년 뜻하지 않은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고있었습니다. 은행도 업무를 중단하고 피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다 돈 뭉치를 들고 은행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지난번 은행에서 빌린돈을 갚을 날짜가 오늘이어서 갚으려고 왔는데요" 하면서 돈 뭉치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이 사람아! 전쟁통에 무슨 돈이야"
놀라는 은행 직원을 보고 "아무리 전쟁통이라고 하더라도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약속은 은행과의 약속 이전에 나 자신과의 약속이며 나아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나라 유리 산업의 선구자의 역할을 한 전 "한국 유리" 회장이셨던 최 태섭 장로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예배드려라" "너무 멀리 가지 말라" "아이는 두고 가라" "양과 소를 두고 가라" 라고 말하는 마귀의 소리에 넘어가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분의 뜻만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만 바라봅시다. 그러면 마귀가 굴복하는 신앙이 될 줄 믿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
(출 8:25-28)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이 시간에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신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과 타협하느라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왕이 보여주는 진리가 그렇습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 하나님을 섬기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고, 재앙이 계속되자 바로는 다섯 번에 걸쳐 모세와 타협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그럼 완악한 바로 왕의 타협은 어떤 걸까요?
1. 믿기는 믿되 세상을 떠나지 말라.
출8:25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이 말은 보낼 수 없다던 바로 왕이 큰 재앙을 받고 한 첫 번째 타협입니다. 백성은 보낼 수 없으니 이 애굽 땅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기는 믿되 마음은 세상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자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 세상에 나가면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삽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몸이라도 나왔으니 큰 발전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우상 섬기고 거짓말하고 욕하고 싸우고 쾌락을 따라 살아가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 하셨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그 뜻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아직 이런 가운데 있다면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2. 세상을 떠나긴 하되 너무 멀리 떠나지는 말라.
28절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이 타협안은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다가 더 큰 징계를 받고 내놓은 두 번째 타협입니다. 보내긴 보내지만 가까운 광야까지만 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악한 마음은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되 너무 멀리 떠나지는 말라. 예수는 믿되 적당히 믿어라. 그래서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625사변 때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들이 인민군과 아군의 중간인 접경지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 가장 피해가 큽니다. 여호와께 한 발 바알에게 한 발 그랬던 아합 시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순종하지 못할 때 양심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심령이 사막이 됩니다.
시32:3-4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했습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해야지 미지근하면 세균도 가장 잘 퍼집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을 받아들인 후 즉시 문을 닫은 것과 같이 예수를 모셨으면 세상 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마음을 닫으시기를 바랍니다.
3. 믿기는 믿되 마음은 다 드리지 말라.
출10: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모세가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키기 위해 남녀노소와 양과 소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가겠다고 하니까 바로 왕이 질색하는 장면입니다.
번역 성경을 보면 “바로가 그들에게 호통쳤다. 그래, 어디 다 데리고 가 봐라! 너희와 함께 있는 너희의 주가 나를 감동시켜서 너희와 너희 아이들을 함께 보내게 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너희가 지금 속으로 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10절)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었습니다.
이 세 번째 타협안은 바로 왕이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재앙 즉 악질과 독종, 우박과 불이 쏟아지는 재앙을 받고 내놓은 제안입니다. 종이나 아이나 여자들은 놔두고 남정만 가라. 가족의 대표자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도 드리고 시간도 드리고 힘도 정성도 드려야 마음이 드려지는 것이지 안 드리면 마음도 안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면 몸도 드려야 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형식주의는 특이합니다. 예배 헌금 봉사 전도 선행 등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하면서도 마음은 아직도 세상에 왔다 갔다 합니다. 습관화된 믿음 때문입니다. 진실로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4. 포기하지만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출10:24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이 네 번째 타협안은 메뚜기 재앙과 흑암의 재앙을 받고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애굽에 양식이 고갈되고 흑암재앙까지 내려 캄캄한 상황입니다.
바로 왕이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보내주겠다. 그러나 재산은 안 된다. 재산을 붙잡아 두면 갔다가도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왕께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라도 주어야 할 처지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의 가축 중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이 함께 가야 한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바로가 노하여 다시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28절)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되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있습니까? 부자 청년처럼 율법을 다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했지만 돈 사랑하는 마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사울 왕도 짐승의 낮은 것은 다 멸하면서 좋은 것은 남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각자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자존심, 어떤 이는 물질, 혹은 권세, 혹은 명예, 쾌락, 오락, 육정, 다 회개할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 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5.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이길 수 없습니다.
출12:31-32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바로는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 그러니까 자기 왕자까지 죽게 되니 놀라서 밤중에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해방령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는 내 심령이 죽는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심령만이 아니라 모든 삶이 파토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 오래 머물며 온갖 고통과 저주를 경험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온갖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바로 왕과 같은 완악한 마음 다 내버리고 하나님께 마음 바쳐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