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누가복음 16 : 10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식물의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막4:31).
그러나 가장 작은 씨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생명이 살아서 숨 쉬고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이란 말은 ‘진정한 믿음’, ‘생명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크고 작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믿음’은 열심히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바르지 못한 믿음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소용없는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뽕나무는 15-20m에 이르기까지 자라고 많은 가지가 옆으로 넓게 퍼지고 사방으로 크게 뻗고 깊이 내려져서 인간의 힘으로는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뽕나무’를 ‘산’(11:23)이라고 했습니다. ‘뽕나무’든 ‘산’이든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나 산도 순종한다는 말씀입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9:23).
겨자씨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겨자씨 믿음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는 믿음은 ‘뽕나무’(산)에게 명하여 바다에 심기어지는 것보다 더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을 복음으로 비유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한 알의 겨자씨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겨자씨 한 알이라 할지라도 땅에 심기어지면 싹이 나고 흙을 뚫고 자라서 나물보다 크서 공중에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으니라”(눅13:19)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들이 깃들인다’는 말은 공중에 나는 새들이 겨자나무에 둥지를 틀고 가지와 잎 사이를 날아다니며 조잘거리면서 즐기는 안식을 의미합니다.
구속사적으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말씀은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일지라도 무한한 은혜와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하며 영생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막4:31,32).
‘겨자씨 한 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겨자씨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생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를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도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사53:2,3).
‘한 알의 겨자씨’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나셨고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랐지만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눅12:24)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죽어 장사 되셨으나 생명이신 예수님은 죽음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땅에 심기어진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말씀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족속에게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불가항력 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되는 믿음입니다. 지옥 불 가운데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자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1).
‘실족케 하는 것’은 마치 짐승을 잡기 위해서 올가미를 만들거나 함정을 파서 빠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작은 자에게 올가미를 걸어 넘어져서 멸망 받게 하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도덕성은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족케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라고 하신 말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힘써서 실족케 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화로다’라는 말은 단순한 비탄의 소리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 선언입니다. 영원한 지옥 형벌의 무서운 저주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로다’라고 선언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실족케 하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경고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실족케 하면 무서운 화가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2).
제가 어렸을 때 정미소가 없는 산골 마을에서 소에게 멍에를 메워 돌로 만든 큰 둥근 연자맷돌을 돌리며 곡식을 빻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 연자맷돌을 목에 매여 바다에 던지면 살아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시체도 찾지 못하는 무서운 사형제도였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는 큰 죄가 됩니다.
그리고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죄를 범한 자를 정죄하고 심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범죄한 형제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죄를 범할 수 있는 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범죄 한 자를 용서할 때 조심스럽게 죄를 깨닫도록 해서 회개하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했습니다(마18:22).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은 그를 끝까지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대의 용서를 받았고 계속 용서받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나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작은 믿음으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우니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음은 크고 작은 양(量)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크고 작은 양(量)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섬기면서 봉사를 했느냐?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주인과 종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서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7).
‘종’은 노예였습니다.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짐승처럼 팔려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노예는 종일 밖의 일을 마쳤다고 곧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하는 주인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주인을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할 것이며, 종은 띠를 띠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만찬을 준비하여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든 후에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하는 주인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주인에게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한 그 종이 바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하고도 칭찬 듣기를 원하고 보상을 받기 원하는 것은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이 될 수 없는 거짓 믿음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생명이 있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어서 살아나서 공중에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무한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자랑하고 칭찬을 듣기 원하고 보상 받기를 원하는 믿음은 대단히 위험하고 불행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합시다. 땅에 심겨진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있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