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복음성가중에 사람을보며 세상을 볼때 만족함이 없겠네 가 있습니다. 제가여기까지 온것은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왓습니다. 오직예수만 바라보고 달려왔기때문입니다.
미국 ‘와이오밍’주의 한 작은 시골교회 문위에 큰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Looking unto Jesus!” “예수를 바라보라!”그리고 교회당 강단에도 역시 “예수를 바라보라.”고 쓰여있다고 합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레오나르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고 화가들을 초대해서 그 그림을 감상하게 했습니다. 화가들은 예수님의 손에 있는 잔이 정말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졌다고 잔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빈치는 붓으로 그 잔을 지워버렸습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 성화를 그린 목적을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두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은 그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보며, 어떤 사고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너무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죄된 것, 악한 것만을 바라보는 자는 결국 그의 마음도, 그의 생각도, 그의 행동도 그렇게 되어 버릴 것이고,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자는 그의 생각이나 마음도 아름답게 형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적도 없이, 가치관도 정립되지 못한 체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너무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인생이 바라보아야 할 분이 누구신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낙심이 된 성도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성도들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히13: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계22:13
여러분은 진정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입니까? 아멘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성도입니까?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변함없이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바라보자'라는 말은 예수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주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곳에 초점을 맞추어 주의 깊게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오직 예수만 바라봅시다'라는 말씀으로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이 시대에 우리의 소망을 찾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첫째,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무거운 것”은 “거리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 바라봅시다. 거리끼는 것을 벗어 버리기 위해서 얽매이게 하는 것을 떨어버리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항상 고통을 주는 죄악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 바라보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 바라보면 더욱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 바라보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은 낮은 곳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들을 고치시고 수제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며 또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 중에 한 서기관이 예수를 따라다니면 수지맞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대단한 기대와 결심을 가지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14-22) 예수의 이 한 마디로 서기관은 크게 실망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권세나 명예, 물질 등 세상에서의 성공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게 되면' 실족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갇힌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눅4:18,19)
둘째로, 완주를 위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 더니 하나님보좌우편에 앉으 셧느니라
“인내로서 우리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3~14에 “형제들아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노라.”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푯대는 바울의 소망이요 목적이였습니다. 바울이 사명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내심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의지력이 강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그 분만을 소망으로 바라보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고는 참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푯대로 삼고 바라보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벧전2;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하나님의 우편 보좌는 어떤 자리일까요?
시편 11:4에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성전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쪽이 그들을 감찰 하시도다.
시47:8에 “거룩한 보좌”라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편 93:2에 “그 보좌는 예로부터 영원부터 견고히 셨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렘 17:12에는 “영화로운 보좌”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게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애5:19에 “세세토록 미치는 보좌”,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히 8:1에는 “굉장한 위엄의 보좌”,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계3:4에는 “오색 무지개가 둘러쓴 보좌”,
이렇게 훌륭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지상에서 그 십자가의 고난을 오직 소망으로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마 25:31에 보면 우리 성도들도 영광의 보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계 20:4에 사도요한은 보좌에 앉은 성도들의 권세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확신한 소망이 있기에 오늘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결론 : 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어려운 세상에서 끝까지 완주 할려고 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의 인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의지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완주하셔서 하나님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주님을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