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mond-9]
레비에프는 우즈베키스탄에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가족은 7년을 기다린 끝에 1971년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100만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오자 갖고 갔던 원석의 질이 낮아 20만 달러밖에 안 나간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다이아몬드 커팅을 배운 그는 1977년에는 스스로 커팅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막 꿈틀대던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시장의 투기 바람은 대단했다.
커팅업자 대부분은 가격이 치솟으리라는 예상에 재고를 많이 확보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시장은 붕괴됐고 많은 커팅업체가 파산했다.
재정상태가 그래도 양호했던 그는 이후 5년에 걸쳐 열두 개 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원석을 확보하기 위해 런던, 앤트워프, 남아공, 러시아로 뛰어다녔다.
그는 레이저 기술과 당시 혁신적이었던 커팅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다.
1987년 드비어스는 레비에프에게 사이트홀더 자격을 부여했다.
2년 뒤 레비에프는 러시아 국영 다이아몬드 채굴 판매업체인 ‘알로사’로부터 커팅공장 설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에 최초로 첨단 기술 연마공장을 설립했다.
드비어스는 그의 사이트홀더 자격을 상실시켰다.
원석 생산에서부터 세공까지 마무리하는 최초의 합작회사 ‘루이스(Ruis)’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거래를 인연으로 레비에프는 러시아 원석 공급량의 일부를 확보하게 되었다.
드비어스는 발끈했다.
하지만 1995년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레비에프는 드비어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레비에프는 당시 드비어스의 보복에 대비해 보석 금 예술품 고미술 창고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 재무부 산하 국가귀금속준비국의 원석을 미리 확보했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 정부는 1955년부터 비축해 놓았던 원석과 세공 다이아몬드 일부를 매각하기로 했다.
당시 물량은 무려 120억 달러 규모였다.
국가귀금속준비국의 다이아몬드 비축량의 상당부분은 1997년 무렵 고갈되었다.
그렇다면 이중 상당 분량이 어디론가 팔려나간 것이다.
레비에프가 이 거래를 중개했다면 떼돈을 벌었을 것이다.
레비에프는 부인했지만, 최소한 원석들은 루이스사를 통해 팔려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스는 연간 1억 4천만 달러 이상의 다이아몬드를 가공한다.
레비에프의 성공을 보고 러시아에서는 다이아몬드를 연마 가공하는 업자들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대규모 고용이 일어나 러시아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