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푸코가 지난 71년부터 84년 사망할 때까지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사유체계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했는데, 그 중에서 76년 강의 내용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는 제목 자체가 인종차별을 합리화하는 인종주의자들을 비꼬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는 보호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글의 제목을 정했다.)
한국의 자본주의 역사는 50년에 불과하다. 16세기 종획운동부터 영국 자본주의 시작으로 본다면, 영국은 500 년에 이르는 동안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도 있다.
(종획운동: 16세기 들어와 북대서양 교역이 활발해지고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 산업이 번창하자, 그 원자재를 공급할 배후지로서 영국의 위치가 주어지게 되고, 영국의 지주들은 자신의 땅에다 더 많은 양을 사육하여 화페수익을 얻고자 했다.
이에 이들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관습법을 무시하고 일정 영역의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몇백년간 경작과 주거의 권리를 보장받고 살아온 여러 신분을 가진 농민들을 모두 몰아내었다.
맑스에 의해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시작으로서 그 의미가 밝혀진 이후 경제사의 중요한 연구주제가 되어 왔다.)
한국의 자본주의 50 년은 그나마 미국에 의해 심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 역사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박정희 정권 산업화 시기 1970 년대, 젊은 여성노동자의 하루 일당은 커피 한잔 값도 되지 않았다. 당시 미싱사 월급이 1만원, 시다는 5천원에서 9천원 사이였다. 쌀 한 가마가 1만6천원, 블라우스 한 장 3천원, 스커트는 4천원 정도였다.
그럼에도 해마다 한해 평균 5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농촌에서 잡초 뽑히듯이 뽑혀 도시로, 도시로 내팽개쳐졌다.
그들의 노동력으로 오늘 날 한국의 자본주의는 성장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어 놓은 자본주의에 의해 현재 쌍용차 노동자들과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자유시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곧 자유시장의 폭력성이 이 땅에 난무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 아니었다.
자유시장은, 토지 인간 화페까지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그에 대한 증거는 쉽게 예를 들어도, 토지는 부동산 투기로, 인간은 노동 문제로, 화폐는 금융위기 등으로 알수 있고 19 세기 이후 유럽의 혼란과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과 두 차례의 세계 전쟁으로 증명이 되었다. 두 번의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살상을 겪고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경제 혼란의 와중에서도 자유시장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대안 사회는 무엇인가.
아나키즘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공동체이고, 폴라니가 이야기 하는 것은 사회이다.
아나키즘의 공동체와 폴라니의 사회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 사회로서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은 자본주의 역사와 민주주의 역사가 겹치는 나라다. 아마,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절차적 자본주의의 해악에 대한 무감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만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사회'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교해 보자.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단위가 개인이다. 개인을 단위로 삼아 모든 설명이 이뤄진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단위가 계급이다.
그런데 이 두 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개별 단위의 움직임을 경제적 동기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사상에서는 개인의 경제적 동기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요소는 비합리적 선택으로 취급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를 둘러싼 인간집단, 즉 계급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경제적 동기를 가장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다.
폴라니의 사상이 돋보이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폴라니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회다"라고 말한다. 개인도, 계급도 아니다. 사회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노동력 상품화 조치에 맞서서 각종 사회 입법을 추진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등 조치다.
흔히 이런 조치는 사회주의자들만의 힘으로 이룬 성과라고 여긴다. 마르크스도 그랬다. 법정 노동시간을 못 박은 조치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의 위대한 승리"라고 예찬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노동시간 단축 등 사회입법 조치 가운데 상당수는 부르주아에 대해 반발하는 봉건 귀족 세력의 협조를 통해 이뤄졌다. 그리고 이런 조치가 도입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이 있다.
계급이 사회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계급을 결정한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폴라니의 이러한 주장과 아나키스트들이 얘기하는 공동체의 주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서는 두 주장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공동체의 자발적 질서야 말로 근원적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아나키즘과, 긍극적으로 공동체의 철저한 파괴로 결말이 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저항으로 사회의 자기 보호 본능을 주장하는 폴라니의 주장과는, 많은 부분 일치 시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폴라니의 주장과 아나키즘의 일치하는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한 것은 사회와 공동체 두 명제인데, 두 명제의 구별점과 시작점은 어디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해법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자유시장은 자연과 사람을 상품으로 만들었던 탓에, 필연적으로 공동체와 자연의 파괴가 수반된다고 했다.
만약, 지금 폴라니가 살아 있다면,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농촌 생명 공동체를 주장하지 않을까?
폴라니 혼령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만약, 쌍용차에 공적 자금이 투입 된다면, 나는 그 돈을 해고된 쌍용차 노동자들의 농촌 정착 자금으로 바뀌게 하고 싶다.
그것이 더 이상 자유시장에서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폴라니가 이야기 하는 사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나키스트로서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