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29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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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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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mhIVP9583k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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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하기 마련입니다!>
낮잠 한잠 자고 나니 늙은이가 되어있었노라는 옛이야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어찌 세월은 이리도 속절없이 빠른지요?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요, 생각은 유년인데, 나이를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간다는 것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 어떤 영혼의 상태로, 하느님께 드릴 어떤 선물을 들고 그분께 나아갈 것인가? 더 자주 생각해야겠습니다.
늦여름 바닷가 석양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노년, 하느님 앞으로 나아갈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저리 황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그 순간, 그토록 고대해왔던 하느님을 우리 눈으로 직접 만나 뵙는 순간, 우리 영혼의 등잔은 어떤 상태일지 늘 생각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후회 없이 충만한 삶과 아낌없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넉넉히 등잔 속 기름을 준비한 사람의 그 날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저 자기 한목숨 부지하느라 아웅다웅했던 사람, 영혼의 성장이나 이웃 사랑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 하느님 앞에 내어놓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 즉 등잔이 텅텅 빈 사람의 그 날은 참으로 울적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그날은 예고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맑은 정신, 열린 마음으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5장 13절)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 영적인 세상,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음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에 대한 사랑...
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하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나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나를 돌아보고, 나를 갈고 닦으며, 이웃을 살펴보고, 세상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깨어 있음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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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거룩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장 3절)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랄까, 더 나아가서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기억이 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안에서 누군가가 조금 거룩하게 사는 분위기를 풍기면 ‘상뚜스’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여러 그룹 가운데 바리사이라는 나름 잘 나가던 그룹, 자칭 거룩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가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이겠습니까? 죄와 우상숭배, 불결함과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죄투성이인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거룩하고 고결하며 깨끗하고 무죄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종래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제한적이고 그릇된 거룩함을 날카롭게 질타하시며, 거룩함의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함이 더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더 보편적임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다인들 시선으로 볼 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이나 창녀들도, 두 팔 벌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얼마든지 성인성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함이 교회만의 것만이 아님을, 교황이나 주교, 사제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명쾌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디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 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올라, 함께 생활하시는 수녀님들과 촛불을 들러, 서울 나들이를 몇 번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피드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체 사제요 수도자가 돼서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시국이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성당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시면서, 거룩하게 살면 좀 좋냐? 정 그러고 싶으면 사제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라!’라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곰곰이 묵상해 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존경하는 직속 상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정답이겠구나 싶어,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봤습니다.
고민하고 고민하는 제게 교황님께서는 너무나 간단히, 단칼에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곧 교회의 일입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분리되어,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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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WtVKZMLz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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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시한부 선고받고 바뀐 인생>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티는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안효정 간호사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러 경우를 보았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은 폐렴으로 오랜 병상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분에게 다녀가시는 분이 없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가족에게 그렇게 못되게 해서입니다. 상태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는데 버티고 계시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 간호사는 청력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귀에 대고 크게 “할아버지, 부인이 보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시더니 두 번 깜빡이더라는 것입니다.
안 간호사는 수소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찾아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부인이 그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가 다 용서할 테니 편안히 가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고는 바로 임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분은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셨습니다. 가끔 친지들과 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의 산 송장처럼 30년을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고 합니다. 간호사들은 자녀들이 안 다녀간 것을 알고는 연락이 끊긴 미국에 사는 아들이 다녀가게 하였습니다. 2주 만에 아들이 다녀갔고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야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끝까지 그런 준비가 필요 없다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더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서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남편은 도박과 외도 등으로 빚을 잔뜩 지고 돌아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시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았고 온몸이 돌처럼 굳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품안에’]
오늘 복음에는 현명한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현명한 처녀들이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죽음 앞에 가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지금까지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묵상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장례미사 중 가장 많은 신자가 참석한 미사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유학하며 한 동네에서 행해진 장례식입니다. 마체라타라는 곳의 500년 된 커다란 성당에서 행해진 장례미사였습니다. 보통 주일 교중미사보다 그 장례미사에 다섯 배 정도의 조문객이 들어찼습니다. 당시 한여름이었고 기온이 40도 정도였습니다. 성당에는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시장님부터 시작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 미사에 참례한 느낌이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성당에 빼곡히 사람들이 서 있었고 문을 열어 밖의 뙤약볕 아래도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공동묘지까지 행렬하는데 그 더운 날씨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고 마을을 가로질러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날 장례를 치르는 분은 성직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여자 신자였습니다. 3년 전에 암으로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도 평소에 하.사.시.를 읽었다고 합니다. 시한부 선고받고는 자신의 집에 신자들을 초대하여 성경을 읽고 생활 나누기하였고 늘 하던 대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자매는 길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언제나 먼저 달려와 인사하였고 신앙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그분은 저를 알아보고 찾아와주어서 고맙다며 천사의 미소를 보내셨습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아내가 돌아가시기 2~3일을 제외하곤 3년 동안 기적적으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3년 동안 가진 것을 다 주며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사람에게 은인이 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장례미사에 참례하여 그분이 가는 길에 함께 한 것입니다.
그 자매가 특별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시한부 선고받고는 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서 탐욕과 무절제와 같은 안 좋은 욕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며 방탕한 삶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기름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자매는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일 수 있고 죽고 나면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만나야 함을 되새긴다면 내 마음 안의 기름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아쉬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습니까? 미소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기름이 가득 찬 등잔을 들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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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하루 사이에 부고를 두 번 들었습니다. 여행사를 하시는 형제님의 아들이 밤사이 심장마비로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젊은이가 꿈을 다 펴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부모님의 상실은 어찌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젊은 청년이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가 슬픔을 딛고 힘을 내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내년에 부제품을 받는 형제님의 장모님이 가슴이 답답하여 병원엘 갔지만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하였던 어르신입니다. 자식들에게는 큰 슬픔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이제 투석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0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처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등잔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은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야 하는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올 수도 없고, 나의 것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런 삶은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타인에게 빌려 올 수 없습니다. 공기가 있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그냥 우리가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름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삶 또한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빌릴 수 없습니다. 물이 있어서 마시는 것처럼 우리가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참된 신앙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불빛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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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며,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 그것은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예기하지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 선은, 사랑은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쳐 지나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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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여기서 ‘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이고, ‘신랑’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또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비유 속에서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친구들)입니다. 신부는 비유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신부’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들러리’로 설정하셨을까? 만일에 ‘신부’로 설정하면, 신랑이 혼인잔치에 들어가면서 신부를 밖에 둔 채 문을 잠가버리는 상황 설정이(10절-11절) 이상해집니다. (신부 없이는 결혼식도, 혼인잔치도 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들러리’는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이 없더라도 결혼식과 혼인잔치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들러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신앙인은) ‘들러리’ 같은 존재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들러리’로 설정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남의 신앙생활을 구경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들러리’로 전락하는 일이 됩니다.>
‘어리석다.’라는 말과 ‘슬기롭다.’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따라서 어리석은 처녀들이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실행하지는 않는 것을 뜻하고,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등’에 초점을 맞추면, 기름이 없어서 불을 켤 수 없는 ‘등’은, 또는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져 가고 있는 ‘등’은,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야 하는 ‘제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마태 5,13) 반대로 기름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는 ‘등’은 사람들 앞을 환하게 비추어서 주님에게로 인도하고, 그 자신도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마태 5,16)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5,7-9)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신앙생활’과 ‘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고, 회개하라고 권고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보속’을 대신해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그 기도와 권고와 보속은 ‘사랑 실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과 회개 자체는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구원과 회개는 무임승차가 허용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0-13)
‘최후의 심판’은 글자 그대로 ‘최후’의 심판입니다. 재심의 기회도 없고, 취소되거나 번복되지도 않습니다. 비유의 내용만 보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늦게 온 것은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저 ‘슬기로움’이 조금 모자랐던 것뿐이니 정상참작을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이것은 비유일 뿐입니다.
실제 최후의 심판 상황에서는, 늦게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3-15) 최후의 심판이 끝나면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고 ‘문밖에’ 있는 세상은 전부 다 소멸됩니다. 지옥도 소멸됩니다. ‘문밖’이라는 공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늦게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는 상황 자체가 없습니다. 아마도 소멸되기 직전의 짧은 순간 동안 후회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입니다. (어쩌면 후회할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열 처녀의 비유’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지금 회개하고, 지금 준비하여라. 나중은 없다.” 신앙생활과 회개를 나중에 해도 되리라 생각하면서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미루지 않고 지금 하는 것은 ‘슬기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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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열 처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저마다 그리스도의 신부고 교회입니다.(에페 5,22-32 참조) 슬기로운 처녀들은 모범적인 신앙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언뜻 보기에 착하기는 커녕, 약고 야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지인이고 친구였을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에 기름이 떨어지자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그것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이 기름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합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의 깨어 있음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한결같이 지속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등잔의 불은 어두운 밤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충실히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등불의 기름은 행실이 동반되는 지속적인 믿음의 삶입니다. 이 기름은 뒤늦게 급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형제들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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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솔로몬 신부님]
우리는 그날, 그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압니다. 그날, 그 시간은 지구의 종말, 최후의 심판, 구원의 날,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나의 죽음으로 그날, 그 시간을 더 빨리 체험하게도 됩니다.
예수님은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그 시간을 아무도 알 수 없는데 가끔 어떤 사람이 그날이 언제 시작하니 자신의 교회에 들어와 그날을 준비하라고 호도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말에 넘어가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바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이 와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으면 그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원망합니다. 가족과 직장 그리고 재산을 잃어버린 것을 후회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천국을 내기하는 도박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도박은 적은 돈과 적은 노력으로 한순간에 상상할 수 없는 재화를 갖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날도둑이죠.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서 천국 갈 준비는 하지 않고 몇 달의 기도로 천국을 얻으려 하니 말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히 하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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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 나타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고(마태 7,24-27 참조),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던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의 예였으며(루카 12,16-21 참조), 영리하여 칭찬받는 약은 집사는 반대로 슬기로운 사람의 예였습니다.(루카 16,1-8 참조)
오늘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가 담겨 있습니다. 처녀 열 명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등과 함께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처녀들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지만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가고,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맙니다.
결국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이 닫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유 속 인물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랑은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이시고,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지연입니다. 열 처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고, 기름은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거부는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에게 깨어 준비할 것을 경고하시고, 일상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마땅히 깨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은 우리의 슬기로움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는 이의 슬기로움입니다.
“깨어 있어라.”(마태오 복음 2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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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라고 두 가지 곧 ‘깨어 있음’과 ‘준비함’을 명령하시면서, 세 개의 비유, 곧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비유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이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 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기 위함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15절-16절)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에 도유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오 복음 25장 6절)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오 복음 25장 6절-7절)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실인 선한 행동의 등을 밝히고 있는지, 그래서 신랑이 나를 금방 알아보고 찾을 수 있게 빛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오 복음 7장 24절-26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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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든 안 보든 한결같아야 한다>
멕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과 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갑니다.
신붓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 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 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삶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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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도박하는 사람의 승률은 얼마나 될까요?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아마 도박에서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본전 생각과 막연한 희망 때문입니다. 본전까지만 찾으면 그만하겠다고 하지만, 본전 찾기 전에 패가망신 당하고 말지요. 또 본전을 찾아도 더 딸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에 매달려서 쫄딱 망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분은 절대로 도박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이런 도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돈이 아닌 시간을 가지고 하는 도박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봉사할 거야.”, “시간이 나면 성당에 열심히 다닐 거야.” “은퇴하면 가족과 열심히 함께할 거야.” 등등 우리는 막연히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하지 않고 뒤로 미룹니다. 시간을 가지고 도박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돈을 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100%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도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 나중에’라는 말로 지금을 소홀히 한다면, 큰 후회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루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특히 깨어 기다리라는 교훈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이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야단스러울 만치 온 동네가 함께 기뻐합니다. 혼인 며칠 전부터 밤에 횃불을 밝히고 춤과 노래로 밤을 지새웁니다. 신랑이 자기 집에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고 혼인날 저녁에 신붓집을 찾아가 결혼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 집의 잔치가 끝나야만 신붓집에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제때 오지 못하고 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신부 측 들러리들은 신랑 측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기다리는데, 이 등은 약 15분가량 있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신랑이 올 때를 잘 맞추든가 여유의 기름을 준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할 일에 늘 대비하는 성실한 사람과 그저 그때를 안일하게 넘기는 게으른 사람으로 나뉩니다. 성실한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고 게으른 사람은 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실히 주님의 나라를 준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아직 오려면 멀었다면 게으르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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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
마태오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
하느님께서
나에게
삶을 주시네
하느님께서
너에게
삶을 주시네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삶을 가꾸네
너는
하느님께서 주신
너의 삶을 가꾸네
나는
나의 삶으로
우리의 삶을 이루네
너는
너의 삶으로
우리의 삶을 이루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나의 삶은
나의 몫이라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너의 삶은
너의 몫이라네
서로 줄 수도 없고
서로 받을 수도 없는
다만 서로의 몫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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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적이고 순수한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수녀회 피정지도는 많이 했지만 이렇게 ‘프란치스코’ 수도사제가 남자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도회 피정은 난생처음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강론은 참 각별한 성격을 띨 것입니다. 제 은총의 발자취, 수도여정의 렉시오 디비나이자 고백이 될 것이며 또 새로운 시작의 다짐이 될 것입니다. 총원장 형제님과 나눈 카톡의 청담淸談의 대화가 이 강론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정적이고 순수한 수도공동체 형제님들의 젊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편공동전례기도에 힘과 감동을 받습니다. 피정분위기도 진지하고 열심하여 좋습니다! 공동체 힘껏 섬기시노라 수고많습니다.”
“벌써 내일 모레 피정이 끝나네요. 내일, 혹은 토요일 강론 때 신부님 수도여정 안에서 묻어나는 복음삼덕에 관련하여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 듯 싶습니다.”
“아, 그것들은 이미 제1부, 체험적 고백의 강의에서 다 피력됐다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시, 내 수도생활관, 명상기도, 희망의 여정, 행복기도에 제 삶 모두가 담겨 있지요!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살고 있으며, 이렇게 살고 싶은 것이 유일한 소망이랍니다. 이에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이렇게 정다운 청담을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잠을 깨는 순간, 형제님의 청에 순종順從하여 제 수도여정을 나눠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은 순전히 성령聖靈께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도저히 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못 견딜 것 같았습니다.
제 성소聖召는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천주교를 몰랐던 시골 어린 시절부터 결혼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늘 자리했습니다. 이때는 집 근처의 감리교회에 다녔지만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성소의 계기는 교대 시절 여름방학 뇌종양 수술로 RNTC 훈련을 못받자 군에 1970년 징집되어 34개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였습니다.
입대 시 소지품은 절박한 마음에 지녔던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군복무 중 개신교 신자로 주일 예배는 꼭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 안에 순탄한 군복무 후 제대해 마지막 한 학기를 마치고, 1974년부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만8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1981년까지 재직하다 1982년 왜관 수도회에 만 33세로 입회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열하고 간절했던 초등학교 8년의 교편시절이었고 수도 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직을 돈벌이 직업職業이 아닌 성직聖職으로 생각하여 오로지 교육에, 아이들 사랑에 헌신하고자 했고, 결혼에 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바람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기에 8년간 학부모가 건네주는 일체의 촌지寸志도 겸손히 사양했고, 온전히 날마다 하루 전부를 아이들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하느님 사랑이 전부이지만 당시는 교육과 아이들이 제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향해 몸바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마음의 허기는, 공허는,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개신교에 다녔고 처음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알았고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때로 목사님이 되라는 조언도 있었지만 직업으로의 목사님 하기보다는 교사 직업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떳떳하리라 생각하고 거절했습니다. 정말 내 가정을 가지고 성직을 수행한다는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서히 가톨릭에 끌리기 시작했고, 때로 미사에 슬며시 참석하기도 했는데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했습니다. 마음의 갈증도 허기도 해소되는 느낌이었고, 동료 가톨릭 교사들도 적극적으로 수도사제의 길을 권했습니다. 당시 만 33세에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수도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모험이었습니다. 참으로 무모無謀하기에 일부는 권했지만 대부분 말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 산다 해도 이 길뿐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1980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고, 1981년 성탄절에 견진을 받고, 1982년 초 사직辭職 후 일사천리 수도회의 각별한 배려의 은총으로 입회가 가능했습니다. 이때 역시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사무장님이 잘 아시는 수도회 성소 담당 신부님을 연결해 줬기에 막차를 탄 기분으로 고령의 나이로 입회가 가능했으니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어제와 동일하게 “깨어 있어라”인데 이때부터 하루하루, 참으로 치열히, 절실히 깨어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보통 자연스런 입회자들보다 14년은 늦었기에 배로 열심히 산다는 각오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가톨릭 신학대 입학은 어려워 마침 수도자 신학교를 계획한 서강대 종교학과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기막힌 섭리였습니다. 제가 입학한 후 더는 수도 신학생의 입학은 없었습니다. 마치 저를 위해 개설한 학과였던 듯싶습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철학, 종교학을 마치고 졸업하자 즉시 수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련기 때는 토마스 머튼에 심취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영문판 서적은 거의 읽었고, 나중 대학원 논문도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해 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자 특별한 배려로 대구가대 신학대학원 제1회에 맞춰 제일 많은 나이에 자연스럽게 편입이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원 2년간 교구 학생들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학부과목도 무려 12과목을 수강하라 하여 시험을 봤습니다. 참으로 치열히, 열심히 공부하여 만학晩學의 오르도ordo 첫 번째인 저를 의아해하던 주위의 시선이 첫 학기 1등 하자 깨끗이 사라졌고 보는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대구가톨릭신학대학원에 자연스러운 편입도 은총의 기적이었지만 종신서원을 앞두기 한 해 전 1987년 성 요셉수도원의 설립도 저에게 기막힌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서강대를 마련해 주신 주님은, 자연스럽게 대구가대로 이끄셨고, 신학교 공부가 끝나자 마자 때에 맞춰 평소 갈망해왔던 관상적 성격의 요셉수도원을 마련하여 이끄셨던 것입니다. 제 일정표엔 없었지만 하느님 일정표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신학교 공부를 끝내고 유기서원 3년차 만39세, 1988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에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으니 올해로 요셉수도원에 정주하기 34년째요, 수도회 입회 후 만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요셉 수도원 초창기 역시 참으로 생존生存을 위한 참 치열했던 삶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22년 동안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우여곡절에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은총으로 무사히, 성공적으로 통과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선명한 기억이 있습니다. 1988년 7월11일 요셉수도원 부임 전날 밤, 참 절박한 마음으로 왜관 수도원 대성전에서 밤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3천배 기도를 바쳤던 기억입니다.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살아 온 그동안의 삶이었습니다.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치열하고 항구한 깨어 있는 삶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유명한 제 모토가 생각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참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수도공동체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날로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2014년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지면서, 제 수도여정을 렉시오 디비나 하였고, 이어 훌륭한 원장 후임자를 마련해 주신 ‘신神의 한 수手’ 같은 하느님의 섭리에 정말 감격, 감탄하였습니다. 저절로 모두가 은총이란 고백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도 날로 깊어지게 됩니다.
2014년 원장직에서 내려온 후 오늘까지 평범한 수도승으로서 수도형제들과 34년째 정주중입니다. 우리 나이로 40세 부임하여 34년이 지나니 현재 74세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환상이나 거품을 거둬내고 깨어 본질적 깊이의 종말론적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해가면서 저절로 깨어 살게 되며 주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됩니다..결코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처녀처럼 문을 두드렸을 때 주님의 다음 말씀은 듣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과 신뢰를 받았더라면,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처럼 섬김과 사랑, 겸손을 위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평상시 영혼의 등잔에 신망애信望愛와 진선미眞善美의 영적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여 늘 환한 등불 환히 켜들고 깨어 주님을 기다렸다면, 하늘 나라 잔치에 입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여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 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고백기도시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깨어,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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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마태25,1)
<열 처녀의 비유!>
예수님께서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열 처녀 가운데에서 다섯은 '어리석은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등만 준비하고 있다가 한밤중에 오신 신랑을 맞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다섯은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하고 있다가 신랑을 맞이한 '슬기로운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늘 깨어 준비하고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어제 이른 아침에 그리고 늦은 밤에 큰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들은 소식은 기적같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이었고, 늦은 밤에 들은 소식은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그래서 주님의 기적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찰나(刹那)인생'이라는 생각을 더 해 보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일이 내게 일어날지 모르는 '찰나인생!', 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찰나인생!'.
오늘 복음은 이런 찰나인생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준비된 사람만이 살 수 있고, 또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열 처녀'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등과 기름'은 '믿음과 삶', '세례와 세례의 합당한 삶', '성체와 성체의 합당한 삶'을 의미합니다. 곧 '행동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등과 기름'이 함께 있어야 불을 밝힐 수 있고,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등과 기름의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져야만 잠시 지나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살고, 죽음 저 너머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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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WsbZbHA4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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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이
공존하는
우리들 삶이다.
자기성찰의
기름이 필요하다.
신앙인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은
묵묵한 실천의
참된 빛이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실천의 빛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고요와 밝음은
더하여 간다.
참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위하여 사랑의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고 가는
삶 속에서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이
이제 오신다.
믿음의 의미를
오시는
주님을 통하여
새롭게 창출해 내는
우리 삶의
생기와 활력이
참으로 중요하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우리의 삶은
게으름과 무기력의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식전환이
필요한 시간이다.
주님의 지혜는
자기성찰을 통해
주어지는
관계의 확인이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만나는 것이다.
최선의 길은
우리의
어리석음까지
오시는 주님께
내어드리는
기도의 삶이다.
영원한 가치는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우리들 사랑이다.
가치있는 삶이란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랑에 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맑고 밝은
사랑이 오신다.
사랑을 알고
사랑을
맞아들여야 할
우리들 관계이다.
사랑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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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슬기롭고 어리석은
우리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뭇 다른 우리들
삶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준비없이 만나는
시간에는 언제나
아픔만 있습니다.
등(燈)은 기름을
기름은 등을
필요로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목적입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어떠한
만남이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남과 마음은
등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매순간이
말씀의 기름이
필요한 만남의
여정입니다.
슬기로운 준비의
시간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기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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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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