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의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평설 / 박남희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
서영처
동물보호구역에 62세의 람 두안이 산다
펄이 자주 방문해서 연주를 한다
먼 산맥엔 바람에 해진 룽다가 펄럭이고
그만큼 해진 귀를 펄럭이며 두안은 음악을 듣는다
밀려오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긴 코를 흔들며 피아노 곁을 서성거린다
삶이 빈 요새처럼 적막으로 가득 차서 흘러나오는 선율
펄이 평균율을 치는 동안
쇠꼬챙이와 사슬이
서커스의 눈부신 조명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벌목한 나무가 허리를 덮치고
두안이 제 몸에서 울부짖는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무거운 보따리를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
코끼리의 꿈이 투영된 환영 같은 날
두안은 강물인 듯 바위인 듯 생각이 많은 채로 서 있다
밀림엔 검은 피아노 한 대, 늙은 코끼리 한 마리
숲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저녁 속으로
두안은 신전의 기둥만한 다리를 천천히 옮긴다
밤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한 발로 서서 잎사귀를 피워올리는 나무들
코끼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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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태국 왕동지역 코끼리보호시설인‘앨리펀트 월드(Elephant World)’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서사로 삼고 있다. 앨리펀트 월드는 인간의 탐욕으로 불법 벌목, 관광, 트래킹 등에 내몰려 고통받아온 코끼리들을 수용해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코끼리들은“쇠꼬챙이와 사슬”의 억압 속에서 벌목과 중노동에 동원되거나 “눈부신 조명”속 서커스에 내몰리면서 육신이 지치고 병들어 각종 장애와 부상에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에는 불쌍한 코끼리들을 위로하기 위해 코끼리보호구역을 찾아 피아노 연주를 해주는 펄(Paul Barton) 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그로부터 피아노 연주를 듣고 반응하는 코끼리의 이름은 어언 62세가 된‘람두안(Lamduan)’이다. 두안은 헤진 귀를 펄럭이며 펄의 음악을 듣는다”. 그는 펄이 피아노 연주를 할 때“밀려오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육중한 몸을 긴 코를 흔들며 피아노 곁을 서성거”리는 반응을 보인다. 이 시의 화자는 코끼리의 이러한 반응을 “삶이 빈 요새처럼 적막으로 가득 차서 흘러나오는 선율”로 아프게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두안이 제 몸에서 울부짖는 코끼리를 꺼내고 있다/ 무거운 보따리를 하나둘 들어내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코끼리가 펄의 음악을 통해 그동안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풀려나 서서히 자유의 몸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두안은 “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날”을 비로소 몸으로 느끼며 “강물인 듯 바위인 듯 생각이 많은 채로 서 있다”.
이 시의 말미의 “숲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저녁 속으로/ 두안은 신전의 기둥만한 다리를 천천히 옮긴다”는 표현을 통해서 화자는 그동안 수많은 고통의 늪을 헤쳐나와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숲(자연)과 만나서 소통하는 코끼리의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코끼리를 향한 화자의 연민은 “밤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한 발로 서서 잎사귀를 피워 올리는 나무들/ 코끼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는 마지막 연에서 고조된다.
이 시는 인간과 코끼리, 문명과 자연이 대비를 이루면서 밀림의 “검은 피아노 한 대”와 “늙은 코끼리 한 마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하고 반응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화자가 ‘눈먼 코끼리’와 ‘바흐’를 대비시키는 제목을 설정 한 것은 나름대로 숨은 뜻이 있어 보인다. 바흐 역시 그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베를린 궁정 예배당 연주자로 임명되어 피아노를 연주하는 과정에서 왕이 지나치게 굴종을 요구하여 관계가 점차 악화는 경험을 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바흐 역시 눈먼 코끼리의 삶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서영처 시인은 『피아노 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라는 시집 제목에서 보듯 음악적 상상력을 현대시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중견시인이다. 경북대 음대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영남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한 그의 이력만 보아도 그의 시적 취향을 알 수 있다. 그가 음악적 상상력이 깃든 시들을 통해 삶의 깊은 통찰에 이르는 과정은 「눈먼 코끼리를 위한 바흐」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비록 코끼리보호구역이 기존의 코끼리가 살던 자연과는 차별화된 공간이지만, 코끼리와 피아노의 만남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차원을 넘어 낯설고 신선하다. 이 시는 단순히 사실적 서사를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적 묘사와 울림 있는 표현을 통해서 깊이 있는 음악적 상상력의 내공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_시전문지 《아토포스》 2023년 겨울호
박남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