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5일 [연중 제24주일]
마르코 8,27-35
사탄의 정체: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믿느냐고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묻고 계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 예언자, 사제의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탄은 잘못된 대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째 동물 사료를 먹으며 산속에서 숨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무서운 부모 때문에 도망쳐서 산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데 여전히 자기 욕구에 봉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겐가 속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관계도 없습니다.
혼인을 하려고 해도 상대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는 것입니다.
관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결국 행복과 안녕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천황이 내린 사케 한 잔씩 마시고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던 카미카제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천황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존재에게 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십자가를 지면 자녀가 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폐지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은 굶어가며 아이를 키웠지만,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는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고아였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안에 속해있어야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속해있어야 고쳐지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인간을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말고 하느님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복음: 마르 8,27-35
한쪽 발은 주님께로,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남아있는 삶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영광스럽게도 베드로는 사도단의 대표이자 수제자로 발탁됩니다.
스승님과 밀착 동행하다보니,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신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장엄하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극찬도 받고 지지도 받고, 마침내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한 마디로 승승장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두 발은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한쪽 발은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로 건너갔지만, 다른 한쪽 발은 아직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세상 한가운데 남아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의 성소 여정은 흔들리는 작은 배 한 척 같았습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반복되었습니다.
장엄하게 스승임을 따라 나섰지만 아직도 베드로 안에는 인간적 야심들과 미성숙, 다양한 결핍과 긴가민가 하는 망설임이 남아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핍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겪으실 수난 여정과 십자가 죽음을 거부함으로 인한 결핍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 결과 베드로는 스승님으로부터 결코 들어서는 안 될, 정말이지 충격적이고 모욕적인 지탄을 받게 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 숱한 인간적 약점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덕행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속적인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러웠지만, 마지막 순간, 베드로에게는 다시 한번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자비를 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분께서 운명으로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4주일 강론>
(2024. 9. 15.)(마르 8,27-35)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29-35)”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내 제자가 되었느냐?”, 또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었고, 또는 기다리고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기들의 희망이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느닷없이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했고, 기다렸고, 믿었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그리스도(메시아) 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스승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모든 신앙인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예식에 이 질문과 대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2)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것을, 아직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셨다.”인데,
당신의 부활 때까지는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뒤의 9장에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에 똑같은 명령이 나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제자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을 갖게 된 때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 모두 이루어진 다음입니다.
그 전까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긴 했지만, 그 믿음은 참된 신앙의 시작 단계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깨닫고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자격도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그때까지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으니 당신에 관하여 아무것도 선포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 부활 전에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었는데(마태 10,7), 부활, 승천, 성령 강림 후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가 복음 선포의 주 내용이 됩니다(사도 2,32).>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실 때 사용하신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일’이라는 말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는 말씀을, “나는 수난 예고만 한 것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 다음의 부활도 예고했다.
그런데 너는 왜, 부활 예고는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느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세의 안락한 생활만 중시하는 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로 읽을 수도 있고,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가 될 것이고, 힘들고 어려운 ‘숙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면, 그 ‘큰 은총’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매를 생각하면, 십자가는 숙제가 아니라 은총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