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년... 가이의 맹호 다케다 신겐의 병사로 이시야마 혼간지를 주축으로하는 반 노부나가 포위망이 흔들린다. 신겐은 죽기직전 후계자 가쓰요리에게 3년간 전쟁을 삼갈것을 당부하고 귀환도중 사망했다. 유해는 시나노의 스와호수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신겐의 당부와는 달리 가쓰요리는 가문내의 든든한 입지의 성립과 자신의 성과를 드높이기위해 아버지의 유언을 뒤로한채 가보 다테나시노 요로이앞에 노부나가,이에야스의 토벌을 맹세한다. 제1의 목표는 가장 인접한 미카와,돗토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쓰요리는 도쿠가와와의 전쟁에서 아버지 신겐이 함락하지 못했다던 다카덴진 성을 함락시키고 멈출수 없는 팽창정책을 계속 밀고나가고 만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노부나가가 아니었다. 아네강, 에치젠, 오미 오다니성 결전에서 아사이, 아사쿠라를 완전 분쇄한 노부나가는곧 도쿠가와에게 구원군으로 출전해 가쓰요리를 협공하자고 제안한다. 오다, 도쿠가와 연합이 움직이기전 가쓰요리는 요충지인 나가시노성을 공격한다. 나가시노 성주는 오쿠다이라 다다마사라는 젊고 용감한 대장이었다. 다케다군의 맹공으로 나가시노의 수비병들은 점점 힘에 부치며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위해 성주 다다마사는 휘하무사인 도리이 스네에몬을 밀사로 파견하여 오다, 도쿠가와의 군막으로 원군을 요청한다. 스네에몬은 수많은 난관과 고비를 거치며 오다의 장막에 도착하여 성의 운명이 시급하니 빨리 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오다는 스네에몬을 먼저 돌려보내고 도쿠가와군과 합세해 약 2만(맞나???)에 가까운 대병력을 이끌고 출전한다. 그러나 먼저 떠났던 스네에몬은 다케다의 병영을 통과하다가 다케다의 명장 야마가타 사부로베에 마사카게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가쓰요리로부터 나가시노성의 장수들에게 원군은 없으니 항복을 재촉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스네에몬은 성문앞에서 곧 오다,도쿠가와의 대병력이 구원하러오니 조금만 버티라고 나가시노 수비병들의 용기를 북돋는다. 이 댓가로 스네에몬은 책형(말뚝에 큰 대(大)자로 묶고 창으로 3~4번 급소를 피해찔러 천천히 죽이는 극형)을 당하고 만다. 마침내 오다, 도쿠가와의 연합군은 나가시노성 앞 평원인 시타라가하라에 도착 렌코가와를 따라 거대한 마방책을 구축한다. 가쓰요리의 1만4천(안팎이라 알고있음)의 군대는 오다연합의 2만대군을 맞아 역시 나가시노성과 후방의 도비노스야마 성채를 뒤로하고 시타라가하라에 포진한다. 먼저 선공을 친것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오다의 대장 가나모리 나가치카와 도쿠가와 사천왕의 필두 사카기 다다쓰구 두장수의 기습전법으로 도비노스야마 성채와 다케다의 대장 사에구사 모리토모가 전사하자 전,후방 적으로 둘러싸인 가쓰요리는 전군의 돌격을 감행한다. 야마가타, 나이토 등의 노장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로를 차단당했던 가쓰요리는 야마가타, 하라, 츠치야, 사나다형제, 나이토 등 정예의 무장들이 이끄는 다케다의 기마대를 렌코강뒤의 마방책을 향해 돌진시킨다. 하지만 말들이 높은 마방책앞에서 멈출때마다 오다,도쿠가와 군대의 조총부대는 3단연속사격의 전술로 멈춰선 다케다의 기병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기관총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 싸움에서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스치야 마사츠구, 사나다 노부츠나, 마사테루형제, 하라 마사타네 등이 니와, 다키가와, 사쿠마, 오쿠보등의 연합군 장수들이 이끄는 조총부대에 희생되고 퇴각하는 가쓰요리를 보호하기위해 후위대를 맡아 분전한 60노장 바바 노부후사(노부하루)또한 오다의 대병력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다. 이 전투로인해 다케다가문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리고 오다의 팽창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어 노부나가는 깃가와쿠치에서 모리의 수군을 격파하고 이시야마혼간지를 포위, 격파한 끝에 명실상부한 센고쿠최강의 다이묘로 군림한다. 또한 1582년 3월 마침내 이빨빠진 호랑이 다케다는 오다,도쿠가와,호조 3국연합군의 대공격을 받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이 전투의 양병력차이는 대략 오다,도쿠가와 연합이 다케다보다 약6000~8000정도 우세하다고 보인다. 연합군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하는 오다군은 비록 숫적으로는 우세하나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이 대부분이었기때문에 훈련도,사기,충성심,임전태세등 어느하나 뛰어난 부분은 없었다. 단지 3000정을 육박하는 조총과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다키가와 가즈마스, 사쿠마 노부모리, 마에다 도시이에등 역전의 용장들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동맹측인 도쿠가와군은 비록 숫적으로는 오다만 못하지만 병력의 질로 따지자면 오다군을 충분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지극한 충성심, 오랜 전투경험등으로 쌓인 노회함, 충천하는 사기, 충분히 구비된 조총(오다에게 꿨지만), 사카이 다다쓰구, 혼다 다다카츠, 오쿠보 다다요, 도리에 모토다다등 미카와를 대표하는 무쌍의 맹장들로 구성되어 아네강에서 아사쿠라의 대군을 격멸한 그 위용을 자랑했다. 다케다의 군대는 숫적으로 연합군보다 뒤졌지만 대부분의 주력이 당시 보병을 6명이나 상대한다던 기마부대로 편성되었고 그 용맹성은 오다, 도쿠가와와는 감히 비할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후사, 나이토 마사토요, 사나다 형제, 츠치야 마사쓰구, 하라 마사타네등 다케다 24장을 장식하는 쟁쟁한 용장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타라가하라의 격전 끝에 결과는 오다,도쿠가와의 압승. 당시 전국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의 기마대를 분쇄한 비결은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첫째는 개전초의 나가시노공방전을 들수 있다. 다케다군은 나가시노수비병보다는 훨씬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은 수의 장병들이 수비하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으로인해 다케다군의 전의는 어느정도 상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두번째는 개전직전의 도비노스야마기습작전을 들수 있다. 다케다의 후방을 받쳐주던 성채가 연합군에의해 함락되자 다케다는 퇴로를 차단당하고 가뜩이나 떨어져있던 전의는 더욱 하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번째는 노부나가의 기상천외한 포진. 당시 조총은 전장에서 사용되는 빈도가 상당히 적었다. 조총을 전장에 사용한 것은 이미 1543년 다네가시마의 철포전래이후 오래되었지만 주무기로서 전장을 지배한 것은 오다군이 처음이었다고 할수 있다. (후에 이들의 자극을 받아 사츠마의 시마즈와 오슈의 다테가 조총을 주력무기로 편성하긴하지만 전술적, 활용도에 있어서는 노부나가에 비해 10년정도는 뒤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장전시간이 오래 걸리는 조총의 단점을 보완한 삼단의 배치와 기마대의 돌진을 저지하기위한 높은 마방책 등 아직 경험해보지못한 신전술에 다케다군의 두려움은 더더욱 가중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는 이 전투에 임하는 가쓰요리의 입지를 들 수 있다. 전군의 사기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가쓰요리였지만 싸워보지않고 후퇴하기엔 너무나 잃을 것이 많았다. 일단 지금까지 점령해두었던 지역의 영주들의 대대적인 이탈이 그 첫째요, 가문내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실추될 것이라는 것이 그 둘째였다. 그렇게되면 그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투자했던 팽창정책이 완전한 소모전이 되어버릴 공산이 컸기때문에 가쓰요리로서는 무리하더라도 적군을 공격하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결과적으로는 무참히 깨졌지만)
이러한 이유,배경들을 제외하고라도 나가시노의 결전은 세계전쟁사에도 그 의의를 주는 사례로써 신무기, 신전술이 구전술을 타파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을뿐만아니라 중세의 전술에서 근세의 전술로 넘어가는 어떤 신호탄과 같은 의미를 제시해준다.
첫댓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