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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리하르트 바그너
초연 1870년 뮌헨 궁정 오페라극장
배경 신화시대 훈딩의 집. 바위산. 바위산 정상
<1989년 4월 뉴욕 메트 / 241분 / 한글자막>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 연주 / 제임스 레바인 지휘 / 오토 쉥크 연출
지그문트.....보탄과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용사.....게리 레이크스(테너)
지글린데.....지그문트의 쌍둥이 여동생................제시 노먼(소프라노)
훈딩...........지글린데의 남편.............................쿠르트 몰(베이스)
보탄...........신들의 우두머리.............................제임스 모리스(베이스)
브륀힐데.....발퀴레..........................................힐데가르트 베렌스(소프라노)
프리카........보탄의 아내. 결혼의 여신.................크리스타 루드비히(메조소프라노)
그외 여덟 명의 발퀴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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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Kenneth Chalmers / 하신애 번역>
바그너 <반지>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 중 <발퀴레>
<발퀴레>의 오프닝에서 바그너는 관객들을 폭풍의 소용돌이로 휘몰아갈 듯이 열광적으로 고동치는 현악과 <라인의 황금>에서 선보인 바 있던 초자연적인 무대 구성을 통해 곧장 낭만적이며 야성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천둥의 팡파레와 함께 바그너의 튜바가 돌진할 때면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개를 거두고 발할 성을 드러내기 위해 망치를 휘두르던 도너가 여전히 창공에서 그 움직임을 드러낸다. 피할 수 없는 신들의 존재와 각 사건의 진행에 따른 신들의 연루는 이처럼 균일한 음악적 제스처 속에서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반지>가 거둔 특별한 성공들 중 하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이다. 오프닝과 같은 인상적인 대목들 및 제3막의 시작인 '발퀴레의 기행'에서 보여준 기민함과 정확한 리듬, 그리고 평소에 비해 좀더 활기찬 '기행'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레바인은 다른 지휘자들이 때때로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높이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명확하리만큼 날카롭게 극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다. 지글린데가 비밀스러운 훼방꾼이 누구인지를 깨닫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지글린데와 지그문트의 듀엣이 보여준 팽팽한 긴장감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라인의 황금>에서 신화적 인물들이 보여준 욕망과 목적은 오직 힘에 의한 것이다. 이제 <발퀴에>에 이르러 사랑은 지글린데와 지그문트, 보탄과 브륀힐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휩쓸림의 연쇄 속에 무대 위로 등장한다. 이 부분은 <반지> 전체 중에서도 가장 서정적인 음악들로 표현되어 있다. 지글린데의 역할은 이러한 서정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역할의 전개 양상을 '사람들 모였을 때 Def Manner Sippe'에서 보여준 억눌린 듯 주저하는 이야기꾼의 모습에서부터 지그문트와 함께 한 그리움의 듀엣 및 그 열광적인 결말을 거쳐, 극중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여 'O Hehrstes Wunder!'을 실신한 듯 부르짖으며 패배한 지그문트의 부러진 칼 조각들을 모으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쭉 지켜볼 수 있다. 'O Hehrstes Wunder!'는 지글린데와 지그문트에 대한 예언의 첫 번째 출현을 위해 노래된 것이다. 이 예언은 흔히 사랑의 속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된다. 1980년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레바인의 가장 위대한 프리마 돈나로 일컬어지는 제시 노먼 Jessye Norman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엘리자베스 역으로 무대에 데뷔했다. 그녀는 발성에 있어서 보표 상의 수많은 급강하와 큰 폐활량을 필요로 하는 구절(예를 들어 'Du bist der Lenz, nach dem Ich verlangte')을 포함한 지글린데의 음역에 이상적으로 적합했다. 지글린데 역을 맡았던 다른 성악가들은 브륀힐데의 역할로 옮겨 가게 되었는데, 힐데가르트 베렌스 Hildegard Behrens도 그들 중 하나이다. 이 독일인 소프라노는 1980년대 초 바이로이트에 위치한 솔티 Solti 지휘의 피터 홀 프로덕션에 데뷔할 때부터 1989-199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발퀴레 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1990년 현재를 조명해보면, 베렌스는 발퀴레 특유의 외침인 '호-요-토-호!'로 도약하는 부분이나 보탄을 향해 나지막이 탄원을 요청할 때에도 상처받기 쉬운 여성적 형상으로서의 발퀴레라는 자신의 명성에 걸맞게 진정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지크프리트의 이야기는 바그너가 '니벨룽겐의 노래'를 음악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최초의 시작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보탄이 4부작 오페라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 결함적인 신이 지닌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욕망이 플롯의 전환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1971년부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활동했던 제임스 모리스 James Morris는 198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된 <반지> 1부와 2부에서 보탄의 역을 맡았고, 유럽에서의 성공 이후 이번 4부작 완결 공연을 위한 새로운 구성에 참여코자 뉴욕 오페라하우스로 돌아왔다. 베렌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반지>의 역할을 선보인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공연 및 음반 레코딩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는 그의 노래에 깃든 순수한 음악적 재능과 명쾌한 발성이 이룩한 결과이다. 그는 베이스 톤의 음성을 통해 각 구절들을 적절히 운용해내는 동시에 각 단어들이 지닌 힘을 유감없이 표현해낼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번 공연은 제임스 레바인 자신의 의사에 따라 오토 쉥크 Otto Schenk가 무대 제작을 맡은 첫 번째 작품이다. 빈 출신으로 원래 배우였던 그는 이번 <반지>의 공연들 사이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박쥐>의 익살스러운 주정뱅이 교도관인 프로쉬 역을 연기하기도 했다. 그는 <반지>의 서사시가 하나의 인간 드라마라는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이는 신들이 탐욕과 반항이라는 인간 보편적 특성 및 자식들의 행동을 통제하고픈 어버이로서의 욕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 연출에 관한 바그너의 본래 기록에 집중하여 각각의 사건들을 상징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제시하기로 결정했으며, 디자이너인 귄터 슈나이더-짐센 Gunther Schneider-Siemssen이 이러한 극적인 신념을 실현시키는데 일조했다. <라인의 황금>에서 보여준 놀라운 솜씨에 비하면 <발퀴레>는 극적인 일격을 가하는 순간들이 다소 부족하고 발퀴레들이 말을 타지 않은 채로 등장했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바그너의 무대 지시들을 충실하게 실행하고 있다. 훈딩의 오두막 문은 달빛 어린 봄밤의 정경을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활짝 열리며, 최종 막에서 브륀힐데와 대면하기 위해 도착한 보탄은 작열하는 불꽃들 사이에서 적절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90년 6월 PBS 텔레비전 방송과 이후의 비디오 배급을 위한 영상 제작의 촬영을 맡았던 브라이언 라지 Brian Large는 관객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의 촬영을 주로 담당했으나, 그 외에 구름, 연기, 불 등 다른 분야와 관련된 특수 효과들을 편집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발퀴레의 기행'이 연주되는 동안 관객들이 스크린을 통하여 폭풍의 진행을 보는 듯한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비디오의 경우 카메라가 스크린 자체를 촬영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폭풍이 그저 성악가들의 뒤편에서 날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인상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움직이는 모습들을 일일이 첨가해야만 했다. 그 외에도 비디오 제작이나 사진 촬영, 이야기의 통일성 확보 및 관객들의 눈에는 보이지만 스크린을 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의 모습 조정 등의 이유로 재배치된 요소들이 많았다. 무대 제작에서 조명 분야를 담당했던 길 웨슐러 Gil Wechsler는 영상 제작을 할 때에도 조명 효과를 감독했으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의 관객들이 누릴 수 있었던 효과들을 세심하게 변환하여 비디오 관객들에게 동일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대본집 해설 === <번역 및 해설 / 전예완>
<발퀴레>
인간 세계로의 여행
'발퀴레'는 보탄이 에르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홉 딸들로서, 그들은 보탄의 명에 따라 인간을 선동해 전투를 일으키고, 전사자들 중에서 영웅만을 가려 뽑아 발할로 데려와 발할 수비군단을 조직하는 일을 한다. '전투'를 뜻하는 'Wal'과 '뽑다, 선택하다'의 의미인 'ku:ren'이 합쳐진 그들의 이름은 이러한 임무에서 비롯됐다. 극의 제목인 'Die Walku:re'는 아홉 발퀴레들 중 하나인 브륀힐데를 가리킨다.
서극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에 물의 요정, 신, 난쟁이, 거인 등 한마디로 '요물'들이 나왔었다면, 본편의 첫 번째 극인 <발퀴레>에는 인간이 그리고 인간의 사랑이 등장한다. 인간 지그문트와 지글린데의 '치명적 사랑'이야말로 <발퀴레>의 주요 내용일 텐데, 제목은 왜 '발퀴레'가 된 것일까? 반지의 저주를 풀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보내고자 하는 보탄의 여정을 따라 <반지> 전체를 짚어보면 이해가 간다. 보탄은 그 소망의 실현을 위해, 자신에게 대적할 인간 영웅을 필요로 한다. '신인 나보다 더 자유로운' 인간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반지의 저주 해결의 칼자루는 인간의 손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한 이행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이 보탄의 또 다른 자아인 브륀힐데이다. 즉 그녀는 영웅 지그프리트를 탄생케 하는 보탄의 역사 - 일종의 구원사 - 에 '배반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보탄은 자신의 창을 쳐부수어 줄 자유로운 인간 영웅을 얻기 위해, '벨제'라는 인간이 되어 벨중족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칼 한 자루를 넌지시 지그문트에게 선물했지만, 그 칼은 보탄의 창을 쳐부수지 못하고 동강나 버린다. 보탄의 가장 사랑하는 딸, 그의 감추어진 소망을 아는 브륀힐데는 보탄의 명을 거역하고 부러진 칼토막들을 보존함으로써 미래에 그 칼을 새로이 휘두를 진정한 영웅 지그프리트를 예비한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브륀힐데'가 아니라 '발퀴레'인가? <발퀴레>의 마지막에서, 브륀힐데는 운명의 칼자루가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중간 지점에서 잠들어 있게 된다. 그녀는 보탄에게서 떠났지만 아직 지그프리트를 만나지 못했다. 알베리히가 사랑을 포기하고 얻어낸 반지, 사랑에 대한 저주를 통해 태어난 그 반지의 저주를 푸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의 감정을 모르는 '처녀 발퀴레'였던 브륀힐데는 인간의 사랑의 힘에 깊이 감동하여 지그문트와 지글린데의 사랑의 결실을 보호하고, 결국 이후에는 영웅 지그프리트를 인도하는 사랑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다. 사랑에 의한 '깨우는 자'만이 발퀴레의 갑주를 부수고 그녀를 더 이상 '발퀴레' 아닌 인간 브륀힐데로 만들어줄 것이다.
<발퀴레>는 <반지>의 꽃?
<발퀴레>는 <반지> 4부작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반지> 전체를 관람하기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주변에서는 으레 <발퀴레>만 따로 떼어서 추천한다. 영화음악 등으로도 자주 쓰여 귀에 익숙한 3막 첫 장면, 이른바 '발퀴레의 기행(騎行)' 때문인가? 그러나 '극과 음악의 완전한 종합'을 추구했던 바그너의 4시간이 넘는 악극을 추천하는 근거가 고작 '귀에 익숙한 음악' 하나일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다들 왜 <발퀴레>일까? 재미로 따지자면 <라인의 황금>이나 <지그프리트>가 낫지 않은가? <신들의 황혼>이 더 극적이고 음악도 풍성하지 않은가?
그러나 막상 <반지>에서 한 편을 골라 추천하려 한다면, 결국 고려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있다. <라인의 황금>은 재미있고 비교적 독립적인 극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편 아닌 서극이다. <지그프리트>는 활기차고 유쾌하며 극적 재미로 넘쳐나지만, 동굴과 숲 속에서 남자들과만 너무 오래 있어야 하고, 3막 끝에 가서야 등장한 여주인공 브륀힐데의 엄청난 존재감은 전편을 상정하지 않고는 이해불가일 수도 있겠기에, 선뜻 권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신들의 황혼>은 유명한 영웅 비극이 등장하고 음악적으로도 매우 풍성하지만, 모든 여정이 정리되는 대단원이므로 너무 많은 전제와 요약과 이미 진행되어 버린 의미들로 넘쳐난다. 그러므로 따로 떼어 감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독립성과 자체완결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본편의 첫째 날에 해당하는 <발퀴레>가 비교적 우세하다. 물론 여기서도 극의 진행을 위해 전사(前史)들이 필요하지만, 이는 등장인물들의 회고담 속에서 비교적 무리없이 전달된다. '사랑과 정열'로 점철된 1막은 음악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워서 마음을 잡아끈다. 거기에 보탄의 고뇌가 빚어내는 철학적 의미가 더해지고, 예의 '발퀴레의 기행'까지 가세한다면...<발퀴레>만 종종 따로 떼어 공연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물론 <발퀴레>가 <반지>에서 가장 출중하다는 그런 의미는 결코 아니다. 애초에 연작으로 기획된 것을 따로 떼어 그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고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발퀴레>의 매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수는 있겠다.
보탄의 고뇌, 보탄의 분노
2막 2장에서 보탄은 넋두리삼아 브륀힐데에게 자신의 과거사 및 현재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보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라인의 황금> 속의 행적 이후, 에르다가 경고한 영원한 멸망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세계의 태내 깊이 내려가 에르다로부터 앎을 얻고, 그 댓가로 그녀에게 아홉 발퀴레를 '낳게 해' 주었다. 그가 다가오는 신들의 멸망에 대비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지만, 가장 큰 걱정은 그 반지가 알베리히의 손에 다시 들어가기 전에 하루빨리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계약을 깨뜨리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고, 계약의 수호자인 자신에 대항해 그 일을 해 줄 자유로운 영웅을 기다린다......이 2막 2장은 내용면에서 볼 때 그 어느 대목보다도 철학적이다. 정신이 자신의 한계를 못 견뎌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타자화하고, 그 속에서 다시금 스스로를 발견해 나아가는 자기 지양의 과정으로 세계와 역사를 설명하는 헤겔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기서 자기파멸은 동시에 자기실현이다. 3막 3장에서, 딸에게서 신성을 박탈하는 벌을 내리면서 동시에 '신인 나보다 더 자유로운 자'가 그녀를 깨워 신부로 얻기를 기원하는 보탄의 마지막 모습은, 이러한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지양'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만든다 - 브륀힐데는 보탄의 또다른 자아이므로.
자신의 명을 거역해 전투에서 지그문트를 도와준 브륀힐데에게 보탄은 불같이 분노한다. 보탄의 '소망의 신부'인 브륀힐데와 그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히 '지상명령을 거역한 죄' 정도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보탄은 구구절절이 죄목을 읊어대는 것이다. "...내 의지를 통해서만 존재했던 네가, 내 의지에 대항하는 의지를 품었고 (...) 소망의 처녀였던 네가, 내게 대항하여 소망을 품었더..." 그런데 브륀힐데가 보탄의 '부정적 소망'을 실현한 것이라면, 즉 보탄의 자기파멸-자기극복의 기획을 실행한 것이라면, 보탄은 브륀힐데에게 왜 그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나는 결국 아버지가 소망하는 일을 했다'는 브륀힐데의 항변은 조목조목 일리가 있는데, 어째서 보탄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더 화를 내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보탄 자신만큼 자세히 많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보탄의 분노를 곱씹어 보면, 인간 심사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 줄거리 === <Karl Dietrich Gra:we / Mary Whittall 영역 / 하신애 번역>
(바그너의 무대 지시 원문은 이탤릭 체로 표시됨)
신들의 우두머리인 보탄과 난쟁이인 알베리히는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보탄은 거인족인 파졸트와 파프너를 이용해서 신들의 요새인 발할 성을 지었다. 니벨룽 족인 알베리히는 사랑을 부정하는 자이며 - 보탄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 - 그로 인하여 힘과 부를 얻겠다는 목적에만 몰두하고 있다. 알베리히는 노예들을 시켜 라인 강의 황금을 벼리고, 이를 통해 니벨룽 족의 보물인 반지와 미법의 모자를 만들어 낸다. 이 보물들은 보탄에 의해 강탈당하는데, 이렇듯 부당한 방법으로 보물을 가로챈 보탄은 이후 거인들의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이를 빼앗기고 만다. 반지에 걸린 알베리히의 저주는 파프너를 형제 살해라는 비극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마법의 모자가 지닌 치유의 힘을 통해 파프너는 용으로 변신하게 되고, 이제 동굴에 몸을 숨긴 채 보물들을 지키고 있다.
보탄은 알베리히의 도전에 대비하여 자신의 힘을 보존하기 위해 점차 타협과 의무라는 그물에 얽혀 스스로를 속박하게 되었다. 그는 그 반지와 보물을 원했으며, 그러기 위해선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힘을 약화시킬 염려도 없으며 보물을 다시금 신들에게로 가져올 수 있는 인물, 즉 '자유로운 영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 인간 여자가 보탄에게 쌍둥이 자식들인 지그문트와 지글린데를 낳아주었으며, 이 남매는 어린 시절 서로 떨어져서 자랐다. 보탄의 계획에 따라 이들에겐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1막
격심한 뇌우가 휘몰아치는 동안 적에게 쫓기던 지그문트는 숲 속 깊은 곳에 이르러 피난처를 발견하게 된다.
집의 내부
거대한 물푸레나무 줄기를 중심으로......나무 줄기는 훤히 트인 공간에 지어진 오두막집에 대한 중심점으로 작용한다......무대 앞쪽의 오른편에는 화로가......화로의 옆에는 창고로 쓰이는 벽장이 있고......무대 안쪽에는 집과 대문이 자리잡고 있다......왼편에는 집안으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있고......또한 무대 앞쪽의 왼편에는 뒤쪽 벽에 붙은 폭이 넓은 긴 의자와 식탁이 있으며, 그 앞에는 나무로 만든 걸상들이 몇 개 자리잡고 있다. 무대는 잠시 텅 빈 채로 유지된다. 바깥에서는 폭풍이 점차 잠잠해져 간다. 지그문트는 집 밖에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간다......그의 옷과 외양은 그가 전투 중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한 채로 그는 문을 닫고, 체력이 다한 사람처럼 화로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가, 곰 가죽 깔개 위로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1장
오두막의 주인인 훈딩은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훈딩의 아내인 지글린데는 이방인에게 물 한잔을 가져다 준다. 지그문트는 물을 마시고 뿔잔을 그녀에게 돌려준다. 감사를 표시하던 그는 고조되는 관심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수적으로 우세한 적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그의 무기가 부서졌기 때문이며, 폭풍 때문에 쉴 곳을 찾아 이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글린데는 그에게 환영의 표시로 벌꿀술이 가득한 뿔잔을 건네준다. 지그문트는 이를 긴 몸짓으로 단번에 마시고, 친밀함으로 가득한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킨다. 그는 뿔잔을 그의 입술에서 떼어 천천히 내려놓는데, 이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강렬한 매혹으로 바뀐다. 그는 깊이 한숨을 쉬고 침울하게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에게 저주와 같이 걸려있는 나쁜 운명을 깨닫고, 그는 다시금 전투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지글린데는 그에게 머물 것을 간청한다. 불운은 그녀의 집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지그문트는 화롯가에 기대어 조용하고도 결연한 찬성의 뜻을 나타내며 지글린데를 바라본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다시금 그를 바라본다. 깊은 침묵 속에서 그들은 넋을 잃은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2장
지글린데는 갑자기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고, 훈딩이 말을 끌고 마구간에 들어서는 소리를 알아차린다. 그녀는 서둘러 대문으로 가서 문을 연다.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훈딩은 집안으로 들어서다가 지그문트의 모습을 알아차리곤 문간에 먼춰 선다. 훈딩은 지글린데에게 의심에 가득 찬 엄중한 눈초리를 보낸다. 훈딩은 이방인에게 불신이 가득한 태도로 인사하고, 내키지 않은 태도로 그에게 여느 이방인을 위한 접대를 허용할 뿐이다. 지글린데는 식탁에 저녁식사를 차린다. 무의식 중에 그녀는 다시 지그문트를 바라본다. 훈딩은 그의 아내와 이방인 사이에 흐르는 호감을 알아차린다. 커져가는 의심과 함께 훈딩은 손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지글린데 역시 그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소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지그문트는 그가 스스로를 베발트(고통의 사람)라 부르며 늑대의 아들이라고 얼버무린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컸으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종종 사냥을 나가곤 했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자신과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시기심이 강한 네딩족이 그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여동생을 유괴했다. 몇 년 간의 방랑을 거친 끝에 지그문트는 그의 아버지마저 잃었다. 그는 정착민들 가운데서 우정을 구하려 했으나, 그들은 이 저주받은 운명의 남자를 거부했다. 오늘 그는 가족들의 강요로 인하여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 한 소녀를 구출하기 위하여 혈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훈딩은 자신이 바로 소녀를 결혼시키려 했던 종족 중의 하나라고 밝힌다. 손님 환대의 신성한 법률로 인하여 할 수 없이 그때 그곳에서 죽은 그의 친척들에 대한 엄격한 복수를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말리려고 시도하는 지글린데에게 당장 침실로 가서 그가 밤마다 마시는 술이나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거친 명령을 내린다. 지글린데는 잠시 아무런 생각이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채로 서 있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천천히 창고 쪽을 향해 걸어간다. 창고에 도달하자 그녀는 멈춰 선 채 깊이 생각에 잠긴 채로 얼굴을 반쯤 돌린다. 평온하고도 단호한 동작으로 그녀는 선반을 열고 뿔잔에 술을 채우고 상자에서 허브를 꺼내어 뿌린다. 그런 후 그녀는 지그문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서 그가 여전히 거두지 못하고 있는 그 눈길과 마주친다. 그녀는 훈딩의 응시를 인지하고 곧장 침실로 향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서 지그문트를 간청하듯 바라보고, 확고하고도 의미심장한 눈길로 지그문트의 주의를 물푸레나무 줄기에 있는 어느 한 지점으로 이끌려는 것이다. 훈딩은 발을 구르며 그녀에게 어서 떠나라는 퉁명스러운 몸짓을 취한다. 지그문트에게 마지막 한번의 눈길을 던지며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등 뒤에서 문을 닫는다. 아내를 따라 들어가기 전에 훈딩은 지그문트에게 아침에 있을 싸움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3장
지그문트는 무기가 없다. 그는 문득 필요할 때에는 언젠가 그를 위한 무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하던 아버지의 약속을 떠올렸다. 사그라지는 불빛에 의해 그는 나무줄기에서 비치는 한 줄기 섬광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지글린데의 눈짓이 의미했던 바를 생각하게 된다. 지글린데는 훈딩을 약에 취해 잠들게 한 후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지그문트에게 자신이 이 증오스러운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던 날에 대해 얘기하고, 그날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의미심장한 몸짓을 취하며 물푸레나무 줄기에 칼을 꽂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훈딩의 하객들 중 누구도 그 칼을 뽑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칼을 위해 예정된 영웅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자신을 이 치욕스런 결혼생활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들은 서로 희열에 넘쳐 포옹한다. 대문이 활짝 열리며......바깥은 아름다운 봄밤의 정경이다. 보름달의 빛이 집안으로 스며들고 그 빛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 그들은 그 순간 서로의 모습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그문트는 지글린데를 부드럽게 그러나 굳건히 끌어당겨 자기 옆의 깔개 위에 앉도록 한다. 달빛은 더욱 환해진다. 봄으로의 갑작스러운 돌입은 두 사람의 감정을 자연 세계의 것으로 변환시킨다. 높아지는 매혹과 함께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기억들은 보다 선명해지고, 그들이 지닌 운명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의미심장함으로 가득 찬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지글린데의 눈빛 속에서 지그문트는 그 아버지의 눈빛을 다시금 찾아낼 수 있었고, 지글린데는 지그문트의 진짜 이름을 찾아주었다. 또한 지그문트만이 휘두를 수 있다는 그 칼의 이름은 노퉁이었다. 한번의 움직임으로 그는 칼을 줄기에서 뽑아내었고 이를 기쁨과 놀라움에 넘쳐 환호하는 지글린데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의 감정은 오빠와 여동생으로서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할 때 환희의 절정으로 치솟는다.
제2막
황량하고 바위투성이인 산악지대
무대의 안쪽으로 협곡이 산등성이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고, 흙이 전면을 향해 다시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1장
보탄은 갑옷을 입고 창을 휘두르고 있으며, 발퀴레인 브륀힐데 역시 전신에 갑옷을 입고 있다. 연인들은 도주 중이지만, 보탄은 훈딩이 그들을 따라잡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의 가장 총애하는 딸이자 발퀴레인 브륀힐데를 선택하여 지그문트가 추격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한다. 브륀힐데는 그녀의 사명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동시에 보탄에게 그의 아내인 프리카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이는 결코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브륀힐데는 한 켠에 있는 암벽 뒤로 모습을 감춘다. 프리카는 한 쌍의 숫양이 끄는 수레에 탄 채 협곡을 거슬러올라 산등성이에 이르고, 급히 정지한 후 수레에서 내린다. 그녀는 노한 듯 무대 앞쪽에 있는 보탄을 향해 다가온다. '결혼의 수호자'로서 프리카는 보탄의 모든 계획들을 뒤집어놓는다. 그녀는 간통과 근친을 범한 이 연인들에게 처벌을 요구한다. 보탄은 헛되이 그녀에게 사랑이 지니는 커다란 힘과 나아가 그의 전략적 필요성에 대해 호소한다. 프리카는 그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끔 종용한다. 지그문트는 결코 그가 필요로 하는 '자유로운 영웅'이 아니며, 그저 무지한 인간이자 보탄의 도구일 뿐이다. 무력해진 분노에 휩싸인 채, 보탄은 지그문트를 훈딩의 복수에 맡기기로 맹세해야만 한다. 프리카는 또한 브륀힐데를 통해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보려는 보탄의 에두른 시도 역시 좌절시킨다. 브륀힐데는 바위 사잇길에서 오른편에 말을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낸다. 프리카를 보자 그녀는 조용하고도 느리게 말을 길 아래로 이끌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막다른 길에 몰린 채 보탄은 프리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그문트가 패하게 되리라는 말을 남긴다. 프리카는 빠르게 멀어져 간다. 근심과 혼란에 빠진 브륀힐데는 이전의 분노심을 잃어버린 채 암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보탄에게 다가간다.
2장
발퀴레는 그녀의 아버지이자 신들의 우두머리인 보탄이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역설을 터뜨리는 것을 목격한다. 브륀힐데는 충격적인 놀라움에 잠긴 채 그녀의 방패와 창, 투구를 벗어 던지고 염려와 믿음을 느끼며 그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는다. 신뢰하듯 그러나 걱정스러운 듯 그녀는 보탄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그의 무릎과 가슴을 향해 손을 뻗는다. 보탄은 그녀의 눈을 오래 응시한다. 그런 후 그는 무의식적인 다정함을 담아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무엇인가가 그를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게 했고, 마침내 그는 속삭이듯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오랫동안 마음 속으로 번민해왔던 그의 고뇌들을 긴 대화를 통해 브륀힐데에게 설명한다. 그는 그녀에게 알베리히의 저주받은 반지에 대해 얘기하고 이제 그것이 파프너에 의해 수호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과 난쟁이 알베리히 모두 그것을 얻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린다. 보탄은 대지의 여신이자 전지(全知)의 여신인 에르다를 다그쳐 그녀가 지닌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을 드러내게 했고, 이를 통해 불멸의 신들이 맞이하게 될 위협적인 최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브륀힐데는 에르다가 낳은 보탄의 딸이었다. 그는 그녀를 비롯한 다른 8명의 딸들을 처녀 전사인 발퀴레로 길렀는데, 이는 전투에서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용감한 남자들에게 박차를 가하여 그 죽은 용사들의 영혼을 발할 성으로 이끌어 방어의 임무를 맡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보탄이 그토록 애써 저지하고 있는 발할 성의 파멸은 여러모로 수수께끼와 모순투성이였다. 알베리히보다 우세해지기 위해 - 이 사랑을 부정하는 자는 아들을 낳기 위해 여자에게 돈을 지불했다 - 그리고 반지를 손어 넣어 스스로에게 영원한 힘을 선사하기 위해 보탄은 자신이 맹세와 계약의 신성한 수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반지의 수호자인 파프너와 맺었던 맹세와 계약을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자유로운 영웅'이었지만, 그러나 보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창조해낸 '자유로운 영웅'도 실은 보탄이 지닌 의지의 산물이자 스스로 구성해낸 모순들의 희생자일 뿐이었다. 잔혹하고도 아이러니한 체험 속에서 보탄은 파멸의 운명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브륀힐데에게 프리카의 주장대로 훈딩의 편에 서서 싸우기를 명한다. 브륀힐데는 혼란에 사로잡히지만 그의 명령을 반박해 보려는 그녀의 감동적인 시도는 단지 보탄의 노기만을 더 부추길 뿐이었으며, 보탄은 자신이 곧장 지그문트의 죽음을 확인하도록 하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브륀힐데는 슬픔과 착잡함에 잠겨 충성의 길 사이에 놓인 채 양립할 수 없는 갈등을 느낀다. 그녀는 천천히 무대 안쪽을 향한다.
3장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지점에 선 브륀힐데는 협곡의 아래쪽을 굽어보고 지그문트와 지글린데의 모습을 발견한다. 잠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던 브륀힐데는 이윽고 그녀의 말이 숨겨진 동굴 속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지그문트와 지글린데는 산등성이에 당도한다. 지글린데는 앞서서 질주하고, 지그문트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글린데는 환희와 공포 사이에서 지그문트와 더불어 훈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오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사랑과 양심적 고통, 그리고 돌연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환상들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잃고 지그문트의 팔 안으로 쓰러진다......그는 지글린데를 미끄러지듯 눕히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놓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다음 장이 끝날 때까지 이러한 자세를 유지한다.
4장
브륀힐데는 고삐를 잡고 말을 이끌어 동굴 밖으로 나오고, 느리고 장엄한 걸음으로 무대 앞쪽을 향한다. 이 발퀴레는 지그문트에게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그는 두려움의 기색 없이 그의 운명에 대해 경청한다. 발할 성에 도착하면 그는 다시금 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고, 죽은 용사들의 우두머리 자격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그의 누이가 자신과 함께 발할 성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브륀힐데를 따라가기를 거절한다. 발퀴레는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이 발할 성의 '영원한 천복(天福)'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낀다. 잠들어 있는 지글린데와 그들 사이의 아기를 향해 이들을 잔혹한 세상에 남겨두느니 차라리 죽이기로 하겠다는 지그문트의 결심은 브륀힐데에게 그녀의 임무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지그문트의 편에 서서 훈딩과 싸우겠다고 약속한다. 그녀는 말을 타고 폭풍과 같이 날아 올라 좁은 협곡 아래로 사라진다. 지그문트는 그녀가 가는 것을 바라보며 기쁨과 새로운 희망을 느낀다. 무대는 점차 어두워지고, 묵직한 천둥을 동반한 구름들이 뒤편에 모여 들어 절벽과 협곡, 산등성이를 모두 가린다.
5장
훈딩의 뿔피리가 지그문트에게 싸움의 시작을 알린다. 그는 무대 안쪽으로 달려가 산등성이의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러 번개의 섬광들로부터 순식간에 검은 구름들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지글린데는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 공포에 자로잡힌 채 지그문트의 뒤를 따른다. 번개의 섬광이 산등성이를 비추고, 한 순간 훈딩과 지그문트의 싸움 장면을 드러나게 한다. 지글린데는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려하지만 남자들의 머리 위로 오른편에 한줄기 눈부신 빛이 그녀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녀는 눈이 멀기라도 한 듯이 흔들린다. 브륀힐데는 밝은 빛에 둘러싸여 지그문트의 머리 위를 맴돌며 방패로 그를 보호한다......지그문트가 칼을 휘둘러 훈딩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는 순간, 왼편에서 작열하는 붉은 빛이 구름을 가르고 나타나며 보탄의 모습이 보이고, 그는 훈딩의 머리 위에 버티고 선 채 지그문트를 향해 그의 창을 내뻗는다. 브륀힐데는 보탄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급히 뒤로 물러나 방패를 회수한다. 지그문트의 칼은 보탄의 창에 의해 부서지고 만다. 훈딩은 지그문트의 무방비한 가슴팍을 향애 창을 던지고, 지그문트는 생명을 잃은 채 쓰러진다. 지글린데는 그가 죽음 직전에 내뱉은 한숨과 단말마의 외침을 듣는다. 지그문트가 쓰러지자 양편의 밝은 빛들은 사라지고, 구름은 자욱한 어둠으로 바뀌어 무대 앞까지 뒤덮는다. 브륀힐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녀는 필사적인 다급함을 느끼며 지글린데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재빨리 지글린데를 들어올려 협곡 근처에서 대기하던 말에 싣고 함께 사라진다. 구름은 한 순간 무대 가운데서 갈라져 훈딩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는 막 그의 창을 지그문트의 가슴팍에서 빼내었다. 보탄은 구름에 둘러싸인 채 훈딩의 뒤쪽 바위 위에 서 있으며, 그의 창에 기대어 비통함에 잠긴 채 지그문트의 시신을 내려다본다. 보탄은 경멸에 찬 몸짓으로 힘을 뻗쳐 훈딩을 땅 위로 쓰러뜨린다. 이제 그는 '범죄자'인 브륀힐데에게 그녀의 불복종이 야기한 끔찍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제3막
바위산의 꼭대기
장면의 오른 쪽으로 소나무 숲이 인접해 있다. 왼쪽에는 자연적인 방 형태를 이룬 동굴의 입구가 보인다. 그 위로 바위까 꼭대기까지 우꾹 솟아 있다. 무대 안쪽에 이르기까지 시야는 완전히 트여 있다. 다양한 크기의 자갈들이 무대 뒤쪽까지 가파르게 떨어지는 - 이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 절벽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구름 조각들이 폭풍에 떠밀려 바위 무대의 가장자리를 지나치며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1장
발퀴레들이 호전적인 흥분에 들뜬 채 산 위에 모여 있다. 각자 자신의 말 안장 위에 죽은 용사의 영혼을 하나씩 던져놓았다. 그륻은 브륀힐데가 용사의 영혼이 아닌 무력한 여인 한 명을 동반한 채 황급히 도착하자 깜짝 놀란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보탄의 뜻을 거역하려는 자가 없다. 지글린데 역시 자신의 비참함에 잠겨 그저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브륀힐데가 지그문트와의 사이에서 잉태된 새로운 생명을 위해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지글린데의 비애는 갑작스러운 기쁨으로 바뀐다. 그녀는 구원을 간청하게 되지만 보탄은 이미 매우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따라서 브륀힐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그의 도착을 늦추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지글린데에게 부러진 칼 조각을 주며 그녀가 가야만 하는 길을 가리킨다. 바로 파프너가 니벨룽의 보물을 지키고 있는 숲 속으로, 보탄이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는 곳이었다. 지글린데는 급히 무대 앞쪽의 오른 편으로 사라진다. 천둥을 동반한 검은 구름들이 산꼭대기 부근으로 모여들고, 무시무시한 폭풍이 뒤편에서 휘몰아쳐오며, 오른편을 향해 작열하는 붉은 빛이 이전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발광하기 시작한다......잠시 지글린데의 행보를 지켜보던 브륀힐데는 무대 안쪽으로 몸을 돌려 숲 속을 바라보고, 이제 겁에 질린 채 다시 무대 앞쪽으로 온다. 발퀴레들은 브륀힐데를 보탄의 눈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원을 지어 둘러싸고, 보탄이 작열하는 빛과 함께 도착한다.
2장
브륀힐데는 자신을 향한 보탄의 책망에 답하여 자매들이 만들어준 보호벽을 벗어나 아버지의 판결과 대면한다. 보탄의 처벌은 필시 불명에스럽고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것이다. 브륀힐데는 앞으로 발할 성에서 추방되고 신들의 대열에서 밀려나 바로 이 장소에서 아무런 보호도 없이 마법의 잠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오직 이곳을 지나는 첫 번째 남자가 그녀를 깨우기만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공포에 질린 자매들의 항의는 단지 보탄의 분노를 넘어 더 북돋을 뿐이었다. 발퀴레들은 일제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숲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 흩어진다. 검은 구름이 절벽의 가장자리에 묵직하게 걸리고, 야생의 소음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들려온다. 한줄기 선명의 번개의 섬광이 구름을 찢고, 발퀴레들이 말발굽을 울리고 서로를 밀쳐가며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머지않아 이 소동은 잠잠해진다. 폭풍의 구름들은 점차 흩어진다. 다음 장이 진행되는 동안 날씨는 점점 평온해지고 어스름이 깔리며, 황혼과 함께 결말이 찾아온다.
3장
이제 보탄과 그의 발치에 여전히 꿇어 엎드려있는 브륀힐데, 둘만이 남았다......브륀힐데는 보탄의 본래 뜻과 상반되게 내려졌던 명령에의 불복종에 대해 그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은 그의 진심과 자유로운 의지에 따랐던 것이라고 탄원한다. 그녀는 자신의 충성이 지그문트의 사건에서 목격했던 것과 같은 흔들림 없는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의 결정이 진실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고려한 것임을, 또한 보탄이 마음 속으로 지녔던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행했던 것임을 주장한다. 처벌하고자 했던 의지와는 반대로 보탄은 브륀힐데의 '자유로운 행동'을 취하고자 하는 용기에 감명을 받았고, 어떠한 전략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랑에 의해 그가 가장 총애했던 딸의 마지막 간청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녀가 잠자는 동안 화염의 벽으로 바위를 둘러싸 그녀를 보호하도록 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억제되지 않는 영웅' 즉 "신인 나보다도 더 자유로운 인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다가올 수 없도록 해주리라는 것이다. 기쁨과 감동에 넘친 브륀힐데는 보탄의 가슴에 뛰어들어 안기며, 보탄은 딸과 긴 포옹을 한다. 여전히 포옹한 채로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엄숙한 환희의 빛을 띤 보탄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보탄은 딸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을 선언하며, 키스를 통해 그녀의 신격을 거두고 봉인을 한다. 그는 그녀의 두 눈 위에 긴 키스를 한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그의 팔 안으로 다시 쓰러지고, 천천히 의식을 잃어간다. 그는 온화한 태도로 그녀를 이끌어 앞으로 그녀가 잠들 이끼 덮인 낮은 바위 위로 데리고 가며, 바위 위로는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치고 있다...... 그런 후 그는 엄중한 결의의 빛을 띤 채 큰 걸음으로 무대 중앙으로 나가며, 그의 창으로 거대한 바위의 반대편을 가리킨다. 그는 화염의 띠로 바위를 둘러싸기 위하여 불의 신인 로게를 소환한다. 그는 창을 들어 바위를 세 번 두드린다...... 바위에서 화염이 분출하고, 이것이 번져 작열하는 불의 기세를 이루며 점점 더 밝아진다...... 보탄은 창을 들어 이 불바다의 방향을 지휘하는 듯한 몸짓을 취하고, 바위의 가장자리를 따라 불길이 솟아올라야 할 지점들을 가리킨다. 이제 로게의 불과 보탄의 창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그 누구라도 잠든 브륀힐데의 안전을 침범할 수 없게 되었다. 보탄은 그의 약속이 확립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창을 내뻗는다. 그런 후 그는 비통함에 잠겨 브륀힐데를 돌아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나가고, 불꽃 사이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시선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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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은진 글>
발퀴레
리하르트 바그너
〈발퀴레〉는 바그너의 연작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 중 두 번째 음악극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는 전야제 이후 두 번째 날에 연주된다. 바그너는 〈발퀴레〉의 대본작업을 첫 번째 음악극인 〈라인의 황금〉과 동시에 진행하여, 취리히에서 여름을 보내던 1852년에 대본을 완성했다. 음악 작업 역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작곡에 전념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긴 했지만, 바그너의 놀라운 집중력 덕분에 1856년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었다. 이 작품 역시 〈라인의 황금〉과 마찬가지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의 요청에 따라, 전곡 초연보다 6년 이른 1870년에 뮌헨 궁정극장에서 단독으로 초연되었다.
신들의 욕망에 휘말린 인간들의 운명
〈라인의 황금〉에서 절대반지를 거인족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보탄은, 반지의 마력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반지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한다. 신들의 왕인 보탄은 거인족과의 계약을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기에 직접 반지를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들의 의무에 속하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 여인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기에 이른다. 이 쌍둥이 남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만나게 되는 접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신과 인간은 바로 가장 원초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인 ‘사랑’을 매개로 만나게 된다. 사랑은 〈발퀴레〉를 관통하는 중심주제이다.
욕망과 의무의 충돌
〈발퀴레〉의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것은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이다. 이 갈등의 원인제공자인 보탄은 반지에 대한 욕망과 계약의 수호라는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아버지로서 아들 지크문트와 딸 브륀힐데에 대한 사랑과 신으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브륀힐데 역시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를 지켜주고 싶은 욕망과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의무와 욕망 사이의 갈등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일 것이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불륜과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랑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에 직면하여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적 제약을 모두 무시하고 사랑의 욕망에 충실하려 한다. 의무를 저버리고 욕망을 택한 브륀힐데,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의무를 선택한 보탄은 무사히 살아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고독하고 절망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사실상 아들과 딸을 모두 잃은 보탄은 신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 인물이며,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을 갈구했던 바그너의 사고가 보탄에게 집약되어 나타난다.
의무로 인해 유린당하는 여성
의무와 사랑 사이의 갈등은 또한 지클린데와 브륀힐데라는 두 여성을 통해 체현된다. 남성에게 강제로 유린당하는 여성상에서도 드러난다. 지클린데는 지크문트에게 자신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훈딩과 강제로 결혼한 자신의 생활이 굴욕과 타락의 상태라고 토로한다. 결혼이라는 의무 속에서 유린당하던 지클린데는 지크문트와의 자유로운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굴욕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브륀힐데는 보탄의 명을 거역한 죄로 바위 위에서 잠에 빠지는 형벌을 받는다. 이 형벌의 요점은 브륀힐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녀를 처음 발견하는 남자에게 그녀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결국 브륀힐데는 3부 〈지크프리트〉에서 보탄의 손자인 지크프리트에게 발견되고, 근친상간의 금기를 무시하고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지클린데와 브륀힐데는 결국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지만, 두 사람이 예속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힘이 사랑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사회적 제도에 의해 인간 본연의 감정인 사랑이 억압되는 상황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바그너의 사고가 이 두 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총체예술의 이상과 극적 긴장감의 완벽한 조화
〈발퀴레〉는 장대한 서사의 《니벨룽의 반지》 중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매력적인 음악을 담고 있다. 라이트모티브와 무한선율 등의 음악적 장치는 음악극이라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하고는 있지만, 기존의 오페라에 비해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퀴레〉는 인상적인 라이트모티브와 강렬한 오케스트라의 음향으로 극적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다.
폭풍우와 전투 장면의 격렬한 음악과 사랑과 이별을 그리는 서정적인 음악이 교차하면서, 음악극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음악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연출함으로써 청중이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게 한다. 바그너 스스로도 자신이 작곡한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칭할 만큼, 〈발퀴레〉는 음악적·극적으로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보탄은 거인 파프너에게 빼앗긴 반지를 되찾을 영웅을 낳기 위해 벨제라는 이름으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 여성과의 사이에서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라는 쌍둥이 남매를 낳는다. 그러나 이들 남매는 어린 나이에 생이별하여, 성장한 지금까지 서로의 행방을 모른다. 〈발퀴레〉의 이야기는 이들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3막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와 주요 음악
남매의 운명적 재회(1막)
태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부상당한 지크문트가 전사 훈딩의 집으로 도망친다. 훈딩과 강제로 결혼하여 불행한 나날을 보내던 지클린데는 지크문트를 맞아 정성껏 간호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훈딩이 돌아와 지크문트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자신이 복수하려 했던 적임을 알고 날이 밝으면 결투를 하자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지클린데는 훈딩의 술에 수면제를 넣어 잠재우고, 지크문트에게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크문트는 지클린데의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이 어릴 적 헤어진 쌍둥이 남매라는 사실과, 자신의 아버지가 약속한 마법의 검이 훈딩의 집 앞 물푸레나무에 꽂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는 재회의 기쁨과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는 환희의 2중창을 부른다. 지크문트는 마법의 검을 나무에서 뽑아 ‘노퉁’이라고 이름짓고 지클린데와 함께 도망친다. 여기서 관현악은 유명한 ‘칼의 모티브’를 연주한다.
2막
결혼의 여신 프리카는, 보탄이 인간 여인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낳은 데다, 이들 남매가 불륜과 근친상간을 저질렀음에도 지크문트에게 마법의 검을 준 사실에 격분한다. 더욱이 지클린데의 남편 훈딩이 프리카에게 복수를 요청했기 때문에 그녀는 이 두 사람을 벌해야만 하는 입장이다.
보탄은 에르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인 발퀴레 중 가장 아끼는 브륀힐데에게 고민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권력을 갈망해 반지를 라인의 처녀들에게 돌려주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할 신들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이 사건과 무관한 순수한 영웅으로서 지크문트를 살리고자 했으나, 결국 그는 브륀힐데에게 지크문트를 죽이라고 명한다.
그러나 브륀힐데는 지클린데와 지크문트의 단호한 사랑에 감동하여 그들을 지켜주기로 마음먹고, 훈딩과의 결전을 벌이는 지크문트를 도와준다. 그러나 보탄이 등장하여 마법의 검 노퉁을 파괴하고 훈딩을 승리로 이끈다. 브륀힐데는 죽은 지크문트 대신 지클린데를 데리고 달아나고, 비탄에 젖은 보탄은 아들을 찌른 창으로 훈딩 역시 찔러 죽인다.
3막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주검을 발할 성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담당하는 발퀴레들이 ‘발퀴레의 기행’을 노래하는 동안 브륀힐데가 지클린데와 함께 등장한다. 브륀힐데는 보탄의 추격으로부터 지클린데를 숨겨줄 것을 간청하지만 발퀴레들은 아버지 보탄이 두려워서 선뜻 나서지 못한다. 지크문트의 죽음에 상심하여 죽음을 택하려는 지클린데에게, 브륀힐데는 뱃속에 지크문트의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려주면서 아이의 이름을 지크프리트라고 지으라고 알려준다. 웅대한 ‘지크프리트의 모티브’가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동안 지클린데는 브륀힐데가 알려준 대로 보탄이 접근할 수 없는 파프너의 동굴을 향해 떠난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브륀힐데에게 격노한 보탄이 등장하여, 브륀힐데를 신들의 세계에서 추방하여 바위산에 잠들게 하고 그녀를 맨 처음 발견한 남자가 마음대로 그녀를 처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브륀힐데는 자신이 보탄의 속마음을 읽고 실행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진정한 영웅에게 발견될 수 있도록 자신의 둘레를 불로 둘러싸 발퀴레로서의 위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브륀힐데의 말에 감동한 보탄은 그녀의 청을 받아들이고 비통한 이별의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잠들게 한다. 그리고 불의 신 로게를 불러 그녀의 주위를 불꽃으로 에워싸게 한다. ‘불꽃의 모티브’와 함께 ‘지크프리트의 모티브’가 제시되면서 영웅의 도래를 암시하며 막이 내린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의 2중창, ‘겨울 폭풍은 사라지고(Winterstürme wichen dem Wonnemond)’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지크문트와 지클린데가 환희에 넘쳐 부르는 2중창으로, 그동안 겪은 어려움들을 녹여낼 듯한 서정적인 선율을 부른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가 서로 선율을 주고받는 가운데 현악성부와 목관성부가 감미로운 반주를 제시한다. 사랑의 감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지크문트는 나무에 꽂힌 마법의 칼을 뽑아들고 ‘노퉁’이라고 이름 짓는다. 지클린데가 두 사람이 쌍둥이 남매임을 알리자 지크문트는 감격하여 ‘신부이자 누이’라고 외치면서 그녀를 끌어안는다. 관현악이 ‘칼의 모티브’를 힘차게 연주한 뒤 막이 내린다.
2막 전주곡
2막에 앞서 ‘발퀴레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전주곡이 연주된다. 금관의 힘찬 아르페지오 팡파르와 힘찬 타악기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발퀴레의 모티브’가 제시된다.
‘발퀴레의 기행(Walkuerenritt)’
현악성부와 금관성부가 ‘발퀴레의 모티브’를 연주하면서 발퀴레의 용맹함을 영웅적으로 묘사한다. 펼침 화음과 옥타브 도약으로 진행하는 ‘호요토! 하야하!’라는 발퀴레들의 외침과 ‘발퀴레 모티브’가 함께 제시되면서 전쟁의 여신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어서 금관의 ‘발퀴레 모티브’를 중심으로 발퀴레들의 반음계로 하행하는 웃음소리가 제시되고, 이윽고 브륀힐데가 지클린데를 데리고 등장한다. ‘발퀴레의 기행’은 1979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에 삽입되어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보탄의 이별노래, ‘잘 있거라, 대담하고 뛰어난 딸아!(Leb wohl, du kuehnes, herrliches Kind!)’
사랑하는 딸에게 형벌을 내리는 보탄의 착잡한 심정을 토로하는 노래로, 비통한 선율을 이어가면서 딸에게 작별을 고한다. 장엄한 오케스트라 서주에 이어 보탄이 가장 사랑했던 딸 브륀힐데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느리고 장중한 선율로 애도한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은 점차 고조되어 보탄의 선율을 압도한다. 이윽고 보탄은 불의 신 로게를 불러 잠든 브륀힐데 주위에 불의 장벽을 쌓게 한다.
‘마법의 불의 음악(Feuerzaubermusik)’
보탄이 로게를 불러 브륀힐데를 불꽃으로 에워싸게 하는 장면으로, ‘불꽃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음악이 진행된다. 금관성부가 보탄의 굳은 결심을 표현하고, 이윽고 신비로우면서도 찬란한 E장조의 ‘불꽃의 모티브’가 환상적인 장면을 그려낸다. 반음계로 하행하는 선율에 하프와 목관이 가세하여 마법의 세계를 그리는 동안, 금관이 영웅적인 ‘지크프리트의 모티브’를 제시하면서 다가올 영웅의 도래를 암시한다. 영롱한 ‘불꽃의 모티브’가 반복되면서 막이 내린다.
첫댓글 <불멸의 오페라 2 / 박종호> ★★★
게리 레이크스(지그문트)와 제시 노먼(지글린데) 두 사람의 너무 큰 체격이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해서 들어보면 둘 다 상당한 수준의 가창으로 무척 안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쿠르트 몰(훈딩)에게도 해당된다. 반면 보다 균형 잡힌 체격의 제임스 모리스(보탄)와 힐데가르트 베렌스(브륀힐데)의 장면에서는 도리어 눈이 현혹될 수 있는데, 베렌스는 가끔 무리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모리스는 당당하고 안정감 넘치는 발성과 음색으로 가장 확실한 중량감을 지킨다. 마지막 <마법불꽃 장면>의 효과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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