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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예식 앞에 진행되는 조사심판의 정의와 성경적 정당성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을는지 모르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인간의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으며, 이 의는 하나님의 은사(恩賜: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모든 은혜)이다. 이 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환영받을 손님으로서 나타날 때 입어야 할 예복이다.
지체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에, 그대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며,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1SM 331.1) 그리스도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렘23:6)시며, 믿음을 통하여 각자는 “여호와는 나의 의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이 하나님의 은사를 굳게 붙잡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우리 입술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의 계획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이 죄의 저주 밑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타락하고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자비의 조건들을 제시하셨으며, 그분의 은혜의 가치와 의미를 나타내 보이셨다.
은혜란, 공로가 없이 받는 호의(好意:죄인의 공로 없는 거룩한 사랑의 뜻)이다. 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천사들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할지라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다만 우리들의 범죄 한 상태만이 자비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의 역사하심을 요구하게 된다.
우리 구세주께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찾아 나서시고 양 우리로 다시 데려오신 것은, 은혜로운 행위였다.(1SM 331.2)그대들의 영혼 속에, 어떤 부족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대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은가?
만약 그러한 느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필요성을 느끼게 하셨다는 증거이며,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그대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분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대들을 위하여, 행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시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대들이 주님의 자비를 갈급하고, 주님의 권고를 바라며 주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외에, 아무런 까다로운 조건을 명세(明細:자세하게 요구)하지 않으셨다.
“구하라!” 구하는 태도는 그대들이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만약 그대들이 믿음으로 구한다면 구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은 어김이 없는 약속이다.
그대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아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자비와 동정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논증(論證:근거의 증거와 당위성)이 된다.
그대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조건은, 그대들이 거룩하게 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대들이 모든 죄에서, 정결함을 받고 모든 악에서 순결함을 입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더 기다릴 것인가? 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가?(1SM 332.1) “오 주여, 주님께 이 몸을 바치나이다. 이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이옵니다.”(1SM 332.2)
만약 사단이 와서 그대들과 하나님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그대들의 죄를 비난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를 불신하고, 의심하도록 유혹한다면 그대들은 이렇게 말하라.
“나는 나의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시다. 비록 나의 죄들이 많지마는 나의 거룩한 대치물이시며,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께 이 모든 죄들이 지워졌다.”(1SM 332.3)
“내손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다만 나는 십자가에 매달릴 뿐이옵니다.”(1SM 332.4)
인간은 아무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이나, 품성 가운데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천거(薦擧:내세워 추천)할 수 있거나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오직 예수님께서만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시며 우리들의 대언자이시다. 오직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신 바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생명길 구주]를 발견할 수 있다.
중보자이신 주님 안에 사유하심과 화평과 의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의 공로에 의해서 죄의 상처를 입은, 영혼이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향기이시며 그대들의 탄원을, 하늘 아버지께서 받으시게 하는 것은 거룩한 분향이다.
그 때에 그대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1SM 332.5) “단 한 번의 탄원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나왔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피가 나를 위하여 흘려진바 되었으니, 그리고 나를 그분께로 오라고 부르시므로,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나는 왔나이다.”(1SM 333.1)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일은, 엄격한 정신적 노력이나 번민[고민]이 요구[필요조건]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밝히신, 구원의 조건들을 수락(受諾:부르심에 응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축복은 모든 자[죄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아무나]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보내신 초청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聽從:말씀을 믿고 순응)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는 말씀이다.(1SM 333.2)
성경에는 한 군데도 취하게 하는, 술을 마셔도 된다고 승인한 곳이 없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는, 순수한 포도즙이었다. 그것은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65:8)고 한 새 포도즙이었다.(YHH 151.2)
구약성경에서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잠20:1)고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친히 그런 음료를 만들지 않으셨다. 사단은 이성을 흐리게 하고 영적 지각을 마비시키는, 방종에 빠지도록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저하된 본성을 제어하도록 가르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에게 유혹 거리가 될 만한 것을, 결코 제공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전 생애는, 극기의 모본이 되었다.
[시험의]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식음을 전폐]하심으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가장 혹심한 고통을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것은, 곧 식욕의 힘을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침례요한’에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지시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와 비슷한 절제생활을 하라고. 분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훈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혼인 잔치에 모인 손님들을 위하여, 만드신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은, 건강에 좋고 원기를 새롭게 하는 음료였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이, 첫 성찬식[성만찬]에서 사용한 포도즙이었다. 이것이 성찬식에 구주의 피의 상징으로, 항상 사용되어야 할 포도즙이다.
이 거룩한 성례전(聖禮奠:침례와 성만찬의 기념한 예배의식.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대한 감사와 은혜표현)은 심령을 새롭게 하고, 생명을 주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죄악을 조장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여기에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YHH 151.3)
부절제는, 흔히 가정에서 시작된다. 영양분은 많으나 건강에 좋지 못한 식물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소화기관을 약하게 하여서 한층 더 자극성을 가진 음식을 요구하게 만든다.
이리하여 식욕은 계속적으로 더욱 자극이 강한 것을, 갈망하도록 길들여진다. 자극성 식물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제재하기가 더욱 곤란해진다.
[인체의 소화기관]조직이 약간의 독소로 채워지고 쇠약하여지면 질수록, 자극성 식물의 욕구는 더욱 커진다. 그릇된 방향으로 디딘 한 걸음은, 둘째 걸음의 길을 예비[준비하여 독촉]한다.
자기들의 식탁에 어떤 종류의 포도주나 술을 올려놓는 죄책감을, 지니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독주를 갈망(渴望:간절히 먹기 원)하게 하는, 그러한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아 시험[유혹]을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먹고 마시는 데 대한 그릇된 습관은, 건강을 파괴하고 음주의 길을 예비한다.(YHH 152.2) 사회를 구성하고 꼴 지어 나갈 청년들에게, 절제에 대한 바른 원칙을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곧 금주운동에 대한 필요가 거의 없어지게 될 것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가정에서, 부절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유아기부터 원칙을 따르도록 가르침으로, 그들은 성공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YHH 152.3)
자녀들이 바른 습관과 순수한 식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것이 어머니들의 과업이다. 자녀들의 식성을 길들여서, 자극성들을 싫어하도록 가르치라.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죄악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갖도록 그대의 자녀들을 양육하라.
그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흔들리거나, 세찬 나쁜 감화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감화를 끼치도록 가르치라.(YHH 155.1)
부절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으나, 많은 노력이 올바른 방향[건강개혁의 과일과 견과류, 곡• 채식]으로 지향(指向:선지자의 권유에 부합)되지 못한다. 절제개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비 건강적인 식품, 양념, 차, 커피를 사용함으로 생기는, 해로움에 대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절제운동가들의 성공을 기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투쟁하고 있는 해로움의 원인을 보다 깊이, 통찰하고 개혁에 있어서 언행이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YHH 155.2)
지력과 도덕심의 올바른 균형이, 육체의 건강과 큰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육체의 체질을 약하게 하고 저하[저질스럽게 하락]시키는. 모든 마취제와 비정상적인 자극성 식물은 지적 및 도덕적 상태를, 저하시키는 경향[기우려짐]이 있다. 부절제는, 세상의 도덕적 타락의 기초를 놓는다.
왜곡된 식욕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유혹을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다.(YHH 155.3) 절제 개혁자들은 사람들을, 이 방면으로 교육시킬 의무가 있다. 쇠잔한 기력을 자극하여 비정상적인 발작적 행동을 일으키는, 자극성 식물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건강과 품성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라.(YHH 155.3)
1844 년 여름에 선포된,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기별은,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즉시로 오실 것으로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지정된 시기에는 백성들이 기대했던 대로, 신랑이 이 세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혼인예식을 위하여, 하늘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로 곧, 그분의 나라를 받으시기 위하여 나아가시었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백성들은, 직접 그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살고 있는 반면에, 그 혼인은 하늘에서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 (눅12:36)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때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GC 427.1) 비유에 의하면 혼인잔치에 들어간 사람들은 등뿐만 아니라,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 자들이었다. 성경에서 진리의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또한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캄캄한 시련의 괴로운 밤에도 참고 기다린 사람들은, 더욱 광명한 빛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였고, 그들은 하늘 성소에 관한 진리와 구주의 봉사의 변동을 깨닫고, 믿음으로 하늘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그분을 따라갔다.
또한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같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중보의 일을 필하고 그의 나라를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실 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자들로 표상되어 있다.(GC 427.2)
마태복음 22장의 비유에도, 결혼에 대한 동일한 상징이 소개되었는데, 거기서도 ‘조사심판’이 혼인예식보다 먼저 진행될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혼인예식이 있기 전에 왕이 먼저 와서, 모든 사람이 다 예복 곧 어린양의 피로 씻어, 깨끗하게 된 흠 없는 품성의 옷을 입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손님들을 살펴보게 된다.(마22:11;계7:14 참조).
부족한 것이 발견되는 자는 밖으로 내어 쫓김을 당하지마는, 검사한 결과 예복을 입은 것이 인정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고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 그분의 보좌에 앉을 자격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품성을 검사하는 일, 곧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는지, 결정하는 것이 곧 ‘조사 심판’이요, ‘하늘성소’에서 하는 ‘마지막 사업’이다.(GC 428.1)
이 장을 준비하면서 나는 내 직장 ‘퍼시픽 프레스’ 출판사의 친구들에게 간단한 설문을 돌렸다. 내 질문은 단순하였다. 재림교회의 ‘조사심판’ 가르침이 자기의 삶에,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내가 모은 대답들 중, 몇 개를 소개한다.(434.1)
• “선과 악을 구별하는 심판이 없는 종교라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 “‘조사심판’은 공기와 같다. 항상 거기 있으며, 나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 “조금 겁이 난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면을 보고 계시니까.”
• “나는 사람들이, 그것을 놓고 논쟁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왜 그렇게 야단일까?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갖는 관계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조사심판’이 무엇이냐? 들어본 적이 없다.”(434.2)
이 간단한 ‘설문조사’는 분명 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겨우 여섯 개의 응답만 보아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조사심판’의 교리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너무 놀랄 것 없다. 우선 정통 기독교에서 널리 수용되는’ 교리 하나를 들어서 그것을 살펴보자.
‘삼위일체’의 교리를 받아들이므로, 그들이 얻는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설문을 돌렸을 때에, 어떤 대답들이 나올까? 이 교리는, 심오한 의미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내 질문에 대답한 몇 사람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마치 공기와 같다. 교리로는 중요하다. 그런데 왜 이리 야단이냐? 우리는 그것을,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434.3)
분명히 우리는 날마다 하루 종일, ‘삼위일체’와 ‘조사심판’과 또 다른 26개의, ‘기본교리’들을 생각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선 말해두고 싶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이런 교리들은. 우리의 머리 뒤편에 의식 밖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 때에, 어떤 느낌을 갖는가? 물론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한 일 때문에, 나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 문제는, 심판이 언제 있느냐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심판을 받은 느낌일 것이다.
결국 예수 자신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할 중 하나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죄 있다.”고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요16:8, NTV).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피하도록 도와준다.
심판에 대한 이런 느낌들은, 우리가 복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런 느낌을 품는다면, 전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그런 느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더 낫게 해주시는, 방법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435.1)
내 요지는 ‘조사심판’ 교리는, 우리의 매일의 영적태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조사심판 교리는 우리의 삶을 위하여, 아무런 영적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에는 심오한 의미들이 있다!(435.2) 하나님께서 언젠가 ‘조사심판’을, 시행하시리라는 개념은 매우 성경적이다.
‘전도서’ 12:14에 ‘솔로몬’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사람이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행위, 언사와 심지어 생각(비밀스러운 일들)까지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때에 검사를 받을 것이다. 그것이 ‘조사심판’이다.(26.3)
‘하늘성소’의 속죄일과 심판 간의 상호관계가, ‘퍼즐’의 마지막 조각, 즉 대 실망을 전후하여 ‘밀러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네 가지 신학적 개념들 중의 마지막 개념이다.
그 네 개념이 합쳐져서 하나의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내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사심판’이다. 이처럼 1857년까지 ‘안식일준수 재림신자’들은 그와 같은 네 가지의 신학적 개념들로부터‘ 재림 전 ’조사심판‘에 관한 그들의 기본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다.(76.1)
‘조사심판’의 교리는, 우리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취급하시는 합리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438.1) ‘조사심판’의 교리는,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임을 신뢰할 수 있게 해 준다.(438.5) ‘조사심판’의 교리는, 우리의 삶이 평가를 받을 것이니 우리가 하는 일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440.2)
‘조사심판’교리는, 심판 때에 하나님은 우리 편에 계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스러움을 덮으시려고, 그리스도의 의를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441.4)
하나님의 백성은 적대적[원수와 대적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 하늘에서 첫 반역을 조장한 자[당시 ‘루스벨’천사. 사단마귀]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충성하는 소수의 무리를,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없어 화가 났다.
다니엘 7장 25절은 그의 반역이 이 땅에까지 미친 것을 성도를 공격하는 작은 뿔로 묘사한다. 계시록 12장 17절은 용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진노하였고, 그들과 싸울 태세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시록’ 13장 7절은 ‘다니엘’의 ‘작은 뿔’을 “성도와 더불어 싸우고 이길” 권세를 받은 짐승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대 쟁투’의 주제다. 본서의 앞 장들에서 논의한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조사심판’이 작은 뿔에 불리하게,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판결을 내릴 것을 확인한다.(단7:22).
‘계시록’은, 그러한 호의적 심판의 소리를 울린다. 이렇게 말한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 하신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 우시 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 이다.”(계16:5,6).(442.1)
‘조사심판’이 끝나면서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다루신 그분의 모든 결정에 있어서, 정당성을 옹호 받으실 것이다. 예수를 신뢰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승리한 자들은, 모두 그들과 함께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천사들은 동의할 것이다.
한 편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은 우주로부터, 영원히 추방을 당할 것이다.(425.2) 이런 것을 말하는 단어가 ‘신정론’(theoducy)이다. 악의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재림교회의 ’조사심판‘의 교리는 이러한 ’신정론(神正論)‘의 정의(定義:신의 선한섭리)를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426.1)
죄의 도말[지워 소멸] 문제를 생각할 때, ‘조사심판’을 베푸는 하나님의 광범위한 목적은‘ ‘신정론’이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단순히 그분의 백성의 죄를 씻어내는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 완전히 죄를,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엘렌 화잇‘은, 이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였다.〈각 시대의 대 쟁투〉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봉사를 마치실 때에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하늘성소에서 도말해 버리실 때 그분께서는, 그 죄를 최후의 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단 위에 두실 것이다.
또한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무인지경으로 쫓겨나서, 다시 ‘이스라엘’ 회중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처럼 사탄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앞에서 영원히 쫓겨나고 죄와 죄인들이, 최후에 멸망할 때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사탄자신의 존재가 불 못에서 사라질 때에, 죄의 궁극적인 도말이 이루어질 것이다.(275.1) ‘조사심판’은 하늘의 지성이 있는 존재들에게, 죽은 자들 중에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누가 그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또한 산 자들 중에서 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켜 그의 영원한 나라로, 옮겨질 준비가 되어있는지 [동일한 하늘의 지성 있는 존재들에게]나타내 보인다.
이 심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59.2) 원형에 있어서 죄가 ‘성소’로 옮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죄가 역사 대대로, 하늘의 ‘기록책’에 쓰여 있어서 조사심판 때에, 검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재림교회는 늘 말해왔다.(230.3)
‘희생 제물’을 통하여 ‘성소’로 옮겨진 죄만이,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주목[집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본 것처럼, 반역의 죄 역시 성소로 옮겨졌으며, 이러한 ‘페샤’[불법적 죄악]의 죄들도 속죄일에 ‘성소’에서 제거되어야 하였으나, 그로써 죄인이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모든 죄는, 하늘의 ’기록책‘에 기록되며 그 모두가, 심판 때 검토를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