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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사랑한 詩人,윤동주 - 덕향문학 편집국 - 윤동주 시인 尹東柱 | Yun Dong-ju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 모습. 출생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펑톈성 용정 명동촌[2] (現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시) 사망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후쿠오카 형무소 본관 파평 윤씨 본적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동 76[3] 부모 아버지 윤영석, 어머니 김용 형제자매 남동생 윤일주, 윤광주, 윤범환 여동생 윤혜원 학력 숭실학당 (중퇴)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 / 졸업)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 수료) 도시샤대학 문학부[4] (영문학과 / 제적) 종교 개신교 (장로회) 유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정음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에 나온 윤동주의 어록.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선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20세기 중반 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으로, 조선 독립의 문학적 상징이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삶의 고뇌에 대한 시로 민족의 길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윤동주를 주로 시로 투쟁한 인물이라고 배우지만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윤동주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부끄러워하던 소극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저항의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온다.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2. 상세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이다. 동생인 윤일주[7]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다. 3. 생애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지신진)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출생 당시, 위의 손윗 누이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에 태어난 아이라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고 한다. 명동촌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다.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으나 그의 시에 등장하는 만주는, 머나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이거나 혹은 “돈 벌러 가”는 곳이었다.(논문: 만주 이야기와 윤동주의 기억, 김신정)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당시 위당 정인보(역사학자, 건국훈장 독립장), 외솔 최현배(국문학자, 건국훈장 독립장) 같은 한학자(韓學者) 이외에도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처음 주장한 백남운(경제학자), 유물론적 경제학 이론을 도입한 이순탁(경제학자), 노동규(경제학자)등 많은 학자들이 일제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뿐 아니라 관념과 학술적으로도 맞서 싸웠다.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이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합격자 명단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이 윤동주와 송몽규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같은 기독교 재단의 명문인 릿쿄대학을 다니다 갑자기 도시샤대로 옮긴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되었는데 그당시 도쿄의 대학들은 교련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윤동주는 교련수업을 거부하다 고초를 당했다고 알려져있고 그것에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윤동주와 중학동기였던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에 따르면 도쿄의 대학 재학생은 학도병에 참가했어야 했었고 그 결과 윤동주는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해야했다고 한다. 실제 김형석 교수도 윤동주와 같이 교토로 옮겨서 공부를 했었어야 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우(親友) 정병욱(1922-1982)과 함께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제국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제국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 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제3고교 출신의 선배. 고희욱은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가 생존한 고희욱을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약 1년 7개월동안 수감생활을 견뎌오던 윤동주는 건강악화로 인해 1945년 2월 16일, 29세의 나이에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뇌졸중으로 요절하였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이 있다. 당시 간수가 말하기를,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는데, 이 소리가 마치 대한독립만세라고 하는 듯 들렸다고 한다. 3.1. 사망과 의혹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형무소에 들릴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 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였고, 이후 같은 주사를 맞은 송몽규도 얼마못가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는 1980년 <현대문학>지 5월호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1988년 KBS1 3.1절 특집 <민족시인 윤동주>에선 제작진들이 일본에 가서 시모야마 경찰서와 후쿠오카 형무소 등 관계기관들과 관계자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당시 관련 기관들과 에지마 다카시 전 교토지검 검사, 전직 형무소 간수 등 생존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기록이 없다든지,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답변을 회피했으며 검거자였던 고오로기 형사는 1982년에 사망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보고 싶은 사람은 727회를 보면된다. 방영날짜는 2009년 8월 15일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추정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윤인완-양경일의 연재만화 <아일랜드>의 1부 마지막 에피소드 '또다른 고향'에서 이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설이 언급된다. 저주받은 인골들로 일본과 제주도에서 일본인들을 살해한 인물에 의해서 밝혀지는데, 당시 연재시기가 2000년임을 생각한다면 제일 처음 윤동주의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을 대중매체에서 언급한 셈. 4. 사조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 자화상, 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외적으로는 윤동주의 동기인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앞장서고 편집 교정 등 출판 실무는 국문학자인 정병욱이 맡아 하였다. 여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하여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윤동주의 도시샤대학 동창이자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이 1948년 12월 고향 용정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본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을 3부 만들어 자신이 한 부 갖고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도 증정했는데 정병욱이 증정받아 보존한 유고만 남고 나머지는 여러 사정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5. 성격과 일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개신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개신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개신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개신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개신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개신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개신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개신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에서 유학을 했었는데,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29]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 윤동주의 실물을 본 몇 안되는 이, 즉 친구인 문익환이나 육촌 동생인 윤형주의 증언으로는 "확실히 그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도 잘생겼다."고 인정한다. 윤형주가 관련된 언급을 한 것은 사실이나, 윤형주는 1947년생인데 윤동주는 1945년에 옥사하였으므로 윤동주의 실물을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일본 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잊지 못할 윤동주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곱상한 외모 때문에 유약한 샌님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운동을 좋아했으며 특히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북간도의 조선인 민족학교에선 체육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체육교육을 장려했는데 그 때 축구가 가장 인기 있었던 과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의 말에 따르면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라고 한 바 있으며 친동생 윤일주도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고 하였다기사 참조 6. 작품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24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서시(序詩)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 후에 김주원 작곡가가 노래로 만들어 팬텀싱어3에서 고영열, 존 노, 김바울, 정민성이 불러 많이 알려졌다.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 현대 국어의 어문 규범에 따르면 '쉽게 쓰인 시' 또는 '쉽게 써진 시'. 참회록 간 황혼이 바다가 되어 봄 팔복 국어 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자화상>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2020 수능에서도 그의 시 <바람이 불어>가 등장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백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세계를 온전히 펼치기 전에 요절해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준다. 6.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김소월의 <가을 아침에>, 필자불명의 <편지>[40] 등 특히 <편지>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편지>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편지>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편지>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7. 중국의 자국민화 역사 왜곡 윤동주의 묘소. '시인 윤동주의 묘'라고 쓰여 있다. 근처 생가 입구 경계석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새겨져 있어 한국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41] 그러다 어느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생가 입구 경계석에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라고 주장하는 조선족 계열 신문 기사.(길림 신문)와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의 기사 참조. 대문 경계석에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조선족'으로 바꾸어 놓은 것과 대표작 '서시'를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을 설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외교부가 이를 시정해달라는 요구하고 있다. 한국일보의 취재에 따르면 중국 바이두는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일본어 위키백과는 윤동주의 국적을 일본으로 왜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7.1. 윤동주의 정체성 고향 집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엔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윤동주 동시집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 중에서 윤동주는 그가 지은 시 〈고향집〉에서 자신의 고향을 따뜻한 남쪽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은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두만강을 건너기 전 남쪽'은 '한반도'를 뜻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윤동주는 자신의 고향을 '조선'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만주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그의 시에 등장하는 만주는, 머나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이거나 혹은 “돈 벌러 가”는 곳이다. - 논문: 만주 이야기와 윤동주의 기억, 김신정 첫째, 그는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이 완전한 고향은 아니었다. 디아스포라로서 공동체의 원래 고향인, 강 건너 남쪽을 기리워 한다. 이주민에 대한 시를 썼으며, 또한 남쪽을 그리워 했다.둘째, 경성에 온 그는 반대로 조국은 아니지만, 자신이 태어난 만주 명동촌을 그리워 한다. 여기서는 반대로 두고온 고향을 그리워 한다. 다른 작가의 경우에는 만주에 대해 고토의식(故土意識)이 작용하기도 했으나, 윤동주의 시에는 그것까지 나타나지는 않고 “어머니는 북간도에 계십니다”와 같은 나르시시즘적 모성회귀본능(母性回歸本能)이 나타난다. 셋째, 일본에 온 그는 “남의 나라”와 대비되는 조국과 만주가 혼종된 공동체를 그리워 한다. 그러나 그 공동체로의 복귀는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출생지인 만주에서는 ‘뿌리 뽑힌’(uprooted) 디아스포라로서 두만강 남쪽의 조선반도를 그리워 하고, 경성에 와서는 모성회귀본능으로 어머니가 계신 만주를 그리워 하고, 일본에 가서는 “남의 나라”[43]가 아닌, 만주와 조선반도를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조국을 그리워 하는 심상을 보여준다.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주변부였던 간도에서 당시 제국의 중심지였던 일본으로 향하면서 오히려 그의 고향의식은 구체화된다. 결국 현실 속에서 일본은 중심일지 모르나, 윤동주의 의식 속에서는 보다 확실한 고향과 조국을 깨닫게 하는 헛것[Simulacre]이었던 것이다. -논문: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고향, 김응교 논문: 만주 이야기와 윤동주의 기억(김신정)에 따르면, 그의 시에 등장하는 만주는, 머나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이거나 혹은 “돈 벌러 가”는 곳이다. 또한 논문: 만주, 디아스포라 윤동주의 고향, 김응교에 따르면 그는 만주에 있을 당시에는 만주를 '완전한 고향으로 여기지 않고' 고국 조선을 그리워 하고, 경성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기에는 자신이 태어난 만주 명동촌을 그리워 하거나 북간도에 사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르시시즘적 모성회귀본능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만주는 머나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이거나 혹은 “돈 벌러 가”는 곳이며, 또한 '완전한 고향'이 아니었고, 다만 '북간도' 명동촌은 태어나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그리워 했으며, 일본에 있었을 때에는 일본과 반대되는 추상적인 개념 안에 포함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윤동주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선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을뿐더러 윤동주는 한 번도 중국어로 시를 쓴 적이 없고, 그의 시 ‘별 헤는 밤’ 에서는 중국 이름을 가진 같은 반 친구인 패(佩), 경(鏡), 옥(玉)을 '이국(다른 나라) 소녀'라고 분명히 기술했다. 즉, 윤동주는 '중국'을 자신의 "고향"인 조선과는 '다른 나라'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지은 시와 생존 인물의 증언들을 살펴보더라도 윤동주의 정체성은 '당시 한반도에 위치했던 조선'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주장하는 중국에게는 치명적인 것으로,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삼는다면 중국당국에게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윤동주는 조선을 위해서 노래하고 시를 썼기에, 이는 또한 조선족이 '조선반도(한반도)'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위인을 얻는 셈이다. 즉, 중국당국은 조선족한테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던 윤동주를 그들의 위인으로 만들어준 것. 조선족 보고 '조선반도(한반도)'를 위해서 살라고 재촉하다니, 소수민족독립에 노심초사인 중국당국에게 이런 자승자박이 없다고 할 수 있다. 7.2. 윤동주와 재만 조선인의 디아스포라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조선족>은 <민족(民族)은 조선 민족이며 국적(國籍)은 중화인민공화국> 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 이후부터이며, 윤동주는 1945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출생지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있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중국 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가진 중국 조선족은 아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중국 측에서는 역사속지주의를 내세워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인의 개념이 부재했다고 주장하지만은, 중국 현행 국적법 역시 출생지주의(속지주의)가 아니라 혈통주의(속인주의)임을 생각해 본다면, 본적은 함경도이며 부계와 친척은 모두 대한민국으로 귀국했으므로 한국 국적임이 당연하다. 또한 현대에 일컬는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과 윤동주는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없다. (1분 10초 부터) 윤동주가 북간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국적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일본 검찰이 공개했던 윤동주의 재판 기록과 판결문에도 본적(本籍)은 함경북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윤동주는 일제시대를 살면서 한반도에 위치한 조선을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갔으며, 본인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지칭했다. 또한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에 사망했다. 윤동주의 선조는 조선인으로서 19세기 후반 간도로 이민을 갔다. 당시 간도는 조선의 8도 행정구역 밖이었고 청나라 역시 방치해두고 있던 변방 지역이었다. 간도는 윤동주의 출생 시점에는 중화민국 영토였으나 윤동주는 함경도에 본적을 두었고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한 적 없으며, 1932년 간도 영토 자체는 일제 만주국이 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혈통주의적 관점에서 윤동주는 한국 국적의 위인이나 다름없으며, '조선 독립'을 위해 살았던 저항시인이면서, 동시에 여러 문화적 다양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그는 간도에서 조선인 이민자 3세로 태어났으며, 현재의 인식과 달리 일제시대에는 커다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있었던 용정&평양&서울&도쿄, 교토에서 성장하고 활동했다. 현대의 지도로 보면 4개국을 넘나들며 생활하고 3개 국어를 구사한 사람이다. 윤동주처럼 여러가지 복잡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인물을 영어권에서는 TCK(제 3문화 아이)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에 대해 고향사람들인 연변 조선족들이 애착을 갖는 것이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윤동주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로서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갈구했으며, 그의 모든 가족들도 중국 공산화 이후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인들이 그를 자국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던 그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같은 '한민족'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이런 식으로는 끝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정리하자면, 윤동주 일가는 윤동주의 할아버지가 당시 대한제국 국외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이주하여 국외에서 정착한 가정이므로, 윤동주가 같은 지역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조선족들이 윤동주에게 어느 정도 동질감을 가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당시 북간도로 넘어간 조선인들은 공식적으로 귀화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국경법과 상관없이 그냥 강 건너 농경지를 개척하다가 거주한 것으로, 이후 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전체가 일제 치하였다는것을 생각하면 그는 절대 1949년 이후에 건국된 중국과는 관련이 없고, 현대에 그려진 국경선을 가지고는 그의 국적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은 자신들의 현재 법에서는 혈통주의적 관점을 고수하는 것과는 반대로, 역사나 문화에서는 속지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윤동주를 중국인 조선족의 위인으로 삼으려고 시도 중이다. 이는 조선족 학자가 만들어낸 일사양용(一史兩用)론적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첫째 조선족과 조선은 공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둘째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다. 결론, 조선족은 중국의 일부분이므로, 조선족의 역사인 과거 조선의 모든 역사까지 모두 중국의 역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 이후부터이며, 과거 조선의 역사까지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보는 것은 심각한 억지주장이다. 물론 윤동주의 경우, 한국 건국 전에 태어난 것이기도 하기에 중국 국적이냐 한국 국적이냐, 또는 중국 위인이냐 한국 위인이냐를 나누는 것은,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왔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산 사람을, 중국의 위인으로 삼는다는 것도 웃긴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위인은 중국을 위해서 산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윤동주는 분명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반도에 위치한 조선을 고향으로 여겼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 감옥에서 돌아가셨으니, 그가 조선의 광복으로 탄생된 현재의 한국에 귀속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한국은 중국의 역사 속지주의적 관점과 일사양용론적 논리를 비판하고, 역사와 문화를 혈통주의(속인주의) 관점으로 보기에, 윤동주의 본적 함경북도라는 점과 친척과 대부분의 혈육이 광복 이후 한국 국적을 소유함에 따라 윤동주를 '한국 국적의 위인'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 7.3. 동북공정과 중국 조선족의 연관성 문제 이 문단은 토론을 통해 "토론 관리 방침에서 정하는 순위권 내의 유효한 근거를 통한 입증 없이 윤동주가 조선족 독립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의 기재를 금지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합의된 부분을 토론 없이 수정할 시 제재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기념이나 추모 행태를 두고 한국인들의 비판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뿐이며, 정작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므로 이는 동북공정과는 관련이 없다"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2021년 바이두 백과에서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해놓은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중국 정부는 직접적으로 의견 제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하기관, 언론, 민간인들을 통해서 동북공정 등의 역사, 문화 왜곡을 실행해왔다. 2021년 김치, 한복 공정에서 보듯이 유튜브나 언론단체, 웨이보 여론, 심지어는 중국의 해외대사들까지 참여해서 전방위적 역사 왜곡을 일삼는 중국의 행동을 보면, 위의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해 중국 중앙정부는 관심이 없고, 동북공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로 반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윤동주가 중국인이라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코리안 디아스포라사의 중요한 인물이라서 윤동주를 조선족 역사의 일부로 주장한다"라고 말하지만, 바이두에는 조선족으로 명시되어 있고 중국 언론단체나 웨이보도 "중국" 조선족, 즉 중국인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심지어는 중국 동영상 사이트에서 조선족이 나와서 윤동주는 중국의 위대한 위인이라고 주장하기 까지 하는 등 조선족까지 동원하여 전방위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조선족 개념이 생겨나기도 전에 조선인의 후예로 태어나 한국어로 시를 썼고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체포당해 탄압받다가 후쿠오카 형무소 옥사했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중국인이 아니라 명백한 조선인으로 인식되었고 인정되고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윤동주는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망동을 했다” 1944년 3월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징역 2년형 판결문 내용 中 이점은 윤동주에게 징역을 선고한 일본 법정의 판결문만 봐도 일목요연해진다. 도대체 중국에서 무슨 생각으로 윤동주를 치켜세워주는지 의문일 정도. 윤동주는 제대로 파고들면 오히려 현재 중국에게 있어서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닌 셈이다. 윤동주 생가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국어와 중국어가 병기된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49]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 공동의 시인"으로서 인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한국인들이 '어려운 시기에 흩어져 힘든 세월을 버텨온 같은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만약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억제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 정부는 이러한 입장마저 경계하여 윤동주를 "조선족 위인" 넘어서서 아예 "중국인 위인"으로 공식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최근에 이르러서는 중국 정부의 이러한 영향으로 일반 중국인들의 생각도 점점 변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 네티즌들은 자기 나라 중국의 법체계도 혈통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윤동주 시인은 중국 지린에서 태어나 자란 중국인”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중국 네티즌들의 일방적인 욕설에 대해 서경덕 교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줘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당당하게 더 맞서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이상 정리해 보면, 조선족 문화유산에 대한 중국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중략)...둘째, 중국내 소수민족의 이탈방지를 위함이다. 중국은 조선족의 문화 역시 중국화 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을 모색한다. 동북공정과 같은 방법으로 조선족의 문화를 중국에 귀속함으로써 조선족과 남북한의 유대를 끊음으로써 조선족의 이탈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문화전략인 셈이다. 이천석, 중국 동북변강정책과 문화공정, (국제정치연구 Vol 15. 2012) 결론적으로 말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시켜...(중략)... 동시에 향후 한반도 통일이 중국 동북지구(즉 만주)에 야기할 소수민족 문제(통일한국의 조선족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그로 인한 조선족의 정체성 혼란이나 이탈, 분리독립운동 가능성 등)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여...(후략) 윤휘탁,현대 중국의 변강민족인식과 동북공정,(역사비평, 2003) 조선족들의 입장에서는,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되어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문학가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는 자기 고장 출신으로 역사적 위인으로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시인으로 여겨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한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까지 아우르는 전민족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소수민족을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경계를 야기할 우려가 있으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지역 출신 한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두려워 한다. 일생을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던 윤동주를, 조선족이 자신들의 위인으로 존경하는 것은 중국당국 입장에서는 마냥 편치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내 소수민족 동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조선족들이 한반도와 동질감을 느끼고 민족의식을 갖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중국 당국은 아예 윤동주를 '중국 위인'으로 확정지으려고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조선족에게 윤동주의 삶처럼 '조선 한반도'를 위해 살아야 할 대표적 인물을 하나 만들어주는 셈으로,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들에게 독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8. 대중매체에서 1984년 12월 21일에 KBS1을 통해 방영된 특집드라마 <마돈나여, 광야에서 별을 노래하라>[50] 제2부에서 그를 다뤘는데, 배우 태민영이 윤동주를 연기했다. 2014년에는 EBS <라디오 인물열전>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을 맡은 성우가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윤동주 평전>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을 연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정명 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와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일본 영화 <안녕, 쿠로(2003)>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한다.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 개코, 황광희, 오혁이 윤동주를 주제로 한 노래 "당신의 밤"을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이 12년간의 노력끝에 2017년에 교토 우지시 강변에 윤동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부터 일본, 한국의 900여명의 사람들에게 모금을 받았으며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윤동주기념비건립준비"모임에서 12년간 30번 이상 본청에 요구하였으니 정말로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8월 15일 KBS2에서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 특집회를 방영했다. 노래 뿐 아니라 뮤지컬, 다큐멘터리, 시 낭송, 미니드라마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제 47회 한국방송대상 연예오락TV 부분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사회자로 김영철, 한혜진, 출연 배우로 박혜수, 장동윤이, 출연 가수로는 윤형주, YB, 이적, 스윗소로우, 백지영, 민우혁, 포레스텔라, 다이나믹듀오가 나왔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이하림이 출연했다. #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별 헤는 밤의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가 있다. 9. 기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희열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유희열은 2013년 11월 27일 자 SBS 한밤의 TV연예(後 본격연예 한밤)에 나와 이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했다. 소수 의견이기는 하지만, 윤동주가 정말로 항일 시인이었느냐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친일 문학가였다는 것은 아니고,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윤동주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자 시인이었을 뿐, 딱히 거창하거나 대단한 일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즉, 사상적으로 보면 중립적이었다는 것. 하지만 이는 2010년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에서 바로 반박이 되어 지금은 이런 소수 의견 조차 사라졌다.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에서 윤동주는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라고 하는 등, 그의 글에서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심각하게 의심했던 한때의 흐름은 무지와 오류의 소산이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의 초상은 일제의 취조문서, 판결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2011년 MBC 스페셜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일본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숭실 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또한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윤동주 평전>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문익환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라고 하며,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하였고, 장준하는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장준하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했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이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54]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 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이 말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고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주간신문 《문학신문》에서도 긍정적 논조의 윤동주 평론이 기고된 적이 있다. 일각의 편견과 달리 북한 문학계에서는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 알고 있고 관련 논의도 하고 있다.[55] 또한 북한 문학계는 윤동주에 대해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89년 문익환과 같이 방북한 황석영에게 백인준 당시 조선문학예술총동맹[56] 중앙위원장은 "자신이 윤동주와 같은 하숙에 있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증언은 2013년 KBS 보도에 의해서도 다시금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도 윤동주를 매장하기는커녕 나름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어린이와 청소년 학교교육에서 윤동주와 그의 시를 가르치진 않는다. 문학계 내에서만 논의·소비되고 대중화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일본인들 중에서도 그의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57]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58]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라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 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별 헤는 밤>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가 그 구절.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윤형주는 약 2,000여 곡의 CM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며,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1970년대 청춘문화의 아이콘이었는데, 의외로 윤동주의 작품을 노래로 만들지 않았다.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밝히기로는, 가수 활동 당시 아버지에게 "동주 형님의 시로 노래를 만들어볼까 합니다"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시도 노래다. 작품 자체로 이미 운율이 있는데, 네가 뭔데 그 시에 함부로 손을 대겠다는 것이냐?"고 나무라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당시 "서시"를 노래로 만든 조영남이 그 자리에서 디스를 당했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60]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61]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 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이 12년간의 노력끝에 2017년에 교토 우지시 강변에 윤동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부터 일본, 한국의 900여명의 사람들에게 모금을 받았으며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윤동주기념비건립준비" 모임에서 12년간 30번 이상 본청에 요구하였으니 정말로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윤동주의 작품은 전라남도 광양시와 아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후배 정병욱은 본가가 광양(현 광양시 진월면)에 있었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윤동주의 유고를 광양의 본가에 보관하면서 윤동주의 작품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것. 정병욱 본가는 현대에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국적과 관련하여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분쟁과 토론이 있다. 10. 참고 자료 3.1절 특집 별하나의 삶과 죽음: 민족시인 윤동주 (1988.03.01. KBS1) MBC 스페셜 - 가을, 윤동주 생각 (2011.11.04. MBC) MBC 특집 다큐멘터리 - 잊지 못할 윤동주 (2014.04.19. 여수MBC) 특집 다큐 - 바람, 별, 그리고 윤동주 (2020.12.31. KBS1) 출처 <나무위키> |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별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님을 되돌아 볼 기회를 주셨군요
우리는 별이 말을 한다면 별에 대한 소롯한 감정이 생성되지 않았을 거지요
국장님의 문학사랑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