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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떠떠떠, 떠」중에서(낭독:임호기,문지영)
우리는 일이 끝나면 작동이 멈춘 놀이기구에 앉아 사람이 빠져나간 한적한 유원지를 감상했다. 때로는 목마 위에 앉기도 했고 때로는 범퍼카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녀가 벗어놓은 판다의 얼굴을 껴안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 안쪽 속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박따박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물처럼 얼굴에 닿을 때마다 딱딱한 표정의 단단한 표면이 깎이거나 녹아내렸다. 그녀는 끝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야?’ 같은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녀는 ‘그런가 보네.’ ‘웃긴다’ 같은 말로 유연하게 대화를 다시 이끌어 나갔고 때때로 내 표정과 가벼운 수화를 보고 대화의 화제나 분위기를 바꾸어갔다. 그녀의 말은 놀랍도록 건강한 것이었다. 표정과 어투, 가늘고 긴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물속에서 막 끄집어내 움켜쥔 생선처럼 탄력적이었고 물기를 머금은 야채처럼 싱싱했다. 나는 그녀의 말끝마다 웃었다. 웃고 있다 보면 웅덩이에 고여 어지럽게 부유하던 잡다한 것들이 소리 없이 바닥에 침전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양손을 마주잡아 깍지를 끼고 낮게 한숨을 내쉬며 왼편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왼쪽을 쳐다보면 창문이 있었어. 그리고 열한시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면 네가 앉아있었지. 창문 너머로 파랗게 열린 하늘이나 그 하늘을 가로질러가는 비행기의 느린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너를 봤어. 앉아있을 때는 녹슨 흉상처럼 느껴지다가도 서있을 때는 폭풍 속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무 같았지.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혀 어딘가로 날아갈 것 같은 너를 보고 있으면 난 이상하게도 마음이 저릿해져서 손바닥으로 왼쪽 가슴을 꾹 누르곤 했어. 네가 책을 들고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었어.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손끝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습을. 입속에 갇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너의 혀를 본 것도 같았지. 아니 온몸이 한 조각의 혀처럼 보였어. 흠뻑 젖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거든. 그때 넌 내게 어떤 풍경과도 같았어. 그 풍경 속에 뛰어들어 너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지.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까,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했던 것 같아.
모든 연인들에게는 사랑이 시작되었던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정용준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그때 넌 내게 어떤 풍경과도 같았어.’ 시야에서 모든 것이 다 지워지고 단 한사람만이 남는 순간, 당신에게 사랑이 온 겁니다. 여기 막 사랑을 시작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습니다. 둘은 놀이공원의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사자 가면을 쓴 남자는 심하게 말을 더듬고, 판다 가면을 쓴 여자는 간질을 앓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서로의 곁에 앉아 쉬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바라봐주기 시작합니다.
문학집배원 소설가 정이현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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