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過慾敗家(과욕패가)
過:지나칠 과, 慾:욕심 욕, 敗:패할 패, 家:집 가.
어의: 욕심이 지나치면 집안을 망친다는 뜻이다. 즉 허망한 과욕은 자신을 망치게 하는 것은 물론 가족까지 잃
게 한다. 과욕을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문헌: 한국인의 지혜 고금청담(韓國人의 智慧 古今淸談)
조선 인조(仁祖) 때, 사헌부에 윤후길(尹厚吉)이라는 나졸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옥문을 지키고 있는데 한 죄수가 자기를 풀어주면 평생 먹고살 만한 돈 삼천 냥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생각해 보니 그 돈만 있으면 고된 나졸직을 그만두더라도 평생토록 배부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 죄인과 함께 달아났다.
하지만 이내 잡혀 사헌부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 끝에 범죄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편히 살려던 꿈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고문으로 얻은 상처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가스로 목숨을 유지하여 옥살이를 마치고 나오니 가족들은 물론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욕은 신세를 망치게 되고 끝내는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패가(敗家)의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寡子倍學(과자배학)
寡:홀어미 과, 子:아들 자, 倍:곱 배, 學:배울 학.
어의: 홀어미의 아들은 남보다 갑절이나 더 배우고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즉 편모슬하에서 자란 아들은 아버지 없이 자란 버릇없다는 욕(辱)을 먹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胯知玉龍(과지옥룡)
胯:사타구니 과, 知:알 지, 玉:구슬 옥, 龍:용 룡.
어의: 허리 아래 옥룡(남근)은 알고 있다. 즉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 말이다.
또한 남성의 강한 기개를 나타낸 말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장렬한 기개를 뜻한다.
문헌: 일계집(日溪集).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의 무신 문기방(文紀房.?~1597)은 본관이 남평(南平)이고, 자는 중률(仲律)로,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하더니 자라서도 역시 힘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명회(明會)와 함께 의병을 모아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복남(李福男)을 따라 남원에서 싸웠다. 그때 왜적은 숙성령(宿星嶺)을 넘어 오고, 관군은 순천을 지나 남원에 이르렀는데, 의병들은 무장한 일본군을 보자 겁을 먹고 달아나 겨우 50여 명만 남아 있었다.
왜적의 선봉이 남원성 아래로 바싹 다가오자 그는 명회에게 강한의지로 말했다.
“나는 오늘 이 싸움에서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
그는 활을 당겨 쏘느라고 오른쪽 손가락이 문드러지자 왼손으로 쏘고, 왼쪽 손가락마저 문드러지자 이렇게 시를 읊었다.
평생토록 순국은 나의 뜻이다.
허리 아래 옥룡은 알고 있으리.
허리 아래 옥룡이란 대장부를 상징하는 남근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자 아우 명회가 화답했다.
힘을 다해 싸웠건만 고성이 되었구나.
그 누가 나라의 위태함을 구해 주려나?
형제는 치열한 싸움 중에도 이 글을 적삼 소매에 피로 써 놓고, 육박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하니 충신의 일생이 그렇게 끝났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觀命昇進(관명승진)
觀:볼 관, 命:목숨 명, 昇:오를 승, 進:나아갈 진.
어의: 관명의 승진이라는 말로, 숙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관명의 승진에서 유래했다. 공적인 일을 소신껏 추
진하여 인정받고 성공함으로써 고속 승진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조선 숙종 때 당하관 (정3품) 이관명(이관명. 1661~1733)이 어명으로 영남에 내려가 백성들의 실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수의어사 이관명 알현이오.”
옥좌에 정좌한 숙종은 용안에 희색이 만연하여 그를 맞았다.
“얼마나 객고가 많았는가? 그래, 백성들을 직접 살펴본 소회는 어떠한고?”
“상감마마께서 정사를 바르게 펴신 덕택에 지방 관리들도 모두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통영에 있는 섬 하나기 후궁의 땅으로 되어 있사온데, 그곳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이 너무 많아 원성이 자자하였기로 감히 아뢰옵니다.”
숙종은 후궁의 땅이라는 데 크게 노하였다.
“과인이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주었기로서니 그것을 탓하여 감히 나를 비방하다니……!”
숙종이 주먹으로 앞에 놓여 있는 상을 내리치니 박살이 나고 말았다. 갑자기 궐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관명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뢰었다.
“소신이 예전에 경연에 참여하올 때에는 전하께서 이러지 않으셨사옵니다. 그런데 소신이 외지에 나가 있던 동안에 전하의 성정이 이처럼 과격해지셨으니 이는 전하께 올바르게 간쟁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오니 모든 신하들을 파직시키옵소서.”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숙종은 시립(侍立)하고 있는 승지에게 명하였다.
“승지는 전교를 쓸 준비를 하라.”
신하들은 관명에게 큰 벌이 내려질 것으로 알고 숨을 죽였다.
“전 수의어사 이관명에게 부제학을 제수한다.”
숙종의 분부에 승지는 깜짝 놀라 붓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생각 밖의 일이었다. 주위에 함께 있던 신하들도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왜 그런 교지를 내리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숙종이 다시 명했다.
“승지, 나의 말을 다 썼는가?”
“예!”
“그럼 다시 부제학 이관명에게 홍문제학을 제수한다고 쓰라.”
괴리하게 여기는 것은 승지만이 아니었다. 만조백관이 웅성거렸다. 숙종은 잇달아 명을 내렸다.
“홍문제학 이관명에게 예조참판을 제수한다.”
숙종은 이관명의 관작을 한자리에서 세 번이나 높이어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경의 간언으로 이제 과인의 잘못을 알았소. 하여 경을 예조참판에 제수하는 것이오. 앞으로도 그런 자세로 짐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오.“
이 고사를 두고 후세사람들은 갑자기 고속 승진하는 것을 관명승진이라 했다.
그는 훗날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병산집(屛山集)>이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官物不受(관물불수)
官:관청 관, 物:물건 물, 不:아니 불, 受:받을 수.
어의: 관청의 물건은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 엄격하여 청렴한 경우를 이른다. 공공의
물건을 사사로이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중종 때, 홍순복(洪順福)은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고암(顧庵)으로 청렴하고 지조가 굳은 선비였다.
그의 장조부(丈祖父. 아내의 조부) 김맹유(金孟鍒)가 고을 원님으로 부임하여 오자 인사차 방문하니 장조부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대의 집은 가난하여 무엇인가 재화가 될 만한 것은 하나쯤은 달라고 할 법도 한데 왜 그런 말을 하자 않는가?”
그러자 순복이 단호하게 말했다.
“관가의 물건이라면 저는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이에 장조부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사소한 것일 뿐인데 무에 그리 흥분하는가? 그러지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인사가 끝나고 돌아오려고 일어서자 벌꿀 5홉과 개가죽 반 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못하여 받아왔으나 집에 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받아 온 물건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정중히 말했다.
“개가죽으로 말안장을 만들어 쓰다 보면 닳아 끊어질 걱정을 해야 되고, 달콤한 꿀을 먹고 먼 길을 가다 보면 갈증이 더해 오히려 치료를 해야 할 염려가 있어 아예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순복은 이처럼 매사에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행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官必崇民(관필숭민)
官:벼슬 관, 必:반드시 필, 崇:숭상할 숭, 民:백성 민.
어의: 국가의 녹을 받는 벼슬아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받들어야 한다.
즉 관리들은 국민들에게 친절하게 봉사해
야 한다는 공직자의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문헌: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조선 제4대 세종(世宗) 때의 무신으로 좌의정에까지 올랐던 최윤덕(崔潤德. 1376~1465)이 모친상을 당하여 식솔들을 데리고 창원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중에 어느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서너 명의 수령들이 냇가에 천막을 치고 천렵(川獵)을 하다가 말을 타고 가는 최윤덕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저런 고얀 놈이 있나? 상복을 입은 채로 말을 타고 가다니……. 그리고 이 부근의 시골 놈이 분명한데, 어찌 수령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게야?”
“저런 놈은 잡아다가 호되게 다스려야 해.”
수령들은 하인을 시켜 최윤덕의 종을 잡아오게 하고 캐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느냐?”
“예! 최윤덕이라 하고 지금 창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뭐라구? 좌의정 최윤덕 대감을 말하는 것이냐?”
“예.”
“어허! 이거 난리 났군. 난리가 났어!”
수령들은 금방 사색이 되어 서둘러 천막을 걷고 술자리를 치웠다. 그리고 최윤덕의 숙소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최윤덕은 준엄하게 꾸짖었다.
“백성을 종 보듯 하는 너희들의 마음부터 고치도록 하여라. 목민관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을 떠받드는 자가 되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예.”
수령들은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갔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驕王之末(교왕지말)
驕:교만할 교, 王:임금 왕, 之:어조사 지, 末:끝 말.
어의: 교만한 왕의 끝이라는 말로, 태봉국 왕 궁예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덕을 베풀
지 않고 교만하면 그 말로가 비참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삼국사기
애꾸눈 왕 궁예(弓裔.?~918)의 출생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성은 김(金)씨로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후궁한테서 태어난 서자로 알려져 있다.(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의 신라는 정치가 혼란하여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났고,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지엄한 왕의 명령도 먹혀들지 않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힘을 이용한 음모가 판을 치게 된다. 궁예 역시 왕가의 권력다툼이 있을 때 태어났다. 갓 태어난 궁예의 생명에 위협이 닥쳐오자 후궁이 궁 안에서 담 너머에 있는 유모에게 아기를 던졌는데, 그때 유모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다쳐 피를 흘리는 궁예를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맡겨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궁예 앞에 ‘왕(王)’자가 씌어져 있는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궁예는 그것을 보고 언제인가는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 후, 청년이 된 그는 절에서 나와 도적의 우두머리인 기훤(箕萱)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과 마음이 맞지 않아 그를 버리고 이번에는 북원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웠다. 양길은 궁예를 신임하여 군사까지 맡기며 후하게 대해 주었다.
궁예는 그 힘을 빌어 명주와 철원을 함락시키고, 부자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진 장군이라는 칭송과 함께 민심을 모았다.
그를 따르는 군사의 수효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겨서 강원도의 여러 고을을 차지했는데, 이 무렵 송악(松嶽) 출신 왕건(王建)도 그의 부하로 들어왔다. 왕건의 세력까지 합친 궁예는 도읍을 송악(松嶽)으로 정하고 왕건을 태수(太守)로 삼았다.
양길은 부하인 궁예가 크게 성공하자 자기의 지위가 위태로워짐을 느껴 먼저 궁예를 쳤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반격하게 하여 양길을 죽이고, 신라 효공왕 5년에는 정식으로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했다. 그라고 왕건에게 금성과 나주를 치게 하여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견제했다.
효공왕 8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개칭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바꾼 뒤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중앙관청으로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나랏일을 토의케 하는 한편, 각 지방에 관청을 둠으로써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다. 또 궁궐과 누대 등을 호화롭게 꾸며 자신의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양까지 점령하여 신라의 북쪽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함으로써 그 세력이 신라를 앞지르게 되었다.
그러자 신라의 많은 장수와 학자들이 투항하였으나 신라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잔악한 본성이 이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궁예는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했다. 그리고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고, 맏아들은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은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불렀다. 또 스스로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방포(方袍. 중의 옷)를 걸치고 다녔다. 그는 불경 20권을 만들어 승려 석총(釋聰)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석총은 ‘이것은 불경이 아니라 사악하고 괴상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직언을 했다. 궁예는 몹시 노하여 석총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부터 백성들의 마음은 차차 궁예에게서 멀어져 갔다.
궁예의 왕비가 그의 난폭한 행동을 염려하여 평상심을 찾으라고 간곡히 간하였다. 화가 난 궁예는 왕비에게 말했다.
“감히 미륵불을 가르치려 하다니……, 너 요즘 다른 사내와 가까이 지내고 있지? 나는 미륵불이야, 미륵불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심(觀心) 능력이 있어서 상대방의 눈동자만 보아도 속마음을 훤히 알 수가 있어.”
그리고는 끔찍하게 왕비를 인두로 지져대자 아들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 말렸다. 더 화가 난 궁예는 그 자리에서 철퇴로 두 아들을 때려 죽여 버렸다. 또 신하들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죽였다.
그러자 장수 신숭겸(申崇謙),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이 그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궁예는 몰래 달아나다가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붙잡혀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태봉국은 28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끝나고 고려가 열리게 되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郊彘仲媒(교체중매)
郊:들 교, 彘:돼지 체, 仲:버금 중. 媒:중매 매.
어의: 산돼지가 중매를 하다. 고구려 산상왕에게서 유래한 말로,
뜻하지 않은 일이나 사물이 계기가 되어 일이
잘 이루어짐을 뜻한다.
문헌: 삼국사기
고구려의 제8대 신대왕(신대왕. 재위165~179)은 4형제를 두었다. 첫째 남무(남무.고국천왕),
둘째가 발기(발기), 셋째가 연우(연우), 넷째가 계수(계수) 4형제였다.
고국천왕 남무가 죽자 후사가 없었던 황후가 이를 숨기고 둘째 시동생 발기를 찾아갔다.
“대왕께서 왕자가 없으니 왕위를 계승하십시오.”
그러자 발기는 형수인 왕후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알고, 엄연히 형님이 계신데
경솔한 행동을 삼가라며 단호히 말했다. 왕후는 부끄러웠으나 대권을 이어야 했기 때문에
셋째 시동생인 연우를 찾아갔다.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형수인 왕후를 정중히 맞았다.
“제가 찾아 온 까닭은 대왕이 승하하여 발기 시동생을 찾아갔으나 나를 의심하기에
숙아자비를 찾아왔습니다.”
연우는 왕후를 맞아 상을 차리는데 고기를 썰다가 일부러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흐르자
왕후가 치마끈을 찢어 상처를 싸매 주었다. 궁궐로 돌아온 왕후는 고국천왕 시신을 향해 말했다.
“연우를 왕위에 계승하라 하셨죠?”
거짓말로 던진 말이지만 이 말이 공식화되어 연우는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형 발기가 군병을 이끌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궁문을 굳게 닫은 연우는 3일을 버텼는데 발기가
스스로 물러서더니 요동 땅으로 가 공손강(공손강)에게 동생 연우를 처단하겠다며 군사 3만을 요청하였다.
공손강은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같은 고구려를 치려고 기회만 보고 있던 침이라 잘 되었다 싶어
군사 3만을 내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괘씸한 아우를 무찌르고 왕위를 탈환하시오.”
산상왕에 오른 연우는 형 발기가 3만의 군사를 앞세워 쳐들어오자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맞서도록 했다. 막내 아우 계수가 형 발기를 향해 말했다.
“연우 형이 왕위를 사양하지 않고 잇는 것은 의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망치려고
요동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니 죽은 뒤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겠습니까?”
발기는 계수의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 달아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궁궐이 평정을 되찾자 산상왕은 잔치를 열고 동생 계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예우를 다하여
발기 형을 장사 지내고 온 계수에게 형제의 우의를 다한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례 후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산상왕은 형수 우씨를 왕후로 맞이했다.
산상왕 7년(203) 3월에 왕은 아이 갖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흰옷을 입은 조상이 나타나더니 말했다.
“연우야, 네가 소후(小后)첩으로 하여금 아들 낳게 될 것이니라.”
꿈을 꾼 산상왕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산상왕 12년(208) 왕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산돼지를 보고 시위를 당겼으나 맞지 않고 달아났다.
그러자 신하들이 산돼지를 쫓아가 주통촌(酒桶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한 처녀가 뛰쳐나오더니 달아나는 산돼지를 낚아 채 쫓아오던 사람에게 주었다.
장정이 몰아도 잡지 못하던 것을 처녀가 잡아주자 신하들은 의아해 하면서 왕 앞으로 가지고 갔다.
“누가 잡았느냐?”
“주통촌의 처녀가 잡아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산상왕이 그 집으로 가 인사를 받고 전날의 꿈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산상왕은 주통촌에 뜻하지도 않았던 소후를 두게 되었다.
주통촌에 소후를 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후는 군사를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소후는 남장을 하고 산속으로 달아났으나, 얼마 못 가 잡히고 말았다. 군
사들이 칼을 빼 그녀를 죽이려하자 말했다.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대왕의 명령이냐? 그렇지 않으면 왕후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입니다.”
“그럼 듣거라. 내 뱃속에는 대왕이 남겨 준 새 생명이 있다. 내 죽음은 곧 왕자의 죽음이니
그래도 죽이겠느냐?”
이 말을 듣고 대궐로 돌아가 왕후에게 고하자 펄펄 뛸 뿐 어찌하지 못했다.
산상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주통촌을 찾았다. 그리고 그 해 9월에 아이를 낳으니
산돼지로 말미암아 낳은 아기이므로 이름을 들교(郊)자에 돼지체(彘)자를 써 ‘교체’라 하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 소후로 삼았다. 서기 218년 산상왕이 승하하자 교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11대 동천왕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