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왔고 며칠 동안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기록하기 위해 목욕 재개 하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연병, 머리가 하해지면서 머릿속 원고가 싹 다 날아가 버렸지 뭡니까? 5시간 썰이 힘들었을까요? 3시간의 취침이 달콤합니다. 에예공이 틀림없이 곯아떨어졌을 것 같아요. 말하는 직업은 밥을 단디 먹어야 할 것입니다. 아내와 겹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토요일을 피해 간 면회에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은 우연일까요, 신의 섭리일까요? 누가 누구의 원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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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침이나 당한 것처럼 황소 눈알을 하고 상황을 전달하는 예주랑 인사로 못했으니 동족상잔의 비극이 따로 없네요. 용우 장로의 기승전결이 있는 기도, 성빈이의 5만 원 송금과 10만 원 재 송금을 보고 받고, 에스더가 자랑스러웠어요. 하늘 공원과 2층 휴게실을 번갈아 가며 토킹 어바웃의 진수를 보여준 에에공을 리스펙트 합니다. 고미숙의 말처럼 '시절 인연'(타이밍)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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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한 날 학생들이 너무 좋아라고 했고, 200만 원 학원 비 발언에 자괴감을 느꼈다는 말 속에서 아비는 예주의 욕망을 보았어요. 원장이 한 달을 비웠지만 "이 놈의 학원이 잘 돌아가고 있네"요. 5시간 동안 교차된 희비의 대서사시를 담자니 매인이 또 밀리 것 같아 폐일언하고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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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인식론'은 핵심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칸트가 플라톤을 박살 낼 때 코페르니크스식 전환이었고 갈릴레오가 지동설로 중세 신학을 박살 냈지요. 이후 포스트모던의 등장으로 근대 '이성의 사각지대'를 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잘 보고 잘 인식할 것인가를 다루는 학문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인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결론을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상승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발휘해 위버맨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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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는 현재의 삶을 자기만의 창조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행동 쯤 될 것입니다. '자유'는 누구에게나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결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에에공!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사물과 달리 '무' 상태인 인간만이 창조적 가치를 지향한다고 보았다. '힘에의 의지'='자연적 자유의지'는 삶을 자기 극복으로 조형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당면한 현실(상황)을 돌파하며, 긴장적 대립을 제어하는 능력자(초인, 위버맨쉬)로 카뮈의 부조리한 삶 속 '저항'이나 '카르페디엠'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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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의지' 혹은 '자연적 자유의지' 자는 '자기 긍정과 가치관'을 '새로운 선의 영역'으로 정한 가치 설정자입니다. 이런 존재방식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가능한 영역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지향합니다. 그러니 주인적 존재(나)는 순전히 자유의지로 '힘에의 의지'가 발휘 되는 인간입니다. 주인적 존재 방식은 내 의지적 결단(자유의지)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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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논의 했던 리얼이라는 단어를 불어(Réalité)나 영어(Reality)로는 사실이나 사물, 실제의 정지 개념이지만 독일어의Realität 실제 개념은 '영향을 미치다' '작동(움직인다) 하다'라는 동사라고 하더이다. 150년 전에 니체 형님의 '도덕 계보학' 제4논문에 이미 보는 것(=양자물리학)을 언급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과연 니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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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인간 포함)은 원자로 구성 되어있다는 데 동의 할 것입니다. 18C에 들어온 원자 개념이 20세기 핵의 혁명과 함께 원자의 구조가 태양과 같은 체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자 핵 주변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돌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전자의 열 양(빛 양자)를 가지고 계산하는 '에테르 개념'이 나타났다고 해요. 물리학에 완전 무식한 내게 더 이상의 설명은 무리니 패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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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신이나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움직입니다. 손/ 발톱마저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더이다. 움직이는 물체를 고정시켜야 볼 수 있기 때문에 '보기 위한'(인식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가 눈물겹습니다. 고대(헤라클레이토스)에도 나름 인식을 위한 시도가 있었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되는 가운데 사물의 실체를 보는 방법으로 언어가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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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언어의 태동적 한계입니다. 언어는 실체를 은유할 뿐 지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사물의 모든 이름을 아담이 지었다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반대에요. 명명이 먼저 있고 사건과 사물에 붙여지는(조작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나무라고 이름을 짓고 난 이후에 나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인간이 있기 전 우주는 스스로 움직이고(빅뱅) 있었는데 인간이 개입하면서 인간의 방식으로 떡칠됩니다. 태동적 한계인 조작된 언어로 어떻게 실체를 인식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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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은 결코 일치할 수 없으니 언어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예당초 거짓입니다. 율법과 성령을 비교 할때 문자는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언어가 만든 환상이지요. '인간 중심으로 해석한 언어'지만 언어는 포스트모던의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깨는 포스트구조주의 말입니다. 고대로부터 현대를 거쳐 인식을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보는 것'까지 왔고 잘 보기 위해 정지시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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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것도 예측불가한 걸 보면 아직도 '보는 것' 하나를 제대로 못 보고 포스트모던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는 없고 시대마다 가설만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절대화 시키면 안 된다는 뜻인데 고정-교리화-도그마 시키는 순간, 생성(창조)은 멈추는 겁니다. 끝도 없는 논쟁은 '모든 진리는 차연'이다로 패스하겠습니다. 필자는 빅뱅이론을 믿기 때문에 코스모스를 대우주라고 부르고 나를 소우주로 지칭합니다. 정말 내가 죽으면 지구에 오기 전 별 에너지의 형태로 우주 공간으로 돌아갈까요?
2024.8.28.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