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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독서모델학교 좌담
독서모델학교는 매우 세련된 협치 모델
때 | 2014. 08. 21 오후 2시
곳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회의실
참석자(가나다 순)
김경집 인문학자
박상률 작가
안찬수 시인,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한기호 (사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수월성 교육은 이제 그만
한기호 안녕들 하셨는지요? 제가 최근 한 신문 칼럼에 2017년 체제는 ‘인간화’가 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참고로 1987년 체제는 ‘민주화’, 1997년 체제는 ‘세계화’, 2007년 체제는 ‘개중個衆화’가 화두였습니다.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2017년도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올해 4월에 터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가진 내재적인 모순을 내장까지 완전히 드러내 보여줬습니다. 이후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열망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 <명량>이 21일 만에 관객 1500만 명을 돌파한 것은 정상이 아닌 사회에서 한쪽의 열망이 과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국의 지도자상을 열망하는 게 아니에요. 막장에 몰린 개인들이 삶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이순신을 롤모델로 삼은 겁니다. 국가에서도 고문당하면서 버림받고 부하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순신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이 시대 개인의 삶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왔을 때, 그가 해주는 따스한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도 그만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정보기술을 비롯한 모든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가치를 급전직하로 떨어뜨리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과거에 로봇이나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신했다면 이젠 머리까지도 대신할 태세입니다.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작동하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학교 교육은 너무 과거에 안주하고 있어요.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과 실천적인 모델 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가 오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저는 ‘독서모델학교’를 제안했습니다. 먼저 김경집 선생님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김경집 2017년 체제를 말씀하셨는데요. 먼저 97년 체제에 대한 반성이 언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97년 체제를 저는 어떻게 보냐면요. 97년 이전 패스트 무빙fast moving 사회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면 안 되는데 이게 계속 이익을 주니까 끌고 왔던 거거든요. 그게 고장 난 게 97년 체제입니다. 이후에 변했냐 하면 안 변했어요. 좋은 기득권과 나쁜 기득권이 있습니다. 나쁜 기득권은 패스트 무빙에서의 이익을 투자 없이 계속 뽑을 수 있기에 규제를 풀어달라는 거예요. 퍼스트 무빙first moving으로 가야 하는데, 만들어진 규제가 이걸 방해하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겁니다. 풀어준 규제는 전부 이 사람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방식이에요. 변화에 대한 방향성이나 의미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학교도 이미 3%를 위한 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지하철 2호선에 있는 좋은 대학에는 수능 표준점수가 2등급이 되어야 응시를 할 수 있어요. 그 아이들이 다 합격했다고 치고, 그 아이들이 대학에서 학점을 잘 관리해 이른바 원하는 500여 개의 직업, 직군에 들어갈 확률은 지금 20%가 안 됩니다. 결국 3% 게임인 거죠. 이 3%를 위한 수월성 교육이 패스트 무빙 사회에서는 통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끌고 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퍼스트 무빙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육은 여전히 이 방식입니다. 이미 부모들이 해보고 좋은 대학까지는 보내놓았는데, 그다음 삶이 전혀 바뀌질 않으니까 ‘이건 아니다’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독서모델학교나 독서교육이 접근해야 할 접점이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책을 읽어서 좋다’가 아니라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기존의 교육체제에 대한 대안과 실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설정해주는 것이 좋은 어젠다가 아닌가 싶어요.
안찬수 ‘인구절벽Demographic Cliff’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장 돈을 많이 써야 할 연령대가 줄어들면 경제가 하강하게 됨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느 자료에선가 보았던 것인데, 일해서 벌이를 하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사회적인 비율이 있잖아요. 일본은 20년 전에, 소위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될 때가 인구절벽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일하는 사람보다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더 많아지는 변곡점이 바로 2017년이라 합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하셨다시피 대통령 선거가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2017년이 상당히 중요한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계기나 어떤 인구 변화가 있는데, 거기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 중 하나는 학령기 아동들의 숫자예요. 저희 연령 때만 해도 예전에 입학시험 볼 때 90만 명이 시험을 봤습니다. 지금은 50만 명 정도 볼 겁니다. 40만, 30만, 이렇게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대학 구조조정이라든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이를 조금 과장해서 하나의 가설로 만들어본다면요. 예를 들면 한 해 대학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이 10만 명이 안 되는 사회를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 숫자가 자꾸 줄어서 대학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1년에 1만 명밖에 안 된다고 하면 대학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그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수월성 교육, 즉 소수의 승자를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떨어뜨리고 마는 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던 거죠. 그러나 앞으로 우리 교육은 그런 구조, 그런 시스템으로는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핀란드 교육 등을 벤치마킹하는 열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보교육감들이 혁신교육, 혁신학교 등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것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꼴찌까지 살려내는 교육’이 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살기 어렵게 된다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시대에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교육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책읽기’입니다. 책으로 표현되는, 앞선 시대의 지혜, 지식, 정보, 스스로 문제를 설정해서 탐구해 들어갈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문제를 파악해 정의하는 것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책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손노동’으로 표현되는 게 있을 듯합니다. 사회가 점점 발달하면서 기계가 감당하는 게 늘어날 텐데, 기계가 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손으로 글쓰기, 붓글씨, 조형물 만들기, 목공, 텃밭 가꾸기, 악기 다루기. 이건 기계가 못하거든요. 기계가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저는 지금 진보교육감들의 혁신학교, 혁신교육 정책에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니, 결합해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 현재평가시스템에서 성적이 안 나와 꼴등 하는 애들도 다 살려내는 교육으로 변화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인구절벽 이후에도 자라나는 세대가 ‘책읽기’와 ‘손노동’으로 자기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어른들이 도와주는 방향으로 변화해가야 한다고 봅니다.
김경집 그런 의식의 고민과 변화가 요즘 느껴져요, 3주 전에 전남교육청에서 하는 교육연수에 다녀왔습니다. 교감 승진 대상자들이 참석했는데, 그 분들께 물어봤어요. 만약 다시 학생이 되면 무슨 과목을 제일 열심히 하겠느냐고 했더니 ‘국영수’ 라고 해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내가 만약에 다시 학교를 가거나 선생이 되면 체육 수업을 제일 열심히 할 거다” 하고 말하니 이분들 표정에 ‘놀자고?’ 하며 깜짝 놀라는 게 보여요.
인간이 평균 수명 40을 넘어선 게 20세기가 처음인데, 지금은 100세까지 산단 말이죠. 내가 어떻게 건강하게 살아갈 거냐가 가장 기본적인 훈련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게 교육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요. 체육시간에 단지 공을 주고 나가서 놀라는 게 아니라 내 몸을 관리하는 방법부터 성교육까지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다음 20년 주기를 살 수 있는 전체 그림을 아이 때부터 교육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앞으로의 20년은 어떻게 살고, 그다음 20년은, 또 그다음 20년은 뭐하고 살지 자기 삶을 조망할 수 있도록 이 시기에 깨닫고 갖추게끔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전교조 선생님 손 들어봐라 했더니 3분의 1쯤 들어요. 3분의 1도 안 돼요. 나는 교육은 진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이 미래에 살아가야 하는데, 과거를 살아온 사람들이 과거 방식으로 하는 교육은 말이 안 되는 거죠. 100세 시대에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자고 하고서 책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분들이 쉬는 시간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나중에 워크숍을 따로 한번 해보자” 하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아이들 중에는 성과가 늦게 나오는 아이도 있고, 빠른 아이도 있잖아요. 지금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늦게 되는 아이가 허용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아이들까지 챙겨갈 수 있어야 하는데요. 예전 수월성 교육에서 중요한 게 수월적인 인간을 뽑아내서 리딩을 하는 거예요. 이게 베스트셀러 문화랑 똑같아요. 아마존에서 전체를 봤을 때, 총 매출은 롱테일에서 나오잖아요. 교육 방식도 롱테일 시스템으로 갈 수 있는 전환점과 인식이 필요해요. 이게 단지 아이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행복이라고 한다면 경제발전도 마찬가지겠죠.
총량을 늘리려면 다수 속에서 총량을 늘려야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에 독서가 왜 접점이 되어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설정해주어야 해요. 그래야 독서가 그냥 교양이나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걸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능성을 본 것이에요.
조금 전에 낙오된 97%에 대해 이야기했잖아요. 여수에 있었던 테크니션 스쿨이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지자체마다 전부 취업이 제일 큰 문제에요. 여수는 산업단지가 있잖아요. 여기 아이들의 꿈이 뭐냐면 여수 화학 단지에 가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화학 단지에 가서 2년차 되면 연봉을 4000만 원쯤 받는대요. 여수시장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온 젊은이들을 거기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만든 겁니다.
처음에 산단에서는 자기네들에게 떠넘길 거라고 생각했죠. 그걸 조영만 박사가 맡았어요. 조영만 박사는 “내가 기업에 있어보니까 전문적인 엔지니어가 아니면 회사에서 요구하는 건 그 사람의 기술이거나 기능적인 측면이 아니라 첫째가 인성, 둘째도 인성, 셋째도 인성이더라. 그래서 우리는 기술적인 자격증을 따는 교육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인문 인성 교육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애들을 뽑아서 회사에서 써보니 괜찮단 말이에요. 거기만 들어가면 산단 취업이 거의 보장이 되니까 여기 경쟁률이 4:1이에요. 기술교육을 뺀 나머지 인성교육을 뭐가 커버하겠어요? 독서교육입니다. 분명히 이건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버랜드에서 신입사원들 독서교실을 만들었어요. 그냥 하려고 하지 말고 임원부터 바뀌어야 하니까 임원에 대한 교육을 한번 하자고 말했어요. 그걸 할 생각입니다. 저는 또 이런 제안을 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처음에 10%만 스펙 무시하고 책을 바탕으로 채용하라. 책 읽은 사람을 검증해서 이 사람들이 어떤 능력을 보여주는지 지켜봐라. 그의 능력을 개발해주고. 그게 확신이 서면 점차 채용 비율을 늘려라’ 하고 말이죠.
저는 그게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해요. 그렇게 해서 삼성이 변하면 기업 채용 방식이 변하겠죠. 이처럼 단순히 책을 읽자고 외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이 기회로 주어지고, 개인의 삶이 바뀌고, 기업의 문화가 바뀔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콘텐츠라는 사실을 공유해야 해요. 그 방식을 우리가 모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책 읽자 해놓고 뒷감당을 못 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좀더 긴밀하게 생각해봐야 할 지점입니다.
아이들 스스로 서게 하는 독서
박상률 결국은 책이 교육과 연결되는데요. 저는 수월성 교육, 그러니까 상위 3%만을 위하고 나머진 전부 엎드려 자는 대학 입시만을 위한 교육을 떠올리면 자꾸 히틀러의 나치 시대가 생각납니다. 우생학적으로 공부 선수인 우등생과 공부를 못 하는 열등생을 나누는 것만 같습니다. 나치가 자기들 멋대로 게르만족과 유대인을 나눈 것처럼 지금 우리 사회도 그렇게 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아이들을 공부하는 머리로만 나누는 게 아니라 돈 있는 집과 없는 집, 힘 있는 집과 없는 집을 나누는 게 히틀러 방식이 아니고 뭐겠어요.
그러면 나머지 97%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까 안 처장님이 꼴찌까지도 안고 가야 된다고 하셨는데요. 무조건 안고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서게 하는 게 필요합니다. 스스로 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결국은 책읽기를 해야 합니다. 책읽기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자는 거잖아요. 생각은 컴퓨터를 시킬 수도 없고, 어떤 기계에다가 책 읽고 읽은 거 요약해서 전달해달라고 할 수 없잖아요. 열아홉 살 때 공부 좀 못한 게 평생 가버리는 건 안 돼요. 패자부활전도 있어야 하는 데, 우리 사회는 패자부활전도 없습니다. 한 번 낙오되면 영원히 낙오되는 겁니다. 낙오자가 부활해서 절벽 위로 올라올까봐 밑에 가라앉아 있으라고 되레 발로 차죠. 패자부활도 해야 합니다. 20년 동안 직업을 가지고 물러난 뒤에도 또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 한 사람이 유리합니다. 자기 스스로 길을 모색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김경집 실상 패자가 아닌데 패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겁니다.
박상률 요즘 말로 하면 위너와 루저 중 루저라고 하죠. 결국 좋은 교육은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단지 눈으로만 읽고 줄줄 외는 게 아니에요. 책을 손으로 넘기고 만져보며 내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김경집 독서를 싫어하고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수월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공부 좀 수월하게 하자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빼어나게 하자는 거더군요. 저런 도둑놈이 있나 싶었어요. 왜 지금 이 말씀을 드리냐면요. 예전에는 이런 얘기를 하면 “당신 말에 나도 동의해. 하지만 내 새끼는 어떡하고” 이랬거든요. 독서라고 하는 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지, 특히 부모 입장에서 자기 자식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고 하는 게 과정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막연하게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독서를 던져놓고 하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만약 전략을 세운다고 하면 최소한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2학년, 이 지점을 설정해놓고 독서가 이 시기 아이들의 전반적인 학습능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느냐를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열 살이라고 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 저는 열 살을 언어사춘기라고 부릅니다.
최근 인지 과학에서는 이 시기를 언어 확장기라고 정의해요. 우리가 사춘기를 겪을 때 제일 늦게 오는 게 사실 신체사춘기에요. 신체사춘기만 생각하니까 못 보는 건데, 사실 사춘기에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게 언어예요. 아이의 언어에서 어른의 언어로 변해요. 열 살 때 말이지요. 미국의 경우는 3, 4학년 아이들한테 과제를 줄여주고 그 시기에 독서교육을 늘립니다. 어른의 언어를 습득하는 나이인 거죠. 사춘기가 되어야 어른의 몸으로 가잖아요. 마찬가지로 언어사춘기를 제대로 겪어야 어른의 사고로 넘어가는 겁니다.
실제 교과서를 비교해보면 3학년 책과 5학년 책은 차이가 많이 나요. 5학년 책부터는 개념어, 관념어들이 많이 나타나요. 애들이 최초로 교육 에서 탈락하는 때가 3, 4학년 때예요. ‘공부가 재미있었는데, 더 이상 안 재미있어’ 하고 애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하거든요. 아까 안 처장님이 탈락하는 교육을 말씀하셨는데, 초등학교는 시험문제가 이게 뭐냐고 물어봐서 5개 중에 2개만 대답해도 맞아요. 그런데 중학교에서는 “다음 중 아닌 것은?” 하고 물어봐요. 그럼 5개를 다 알아야 해요. 예를 들어 문제가 이렇게 나와요. 5형식 문장을 가르쳐주고 지각동사, 사역동사를 가르쳐줘요. 렛let이 들어가든 워치watch가 들어가든 다 되는데, 문제가 “다음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라고 나옵니다. 다 알아야 해요. 학교 수업시간에 안 가르쳐줍니다. 학원에 가서 이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해요. 그게 사교육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의 핵심입니다.
우리 학습 구조는 이렇게 두 가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에서 한 번 걸러지는 구조. 그런데 강남 같은 곳에서는 대부분 학원을 통해 언어사춘기를 넘어가요. 자기 학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넘어가니까 다음 단계가 수용되는 거예요. 실제로 강남에서 아이들 프로그램이 20년 전부터 시작됐어요. 체계적인 소수의 엄마들이 모아서 하는 게 사실은 많았거든요.
이 언어사춘기를 잘 넘어가기 위해서는 책을 봐야 합니다. 초등 3, 4학년이 언어사춘기를 가장 바람직하게 넘어갈 수 있는 교육적인 제안을 우리가 던져두고 도움을 줘야 해요. 중2의 경우는 스스로 자기의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해요. 독서를 통해서 다양한 것들을 놓고 자기가 정리할 수 있게 말이죠. 독서운동은 저 끝자리 있는 애들도 책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그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단지 책이 좋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그건 이미 다 동의하는 겁니다. 책을 봤더니 내 새끼의 삶이 바뀌고 학습 능력이 바뀌고 세상 보는 게 바뀌면 이게 확산되는 겁니다. 우리가 교육하는 분들과 함께 좀더 고민해서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 그 시기에 변화되는 걸 보여주어야 합니다. 삶 전 체를 놓고 봤을 때, 책이 왜 더 필요한가? 이렇게 두 개 트랙을 봐줘야 훨씬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상률 독서를 통해서 자기학습을 해야 하는 것조차도 학원에서 대신해주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은 없고 학원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성이 사라진 세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김경집 네. 맞습니다. 자기주도학습조차 학습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박상률 책을 읽어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변한다는 걸 보여주는 게 독서모델학교의 역할이기도 할 것입니다.
안찬수 한 소장님이 이 좌담의 첫머리에서 2017년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우리 사회 내부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과연 그 문제는 무엇이며, 또한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아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잘 안 보일 때는 원점으로, 다시 말해 근원으로 돌아가서 보면 제대로 보인다는 말이 있듯 다시 근원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듯합니다.
우리 사회가 굉장히 빠르게 성장해왔습니다. 서양에서는 몇백 년에 걸쳐 쌓았던 역사를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성장한 겁니다. 너무나 압축적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거기서 놓친 것도 굉장히 많은 거죠. 놓친 것의 핵심이 저는 어떤 ‘기본基本’이라고 봐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가다가는 진짜 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문학적 비유로 “대한민국호라고 하는 게 세월호 아니냐” 하는 말이 있잖아요. 침몰했는데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 현실에 지금 봉착한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우려가 있는 거죠.
결국에는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되도록 기본 다지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어요. 물론 여러 가지 문제를 설정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다방면으로, 그러니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 등을 풀어나가야 하지만요. 거기에서 진짜 기본 중 기본들을 찾아내서 하나하나 다져나가야 이후에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걸 딛고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문명적 가치를 일궈나갈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본이 무엇일까요? 옛날 어르신들이 밥상머리에서 해주시던 말씀이 역시 옳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것은 배려와 존중,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서 듣는 태도, 즉 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것, 결국 인성의 문제입니다.
저는 지금 ‘책읽는사회’라고 하는 단체 일을 하면서 자꾸 그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책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거 아닐까. 기본으로 돌아가야겠다. 기본을 다져야겠다, 그건 역시 책이며, 책읽기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20세기가 미국 중심의 사회였다면 현재는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형국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라고 하는 초강대국들 사이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형국입니다. 정말 오묘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시기가 다가오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지 못한 채 중간에 끼어 가지고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시기의 세계사 속에서도 계속 그러고 있으면 곤란할 겁니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서 진짜 유사 이래 문명사회를 일구어왔던 기본적인 생각들을 다시 따져 묻고, 거기서 해법을 찾아내는 것밖에 길이 없지 않을까요.
기본을 다시 상기시키는 일, 책읽기
박상률 길을 잃었을 때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살펴보아야 어디로 갈지 얼른 판단할 수 있습니다. 길 찾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더 헝클어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기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가 문제인데요. 옛날 전통적인 공동체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기본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것은 결국 책입니다. 책읽기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수사적으로 책 속에 길이 있다고는 하는데요. 정말 현실적으로도 또 실제적으로도 엄마들 피부에 느낌이 오게 책읽기를 해야 합니다.
엄마들이 자녀들의 인생을 다 좌우하잖아요. 엄마를 바꾸는 것이 뭘까요? 엄마들에게 호객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뭘까요? 책 많이 읽으라고 하면 엄마들이 “그거 읽으면 대학 가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읽었으니까 갔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읽었으니까 ‘찌질이’가 안 되고, 어떤 직장에서 끝났어도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호객행위를 할 수 있는 독서를 고민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선언적으로 책 속에 길이 있다고만 외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김경집 박 선생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요. 문제는 구체적으로 뭘 할 거냐는 겁니다. 아까 제 가 왜 3, 4학년 얘기를 했냐면요. 3, 4학년 독서교육이 아이 학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게 인지되어야 해요. 우리나라 피아노교육하고 독서교육이 똑같습니다. 6학년이 되면 체르니 40번에서 딱 끝나요. 중학교 들어가면 본격적인 입시생입니다. 피아노를 딱 끊어요. 피아노가 집에서 가구가 되는 거지요. 독서도 똑같아요. 초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읽다가 중학교 들어가면 책을 읽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돼버리는 거죠. 이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리느냐는 거예요. 엄마들을 움직여서 책을 통해서 엄청나게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기호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 참사가 터지는 게 단순히 배 하나가 침몰하고 해상 교통사고 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모순이 다 드러난 겁니다. ‘기레기’(기자┼쓰레기)들도 잠시 반성하는 척하더니 지금은 잊어버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아까 말씀하셨던 초등학교 3학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성적이 4학년에 결정된다고 하니까 엄마들이 아이들을 3학년부터 때려잡아서 중학교부터 같이 쫓아다녀요. 심지어 대학 보내고 나서 스펙도 함께 관리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졸업을 시키고 유학을 보내고 해서 최고의 스펙을 만들어놨는데, 좌절했다는 거죠. 1978년생 전후인 그 세대가 지금 이케아 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케아 세대가 좌절한 게 개인의 능력 차원이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인 시스템 문제라는 거잖아요.
일단 미국 경제가 몰락했고 네트워크화가 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찾은 인력은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글로벌 옥션’이라고 하는 역경매 시스템에 의해 스스로 일자리를 찾는, 같은 능력이라도 값이 싼 인력입니다. 인력시장에서 미국 하버드대 나온 사람은 1억을 달라고 하는데, 신흥국인 중국이나 인도의 젊은이들은 “나 3000~4000만 원만 주세요. 그 정도만 받고 일할게요” 라고 달려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스펙이라도 경쟁 자체가 안 되는 거잖아요. 워낙 인구가 많으니까요.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패스트 무빙 시대에 최고로 앞선 실력을 닦아봐야 자본주의시장에서 안 팔리는 시대가 돼버렸으니, 2011년 가을에 월가에서 시위하면서 “등록금 빚이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한 거잖아요. 그러면서 “우리는 99%”라고 소리 지른 거잖아요.
한국은 더 좌절했습니다. 1년에 16만 명이 유학 갔다가 돌아오는데 돌아와도 할 일이 없어요. 밤 새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소셜미디어에서 장난만 치고 있는 거죠. 머리 좋고 유머도 있는 아이들이 소위 ‘일베’가 되기도 해요. 일베는 자기 존재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에요. 자기는 밝은 미래를 꿈꿨고 내가 이만큼 대단한 놈인데 아무것도 주어지는 게 없으니, 더 이상 노력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세상에 대한 저주만 쏟아내요. 쏟아내는 대상이 뻔하잖아요. 첫 번째는 여자, 두 번째는 종북세력, 세 번째는 외국인 노동자죠.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많이 들어오면서 일자리 시스템이 변했고, 이런 상황에 대한 좌절이 크다고 봐요. 이케아 세대를 집안의 기둥이라고 생각해 최고로 키워놨는데 좌절했으니, 그 세대를 고모나 이모, 삼촌, 누나나 오빠로 뒀던 그 아래 세대는 지금 더 좌절하면서 애당초 시작조차 안 하는 거죠. ‘저렇게 애지중지 키우고 스펙을 쌓아놨어도 집에서 놀고 있는데 그들보다 나은 게 없는 내가 해본들 뭐가 되겠느냐’ 좌절하고 있다는 겁니다.
교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육이 아무런 대안도 세워주지 않고 있잖아요. 이에 대한 자각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일선학교 교사들의 일기나 책, 에세이를 보면 시골에 있는 고등학교도 학생 하나를 찍어서 스펙을 잘 관리해주면 수시를 통해 일류대를 갈 수 있습니다. 보내놓으면 그 아이가 잘돼서 남들의 모범이 되고 일자리도 잘 잡아서 그야말로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요. 얘들이 돌아와서 선생님을 안아주고 따스하게 해주긴 하지만, 좌절하고 있다는 거에 의식 있는 교사들이 눈물 흘리고 있잖아요.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내가 뭐 해야 하나,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얻은 결과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반성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뭔가 방향을 잡아주고 돌파구를 뚫어줘야 합니다.
김경집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자존감을 없애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친구의 말이 요새 한 반에 40명쯤 되는데 수업을 하면 앞자리에 10명은 자버린대요. 중간에 10명은 깨어 있고, 저 뒷자리에 20명은 잔대요. 앞에 있는 10명은 학원에서 다 배운 거래요. 들어봐야 재미도 없고 영양가도 없으니까 저녁에 학원 갈 체력을 위해 자는 거죠. 뒤에는 공부도 재미없고 대학 갈 생각도 없고, 대학이야 돈 내면 아무 때나 갈 수 있으니까 굳이 힘들게 노력하고 싶지 않고, 저녁에는 놀아야 하니까 자는 거래요. 그럼 가운데 10명은 뭐냐 했더니 5명은 학원 갈 돈이 없어서 ‘내가 이 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공부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악착같이 땡글땡글 집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안 자는 나머지 5명은 학원에서 배웠는데 뭔지 몰라서 학교에서 복습하는 거래요. 이걸 깨줘야 합니다.
신문이 안 팔린다고 투정만 했지 신문을 읽은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 추적조사 안 해보잖아요. 책도 마찬가지란 말이에요. 책 읽은 집단과 읽지 않은 집단, 책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일종의 추적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해보자, 그렇게 해서 두 집단의 삶이 어떻게 질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자는 거죠. 이것도 하나의 큰 틀거리로 들어가야 지속적인 힘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 집단에 도움을 청하든지 해서 이 프로그램을 한번 여기에서 해봤으면 좋겠어요.
박상률 수사적 표현으로 ‘책 읽으면 좋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책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이 어떻게 변했나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노숙자 인문학이라고 해서, 노숙자들에게도 책을 읽게 하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무조건 책 좋으니까 읽자고 하면 “책 읽어봐야 뭐하는데?” 이렇게 되묻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안찬수 그런 사례가 있어요.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EA, National Endowment for Arts)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2010년쯤 이루어진 조사가 기억나는데요, 그 조사는 뭐냐면 그룹을 책을 읽는 그룹하고 책을 읽지 않는 그룹으로 나누어서 이 사람들의 문화 형태를 조사 연구한 겁니다. 해보니까 단적으로 책 읽는 사람들의 투표율이 역시 높아요. 또 책 읽는 사람이 역시 사회 의제가 생겼을 때 기부 행위나 참여활동 하는 것도 높았습니다. 심지어 책 읽는 그룹이 연극과 영화도 더 많이 봐요. 문화소비나 문화 창조, 자원봉사 참여율 같은 것도 조사했더라고요. 우리는 아직 그런 식의 조사까지 못해봤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전반적인 읽기, 예를 들면 ‘신문 보는 사람이 역시 책도 보더라’ 하는 말이 상식적으로는 통용되지만, 그게 증명이 된 것은 아닌 겁니다. 앞으로 세부적인 데이터를 갖기 위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이와 관련하여 내용을 조금 진전해서 말씀드린다면, 지금 한국에 종합편성채널, 즉 종편이라는 게 만들어지게 된 계기가 제가 이해하기에는 종이 매체가 더 이상 생존 가능한 구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매체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종합편성채널을 확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읽는 문화로 치면 더 이상 재생 가능하지 않은 구조에 봉착하다 보니 그 활로를 찾아간 거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읽기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그 활로를 잘못 찾아간 거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읽기문화의 확산 없이는 종이신문도 잡지도 출판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즉 읽기문화의 확산이 기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출구일 터인 데, 현실은 영상이라는 다른 활로를 찾아갔다고 할 수 있는 거죠. 그건 읽기문화 차원에서 제 살을 갉아 먹고 마는 것으로 귀결될 거라는 겁니다.
한기호 읽지 않은 건 아닌 거죠. 저는 읽는 행위 자체는 늘어났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교양이라고 하는 독서는 거의 붕괴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것이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휴대전화 세대와 스마트폰 세대를 구분하고 있어요.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대강만 파악하고 나머지는 웹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켜서 검색해서 보던 세대가 지고 있습니다. 아예 컴퓨터를 켜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모두 읽는 세대가 등장한 거죠. 이게 ‘앱 제너레이션’입니다. 앱 세대가 등장하고 있고 지금 젊은 세대가 이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읽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읽지요. 단 이미 누가 완벽하게 요리해 놓은 것,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열심히 읽고 있는 거죠.
『앱 제너레이션』(와이즈베리, 2014)이라는 책을 쓴 하워드 가드너라고 하는 교육학자는 앱 주도형 세대가 앱 때문에 게으르고 수동적인 인간으로 변한다면, 스스로 깊이 사고할 줄 모르거나, 새로운 질문을 던질 줄 모르거나, 의미 깊은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발전하는 성숙한 자아의식을 빚어내지 못하는 인간이 될 우려가 크다고 했습니다. 정보와 정보를 연결해서 자기 사유를 할 수 없는 세대는 점점 더 늘어날 겁니다. 이 사람들이 자의식을 갖고 뭔가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가 문제죠.
사회에서 한 사람의 엘리트 사원이 일하면 그 엘리트 사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옆에서 퀵서비스도 해주고, 뭐도 해주는 일종의 미국식으로 말하면 ‘맥잡’이라고 하는 거잖아 요. 맥도날드 배달하는 일 비슷한 일을 하는 99명이 한 사람을 보조해주는 극단적인 시스템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99명이 희생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긴 기술적 발전에 따른 성과를 한 사람이 모두 착복하는 세상이니 그런 구조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 한 사람을 제외한 99명이 스스로 이겨내고 스스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박상률 요즘 애들 문자는 많이 봅니다. 심지어 TV 예능프로그램마저도 자막으로 나오고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죠. 문자는 옛날보다 많이 보는데요. 근데 전 그런 건 ‘문자질’이지, ‘문자 행위’가 아니라고 봐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요리되어 정제된 것만 먹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체력이 아주 부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어떤 책을 읽고서 정리도 내 머리로 해야 하는데, 이미 다 정리되어서 나오니 그럴 필요가 없게 돼버렸어요. 심지어 교과서마저도 딱 정리해서 주잖아요. 학교 교육도, 교사의 역할도 그렇게 돼버렸으니, 학생들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요즘 문자가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앱 세대지만, 분명히 문어와 구어는 다른데 구어체에만 너무 익숙해지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앱 세대를 넘어서, 말하자면 문자질이 아닌 문자 행위를 하는 세대, 그냥 구어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문어체까지도 구사할 수 있는 세대를 키워내야 합니다.
사회적 연대로 나아가는 함께 읽기
김경집 최근에 저는 무슨 생각을 하냐면요. 독서의 세 번째 실용적인 면인데요. 일종의 사회복지적인 측면에서 보는 겁니다.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재교육 시스템이 없다는 겁니다. 복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연금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삶을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재교육 방식이 없는 거예요. 그게 없는 상태에서 내가 또 다른 삶을 어떻게 구성할 거냐고 할 때, 최적의 방식이 책이라는 말이에요. 여러 책을 읽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일이 있는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익힐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독서모델을 하면 거기에는 중장년층들이 자기의 다음 삶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한 달이 됐든 다섯 달이 됐든 정년퇴직하면 여기에 와서 몇 달 책을 진중하게 읽어보면서 내가 돌아온 삶을 그저 반추만 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기 세팅을 할 기회를 주어야 해요. 그런데 독서가 아이들에게만 자꾸 간단 말이에요. 지금 중장년층은 늘어났는데, 재교육 할 수 있는 아무런 시스템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재교육 방식이 나 복지 담론이 가야 하는지 어젠다까지 마련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찬수 ‘책읽는사회’가 지난 10여 년 동안 주력했던 게 인프라 구축이에요. ‘제대로 도서관 좀 지어라, 학교 도서관에 장서도 갖추어라, 그것이 기본적인 독서 환경이다, 그런 환경 속에 시민들이 책 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해나가자’ 이런 제안이나 실천들이 많았거든요. 최근에 크게 변한 것 중 하나가 ‘읽자’는 거예요. 다르게 표현하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쪽으로 강조점이 변한 겁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통해 ‘혼자가 아닌 함께하니 읽게 되더라’는 겁니다. 즉 ‘함께 읽기’ 그래서 독서 모임이나 독서 동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지금 이것은 <학교도서관저널>에서도 계속 강조하시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독서동아리를 갖자.” 이런 식의 사회적 제안을 해보고 싶어요.
다른 나라 사례를 한 가지 들어보면, 스웨덴에 장애인 도서관을 둘러보러 갔을 때 확인한 것입니다. 스웨덴의 도서관 역사를 추적해보니까 ‘스터디클럽study club’이라고 불리는 독서동아리가 도서관 문화사의 중요한 계기였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스웨덴 시민들이 독서동아리 멤버예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사민주의 정권이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크게 보도했습니다. 북유럽 복지 모델의 종말인 듯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쯤 <한겨레> 기자가 스웨덴으로 특파되어 확인해보니 바뀐 정권의 정책도 법인세를 조금 내려주는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 나머지 기본적인 사회복지 혜택은 전혀 손댈 수 없었다는 겁니다. 스웨덴 국민들이 독서동 아리를 통해 공부하고 책을 읽으니까 정치인들이 뭘 함부로 하기 어려웠다는 거예요. 어떤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본 궤도가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씩 조종하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확 바뀐다면 굉장히 불안한 사회인 거잖아요.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큰 변화 없이 기본적인 것들이 유지되는 사회, 이런 사회가 가능한 것은 역시 국민들이 사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성찰할 수 있다면, 사회가 요동치지 않습니다.
김경집 안 처장님 말씀과 같은 맥락인데요. 지금 필요한 건 코디네이션 능력이에요. 스마트니 하는 분야나 ‘앱 제너레이션’에서도 이미 나타났지만 ‘앱 제너레이션’에 가서 완전히 붕괴된 게 코디네이션 능력을 발휘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지금 세월호 사태에서도 정국을 헤쳐나가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이걸 할 수 있는 코디네이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정치인도 그렇고 국민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코디네이션을 어디에서 학습하느냐는 겁니다. 책을 한 권만 보는 게 아니라 두 권 보고 세 권 보고 열 권 보고 이 사람 얘기 듣고 저 사람 얘기를 들으면, 이미 이게 자연스러운 코디네이션이 되는 겁니다. 책은 단순히 한 사람의 교양을 기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가치로 발전해나갈 수 있게 도와주고, 이런 코디네이션 능력을 책을 통해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안 처장님 말씀처럼 스웨덴 모델도 우리가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저절로 흘러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어젠다 세팅을 여기에서 정확하게 하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미래 비전을 설정하고 전체의 시작과 끝이 짜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까지는 대부분 캠페인 방식에만 쏠려 있었어요. 요즈음 온갖 도서관 지자체에 인문학 강좌가 막 생겨요. 여기서 제일 큰 문제가 단발성이에요. 시민이 프로그램 쇼핑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들어보고 저것도 들어보고 만날 가도 그 수준이에요. 그리고 비교하는 거죠. 최소한 한 사람한테 4강은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냐면 여기에 도입 과정이 있어야 해요. 제너럴 인트로 과정이 있고, 그다음에 심화학습 과정이 있고, 그 다음에 구체적 실천모색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걸핏하면 토론 운운하는데, 사실 토론은 실천과정에서 다뤄져야 효과적입니다. 심화학습과정에 들어가서 충분한 정보를 습득해야 이걸 내가 소화를 해서 실습 과정에 들어가서 뭘 할지 정립을 하고 연대할 수 있는 방안도 생기게 되는 건데요. 그걸 구분하지 않으니까 아무 과정에서나 툭 화두 만 던져놓고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방식이니까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정작 삶의 변화가 없는 거예요. 지자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프로그램 쇼핑하는 게 제일 편하거든요. 프로그램 여러 개 만들어서 독서도 그런 방식으로 따라가면 참 쉽다는 거죠.
독서의 과정도 도입, 심화, 실천모색 과정이 필요합니다. 3단계 들어가서 토론을 이끌어내야 하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독서회는 읽고 그 자리에서 바로 토론을 해요. 그러니 성과가 없는 거예요. 토론해서 변화가 되고, 내가 가졌던 생각이 이 안에서 농익어서 서로에게 이야기가 되고 보다 나은 단계로 나가는 게 아니라 내가 뭘 이해했는지로 논쟁하기 쉬운 거예요. 이런 것들에 대한 모델을 하나 짜놔야 합니다.
한기호 ‘인구절벽’을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한국 사회든 어느 사회든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로봇이 가장 발달된 일본 같은 경우, 로봇 1대가 들어서면 34명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겁니다. 우리 일자리 줄어드는 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기차표를 사든 버스표를 사든 지하철표를 사든 예전보다 사람이 없어졌잖아요. 로봇이 전부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 없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이제는 인간이 새로운 시스템에 맞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겠죠. 세상이 변했으니까요. 로봇을 설계하는 사람이라든가 로봇을 청소하는 사람이라든가 로봇에 대한 여러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자리가 늘어나겠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사유해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는 계속 스펙을 쌓아서 가장 안정된 직장이라고 하는 500개의 직장 가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유가 안 되는 거예요. 앞으로의 사회는 점점 기존의 직업이 1만 개라고 하면 그중에 적어도 80%인 8000개는 사라지거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직업을 찾아내야 하고, 그 직업에 스스로 적응해야 합니다. 적응하는 게 아니라 주도하려면 사유를 해야 하는 겁니다. 이건 책읽기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까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어적인 텍스트의 책읽기만 해온 거 맞습니다. 책을 읽는 게 중요하고 좋다고, 읽으면 미래가 잘된다고 얘기했는데 결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미국사회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책 한권도 안 읽는 사람 비중이 44%, 대학을 졸업하고도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이 33%나 됩니다. 이 사람들이 사회 생활하다 보면 500대 안정된 직장에 가서 한 20년 일하면 물러 나와야 되잖아요. 그게 ‘사오정’입니다. 백 살까지 살아야 되는데, 앞으로 55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안 되잖아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얘기해줬는데, 어떻게 읽을지, 그 방법이 ‘함께 읽는’ 공독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함께 읽는 방법이 뭘까요?
우리가 책을 준비하고 있는 게 『이젠, 함께 읽기다』입니다. 제가 숭례문학당 친구들과 산에 다니면서 회원들을 파악해보니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생이 고달프고 일이 힘들고 주변 관계도 불편하고 그래서 삶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토론하다 보니까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책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화도 함께 보고, 여행도 함께 하는 겁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같은 사안을 놓고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네’가 되는 거죠. 자꾸 나와 다른 생각을 듣다 보면 ‘차이’ 속에서 상상력이 작동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기획회의> 연재 중에서 책을 읽어서 인생이 바뀐 대표적인 모델은 윤석윤이라는 분인데요. 20대 때 젊어서는 선원이었고 40대 때 사업하다가 망하고 55세 됐으니 뭐가 있겠어요. 그분이 선배가 오라고 해서 갔다가 고전 100권 읽기 모임을 했습니다. 10명이 시작했는데 결국 2명 살아남았다고 하더라고요. 쉽진 않았겠지만 살아남고 나니까 이 사람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대학이나 도서관, 일선 학교에 가서 강연도 하고 독서토론 모임도 이끌고 있습니다. 이분은 인생 후반기에 대한 화려한 준비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윤석윤 씨는 불과 3년 만에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윤석윤 씨도 『이젠, 함께 읽기다』의 공저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책을 읽고 무조건 “토론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책을 함께 읽었으면 논제부터 뽑습니다. 이 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습니다. 논제라는 물음표에 정답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논제를 놓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스스로 결핍, 즉 부족함을 깨우치게 되고, 그걸 깨우친 사람은 결국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채우기 위해서 책읽기는 필수적으로 거치게 됩니다. 그러면 출판시장은 저절로 활성화될 것입니다.
안찬수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소년인문학읽기전국대회’의 사례인데요, 올해 6회를 했습니다. 김해시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고, 학교도서관담당교사모임, 책따세, 한국출판인회의, 전국국어교사모임 등 여러 단체가 후원하고 협력해서 올해 여섯 번째 개최했습니다. 주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고, 학교 밖 청소년들도 참여하는 전국대회입니다. 1년에 함께 읽을만한 책을 선정해서 전국의 청소년들이 저자와 대화를 나누고 질문을 던지고, 서로 토론하는 대회입니다.
이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이 비경쟁 방식이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독서토론 논술대회를 보면 실제 논지가 제대로 자기 몸에 붙어있지도 않은데 상대방을 떨어뜨리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발언합니다. 그런 방식을 극복하고 비경쟁적인 방식으로 토론하자, 책을 읽고 서로 질문을 도출하자는 구상을 했던 겁니다. 질문을 가지고 저자를 만나고 저자 말씀을 듣고, 또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 질문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서로 의논하는 식의 대회를 만들었어요. 이런 대회의 방식이 강원도, 인천, 전북 등 확산되고 있어요.
또 이 대회에 참가한 선생님들이 자기 수업 시간에도 해보자고 하는 분도 생겼습니다. 지금 말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에요.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논제가 될만한 걸 질문으로 만드는 겁니다. 이번 논제는 “우리는 왜 역사를 말하는가?”였습니다. 이 대회의 토론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발언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겁니다.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꼭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이런 방식의 토론을 여러 가지 형태의 독서 모임에 활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둠벙을 파놓으면 개구락지가 모여든다
박상률 세계적으로 아기들의 공통적인 첫 말은 ‘엄마’라는 말이랍니다. 두 번째로 익히는 말은 ‘왜’라 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질문을 하는 존재라는 것인데, 책이라고 하는 것이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지식은 인터넷을 뒤져서 얻을 수 있는 건데요. 토론은 논제를 던져주고 여러 책을 동원해서 자기 식대로 결론을 내는 것이지, 그 책을 잘 정리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책을 쓸 때도 보세요. 쓰는 건 저자가 쓰지만, 독자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생각해도 상관없는 것이죠. 책은 독자한테 가서 완성되는 거잖아요. 책사회가 그동안 10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저는 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라도 말에 “둠벙을 파놓으면 개구락지가 모여든다”는 게 있습니다. 도서관을 잘 지어놓으면, 말하자면 놀 데가 없으면 도서관 가서 놀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동네서점이 없어지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중고생들이 학교 갔다 오다가도 어디 놀 데가 없으면 그냥 서점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인이나 종업원이 좋아서 갈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웅덩이를 파놓으면 개구리는 자연히 모여듭니다.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이런 것이 주변에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독서모델학교도 접근성이 좋아야 해요. 개구리가 모일 수 있는 둠벙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경집 함께 읽기라고 하는 게 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연대로 이어지거든요. 경남 김해에 가서 청소년인문학읽기전국대회 보고 참 섹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들이 벌써 자연스럽게 연대를 배우는 거예요. 어디 학교에 다니는지, 몇 등인지 이런 거는 관심 없어요. 하나의 책을 통해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0대가 느끼는 사회적 연대라는 끈끈한 틀은 중요한 자산입니다.
안찬수 청소년인문학읽기전국대회에 모인 학생들을 보면, 실업계 학생들이 처음에는 이른바 외고나 민사고 같은 특목고에 다니는 학생들에 비해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절쯤 지나면요, 그 연령 시기에 사유 수준이 그렇게 편차가 큰 게 아니기에 서로 자신감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생각을 표출합니다. 그런 걸 보면서 다들 뿌듯해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거기 모인 선생님들이 스스로 배워가는 것 같아요. 우리가 또 생각해봐야 하는 게 있어요. 이런 표현이 성립할지 모르겠지만 ‘독서매개자讀書媒介者’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서매개자 중 제일 중요한 분들이 교사일 것 같고요. 아이들한테 책을 진정성 있게 한 권이라도 “내가 이 책 읽으니까 재밌더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이 책도 봐라” “너는 군인 될 자질이 있는데, 이런 사람도 있어” 하면서 권해주는 매개자가 중요합니다.
사서 분들이 그런 매개자로서의 전문성이랄까, 시민들에게 따뜻하게 권해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 같고요. 작가 선생님들도 중요한 매개자거든요.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 책을 쓴 분에 대해 질문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작가와의 만남과 같은 활동도 꽤 많이 활성화되고 있는데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도 중요하고요. 본인이 쓴 저서를 갖고 이런 것들을 같이 생각해보자고 할 수 도 있겠고요. 또는 서평을 쓰는 분들이나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책 이야기를 하는 분들, 기자 같은 분들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정말 책 읽는 문화로 뻗어 가려면 그런 매개자들이 의미 있게 활동할 수 있게 법이나 제도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그런 활동을 북돋워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저자의 경우 매개자로서의 활동이 책을 쓰는 것만큼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과거에는 책을 써놓고 신문이나 방송 매체에서 다루면 굉장히 화제가 돼서 판매되었다면 지금은 그런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책을 냈을 때, “이런 고민 하면서 책을 썼다.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냐?” 하는 활동이 중요합니다. 그런 활동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전 국민이 하나 정도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면 저자나 기자, 서평가, 교사, 사서 이런 분들이 그런 모임을 위한 매개 활동을 해주어야 합니다. 더 좋은 독서 문화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독서 페스티벌 하면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는 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잖아요. 그런데 프랑크푸르트는 기본적으로 저작권을 거래하는 도서전 모형으로 발전해온 겁니다. 그렇지 않은 모형이 옛날 동독의 라히프찌히 모형이지요. 라히프찌히 모형의 도서전이란 독서 모임들의 행사로 도서전이 꾸려지는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풀뿌리 독서 모임에 저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독서매개자들이 함께하면서 축제로 꾸려나가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역단위로 페스티벌이 되어도 좋고 네트워크 모임이 되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이런 의제가 있으니 함께 읽고 여러 그룹이 한번 같이 이야기해보자” 이런 식의 지역행사도 좋을 겁니다. 이런 것들이 북돋워질 수 있으면 지금하고는 달라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경집 안찬수 처장님 말씀 중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작년에 독서교사 모임 강연이 있었어요. 거기에 가서 독서와 학교폭력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독서교육이 학교폭력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관심만 가지면 지금 어느 애가 따돌림 당하는지 다 보여요.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방치해 놓는 건데요. 선생님이 그 애한테 가서 “너 혼자 생긴 시간을 갖게 돼서 축하해. 이 책을 선생님이랑 같이 읽어보자” 이러면 이 아이는 아이들한테는 따돌려졌지만 선생님이 나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도움이 되는 데다가, 선생님과 책을 읽으면서 갇힌 틀과 오그라진 자아를 깨는 거예요.
그래서 1년 뒤에 보면 아이는 훨씬 성장해 있고, 학교생활도 더 재미있게 하고 있고 학업성취도도 높아져 있죠. 책 하나 읽는 게 그 아이의 생명을 살려낼 수도, 그 애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얼마 전에 양평고등학교에서 그런 학생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 아이와 책으로 연대했어요. 그랬더니 몇 달 뒤 자기 고민이 다 해소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더라고요. 이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독서라고 하는 것을 선생님들 교육 현장에 가서 보면 이게 학교 폭력 예방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안찬수 그런 부분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못하고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책읽는병영’ 사업입니다. 우리가 세계 거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데다가 징병제 체제를 갖고 있잖습니까. 매년 병영에 들어가는 신병들이 25만 정도 됩니다. 50~60만의 장병들이 유지되는 국가인 겁니다. 지금 장병들의 학력 수준이 대학교 1~2학년 정도입니다. 이 친구들은 입시 준비를 하면서 책을 거의 못 읽어왔어요. 그런데 또 다른 조사 결과를 보면 독서 몰입도가 제일 높은 데가 일상생활에서 고립된 곳, 즉 교도소, 병영, 병원 등 입니다. 예전에는 병영에서 일과시간 외에 책을 읽는다는 게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선임병들한테 맞기도 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일과시간 이후에 그런 시간을 많이 준다고 합니다.
최근에 병영에서 자살이나 그런 사건이 많이 나오잖아요. 아까 말한 청년 일자리 감소 문제와 연계되어 청년들이 절망감에 빠져 있는데, 저는 분단국가에, 징병제를 갖고 있다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수 있다고 봐요. 물론 국방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그 국방의 내용에 ‘책읽기’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가 최소한 0.1cm 정도는 수준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경집 저희 작은 애가 1사단에 있을 때, 휴가 나오면 책을 몇 권씩 들고 가요. “나올 때 갖고 나오지 마라. 두고 와라” 했어요. 다른 사병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요즘 군인들 책을 많이 읽어요. 할 게 없으니까요. 지휘관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한 달에 몇 권 읽으라고 지침을 준다고 합니다. 독서대회에서 입상해 휴가를 나오기도 하고 말이죠.
안찬수 국방정책, 병영문화 정책을 담당하시는 분이 <기획회의>를 본다면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외동으로 성장하거나, 형제가 있는 경우에도 남자로는 혼자인 경우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병영의 단체생활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면도 있다고 보는데요. 여기에 긴 호흡을 가지고 ‘책읽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군대를 다녀왔다는 것이 예전에는 군사문화를 몸으로 겪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면, 앞으로 그것은 책을 읽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어떨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김경집 실제로 책읽는사회의 공헌 중 하나가 진중문고예요. 그 변화를 어떻게 느끼냐면요. 최근에 방송의뢰가 왔어요. 국군방송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20분 동안 어떤 책을 정해서 그 책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겁니다. 그만큼 변하고 있는 거예요. 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결과물에 대한 확인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이걸 어떻게 가속시켜줄지 명확하게 던져줄 수 있어야 이런 움직임이 우리가 원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적 독서모델학교를 꿈꾸며
안찬수 또 다른 한 가지가 어르신의 책읽기입니다. 노인복지관이라고 하는 게 전국에 약 300개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마포노인복지관도 잘 되어 있잖아요. 프로그램도 짱짱해요. 그런데 그 프로그램들을 보면 책과 관련된 거는 부족합니다. 대부분이 춤을 배운다거나 붓글씨를 배우는 것이죠. 또 노인정이 있습니다. 노인정은 정확한 통계가 안 잡히는데, 3만 개 정도 있다고 봐요. 초기에는 노인복지관을 대상으로 기존의 여러 프로그램과 책을 결합시켜서 어르신들의 책읽기 문화를 확산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어르신들이 책을 읽으면 사위나 며느리는 물론, 손자 손녀한테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김경집 노인정 말씀이 나왔는데, 노인정에 못 들어가는 세대가 있어요. 딱 베이비붐 세대에요. 사실 은 실버 세대 중에 책을 읽을 수 있고 읽을 의지가 있는 그런 소양이 배양된 세대는 그 세대예요. 이 베이비붐 첫 세대 사람들에게 선택과 집중을 한다면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실버독서의 움직임을 태동시켜 실버 개념을 확장시켜 놓아야 합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최초로 일반적인 연애결혼을 한 첫 세대라는 거예요. 자기 결정을 해봤던 첫 세대라는 거죠.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긴 했지만 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건 결혼밖에 없는 거예요. 이제 가정에서 가장의 의무를 다 끝내고 내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독서가 이 답을 제공해줄 수가 있으면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존감이라든지 얼마 남지 않은 미래지만 재구성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게 될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어떻게 이것을 제공할지 좀더 진중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기호 한국사회를 책 읽는 사회로 만들려면 학생에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독서모델학교도 마찬 가지입니다. 독서모델학교에 책이 없어서는 곤란하지요. 이게 과욕인지 모르겠지만 책이 있어야 합니다. 30만 권 도서관 정도는 갖출 생각입니다. 저는 사무실과 집에 있는 책을 모두 갖다놓을 거예요. 출판평론가라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 중 좋은 책만 골라놓았으니 모두 양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4~5만 권쯤 될 것입니다. 시집만 3만 권 갖고 있는 친구도 동참할 것입니다. 작가 한 분 도 작업실에 있는 3~4만 권의 책을 기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사람만 참여하면 30만 권을 보유한 도서관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저는 4 ~5만 권을 기증하고 30만 권의 서재를 갖는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더구나 여러 사서가 관리까지 해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일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고 봅니다. 강당 수업은 한계가 있어요. 몇백 명을 앉혀놓고 책 이야기를 하며 한 학기 보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독서모델학교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생 50명만 뽑아서 6개월 동안 하루에 책 한 권만 읽힐 계획입니다. 물론 탈학교를 한 아이들도 괜찮습니다. 50명을 25명씩 두 반으로 나누고 25명이 5명씩 5팀으로 나누어서 하루에 책 한 권씩만 읽어나가는 거죠. 아마 교과서 외에는 책을 안 읽은 아이들이 많을 테니까 처음에는 쉬운 책부터 읽어야 할 것입니다.
아까 말한 논제도 그 아이들의 삶과 공동체에서 토론하기 좋은 책들을 골라서 제대로 짜야겠지요. 오전 내내 책 읽고 오후에 토론한 다음에, 다시 합반을 한 상태에서 저자의 강연을 듣고 다시 토론을 벌일 것입니다. 저자가 아니면 저자에 준하는 사람이 내려와야죠. 굉장히 질이 높을 거예요. 충분히 토론한 다음에 끝날 때쯤에는 아이들에게 그날 토론한 책과 연결된 책 30권을 따로 보여주면서 “이 책들은 너희들 머리 수만큼 도서관에 있으니 너희들이 보든 말든 알아서 해라. 너희들의 선택”이라고 말해주는 겁니다.
6개월 동안 100권의 책을 읽고, 함께 연극도 하고, 함께 여행도 갑니다. 연극은 최고의 종합예술입니다. 여행은 책을 읽으면서 토론을 통해 스스로 일정을 짜는 것입니다. 이제 100권을 정해 프로그램을 잘 짜는 게 중요해요. 3100권도 잘 골라야 합니다. 독서모델학교의 6개월은 4년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아마 아이들이 학교를 마칠 때쯤에는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미래를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6개월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걸 느낀 아이들은 3100권의 책 중에서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책을 골라서 계속 읽으려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감과 자기 꿈을 찾은 사람은 그걸 실현할 방법론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에 가려는 아이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1년만 더 공부하면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고 믿습니다. 목표만 확실하면 성과는 저절로 올 것입니다.
이것만 하면 학교라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주말 독서학교를 상시적으로 여는 겁니다. 고등학생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중요합니다. 책 30만 권을 갖춘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책 읽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거죠. 부모와 아이가 함께 오면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따로 책을 읽고 토론하게 만드는 겁니다. 방학 때는 결정적인 시기에 있는 애들이 한 달 코스로 책을 읽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이런 뜻을 받아들이는 지방자치단체가 나타나면 곧 일을 진척시킬 예정이에요. 지자체가 30만 권의 책을 갖춘 도서관이라는 랜드마크를 갖고 있으면 격이 달라질 것입니다.
안찬수 생각이 비슷한 걸까요. 예전에 김경집 선생님께서 해미로 내려가셔서 해미를 ‘책읽는해미’로 만들자고 하셔서 그 일환으로 그곳 해미의 폐교도 둘러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책읽는사회’의 경우 여러 연수나 워크숍을 많이 열게 되는데,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청이 함께한다면 지역의 폐교를 연수센터, 책읽는사회문화센터로 함께 만들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현재 이곳저곳 탐문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한기호 책 30만 권은 모두 도서관에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줄 것입니다. 다만 3만 권 이상 기증한 사람이 와서 책 보고 글을 쓸만한 방 하나 정도는 마련해달라고 도서관에 부탁할 것입니다. 책상 10 개만 놓으면 되고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면 됩니다. 프로그램이 확실하면 기업들도 후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 있다고 봐요. 기업들은 졸업생들을 직원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요.
독서모델학교가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러한 시스템이 일선 학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6개월 과정으로 진행하면 좋겠지만 당장은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언젠가는 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6개월 과정은 아니더라도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시도해 보리라고 믿습니다. 그럴 때에도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할 것입니다. 사전에 아이들과 충분히 논의해서 미리 읽어오게 한 다음 토론을 제대로 해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게 확산이 되어 점점 늘어나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대세이고 교육의 변화입니다. 교육의 혁신이든 교육의 혁명이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거고 그래서 ‘모델’이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학교에 6개월 코스든 방학반이든 주말반이든 프로그램을 제대로 짜야 한다는 거고요.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학교도서관저널>에는 기획위원 추천위원 서평위원 등 100명이 넘는 분들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분들이 가서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면 학생 50명에 교사가 100명인 학교가 되는 겁니다.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왜냐면 다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이런 구조로 가야되는데요. 이 분들은 계속 책을 함께 읽고 토론을 하면서 읽힐 책을 선정해 오신 분들입니다. 지금까지는 <학교도서관저널>을 만들기 위해 토론해왔지만, 교육을 위한 시스템에서도 바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춘 분들입니다.
이 선생님들한테 죄송하지만 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어요.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책을 선정했습니다. 제가 이 잡지의 발행인이긴 하지만 절대 제 잡지는 아닙니다. 참여자들은 모두 자기 잡지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는 자금이 모자라면 메워주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학교도서관저널>을 창간할 때 이미 학교에 대한 꿈을 밝혔습니다. 창간을 주도하신 분들은 이미 이런 제 생각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 분들은 드디어 이제 일을 시작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실 겁니다.
저는 24살 때 안면도 야학 ‘누동학원’에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학교 도시락도 싸올 수 없는, 정식 중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농촌야학이었습니다. 물론 강의는 낮에 이뤄졌습니다. 당시에는 공장 노동자밖에 될 수 없는 아이들을 중학교 과정 졸업시킨다고 교육했습니다. 학교에 제대로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 인간적이었습니다. 가물어서 오늘 물 안주면 고추가 말라비틀어지는데 학교 오는 놈이 잘못된 거죠. 그래서 우등상이나 개근상도 없애고 애들이 세상에 나가서 신문 쪼가리라도 읽을 수 있게끔 하려고 교육했습니다. 그런 얘들이 지금 공동체를 이루며 잘 살고 있습니다. 친구들 중 한 사람이 실직하면 쌀 몇 가마부터 안겨주고 일자리를 함께 알아보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친구들이나 동창이 없기에 오히려 열등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나이가 5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게 달리 말하면 ‘중세의 촌락’ 같은 거잖아요. 한국사회도 권정생 선생님 동화에만 봐도 6.25라고 하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만들어놓은 폐허 속에서 마을 공동체가 어려운 사람들 다 포용해주고 수용해주잖아요. 애 업고 동냥하러 가면 밥 몇 숟가락이라도 주었잖아요? 마을에서 초상 치루거나 잔치를 벌일 때 거지들이 찾아오면 구석에 멍석 깔아놓고 음식을 내줬잖아요. 이런 굉장히 좋은 미덕이 있는 나라거든요. 그런 공동체가 있었어요.
지금 그게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공동체로 돌아가는 힘, 함께 살아가는 힘, 이것을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학교 세워서 나 하나 잘 살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내주겠다는 겁니다. 아이디어도 주고, 활동가도 대주겠다는 겁니다. 참여하시는 분들도 직업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데 온몸을 던진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독서모델학교, 공동체적인 삶의 시작
박상률 한 소장님 얘기 들어보니까 독서모델학교 착안한 것이 일단 공동체적인 삶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우리 어려서 시골에서는 동냥치도 다 와서 먹고, 한 집에서 아침 짓는 연기가 안 나면 그 집을 살렸어요. 옛날에는 고루고루 살자고 해서 고루살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공동체라는 말을 쓰긴 하는데, 골고루 잘 살자는 겁니다. 내가 밥 한 그릇 먹으면 저쪽도 최소한 반 그릇은 먹어야 한다는 게 고루살이인데요. 독서모델학교를 통해서 그런 삶을 다시 복원하자는 겁니다. 지금 다른 것에서는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책을 혼자 읽으면 혼자 머리만 터질지 모르지만, 여럿이 읽으면 가능합니다. 사실 불교의 선방 수행도 혼자 하긴 힘들지만, 여럿이 하면 옆 사람 기운으로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절에서 함께 일하는 것을 흔히 ‘운력’이라고 하는데, 책읽기도 어울려 함께하면 서로 힘이 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절에서 혼자 삼천배 하라면 진짜 힘든데, 여럿이 하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책읽기도 혼자 하면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논제만 하나 정해놓으면 여러 책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내세우고, 작가나 저자를 불러 얘기를 또 들어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넓혀갑니다. 또 지은이를 만남으로써 어떤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작가 입장에서 일정만 맞으면 힘들어도 강연을 거절하지 않고 다니는 것은 청중 가운데 1명이라도 책을 가까이 하거나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을 할 사람도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1년에 100~200군데서 강의나 강연을 하는데 한 곳에서 1명만 나와도 그게 어딥니까. 우리가 옛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책을 통해서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럿이 읽으면 여럿이 같이 수행하니까 내가 부족한 걸 다른 사람이 채워주기도 하고, 내가 힘이 달릴 때 같이 밀어주기도 하니까 함께 읽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러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는 일입니다. 혼자는 여간한 근기 아니고선 금세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독서모델학교라고 하는 데(심지어는 단식학교 도 있잖아요) 보름 들어가고 한 달 들어가서 몸의 변화를 시키는 겁니다. 정신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래서 정말 사회적인 복원력을 갖게 하는 겁니다. 이상한 쪽으로 복원하는 게 아니라 참된 복원을 하는 거죠. 책 읽는 도서관, 책 읽는 학교, 책 읽는 둠벙이나 마찬가지죠. 거기 책 좋아하는 학생들과 선생들, 저자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다 모 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공동체겠지요.
한기호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활하고 있는데요. 가족 중 한 사람만이라도 손잡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요. 저는 김기협 선생의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2011)에서 그런 사례를 확인했습니다. 어머님 영정을 준비한다는 말을 세 번이나 들었는데도 아들이 손을 잡아주자 어머님은 삶의 의지를 갖습니다. 그래서 중환자실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요양원으로 옮겨가면서 살아납니다. 그러고 3년 동안 아흔이 넘은 어머니는 자존감을 느끼며 잘 살아갑니다.
지금 인간은 외동 하나밖에 안 남고, 이혼 등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도 늘고 있고, 아예 미혼으로 평생 혼자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손잡아 주는 사람, 동료가 있다는 건 중요합니다. 앞으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사회가 될 겁니다. 기계가 인간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들어 갈 텐데, 그걸 이겨내는 방법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손잡고 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봅니다. 무조건 시골로 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요.
도시에 있으면서도 서로 손잡아줄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하고요. 언제든지 문제가 있으면 책을 읽고 토론도 하고 모이기도 하는 거죠. 나아갈 수 있는 단체나 공동체로 가는 거죠. ‘셀프 헬프Self–help’가 아니라 ‘소셜 헬프social–help’가 되어야 하는 거죠. 서로가 서로를 돕는 사회로 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저로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다 던져놓고라도 독서모델학교 하나만 만들어도 행복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걸 한번 만들어보자는 거고요.
문제는 프로그램이라고 봅니다. 소프트웨어죠. 안을 짜고 프로그램을 잘 짜서 더 깊게 논의해야 합니다. 연초부터 하려고 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어지게 되었어요. 이제부터 논의를 해서 같이 해야 해요. 하나의 법인체를 만들어야겠죠. <학교도서관저널>이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고, 모두가 함께하는 겁니다. 우선은 <학교도서관저널>의 인적 자원들을 활용해 프로그램부터 잘 짜내야 합니다. 내부 워크숍과 공개 워크숍을 통해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토론하는 과정 자체도 운동이라고 봐요. 언론도 주목하고 있고요. 이렇게 해서 사회적인 협력을 통해 공통으로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혼자 결정하거나 독선적인 게 아니라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회의 결정대로 가야 합니다.
어느 지방에 세워야 할지 저는 안이 없어요. 솔직한 말로 누가 해주면 좋겠어요. 누가 나서주면 내가 갖고 있는 것 모두 내주고 저는 30만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 옆에 움막 하나 마련하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아요. 30만 권 장서를 갖춘 서재가 있으니까 말이죠.
김경집 지금 우리가 그런 사회적인 욕구를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뭔가 변해야겠다는 자 각을 하고 있을 때 주어지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은 굉장히 다릅니다. 그런 점 에서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진 최고의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냥 넘어가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될 겁니다. 서둘러서도 안 되지만, 마냥 미뤄놓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내년부터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찬수 지금 여러 가지 새로운 기운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 기운들을 함께 모아 서로 연대하여 지금까지의 방식과는 다른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읽는학교’의 새로운 모형도 그런 것이라 봅니다. ‘책읽기’와 ‘손노동’이 결합된 새로운 교육, 새로운 책읽기 문화의 중심 거점이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어딘가 하나의 모형이 생기면 우리 사회는 상당히 빠른 학습능력이 있기 때문에 여러 지자체나 교육청이 나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여러 지자체나 교육청과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시행착오도 겪을 수 있을 겁니다. 하다 보면 부족한 게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책 읽는 학교가 모형적으로 운영된다면,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다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제가 아까 독서매개자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분들이 정말 마음껏 책을 보고 생각하고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작가들도 와서 서로 깊은 논의를 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의 거점, 교육의 거점, 독서문화의 거점을 만들어가 보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경집 상당히 세련된 협치(거버넌스) 모델일 수 있습니다. 지자체의 교육 문화 여러 가지가 들어와 서 사실은 한 광역 지자체 내에서 협치 모델로 만들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커지면 다른 지자체와 연 대가 되는 거고, 그렇게 되면 전국적인 문제가 되는 거죠. 이건 단순히 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될 수 있습니다.
박상률 97년 체제가 되었든 세월호 이전 이후가 됐든 사람들이 지금 문제의식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 문제의식을 담아줄만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때입니다. 독서모델학교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불만부터 시작해서 좋은 힘까지도 앞으로 우리의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지자체로 확산이 되면 처음에는 한두 군데에서 시작했더라도 다른 데서도 반면교사식으로 안 좋은 것은 줄여가고 좋은 것은 늘여가다 보면 차츰 더 좋아지고 확산이 될 겁니다. 그동안 책사회에서 10년 이상 했던 것과 뜻은 같아요. 이게 좀더 구체화된 것입니다.
장소를 만드는 게 시급한데, 너무 서둘 일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들의 기운이 떨어지면 동력을 잃어버리잖아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는 책이다’ 하는 식으로 공동체도 만들어야 하고, 사회적인 중요한 담론도 다시 형성해야 합니다. 사람 의식도 바꾸어야 할 것이고요. 아까 안 처장님도 손으로 쓰는 것, 몸이 직접 들어가서 거기에서 몸으로 느껴보는 것들을 통해 변화가 온다고 하셨는데요. 단순히 자기 골방에서 머릿속으로만 책 읽고 변하는 건 아침에 일어나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몸으로 여럿이 같이 토론도 하고 몸의 변화를 느끼게 하면 20, 30년 뒤에는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우리가 늙어서 편하게 젊은 사람들이 달라지면 좋겠습니다.
한기호 이제 시작입니다. 제가 말씀을 많이 드렸지만,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원점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함께 논의하자는 겁니다. 그동안 운동을 많이 했던 모든 곳에서 결집하여 다시 하자면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내놓고 백의종군하겠다는 겁니다. 혼자 하면 어렵지만 같이 하면 못할 바가 없다고 봅니다. 이게 꼭 이루어질 거라고 봅니다. 오늘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획회의’ 375호 201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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