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그는 1930년 3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또한 1931년 봄 이호철(李戶喆)·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鴻山面)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부여군 내의 마정리(馬井里)·금송리(今松里)·조현리(鳥峴里)·장하리(長蝦里)·중정리(中井里)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층 청소년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이와 더불어 그를 비롯한 이호철·유기섭·오기영 등은 1931년 10월 사회주의 실천방법의 연구단체로서 비밀결사 공산주의연구협의회(共産主義硏究協議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33년 봄 동 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실천단체인 무산주의협의회(無産主義協議會)를 결성하여 부여군 내의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데 주력하였다. 동 협의회는 1933년 4월 기존의 홍산노동조합(鴻山勞動組合)을 적색노조로 개편함과 동시에 여러 차례에 걸쳐 비밀모임을 갖고 1933년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扶餘農民俱樂部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이호철·오기영·전영철·유병철(柳秉哲)·유인철(柳寅喆)·최재봉(崔在鳳) 등을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지부조직 책임자로 삼고 조직확대에 힘썼다.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그는 피체된지 2년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고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註·판결문(1935. 11. 25 공주지방법원) ·동아일보(1933. 9. 26) ·경성일보(1933. 12. 9) ·사상휘보 6호 215∼22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