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16)> 인문학 연구강좌 개강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2023년도 인문학 연구강좌가 개강했다. 박물관 후원 연못은 아직 휑하니 비어 있었고, 화원에는 작약은 새순이 몇 개 돋아나 있었으나 모란은 아직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러나 매화나무(plum blossom)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방문객들을 맞아 주었다.
우리 부부는 지난해에는 서양사(西洋史)를 수강했으며, 올해는 미술사(美術史)를 공부한다.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을 3월 14일 화요일 오후 2시 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두 시간동안 수강했다. 필자는 지난 1999년 공직에서 정년퇴임 후 매년 내자와 함께 중앙박물관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미술사 연구강좌는 매월 둘째와 넷째 화요일 오후 2-4시에 열리며 11월 28일까지 15강좌(30시간)로 구성되어 있다. 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하윤 박사이다.
강좌 구성은 1910년대(서양화의 시작: 고희동, 김광호, 김찬영), 1920년대(신영성 미술가들(나혜석, 정찬영, 백남순), 1930년대(아카데미즘과 모더니즘: 이인성, 오지호, 구본웅), 1940-50년대(추상 미술의 선구: 김환기, 유영국, 이성자), 1950년대(새로운 구상 미술: 박수근, 장욱진, 이중섭), 1960년대(새로운 한국화: 김기창, 박래현, 천경자, 서세옥, 이응노), 1970년대(단색화의 거장들: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권영우, 김창열), 1970년대(전위적인 실험미술가: 이건용, 이승택, 정강자),
1970년대(비디오 아트의 시작: 김구림, 백남준, 박현기), 1980년대(민중 미술가들: 오윤, 신학철, 임옥상, 이종구), 1980-90년대(여성주의 미술가들: 윤석남, 정정엽, 김인순, 이불), 1990년대(대중미술과 순수미술 사이: 최정화, 이동기, 권기수, 손동현), 1990년대(글로벌 스타 작가들: 서도호, 강익중, 김수자), 2000년대(차세대 라이징 스타: 양혜규, 최우람), 한국의 컬렉터들: 20세기 한국 미술 총정리) 등 총 15강좌이다.
정하윤 박사는 3월 14일 첫 강의에서 ‘1910년대, 서양화의 시작’을 다루면서 화백과 작품들을 함께 소개했다. 우리나라 서양화가 1호 고희동(1886-1965), 2호 김관호(1890-1959), 3호 김찬영(1889-1960), 그리고 유럽의 한국 화가들(이종우, 배운성, 임용련, 백남순, 나혜석)을 소개했다.
‘한국 서양화가 1호’ 고희동(高羲東)의 아호는 춘곡(春谷)이며, 중국어 역관이었던 고영철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사망했다. 고희동은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여 우등으로 1903년에 졸업했다.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대한제국의 궁내 프랑스어 통역, 문서 번역을 담당했다.
일본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교)에서 재학(1909-1915)하면서 서양화가 구로다 세이키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1915년 귀국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중동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다. 1921년 1회 개인전시회를 시작으로 총 15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후진 양성 강습소 서화학원(書畫學院)을 1923년에 개원하였으며, 국전 및 미술대학 설립과 발전에 기여했다.
해방 이후 조선미술협회장, 국전심사위원장, 예술원 종신회원 등을 거쳐 1960년에는 참의원(參議院, 양원제 국회의 상원의회) 의원이 되었다. 1949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70여 일간 미국을 방문했다. 고희동 화백은 전통적인 회화를 서양화와 절충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대표작에는 ‘자화상’, ‘산수유’ 등이 있다.
도쿄미술학교는 졸업생에게 자화상(自畵像)을 그리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고희동은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던 말총으로 만든 정자관(程子冠)에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려낸 점이 눈에 띈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관’(등록문화재 제84호)은 고희동 화백이 일본 유학 후 돌아와 직접 설계하고 41년 간 거주한 근대식 한옥으로 복원공사를 거쳐 2012년 11월에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김관호(金觀鎬, 1890-1959)의 호는 동우(東愚)이며, 평양에서 부호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관호는 고희동에 이어 두 번째의 서양화가로서 우리나라 유화 도입기의 선구자이다.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1911년 도쿄미술학교 양화과(洋畫科)에 입학하였고, 1916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작품인 ‘해질녁’은 일본 문부성(文部省)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았다.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누드화인 ‘해질녁’은 평양 대동강(大同江)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누드화로서 당시에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1916년 12월 평양 재향군인회 연무장에서 평양 일대의 풍경을 다룬 작품 50여 점을 출품한 첫 개인전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1924년 김찬영 등과 함께 회화연구소인 삭성회를 평양에서 조직하고 1925년에는 교육기관인 삭성회연구소를 개원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의 작품은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다재다능한 낭만파인 유방(惟邦) 김찬영(金瓚永, 1889-1960)는 평양의 부호 김진모의 차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고희동과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을 졸업하였고(1912-1917), 귀국 직후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 유화가 1세대인 김찬영은 ‘자화상’과 ‘님프의 죽음’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였는데, 현존 작품으로는 도교예술대학교 미술관 소장의 ‘자화상(自畵像)’이 유일하다.
‘님프의 죽음’은 작품이 망실되었고 작품 이미지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여서 작품 양식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작품 제목에서 ‘님프’와 ‘죽음’이 제시하는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낭만적 유미주의(唯美主義, aestheticism) 경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였고 낭만적, 상징적 유미주의를 추구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작품 활동을 접고 고미술품 소장가로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모더니스트(modernist)로 평가할 수 있으나 작품 활동 기간이 매우 짧고 미약하다.
<사진> (1) 고희동 화백의 초상화, (2) 김관호 화백의 초상화, (3) 누드화 ‘해질녁’, (4) 연못과 화원, (5) 필자 부부.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15 March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