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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
창 3:20-24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0-24 / ㄱ)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가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ㄱ. 아담은 본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보통명사이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2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혔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을 입었다. 22)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 이제 사람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를 우리처럼 똑같이 알게 되었구나 이제 우리처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가는 죽지도 않고 영영 살겠지' 하셨다. 2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그리고 사람이 흙에서 왔으므로 그 흙을 갈아 농사를 짓도록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뒤에 에덴 동산 동쪽에 천사 그룹을 두어 지키게 하시고 또 칼날과 같이 날카롭게 이글거리는 불이 사방을 빙빙 돌게 하셨다. 그 누구든 생명나무가 있는 길목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때가 되면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노동이 은총이듯, 타락한 자의 죽음 또한 은총입니다. 타락한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하와(20)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고대에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하와와 연결시킴으로써 땅이 가진 신화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여인의 어머니 됨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와는 곧 여성적 원리입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마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데도 익숙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것은 여성만의 특징이 아니라 남성들도 이와 같은 생명의 삶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가죽옷(2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라는 의미는 가죽옷을 만들려면 어떤 동물을 희생시켜야 했으니, 이 사건은 장차 올 희생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리 보게 합니다. 또한 반역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았고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 옷의 기능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살려면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 동쪽(22-24)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입니다. 추방 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았습니다. 인간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는 깨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었고, 깨어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뽑아버리지 않으시고, 천사들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생명나무가 필요한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인간이 스스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적용: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을 어느 정도 비참한 것으로 알고 계신가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셔야 할 어떠한 책임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은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사람에게 회복을 허락하셨습니다.
< 설 교 >
에덴동산과 겟세마네동산
창세기 3:22-24
우리 교회는 교회 묘지를 동산이라고 합니다. 연동동산은 우리 교회의 묘지입니다. 무덤을 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이란 원래 작은 구릉, 작은 언덕, 작은 산을 의미합니다. 원래 동산이 묘지인 것은 아닙니다. 연동동산은 선조의 믿음이 스며 있습니다. 구원자의 소망이 보입니다. 재림의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성경에는 동산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열왕기하 25:4에는 "왕의 동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벨론의 궁정정원들을 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산이란 히브리어로 '칸'이란 단어인데 70인역에서는 '낙원'(paradeidos)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51번 나옵니다. 성경에서 동산이라고 하면 에덴과 겟세마네를 연상합니다. 에덴과 겟세마네는 머리 속에 가장 많이 기억하는 동산입니다. 고대 교부 가운데 시릴(Cyril)과 같은 사람은 두 동산을 비교하였습니다. 에덴은 타락의 동산이며 겟세마네는 승리의 동산입니다. 파스칼도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에덴의 완벽함은 폐허로 끝났고 겟세마네의 구원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입니다.
첫째, 에덴동산은 멸망의 동산입니다.
창세기 2:8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답게 장식하였습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많은 나무들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창 2:9). 창세기 2:10은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에덴 동산은 강의 발원지입니다. 완벽한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에스겔 31:9에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최상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최상의 여건에 사람을 만들어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15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하십니다. 에덴은 하나님이 사람을 두실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고 지키게 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였습니다. 에덴이란 "즐거움" 혹은 "기쁨"의 뜻입니다. 이사야 51:3은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에덴 같게 하십니다.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곧 에덴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아무리 척박한 곳도 에덴 같게 하십니다. 아무리 거칠은 땅도 여호와의 동산 같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에덴은 최상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최상인 자리는 인간에게도 최상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최상의 자리가 최하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멸망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추방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죄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최상의 자리는 최상의 사람들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에덴 같게 만드십니다.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을 광야 같게 만듭니다. 여호와의 동산을 사막 같게 만듭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최상을 최하로 만든 것이 죄입니다. 에덴을 광야로 만든 것이 죄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을 사막으로 만든 것이 죄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요? 우리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땅입니다. 인간이 척박한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최상의 조건에서 인간의 죄는 무르익습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평화는 마귀의 것입니다. 시험은 마귀의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시련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에게 극단적인 평화를 주면 분열합니다. 나약해집니다. 망합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 교회의 신앙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한 후 신앙이 후퇴하였습니다. 에덴을 광야로 만들었습니다.
둘째, 겟세마네 동산은 구원의 동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가신 장소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이름을 밝힙니다. 요한복음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 동산입니다. 요한복음 19:41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합니다. 겟세마네란 말은 "기름을 짜다"라는 뜻입니다. 이 곳은 감람 열매의 기름을 짠 곳이므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의 진액을 짜면서 기도하시므로 이 이름은 예언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땀이 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땀이 피가 되는 기름을 짜는 기도였습니다. 구원은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기름을 짜지도 않고 고통도 없이 구원을 맛보려고 합니다. 고통 없는 구원은 참 구원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참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살아났던 사람이 부활이 아닌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기름을 짜는 기도가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천한 자리입니다. 척박한 자리였지만 구원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척박해도,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이 있어야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야 진정한 은혜를 압니다. 눈물과 함께 먹는 빵이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파스칼은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사람들, 그들이 참된 인간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찢는 고통 속에서 진정한 자아, 깊어진 믿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다음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사흘 동안 암흑 속에 살았습니다. 아마 그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 이 뼈속깊은 탄식이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리히테르라는 분이 이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금이 간 종은 탁한 소리를 낸다. 아예 종을 두 동강이로 나누면 다시 맑은 소리를 낸다. 이와 같이 작은 고뇌는 우리를 자기 자신 밖으로 끌어내지만 큰 고뇌는 우리들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강해집니다. 의심해본 사람이 신앙이 굳어집니다. 나비가 애벌레에서 나오는 고통은 처절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고통은 자신을 죽이는 살신의 고통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의 살신의 동산입니다. 고통의 동산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닌 척박한 작은 언덕이 구원의 언덕이 된 것입니다.
셋째, 두 동산은 항상 우리 속에 있습니다.
두 동산은 우리 속의 동산입니다. 우리 속에 에덴과 겟세마네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과 승리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같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사이에서 방황하며 삽니다.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다시 선택에 실패합니다. 좌절과 방황의 연속입니다. 겟세마네 동산같이 기름을 짜듯 고통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지합니다. 포기에서 얻습니다. 승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중적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양자 가운데 선택하며 삽니다. 양자 택일의 권리가 있습니다. 양자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이 공존합니다. 우리 속에는 타락하고 싶은 이상 심리가 있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정상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공존합니다. 로마서 7:21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의 고민입니다. 고민이라기 보다 고백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아프간을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발상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탈레반이 빨리 망하고, 빈 라덴을 잡아서 혼쭐을 내야 한다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에덴과 겟세마네가 동시에 있기에 이중적 사고를 합니다. 서커스 구경을 갑니다. 외줄을 아슬아슬 건너가는 것을 보러 갑니까? 그런데 떨어지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 이것이 비뚤어진 인간의 심리입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의 스캔들을 재미있어 합니다. 그들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것만 캐러 다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고 다니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잡지를 보세요. 잡지(雜誌)는 문자 그대로 잡(雜)스러운 얘기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잡지를 싫어합니다. 내가 보지도 않는데 왜 잡지를 만들고 잡지가 잘 됩니까? 사람들이 잡스러운 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왜 잡스러운 얘기를 흥미롭게 생각합니까? 인간의 마음에 잡스러운게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지 하면서도 타락하고 방종하고 붕괴되기를 원하는게 인간의 못된 심리입니다. 우리 마음에 에덴과 겟세마네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의 숙명입니다. 성경은 물댄 동산이란 말을 합니다(사 58:11, 렘 31:12). 물댄 동산은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입니다. 물댄 동산은 다시 근심이 없으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물댄 동산 같으면 겟세마네 동산을 사모합니다. 물댄 동산은 에덴을 사모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 론
영국의 특수부대에 소속된 한 병사가 밀림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석달이나 동료들이 찾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끝내 찾지 못한 부대에서는 이 병사를 사망 처리하였습니다. 다섯 달 후에 이 병사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기자들이 몰려들고 그의 생환은 큰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기자들이 보니 그의 손에 지도가 하나 들려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이 병사가 이 지도를 보고 밀림을 빠져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병사의 손에 들려진 다 헤어진 지도는 밀림의 지도가 아니라 런던의 지도였습니다. 런던의 관광안내도를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기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 지도를 가지고 밀림을 빠져 나왔습니까?" 이 병사는 죽고 싶고, 포기하고 싶지만 이 지도를 보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내가 살아서 다시 가 봐야지". "내 가족과 함께 다음 휴가 때는 여길 가 봐야지". 그는 런던의 지도를 보며 가족과 함께 런던의 유적지를 관람할 꿈을 꾼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지도는 어떤 지도입니까? 에덴동산의 지도입니까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의 지도입니까? 에덴동산의 지도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을 살수는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지도를 가지고 있으면 에덴동산에 살지만 죽음을 해쳐 나옵니다. 우리는 두 지도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지도는 아름답지만 삶을 파괴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지도는 척박하지만 삶을 구원합니다. 밀림의 지도는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런던의 지도만 있으면 밀림에서 승리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지도만 있으면 에덴에서 승리하고, 에덴을 회복하고 살 것입니다.
또 한 주간의 삶도 겟세마네 동산의 지도를 손에 꼭 쥐고 밀림 같은 에덴 동산, 화려하고 찬란한 도시를 해쳐나가는 구원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